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굴은 일정한 직선 방향으로 터널처럼 뻗어 있다가, 갑자기 곤두박질하기도 했다. 어찌나 갑작스럽던지 앨리스는 너무 깊어 보이는 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멈춰야지 하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자, 이제 네오와 함께 모피어스를 따라 굴러 떨어진 ‘토끼굴’이다. 이런 경우엔 보통 인원 점검을 다시 하지만, 그럴 형편은 아니어서 대신에 ‘RSI’에 대한 복습만 간단히 하도록 한다. 실재계-상징계-상상계 얘기다. 교재는 다시 <HOW TO READ 라캉>이다. 상징계에 대한 지젝의 설명을 따라가 본다. 멕시코에선 TV 드라마를 가공할 만한 속도로 찍는다고 한다. 매일 25분짜리 에피소드를 찍어대는데 배우들에겐 미리 대본을 받아보고 연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당일 아침에 그날 찍을 대본을 나눠준다는 홍상수 감독보다 더 심한 경우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찍을 건 찍는다. 어떻게? 멕시코 방식은 이어폰을 활용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배우가 즉석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자 이제 뺨을 한 대 갈기고 그를 증오한다고 말을 해. 그리고 껴안아!” 지젝이 보기엔 바로 이런 것이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the big Other)’이다.   


이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말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타인과 대화할 때, 우리의 발화 행위는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전제에 의존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법 규칙을 공유해야 하고 동일한 생활 세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박쥐와 소통하기 어려운 것은 박쥐와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상징적 차원 혹은 상징적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를 재볼 수 있는 일종의 척도다. 대타자가 단일한 대행자(agent)로 인격화되거나 사물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언제나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혹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신이 인격화의 예라면, 내게 명령을 내리고 나의 삶을 바치도록 만드는 자유니 공산주의니 민족이니 하는 대의(Cause)는 사물화의 예이다. 요컨대 우리의 현실을 관장하고 조정하며 인도하는 ‘신’, ‘자유’, ‘공산주의’, ‘민족’ 등등이 모두 대타자에 속한다. 우리가 ‘소타자(small other)’라면 이 소타자(개인)들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대타자가 끼어든다. 말이 좀 어려운가? 이럴 땐 지젝식 EDPS를 활용하자. 

  

 

 
한 가난한 농부가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신디 크로퍼드와 단둘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한때 세계 3대 모델로 불리기도 했던 미녀다. 그렇다고 굳이 신디 크로퍼드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며 각자가 알아서 다른 미녀로 대체해도 좋다. 하여간에 둘이 섹스를 한 후에 신디가 농부에게 어땠냐고 물었다. 대답은 물론 “그레이트!” 하지만 자신의 만족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 가지 사소한 부탁을 들어달라고 농부는 말한다. 바지를 입고 얼굴엔 콧수염을 그려서 자기 친구처럼 분장해달라는 것이다. 자신이 변태가 아니라고 겨우겨우 안심시킨 농부는 신디가 그의 원대로 분장을 하자 그녀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고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내가 말이야 방금 전에 신디 크로퍼드와 섹스했다!”  


여기서 “언제나 증인으로 현존하는 이 제삼자는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의 가능성을 배반한다.”(<HOW TO READ 라캉>, 21쪽) 즉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이란 건 없다. 그런 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최소한이라도 섹스는 언제나 ‘전시적’이며 다른 사람의 응시에 의존한다. 남이 봐줘야 하며 알아줘야 한다(그래서 비디오로 찍어두기도 한다). 제삼자가 개입하지 않는 섹스가 ‘상상적 섹스’라면 농부가 자신의 만족감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원했던 건 그 ‘상상적 섹스’를 ‘상징적 섹스’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자기 친구라는 제삼자가 필요했다. 이 ‘제삼자’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대타자’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대타자는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한가? 그렇지는 않다. 대타자는 무인도에 난파당한 농부가 신디의 분장을 통해 불러낸 친구처럼 ‘주관적 전제(subjective presupposition)’ 혹은 ‘주관적 가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비실체적이며 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이런 주장이 이해가 될 것이다.    

  

   
 

대타자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간단히 말해서, 대타자라는 비실체적 ‘실체’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개인들이 존재할 때만 힘을 갖는다. 대타자가 규칙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가령 체스 경기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체스 경기자가 있어야 하며, 축구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손을 사용하지 않고 공을 다루려는 축구 선수들이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스 경기자와 축구 선수들만으로 게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게임으로서 성립하려면 거기엔 규칙(대타자)이 적용돼야 하고 작동해야 한다. 이 규칙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는 지난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알다시피 독일과 잉글랜드의 16강전에서 벌어진 일인데, 잉글랜드가 1대 2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드필더 램퍼드의 슛이 크로스바를 맞고 독일 골문 안쪽으로 떨어졌다가 튀어 올랐다. 독일 골키퍼 노이어가 재빨리 공을 잡아챈 뒤 그라운드로 날렸고 주심은 노골을 선언했다. 화면상 명백한 ‘오심’이었지만 주심은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고, 이런 경우 축구 규칙은 주심의 판단을 따른다(흔히 동원되는 말로 오심도 경기의 일부다!). 그래서 결국 잉글랜드의 골은 골로 인정되지 않았다. 즉 실재적으론 ‘골’이지만 현실에서는 ‘골’이 아니었다. 오심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FIFA는 향후 골 판정 방식을 개선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 사례에서 골 판정은 주심의 판단에 따른다는 축구 규칙의 힘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규칙(상징계)은 그렇게 현실 세계를 관장하며 지배한다.  


앞에서 “실재적으론 ‘골’이지만 현실에서는 ‘골’이 아니었다”라는 표현을 일부러 썼는데, ‘실재’와 ‘현실’이란 말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실재’는 ‘더 리얼(the real)’의 번역이고 상징계의 효과로서 그와 등치될 만한 개념인 ‘현실’은 ‘리얼리티(reality)’의 번역이다. 이 두 기본 개념을 구별할 수 있어야 지젝을 읽는 데 무리가 없다. 가령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를 읽으려고 해도 초반부터 이런 대목과 마주치게 된다. 
 

   
 

“결과적으로 금융투기로부터 실제 인간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재화를 생산하는 ‘실물경제’로 회귀할 필요를 역설하는 자들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자기추진적이며 자기확대적인 금융순환은 자본주의에 있어 생산의 현실(reality)과 대조되는 유일한 실재(the Real)의 차원인 것이다.(33쪽)

 
   


인용문에서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의 병기 표기는 원문 그대로이다. 그만큼 두 개념의 차이에 주의해달라는 주문이겠다. 여기서 지젝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핵심’으로서 금융순환이라는 실재(the Real)를 생산의 현실, 혹은 ‘생산이라는 현실(reality of production)’과 대비한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실물경제’이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돈의 순환’이야말로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달리 ‘자본주의’가 아니잖은가!). 이런 차이를 표시할 때, ‘현실-실재’는 ‘현상-본질’과도 유사한 개념쌍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실재(계)’는 본질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의미도 갖는다. 조금 오래 전에 쓰인 서평이긴 하지만 라캉-지젝의 ‘실재’ 개념을 능숙하게 정리한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글을 잠시 따라가 본다. <반대자의 초상>(이매진, 2010)에 수록돼 있는 “즐거운 시간 되세요!”라는 서평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영원히 괴물을 품고 사는 존재이며, 우리 존재의 핵심에는 잔인할 정도로 낯선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를 구성하는 재료이지만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한 그것,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일컬은 이것은 우리에게 목적이라는 환상을 부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목적도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에 깊은 관심을 가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이 괴물성의 비형이상학적 양상으로 제시한다.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305쪽)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점은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이질적인 부분’ 혹은 ‘괴물성’이라는 데 있다. 적어도 프로이트는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라캉은 한 공포영화에서 착상을 얻어 이것을 ‘괴물(Thing)’이라고 불렀다. 다음 회에는 이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참고로, <반대자의 초상> 역주에서 라캉이 착상을 얻은 영화가 존 카펜터의 <괴물>이라고 해놓았는데, 착오다. 라캉이 본 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1982)이 아니라 하워드 혹스의 <괴물>(1951)이다(라캉은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실 나도 하워드 혹스의 영화는 보지 못했고, 카펜터의 영화만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한 대중연예지가 ‘역대 최고의 SF영화 톱 25’를 뽑았을 때 10위에 선정된 수작이다. 그럼 1위에 오른 작품은? 바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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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타자란 무엇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9 23:04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하루가 지나갔을 뿐이지만 체감 시간으론 몇 년은 흐른 듯하다. 이사준비로 어젯밤 늦게까지 땀을 빼고 오늘 하루 종일 분주했던 게(포장이사이니 힘이 들 건 별로 없었지만) 이유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공간이 달라졌다는 점(2004년에 러시아에 체류한 걸 고려하면 5년만이다!). 다시 '정상적인' 일상의 리듬과 감각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릴 듯하다. 그때까지는 '1박2일'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미지 2010-08-19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강의를 듣는 듯 생생한 느낌이네요.

로쟈 2010-08-19 23:07   좋아요 0 | URL
꼬박꼬박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일롯 2010-08-26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갑니다! 쉽게쉽게 설명해주셔서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어요.
언제 기회되시면 들뢰즈도 한번 이렇게..

로쟈 2010-08-30 19:16   좋아요 0 | URL
들뢰즈는 전공하신 분도 많고, 입문서도 많이 나와 있어서요.^^;

빠삐용 2010-10-04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타자. 나를 너무 잘 아는 사람도 얄밉지만 누군가 날 알아서 말을 잘 이해해주고 동감해줬음 좋겠다 느끼기도 하는데 그 대상이 대타자와 비슷한 것 같아요. 매 강의마다 피드백하는데 나름 정리죠^^ 전에 쓰신 글이라 요즘 댓글도 읽으시는지 모르겠네요^^

Lyla626 2011-01-1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그냥 사족인데 인터넷으로 읽는게 눈이 피곤해서 인쇄해서 보려고 하는데
레이아웃이 엉망이라 문단이 중간에 짤려요. 인쇄는 엉망으로 되네요....
아 그리고 복사해서 그냥 문서프로그램에 붙여넣기하려고 해도 복사가 안되는군요;;;
진정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저 밖에 없나요??ㅡㅡ;;;;;
이런 리플이 어찌된 일인지 하나도 없나요? 다들 웹에서만 읽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