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4회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하루가 지나갔을 뿐이지만 체감 시간으론 몇 년이 흐른 듯하다. 이사준비로 어젯밤 늦게까지 땀을 빼고 오늘 하루 종일 분주했던 게(포장이사이니 힘이 들 건 별로 없었지만) 이유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공간이 달라졌다는 점(2004년에 러시아에 체류한 걸 고려하면 5년만이다!). 다시 '정상적인' 일상의 리듬과 감각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릴 듯하다. 그때까지는 '1박2일'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기분으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따라 읽는다. 엊저녁에 교정을 봤건만 '토끼굴'에 굴러떨어진 것처럼 새삼스럽다. 전문은 연재코너에서 읽으실 수 있고 여기에 옮겨놓는 건 그 일부이다.   

“토끼굴은 일정한 직선 방향으로 터널처럼 뻗어 있다가, 갑자기 곤두박질하기도 했다. 어찌나 갑작스럽던지 앨리스는 너무 깊어 보이는 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멈춰야지 하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자, 이제 네오와 함께 모피어스를 따라 굴러 떨어진 ‘토끼굴’이다. 이런 경우엔 보통 인원 점검을 다시 하지만, 그럴 형편은 아니어서 대신에 ‘RSI’에 대한 복습만 간단히 하도록 한다. 실재계-상징계-상상계 얘기다. 교재는 다시 <HOW TO READ 라캉>이다. 상징계에 대한 지젝의 설명을 따라가 본다. 멕시코에선 TV 드라마를 가공할 만한 속도로 찍는다고 한다. 매일 25분짜리 에피소드를 찍어대는데 배우들에겐 미리 대본을 받아보고 연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당일 아침에 그날 찍을 대본을 나눠준다는 홍상수 감독보다 더 심한 경우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찍을 건 찍는다. 어떻게? 멕시코 방식은 이어폰을 활용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배우가 즉석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자 이제 뺨을 한 대 갈기고 그를 증오한다고 말을 해. 그리고 껴안아!” 지젝이 보기엔 바로 이런 것이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the big Other)’이다.  

이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말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타인과 대화할 때, 우리의 발화 행위는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전제에 의존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법 규칙을 공유해야 하고 동일한 생활 세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박쥐와 소통하기 어려운 것은 박쥐와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상징적 차원 혹은 상징적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를 재볼 수 있는 일종의 척도다. 대타자가 단일한 대행자(agent)로 인격화되거나 사물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언제나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혹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신이 인격화의 예라면, 내게 명령을 내리고 나의 삶을 바치도록 만드는 자유니 공산주의니 민족이니 하는 대의(Cause)는 사물화의 예이다. 요컨대 우리의 현실을 관장하고 조정하며 인도하는 ‘신’, 자유’, '공산주의’, ‘민족’ 등등이 모두 대타자에 속한다. 우리가 ‘소타자(small other)’라면 이 소타자(개인)들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대타자가 끼어든다. 말이 좀 어려운가? 이럴 땐 지젝식 EDPS를 활용하자.  



한 가난한 농부가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신디 크로퍼드와 단둘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한때 세계 3대 모델로 불리기도 했던 미녀다. 그렇다고 굳이 신디 크로퍼드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며 각자가 알아서 다른 미녀로 대체해도 좋다. 하여간에 둘이 섹스를 한 후에 신디가 농부에게 어땠냐고 물었다. 대답은 물론 “그레이트!” 하지만 자신의 만족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 가지 사소한 부탁을 들어달라고 농부는 말한다. 바지를 입고 얼굴엔 콧수염을 그려서 자기 친구처럼 분장해달라는 것이다. 자신이 변태가 아니라고 겨우겨우 안심시킨 농부는 신디가 그의 원대로 분장을 하자 그녀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고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내가 말이야 방금 전에 신디 크로퍼드와 섹스했다!” 

여기서 “언제나 증인으로 현존하는 이 제삼자는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의 가능성을 배반한다.”(<HOW TO READ 라캉>, 21쪽) 즉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이란 건 없다. 그런 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최소한이라도 섹스는 언제나 ‘전시적’이며 다른 사람의 응시에 의존한다. 남이 봐줘야 하며 알아줘야 한다(그래서 비디오로 찍어두기도 한다). 제삼자가 개입하지 않는 섹스가 ‘상상적 섹스’라면 농부가 자신의 만족감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원했던 건 그 ‘상상적 섹스’를 ‘상징적 섹스’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자기 친구라는 제삼자가 필요했다. 이 ‘제삼자’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대타자’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대타자는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한가? 그렇지는 않다. 대타자는 무인도에 난파당한 농부가 신디의 분장을 통해 불러낸 친구처럼 ‘주관적 전제(subjective presupposition)’ 혹은 ‘주관적 가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비실체적이며 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이런 주장이 이해가 될 것이다.  

“대타자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간단히 말해서, 대타자라는 비실체적 ‘실체’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개인들이 존재할 때만 힘을 갖는다. 대타자가 규칙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가령 체스 경기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체스 경기자가 있어야 하며, 축구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손을 사용하지 않고 공을 다루려는 축구 선수들이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스 경기자와 축구 선수들만으로 게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게임으로서 성립하려면 거기엔 규칙(대타자)이 적용돼야 하고 작동해야 한다. 이 규칙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는 지난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오래 전에 쓰인 서평이긴 하지만 라캉-지젝의 ‘실재’ 개념을 능숙하게 정리한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글을 잠시 따라가 본다. <반대자의 초상>(이매진, 2010)에 수록돼 있는 “즐거운 시간 되세요!”라는 서평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영원히 괴물을 품고 사는 존재이며, 우리 존재의 핵심에는 잔인할 정도로 낯선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를 구성하는 재료이지만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한 그것,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일컬은 이것은 우리에게 목적이라는 환상을 부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목적도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에 깊은 관심을 가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이 괴물성의 비형이상학적 양상으로 제시한다.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305쪽)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점은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이질적인 부분’ 혹은 ‘괴물성’이라는 데 있다. 적어도 프로이트는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라캉은 한 공포영화에서 착상을 얻어 이것을 ‘괴물(Thing)’이라고 불렀다. 다음 회에는 이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참고로, <반대자의 초상> 역주에서 라캉이 착상을 얻은 영화가 존 카펜터의 <괴물>이라고 해놓았는데, 착오다. 라캉이 본 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1982)이 아니라 하워드 혹스의 <괴물>(1951)이다(라캉은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실 나도 하워드 혹스의 영화는 보지 못했고, 카펜터의 영화만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한 대중연예지가 ‘역대 최고의 SF영화 톱 25’를 뽑았을 때 10위에 선정된 수작이다. 그럼 1위에 오른 작품은? 바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10.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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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0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0 0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8-20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타자의 개념을 완전 잘못 이해하고 있었어요.. 정말 이해하기 쉽고 명확합니다.

로쟈 2010-08-20 23:29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제 역할은 가이드라서요.^^
 

오랜만에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어제 보낸 원고인데,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 <차 한 잔> 읽기이다. 분량상 한번 더 다루어야 할 듯하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269 에서 읽어보실 수 있다.  

 

펭귄판 『가든파티』의 서문에서 로나 세이지는 맨스필드를 가리켜 “배제, 불안, 이동, 단속성을 글로 피력했던 대단한 모더니즘 작가”(one of the great modernist writers of displacement, restlessness, mobility, impermanence)였다고 평했다. 그녀를 특징짓는 명사들은 모두 이동성의 범주에 속한다. 가난한 축에 속했다면 ‘자주 이사를 다닌 모더니즘 작가’로 불렸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러한 특징은 맨스필드 자신이 뉴질랜드 태생이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활동한 작가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맨스필드가 작품 속에 그렇게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 중의 하나가 ‘계급의식’이다. 맨스필드의 문학을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가든파티」를 비롯한 몇몇 작품에서는 두드러지는 주제다. 나로선 특히 「차 한 잔」 같은 작품으로 맨스필드를 기억하게 된 까닭에 더 강조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론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우선 주인공은 결혼 2년차의 로즈머리 펠이다.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고, 남편은 그녀를 끔찍이 사랑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 부부가 엄청난 부자라는 사실. 쇼핑을 하고 싶을 때는 평범한 사람들이 동네가게 가듯이 파리로 훌쩍 떠나버리는 식이다. 꽃을 사고 싶으면 고급 꽃가게에 들러서 이것저것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라일락은 싫다고 말하면 점원은 지당하다는 듯이 굽실거리며 라일락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운다. 그리고는 가냘픈 여점원이 커다란 흰 종이 봉지를 한 아름 안고서 비틀거리며 차를 타는 곳까지 그녀의 뒤를 따른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오후 로즈머리 펠은 자주 들르는 골동품 가게에 들렀다가 주인이 소개하는 아주 고가의 조그마한 상자를 본다. 탐나는 물건이었지만 주인에게 보관해달라고만 하고 길을 나선다. 그때 그녀는 잠시 이상한 통증을 느낀다.  

누구나 살다보면 두려울 때가 있게 마련이다. 숨은 곳에서 어떤 사람이 뛰쳐나와 밖을 내다볼 때 그건 참말로 끔찍하기만 한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적인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특제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위고 시꺼멓고 희미한 모습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자가 - 어디에서 왔을까? - 로즈마리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렇게 문득 로즈머리의 공간으로 ‘침범’해온 가여운 여인이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로 이렇게 부탁한다. “사-사모님, 차 한 잔 값만 주시겠어요?” 그녀는 차 한 잔 값도 갖고 있지 않은 무일푼이었다. “참 희한하군요!”(How extraordinary!)라는 것이 로즈머리의 인상이다. 사실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건, 그런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그녀에겐 예사롭지 않은 일이며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더 희한한 일을 고안해낸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한 이 만남이 그녀에겐 예사롭지 않은 사건, ‘모험’(adventure)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면 어떨까? 자기가 늘 책에서나 읽고 무대에서나 구경하던 그러한 사건들을 몸소 실연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스릴 만점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앞으로 나서면서 옆에 있는 희미한 모습의 여자에게 집에 가서 차나 한 잔 들자고 말했다. 바로 그때 훗날 친구들이 깜짝 놀라도록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지, 하고 말하는 듯한 자신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뒷부분은 원문과 같이 음미해보자. 

It would be thrilling. And she heard herself saying afterwards to the amazement of her friends: "I simply took her home with me," as she stepped forward and said to that dim person beside her: "Come home to tea with me."

멀찍이서 이 장면을 봤다면, 차 한 잔 값을 구걸하는 불쌍한 여인에게 부유한 젊은 부인이 뜻밖의 적선을 베푸는 것으로 볼 만한 대목이다.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차를 마셔요! 마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이방인과 과부와 고아)에게 ‘환대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로즈머리의 시점에서 기술되는 이 장면의 핵심은 그러한 윤리와 무관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Come home to tea with me"가 아니라 "I simply took her home with me"이다. 나중에 친구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지 뭐.”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놀래게 만들 자신의 모습에 도취돼 있을 따름이다.

즉 이것은 ‘인정미담’이 아니라 ‘모험담’이다. 이 장면에서 그녀에겐 아무런 타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 옆에는 단지 ‘희미한 사람’(dim person)이 서 있을 뿐이다(‘희미한 모습의 여자’만큼의 구체성도 갖고 있지 않다). 로즈머리 자신이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연기하고 있지만, 이 장면을 카메라로 옮긴다면 ‘희미한 사람’은 초점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희미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순서상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지 뭐.”라고 말하는 자신을 떠올리면서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차를 마셔요”라고 말했다는 식으로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자기 차를 같이 타고 가서 차를 마시자는 로즈머리의 뜻밖의 제안에 대해서 여자가 못 미더워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심지어 로즈머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사모님, 사모님은 저를 경찰서에 데려가는 건 아니시겠죠?”라고 물어볼 정도다. 하지만 배고픈 사람들은 말을 잘 듣는 법이다. 결국 로즈머리는 낯선 여인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빌로드 손잡이를 손으로 잡으면서 그녀는 일종의 승리감을 느꼈다. 사로잡다시피 한 조그마한 포로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야 당신을 붙들었군요.’” 물론 친절한 의도에서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많은 걸 입증해주려고 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놀라운 일도 가끔씩 일어나는 법이고, 부자들도 인정은 있으며, 여자들은 모두 자매지간이라는 사실 등등. 로즈머리는 그녀 쪽으로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겁먹지 말아요. 도대체 나하고 같이 가는 게 어때서 그래요? 우리는 여자들이에요. 내가 좀더 잘 산다면 당신도 당연히 기대는 해야…….”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말을 끝맺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 다행히 차가 멎었다.  

로즈머리는 “우리는 여자들이에요.”(We're both women)라면서 ‘연대감’을 표시하지만, 그것은 기만적인 감정이다. 이 장면에서도 그녀는 그렇게 ‘관대하게’ 말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돼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우리는 같은 여자’라는 전제에 의해 도출되는 결론을 그녀가 마무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곧이어 나오지만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 방에서 벽장을 다 열어젖히고 상자란 상자를 모조리 끌러 보여주고 있는 부잣집의 어린 소녀와 같았다.”  

관대하고 자비로운 부잣집 여성으로서 낯선 타인에게 예기치 않은 환대를 베푸는 역을 ‘연기’하고 있는 로즈머리는 ‘손님’을 이제 자신의 침실로까지 안내한다. 그리고 벽난로 앞에 의자에 앉으라고까지 권한다. 과연 이 ‘어린 소녀’ 로즈머리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그녀와 ‘손님’은 차 한 잔을 같이 마실 수 있을까? 이미 어느 정도는 예견할 수 있지만, 나머지 이야기는 한숨 돌린 후에 마저 하기로 한다. ‘차 한 잔’ 마시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군... 

10. 08. 17.  

P.S. 맨스필드는 생전에 세 권의 단편집을 발표했는데, <독일 하숙집에서>(1911), <행복>(1920), <가든파티>(1922)가 그것이다. <행복>과 <가든파티>는 표제작이고 타이틀엔 'and Other Stories'라는 말이 붙어 있다. 그녀가 1923년에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것이 <비둘기집>(1923)인데, <차 한 잔>은 바로 이 유고 작품집에 실려 있다. 그런 때문인지 국내에 번역된 작품집엔 대개 빠져 있다. 범우사판과 시사영어사판(대역본)이 내가 구할 수 있는 판본이었다. 다양한 번역으로 소개돼 있지 않아 아쉽다. 30여 편이면 전집 분량인데, 아직 작품전집이 소개되지 않은 것도 아쉽고.   

거기에 덧붙여 유감스러운 것은 맨스필드에 관한 전기가 한 편도 소개되지 않은 점이다. 물론 지명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같이 교우했던 버지니아 울프나 D. H. 로렌스와 비교할 때 아쉬운 대목이다. 영어권에는 4-5종의 전기가 나와 있는 듯싶다. 맨스필드와 버지니아 울프를 비교한 연구서 등 몇 권도 개인적으론 관심이 가지만, 이 또한 한정이 없어서 <차 한 잔>을 음미한 후에 나는 일단 맨스필드를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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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31 21:55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차 한 잔> 읽기의 계속인데, 한 차례 더 다뤄야 마무리가 된다. 이후에 예정으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읽기로 넘어갈 계획이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666 에서 읽어보실 수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젊고 부유한 귀부인 로즈머리가 길에서 차 한 잔 값을 구걸하는 한 여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대목에서
 
 
2010-08-17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7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1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막판에 남편이 그 부랑여인에게 한 말 때문에 로즈마리가 그녀를 서둘러 내보내는 장면이 압권이지요.그래도 로즈마리는 구김살없는 부잣집 사모님이라는 생각이에요.

로쟈 2010-08-18 17:54   좋아요 0 | URL
네, '순수한' 가식을 보여주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3회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 3회분을 발췌해놓는다. 역시나 전문은 창작블로그의 연재공간에서 읽어보시면 된다. 연재에는 매회 따로 제목이 붙지 않는데, 이 발췌는 제목을 붙이면서 관련서의 이미지를 링크해놓으려는 목적도 갖는다.  

이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첫 번째로 읽을 책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이다. 원제는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따온 <실재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2002)이다.(...)  



지젝의 분석과 성찰을 따라가보기 전에 제목의 핵심인 ‘desert of the real’이란 말부터 따져본다. 이 영어 표현에서 ‘of’는 동격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실재라는 사막’ 혹은 ‘실재계라는 사막’이란 뜻이다. 또 다른 궁금증. ‘더 리얼(the real)’이란 말의 번역은 ‘실재’도 되고 ‘실재계’도 되는가? 그렇다. 가급적 난해한 철학 용어나 정신분석 용어는 피하려고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는 어쩔 수 없이 확인하고 넘어가야겠는데, ‘the real’이 그런 경우다. 일단은 ‘실재’나 ‘실재계’란 말이 나오면 ‘the real’의 번역어라고 생각하시는 게 좋겠다(전공자들은 ‘실재’란 번역을 선호하지만 실상 일반 독자가 읽는 번역서에서는 ‘실재계’란 말이 더 자주 나온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여 이 연재에서는 맥락에 따라 이 두 번역어를 혼용할 예정이다).

철학에서건 정신분석에서건 대부분의 개념어는 짝을 갖는다. ‘남자’ 하면 ‘여자’, ‘감성’ 하면 ‘이성’을 떠올리게 되는 식이다. 먼저 ‘실재계’는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존재의 현실을 구성하는 세 가지 차원, 곧 상징계(the Symbolic), 상상계(the Imaginary), 실재계(the Real)의 하나이다. 기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숙지해두는 게 좋겠다. ‘실재계(R)-상징계(S)-상상계(I)’의 머리글자를 차례로 따서 ‘RSI 상항조’라고도 부른다. 다르게는 ‘실재-상징적인 것-상상적인 것’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또 상상계를 라캉의 ‘거울 단계’와 연관지어 ‘영상계’라고 옮기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상용되는 용례에 따른다. 일간지 같은 데서야 이런 전문 용어들과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지만, 영화잡지나 문예지의 경우엔 사정이 달라서 어느 정도 ‘독자’ 흉내를 내려면 ‘RSI’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다. 가령, 영화평론가들의 좌담에서라면 기탄없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대답이다.

“지젝이 영화에 대한 깨우침을 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지젝에게 지혜를 베풀어준 셈이지요. 지젝 자신도 점점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고요. 어쩌면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영화는 자기의 RSI 매트릭스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상자였던 셈이지요. 그는 라캉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를 동원했지 그 역은 아니었습니다.”(<씨네21> 763호)

이 인용문에 대해 조금 부언하자면,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라기보다는 “라캉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고, 이 점은 영화평론가의 ‘발견’이 아니라 지젝의 직접적인 ‘고백’이다. 그는 “나는 라캉의 개념들을 본질적으로 저급한 대중문화의 개념들로 제대로 번역해낸 다음에야 비로소 그 개념들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확신했다”라고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가 말한 ‘저급한 대중문화’의 표본은 물론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게다가 지젝은 오페라광이긴 하지만 결코 ‘시네필’은 아니다. 그 점이 시네필 평론가로선 불만스러울 수 있겠지만, 지젝 자신이 “점점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을 만큼 애초에 가까웠던 것도 아니다. 참고로, 2003년 방한했을 때 한 대담(『당대비평』 24호)에서 그 많은 영화를 다 보면서 언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지젝은 이렇게 답했다.

“천만에요. 제가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영화들의 3분의 1도 보지 않았을 겁니다. 예컨대 저는 로셀리니의 작품을 한 편도 보지 않았으며, 영화관에 가는 것도 그리 즐겨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극장에 갈 시간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영화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중요한 영화 텍스트에 대한 대부분의 분석이 책의 형태로 이미 나와 있기 때문에 연구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지젝의 ‘작업 비밀’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지젝에게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의 분석이지 ‘영화’가 아니다. 국내에는 ‘철학책’들보다 먼저 소개된 지젝의 ‘영화책’들, 예컨대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1997),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등을 읽을 때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인용으로 돌아가면, ‘RSI 매트릭스’라는 것이 바로 ‘실재계-상징계-상상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은 허다한 영화비평에서, 심지어는 영화 저널리즘에서도 라캉과 지젝의 용어들이 활용되기에 이 정도는 아는 체를 해주셔야겠다. 그렇게 셋이 짝지어 다닌다면, ‘실재계’만 분리해서 알 수 없으므로 통째로 챙겨두도록 한다. 라캉 입문서인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서 체스 게임을 예로 들고 있는 지젝을 따라가보자.  

체스를 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체스의 상징적 차원이다. 순전히 형식적인 상징적 관점에서 ‘기사’는 이것을 둠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변동 안에서만 정의된다. 이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과 명확히 대비된다. 상징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며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그래서 규칙은 같지만 서로 다른 상상계, 즉 ‘메신저’ ‘러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다. 경기자의 지능이나 경기자를 당황하게 하고 갑자기 게임을 중단시키는 예기치 못한 침범 같은 것이다.(18~19쪽)

나부터도 체스에 익숙하지 않으니 ‘효과적인’ 예는 아니지만, 어쨌든 상징계란 체스 혹은 장기의 규칙 같은 것이다. 어떤 말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는 이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상징계는 ‘현실’을 관장한다. 상상계는 ‘기사’가 ‘메신저’로 불릴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상적 게임의 세계다. 규칙을 떠나서, 혹은 규칙을 무시하고 말이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 따위는 상상계에 속한다. 물론 이 상상적인 것이 공유되고 새로운 규칙으로 수용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상징계로 등록될 수 있다. 한편 실재계는 인용문에서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라고 정의됐는데, ‘연속적인 환경’은 ‘우발적인 상황(contingent circumstances)’의 오역이다. 장기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걸음마를 하는 아이가 다가와 판을 뒤엎는다든가 하는 ‘예기치 못한 침범’이 바로 실재다. 그것은 게임을 한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실재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 자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9·11이라는 스펙터클은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기도 하다. 뒤엎어진 판을 다시 정돈하여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현재의 사회적 좌표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하는 사건이다. 물론 그러한 질문과 대면하는 일은 두렵다. 그것은 마치 폐허가 된 ‘실재의 사막’과 대면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부정하거나 회피한다. 그럴 때 우리가 주로 동원하는 것이 ‘환상’이다.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다.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10.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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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8-2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질문 하나 드려도 되요? 저는 실재계가 진실의 핵심부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사회적 좌표를 흔드는 것은 허상과 허위로 가득한 현실에서 실재를 목격하고 난 결과론적인 것으로 이해했었는데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요?

로쟈 2010-08-20 23:28   좋아요 0 | URL
흠, 실재와의 조우 자체가 사회적 좌표에 대한 충격인데요. 그래서 가장 흔한 조어가 '외상적 실재'란 말이고요. 어떤점에서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신 건지요? 실재는 상징계에서 좌표값을 갖고 있지 않기에 표시되지 않고, 의미를 부여받지도 못합니다. 말 그대로 간극이고 구멍이죠. 그게 우리말 '실재'와 충돌하는 의미 같기도 합니다. '진짜로 있는 것'이 구멍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안되죠.^^;
 

이젠 1982년 등단 작가가 아니라 1982년생 작가의 책들도 읽게 되는구나, 란 생각이 들게 한 책은 크레이그 실비의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양철북, 2010)이다. '오스트레일리아판 <앵무새 죽이기>'라고도 불리는 소설이지만, 여하튼 '젊은' 작가의 경력이 먼저 눈에 띄기에 찾아봤다. 역시 젊어 뵌다... 

  

한국일보(10. 08. 14) 왕따 소년들의 성장기… 고통스럽지만 분명 강해진다 

1965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탄광촌 코리건. 이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년 재스퍼 존스와 제프리 루는 심각한 곤경에 처한다. 원주민 어머니는 죽고 폐인이나 다름없는 백인 아버지뿐인 외톨이 혼혈 소년 재스퍼는 숲 속 자신만의 비밀 공간에서 나무에 목이 매인 여자친구 로리의 시신을 발견한다. 부모가 베트남 출신 이민자인 제프리는 갈수록 심해지는 또래들의 폭력에 시달린다.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이 나라 군인 중 전사자가 점점 늘면서 제프리의 부모 또한 이웃들에게 봉변을 당하기 시작한다. 



인종 차별에 고통받는 소년들의 처지는 암울하기 짝이 없건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신예 작가 크레이그 실비(28ㆍ사진)는 심각할 것은 전혀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이들의 성장기를 들려준다. 두 소년의 친구이자 그 자신 역시 또래 중 왕따인 작중 화자 찰스 벅틴은 재기발랄한 수다로 그들이 겪는 비극의 무게를 덜어낸다. 2008년 발표된 작가의 두 번째 장편이다. 어두운 내용과 발랄한 화법이 맞부딪는, 잘 읽히면서도 농밀한 서글픔을 남기는 이 소설엔 '유쾌한 비극'이라는 모순형용을 부여할 만하다.

소설은 상반된 자세로 난관을 돌파하려는 재스퍼와 제프리의 분투를 찰스의 눈을 통해 번갈아 보여준다. 로리가 타살됐다고 단정한 재스퍼는 찰스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시신을 숨긴 뒤 범인을 찾아나선다. 시신유기라는 불법을 무릅쓴 그의 행동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그리고 자신을 결국 로리의 살해범으로 몰아갈 것이 뻔한 세상의 편견을 향한 이중의 분노가 서려 있다.

제프리는 인내를 택한다. 자신을 '베트콩'이라고 놀리는 백인 소년들의 따돌림을 묵묵히 견디며 그는 제 진가를 보여줄 때를 기다린다. 특히 출중한 크리켓 실력을 보여줄 날을 위해 지역 크리켓 팀 주변을 맴돌며 볼보이 등 궂은 일을 도맡는다. 로리의 시신을 숨겼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녀의 동생 일라이저와 연애를 하고, 부모의 불화로 고통받는 찰스의 성장통 또한 만만치 않다.

소설은 소년들의 분투가 결실을 거둔다는 식의 서사를 거부하고 끝까지 '동정 없는 세상'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대단원이라기보다는 또다른 절정의 도래처럼 여겨지는 소설 결말부에서 독자는 이 소년들 역시 세계와의 투쟁 속에서 놀라울 만큼 강해졌음을 확인하게 된다.(이훈성기자) 

10. 08. 16.  

P.S. 작가 크레이그 실비의 경력은 화려하다. 2004년에 발표한 데뷔작 <루바브>로 호주의 한 언론이 선정한 '최고의 젊은 소설가상'을 수상했고, 두번째 장편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로는 2009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13개 국어로 번역출간 예정이라고 하니 '눈부신 성공'이라 할 만하다. '왕따 소년들의 성장기'라고 돼 있지만, 정작 이 작품으로 쑥쑥 크는 건 작가 크레이그 실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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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8-1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부터 이 책 읽기 시작했어요. 호주의 [앵무새 죽이기]란 말도 듣는다지만, 이 책속의 등장인물 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하퍼 리'로 나와요. 아마도 작가가 [앵무새 죽이기]에서 적지 않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로라의 시신을 숨기고 자책감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은 '찰스'가 아니라 '찰리' 에요. :)

로쟈 2010-08-16 23:49   좋아요 0 | URL
네, 시작부터 '찰리'가 나오죠. 기자가 잘못 적었나 봅니다. 저는 '찰리'가 애칭인 걸로 알았어요...

다락방 2010-08-17 08:23   좋아요 0 | URL
아, 저 어제 이 댓글 쓰고 난 후에 읽다가 주인공 이름이 찰스 벅틴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다시 왔는데 밑에 끼사스님께서 말씀해주셨네요. 다 읽지도 않고 실수했어요. 찰리는 애칭인가봐요. '척'이라고도 불리고요.
죄송해요, 로쟈님. (--)(__)

로쟈 2010-08-17 08:28   좋아요 0 | URL
네, 잘못 적은 게 아니네요.^^

끼사스 2010-08-1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공의 이름은 찰스 벅틴이니 찰리는 애칭일 겁니다. ^^:

로쟈 2010-08-17 08:28   좋아요 0 | URL
네, 초반엔 찰리로만 나와서요.^^;
 

아직 <인셉션>도 보지 못한 상황이지만 지난주에 개봉한 다큐영화 한 편에 눈길이 간다. 칼럼을 읽고서야 영화에 대해서, 그리고 '엘시스테마'란 베네수엘라의 음악교육 프로젝트에 대해서 알게 됐다. 창립자는 음악가이자 경제학자 출신 활동가 호세 안토니오 아브라우 박사라 한다. 방학이 끝나가는 아이들이 한번쯤 보면 좋을 듯싶다. 물론 어른들은 보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뭔가 느껴야겠고...   

경향신문(10. 08. 16) 삶을 구원하는 예술의 힘   

모골이 송연해지는 영화, 그러면 곧 납량특선 공포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비참한 현실을 전복시킨 실화 다큐 <기적의 오케스트라-엘 시스테마>를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베네수엘라 빈민촌 아이들을 30여년에 걸친 음악교육을 통해 오케스트라 주자로 키워내며 나라 자체를 문화공동체로 변신시킨 기적의 현장이 우리 삶에도 영감과 감흥을 준다. 이를테면 “예술이, 음악이 밥 먹여주느냐?”며 예술을 하며 살겠다는 이들을 기죽이는 세속·실용적 논리는 이 다큐를 보면 뒤집어진다. 먹고사는 게 중요하니 돈벌이 직장부터 확보하고 취미로 예술을 하라는 이런 충고는 삶을 구하는 예술의 힘을 본 적이 없기에 나온 것이리라.

최근 다시 출간된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가 주창하듯이 인류문화의 기원은 놀이다. 우리 자신도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온갖 놀이에 빠져 살지 않았던가? 놀이는 예술행위와 같은 것이다. 어린이 그림이 천재 미술가처럼 보이는 것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미 북부 작은 나라, 빈부격차가 우리 못지않게 심각한 이곳에서 1970년대 중반 ‘엘 시스테마’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마약 거래와 총기 사고가 일상화된 이곳, 누추한 차고에서 음악 레슨이 시작되었다. 음악가이자 경제학자 출신 활동가 호세 안토니오 아브라우 박사와 뜻을 같이한 소수가 아이들 손에 악기를 쥐여주며 희망의 싹을 뿌렸다. 전과 5범 소년까지 포함한 11명으로 시작된 빈민 구제용 음악교육은 30여년이 지난 현재 200여개 음악센터로 가지쳐 40여만명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음악하는 삶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제 베네수엘라는 클래식 음악의 미래로 불리기도 한다.

마더 테레사가 가장 빈곤한 이들과 함께했듯이, 아브라우 박사는 가장 가난한 아이들에게 음악을 안겨준 것이다. “죽으면 쉴 텐데”라며 휴일 없이 일하는 그는 꿈을 실현하는 방식을 알아낸 지행합일 몽상가 현자이다. ‘잘 아는 이를 당할 수 없지만, 즐기는 이는 그 누구도 못 당한다’는 공자님 말씀이 바로 엘 시스테마 프로젝트 몰입에도 드러난다. 가난한 이웃을 가족으로 삼았던 인류의 스승들 얼굴이 공유하는 인자함과 사랑, 그런 공익활동이 개인적으로도 즐거운 일이란 것을 보여주는 그의 미소가 아우라가 되어 마음을 뒤흔든다.

그런 즐거움은 전염된다. 시내 공연에 나가는 아이들은 아브라우 할아버지와 같이 시내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산책할 생각에 즐겁고 들뜬 마음을 전한다. 최근에는 음악센터까지 올 형편조차 안되는 쓰레기 하치장 아이들을 위해 쓰레기 더미 속에 음악센터를 세웠다. 청각장애 아이들을 위한 합창단 육성에도 집중하고 있다. 늘어나는 아이들에게 악기를 마련해줄 비용이 없어서 종이악기로 음악교육을 시작하여 종이 오케스트라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등장했다. 음악은 악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음악의 영혼을 인간의 영혼과 접속시키는 교육으로부터 삶을 치유하고 변화시켜 나간다.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는 삶의 열정이 폭발하는 연주로 유례가 없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2008년 말 내한공연에서도, 이렇게 꿈틀대는 연주는 처음이라는 관객의 열광적 반응을 얻어냈다. ‘현대판 모차르트’로 불리는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은 차세대 마에스트로로 꼽히는 격정적 지휘로 객석을 사로잡는다. 그의 지휘를 보기만 해도 심장이 떨리는 음악의 힘을 느끼게 된다. 강렬한 삶의 약동이 온 세포를 자극한다.

엘 시스테마는 연주에만 그치지 않는다. 악기 제작과 수리, 차세대 교육까지 같이 나눈다. 그 결과 성장하면서 서구의 유수한 오케스트라에 진출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루는 오케스트라 만들기는 ‘따로 또 같이 미학’을 증명한다. 베토벤의 ‘운명’ 같은 장중한 클래식으로부터 남미 특유의 꿈틀대는 맘보 리듬은 무대와 객석을 같이 흔들어 놓는다. 아파트 몇 채나 되는 레슨비를 치르며 계급 차별화의 만족감에 쏠려가는 연주자 양성 풍토에선 찾아보기 힘든 열정이 객석에서 솟구친다.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으로, 피곤한 삶이자, 유배당한 삶”이라고 일갈한 니체의 호모 루덴스론이 실현되는 현장. 음악/예술의 힘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란 희망이 꿈틀댄다. 그리하여 이 기적의 오케스트라 현장을 꼭 관람하시라고 초대한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때론 출구조차 안 보이는 우리 사회의 희망을 위해서.

팁: 돈벌이 중심 인간이라는 각박한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중독된 현실에 부딪히는 <와이키키 브라더스> <즐거운 인생>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떠오른다. 밥벌이 현실과 음악/예술을 대치시키는 현실에 대해, 이 영화는 답한다. “그럼요, 예술이 밥 먹여 주고 말고요, 행복도 주지요”라고. 우리 모두 즐거운 놀이를 통해 비루한 삶을 변혁시킬 열정을 가진 인간이기에 이런 프로젝트는 이곳에서도 가능하다.(유지나|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크리스천투데이(10. 08. 07) 엘시스테마-바디매오처럼, 포기하지 않는다면…

“오후 6시만 되면 거리에서 총격전이 시작되고, 모두 잠을 청해야 한다. 가끔 대낮에도 총격전이 벌어져 아직 집에 돌아오지 못한 엄마를 기다린다. 혹시 총에 맞아 부상을 입지는 않았는지 걱정이다. 친구들 중에도 총상을 입어 다음날 학교를 나오지 못할 경우도 있다. 총상을 입지 않아도 사는 것은 ‘지옥’이다. 13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약에 중독돼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체가 전쟁이다. 빈곤에서 해방되고 싶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사는 것이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각박한 현실이 바로 남미의 석유부국인 베네수엘라 빈곤지역 아이들이 겪는 실상이었다. 꿈이나 희망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그야말로 밑바닥의 삶. 이 아이들이 마음껏 희망할 수 있는 세상으로 안내하고, “코끼리처럼 큰 걸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가겠다”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음악’이었다.

빈곤지역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음악교육을 통해 희망을 선물하고자 했던 ‘엘시스테마’(El Sistema) 프로젝트는 1975년 베네수엘라의 한 도시의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됐다. 들리는 거라곤 총소리 뿐이었던 전과 5범 소년을 포함한 11명의 아이들은 총 대신 악기를 손에 들고, 난생 처음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5년 뒤, 차고에서 열렸던 음악교실은 베네수엘라 전역에 200개 센터가 되었고, 11명이었던 단원수는 30만명에 이르렀다



오는 12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영화 ‘엘시스테마’는 거리의 아이들이 어떻게 음악을 통해 삶이 변화되는지 여정을 그리고 있다. 지휘자이자 경제학자였던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Jose Antonio Abreu)라는 한 사람의 꿈에서 시작된 ‘엘시스테마’라는 공동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전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는 기적의 아이콘이 됐는지 다양하고 역동적인 영상과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종이오케스트라를 통해 음악의 기초를 터득하고 각 단계별 오디션을 거치며 좀 더 구체적으로 음악을 배워간다. 개중에는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등 전문적인 음악가로 성장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엘시스테마는 실력이 뛰어난 아이들을 발굴해 성공한 음악가로 키우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을 접할 기회가 없는 거리의 아이들에게 오케스트라 연주를 가르치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풍부한 감수성을 일께워주고, 희망을 갖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  

이 일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헌신했다. 설립자 아브레우 박사를 비롯해 지휘자, 교사,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이들은 월급이 남보다 적고 그 결과가 단시간만에 눈에 띄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내어놓았다.

아브레우 박사는 말한다. “엄청난 부를 가진 선진국의 사람들은 권태와 염세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더 이상 지켜야 할 것, 이루고 싶은 것이 없는 그들은 엄청난 부를 가졌기에 오히려 더 비참할 수 있다. 가난한 아이들은 음악을 배우며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고, 이뤄야할 꿈이 있다면 가난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삶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꿈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부자’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비참했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황 속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소경이라는 자신의 주어진 처지에 절망하기 보다 부르짖을 수 있는 입이 있음을 감사했다. 설령 제자들이 그를 막을지라도 그는 끝까지 “나사렛 예수”를 부르짖으며 구원을 요청했고, 그는 결국 나음을 입었다. 바디매오처럼 부르짖음을 포기하지 않고, 코끼리가 걷듯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보면, ‘엘시스테마’의 기적은 오늘날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이미경 기자) 

10.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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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08-15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내한공연 했을 때 가고 싶었는데 시험기간이어서 ㅜㅜ 그런데 두다멜의 말러 교향곡 5번 음반 좋더군요

로쟈 2010-08-16 20:02   좋아요 0 | URL
작년에는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루체오페르 2010-08-16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부터 교육관련 다큐에 몇번 등장해서 관심 가졌었는데 참 괜찮고 멋진 활동 같습니다.
그 교육으로 세계적인 지휘자도 배출됬다고 하더군요. 이름은 기억 안납니다.^^;
비슷한 것으로 '노숙자 인문학 공부, 희망의 인문학' , '문제아 글쓰기 공부, 프리덤 라이터' 가 떠오르더군요. 우리도 이정도의 성과는 아니지만...지방의 학생 독서,공부모임에서 시작해 활발하게 해외석학 인터뷰도 하고 잡지,책도 내고 하는 곳도 있던데(이것역시^^;) 우리 나라에도 꼭 필요한, 있었으면 하는 모습입니다. 국내 도입이 시급합니다!ㅎㅎ

로쟈 2010-08-16 20:03   좋아요 0 | URL
인디고 말씀이시죠. 요즘은 잡지 영어판까지 발행하고 있습니다...

람혼 2010-08-19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브레우와 엘 시스테마는 정말 하나의 기적이자 기적보다 더 감동적인 전범이죠. 다큐멘터리 영화로까지 나왔다니 한 번 봐야겠군요. 두다멜과 엘 시스테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걸 보면 정말 어깨가 절로 들썩들썩하고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로쟈 2010-08-16 20:04   좋아요 0 | URL
서재엔 가끔 오시나보군요.^^ 람혼님의 공연도 흥이 나던데요.^^

2010-08-16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6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자읽기 2010-08-1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에 그만 영 흥미를 잃어버린 아들에게 보여주어야 겠습니다...
엘리트 예술 교육은, 정말 예술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재앙이지요....

로쟈 2010-08-17 16:51   좋아요 0 | URL
예능 교육이 부의 과시가 되는 나라도 재앙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