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면 어떨까?"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차 한 잔> 읽기의 계속인데, 한 차례 더 다뤄야 마무리가 된다. 이후에 예정으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읽기로 넘어갈 계획이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666 에서 읽어보실 수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젊고 부유한 귀부인 로즈머리가 길에서 차 한 잔 값을 구걸하는 한 여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대목에서 멈췄었다. 그들은 이제 2층에 있다. 로즈머리는 최대한 ‘손님’이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면서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않도록 권한다. 여자는 아무 대답 없이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입을 약간 벌린 채 앉아 있다. 밀어다 앉힌 자세 그대로다. 어딘가 좀 모자라게도 보인다. 로즈마리는 머리카락이 젖었으므로 모자와 코트를 벗도록 권유한다. 그러고는 코트를 벗는 일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좀 ‘비협조적’이다. 개인적으론 아주 마음에 드는 이 장면에 대한 묘사를 읽어본다.  

“여자가 일어섰다. 그러나 그녀는 한손으로 의자를 붙잡고서 로즈머리가 끌어당기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무척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거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여자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비틀거렸고, 로즈머리의 머릿속에는, 남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자신도 약간은, 아주 약간만이라도 거기에 반응을 보여야지 안 그랬다가는 정말 난감해진다는 생각이 오고갔다. 그런데 이제 이 코트를 어떻게 한다? 그녀는 그것을 방바닥에 놓고 또 모자도 그렇게 했다.”

“그녀는 조금도 거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는 “The other scarcely helped her at all.”을 옮긴 것이다. ‘여자(the girl)’라고 줄곧 지칭되다가 이 대목에선 ‘그쪽(the other)’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말 그대로 ‘타자(the other)’와 로즈머리가 접촉하는 장면으로 읽어도 좋겠다. 어째서 타자인가? 로즈머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인가? 그녀가 코트를 벗겨주면서 혼자 되뇌는 생각이다. ‘남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자신도 약간은, 아주 약간만이라도 거기에 반응을 보여야지 안 그랬다가는 정말 난감해진다’는 것. ‘이제야 당신을 붙들었군요(I've got you).’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집에까지 데려왔지만 이 장면에서 ‘손님’의 반응은 그녀의 계산과 기대 밖이다.

물론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가냘프고 이상한 목소리로 “대단히 죄송하지만, 사모님, 저는 지금 쓰러질 것만 같아요. 뭘 좀 먹지 않으면 쓰러지겠어요, 사모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로즈머리의 ‘여자’는 약간이라도 반응할 여력도 없는 것이라고 봐야겠다. 하지만 그런 객관적 정황과 무관하게 이 장면에서 로즈머리가 한순간 ‘타자’ 혹은 ‘사물’과 조우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데도 아무런 기척도 내보이지 않는 ‘타자’ 앞에서 난감함을 느낀 경험을 로즈머리가 과연 또 갖고 있을까? 아마도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로즈머리의 세계란 타자가 전적으로 부재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떠올리게 되는 건 프로이트의 ‘네벤멘쉬(Nebenmensch)’란 말이다. ‘이웃집 사람’ 혹은 ‘옆집 사람’과 같은 의미이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 독일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과학적 심리학을 위한 기획>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각을 제공하는 대상이 주체를 닮았다고 가정해보자. 대상은 바로 동류 인류(네벤멘쉬)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대상은 주체에게 유일한 도움을 주는 힘일 뿐 아니라, 최초의 만족을 주는 대상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는 주체의 최초의 적대적인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이론적 관심도 해명해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 사람이 인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사실은 동료 인간과 관련된다.(케네스 레이너드 외, <이웃>(도서출판b, 2010), 51쪽에서 재인용)

케네스 레이너드의 정리에 따르면, “네벤멘쉬는 주체와 그 최초의 모성적 대상 사이에 서있는 ‘인접한 사람’으로서의 이웃이며, 주체의 현실을 표상 가능한 인식의 세계와 프로이트가 ‘사물’이라 부르는 ‘동화할 수 없는’ 요소로 분할하는 섬뜩한 지각의 복합체이다.” 즉 이웃은 주체가 경험하는 현실을 ‘표상 가능한 인식의 세계’와 ‘동화할 수 없는 사물의 세계’로 분할한다. ‘표상 가능한 인식의 세계’라는 건 주체가 경험하는 것과 닮은꼴의 세계이다. ‘나’와 좀 다르지만 비슷비슷하구나, 쟤는 저렇게 밥을 먹는구나, 저렇게 하품을 하는구나, 저럴 땐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등등을 ‘나’는 ‘이웃’에게서, ‘이웃 아이’에게서 보고 배운다. 따라하기도 하고 공유하기도 한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인간은 동료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기를 배운다”라고 표현한다. 반면에 그가 사물(das Ding; Thing)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낯선 타자 안에 있는 어떤 것과의 마주침”이다. 라캉에 따르면, 그것은 자기와 타자의 구성물을 넘어서는 이질성의 침입이다.  



<차 한 잔>에서 로즈머리는 거리에서 마주친 낯선 여인을 ‘포획’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녀의 ‘자선적’ 행위에는 나르시시즘적 동기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대로다. 하지만 “여자가 일어섰다. 그러나 그녀는 한손으로 의자를 붙잡고서 로즈머리가 끌어당기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무척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거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라는 대목에서만큼은 그녀의 손님은 로즈머리에게 ‘사물’이다. 낯설고 이질적이고 동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내가 ‘사물로서의 타자’와의 조우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다. 하지만 이 조우, 혹은 마주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로즈머리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은 손님의 상태였다. 곧 쓰러질 정도로 허기진 상태라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저런,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했네!”라고 말하며 하녀에게 빨리 차와 브랜디를 가져오라고 주문하다. 하지만 거의 울상이 되어 소리친다.

“아니에요, 브랜디는 필요 없어요. 저는 브랜디는 안 마셔요. 전 차 한 잔이면 돼요, 사모님.” 그러고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놀랍고 황홀한 순간이었다.

이 ‘놀랍고 황홀한 순간’은 이 작품의 유사-클라이맥스다. 왜 놀랍고 황홀한가? 로즈머리가 기획했던 시나리오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기 때문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한 여인의 눈물과 그것을 다독여주는 따뜻하고 고귀한 품성의 로즈머리! 이 장면에서 로즈머리의 연기를 보자. 그녀는 우선 여자가 앉은 의자 옆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는 더없이 자상한 태도로 손님을 위로한다.

“울지 말아요, 가엾기도 해라.” 그녀는 말했다. “울지 말아요.” 그러고 나서 여자에게 레이스가 달린 자기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그녀는 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동되었다. 그녀는 가냘픈 새와 같은 그 어깨에 자기를 팔을 감았다.

번역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울지 말아요, 가엾기도 해라.”는 로즈머리의 말은 “Don't cry, poor little thing”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가엾은 것(poor little thing)’을 ‘사물(the Thing)’이 순치된 걸로 볼 수 있을까? 로즈머리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낯설지 않고 두렵지 않다. 그녀는 ‘가냘픈 새’와 같은 ‘이웃’을 온전히 포획했고 감싸 안았다. 숨을 헐떡이면서 더 이상은 못 살겠다고 울먹이는 여인을 다독이며 자신이 돌봐주겠다고까지 말한다. 로즈머리에 읽은 소설이나 영화에 나올 법한 감동적인 장면이다. 로즈머리 자신이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같이 차를 들면서  뭐든지 죄다 이야기해봐요. 그러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약속할게요. 정말 이젠 울음을 그쳐요. 기진맥진하게 될 테니까. 자, 부탁이에요!”

(...)

10.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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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지만 저 여잔 너무 놀랄 정도로 예쁘잖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06 11:44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맨스필드의 단편 <차 한 잔>을 계속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다음에 한 차례 더 '읽기'를 덧붙일 계획이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837  에서 읽으실 수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의 번역본은 범우사판과 시사영어사판 대역본 두 종을 참고했는데, 대화 장면의 번역은 나대로 다시 옮겼다. 동서문화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