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들의 웅성거림을 기준으로 하면, 비교적 '조용한' 주라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숨죽인 외침 소리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이번에 재출간된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바다출판사, 2010)이다. 나는 학원사판(1985)을 갖고 있는데(하지만 어디에 두었는지는 모른다), 새 판본도 바로 장바구니에 넣었다 일단은 보관함으로 옮겼다. 학원사판을 조금 더 찾아보자는 생각에서다. 그래도 일단 이 '오래된 새책'에 대한 리뷰는 챙겨놓는다.    

세계일보(10. 08. 28)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성에서 모든 권력은 나온다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군중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을 숭상한다. 그들은 재능이 있는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모두 시체 더미의 왕이다. 인간의 역사는 살아남는 자의 역사이고 폭력의 역사이며 시체 더미의 역사라는 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권력자는 군중을 죽음으로 위협하여 전장으로 내몰고 군중은 죽음의 군중, 곧 시체 더미가 된다. 권력자는 그만이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이 되어 시체의 들판에 서 있기를 좋아한다. 살아남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모든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는 자신의 저서 ‘군중과 권력’에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이 책은 198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20세기 최고의 르네상스 지식인으로 꼽히는 저자가 35년간 군중과 권력자의 생리를 조사 분석해 1960년 발표한 역작이다.

군중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현상이다. 월드컵에서 보여준 군중의 열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2년여 뒤 실시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점점 더 많은 군중의 행동들이 집단적으로 표출될 것이다. 아프간에 대한 미국의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북한 핵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 긴장의 파고는 여전하다.

이러한 상황은 50여년 전 카네티가 고민했던 당시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파시즘과 냉전, 핵전쟁의 위협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프로파갠더들의 극성도 여전하다. 현대사회든 그 이후 첨단 사회든 간에 군중과 권력은 여전히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각의 상황도 카네티가 분석했던 군중과 권력 현상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카네티는 1905년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불가리아에서 태어났다. 유대계라는 이력의 카네티에게 ‘나치즘’의 발호는 군중과 권력에 운명적으로 천착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나치즘의 행동 양태를 파악하기 위해 나치즘 치하에서 끼니를 이어가며 연구했다. 그러던 중 군중의 광기에 들떠 있던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자 영국으로 망명, 연구활동에 전념했다.

군중 심리는 카네티에게 문제를 풀어주는 핵심이었다. 1910년 핼리 혜성 출현에 따른 종말론적 패닉 현상, 1911년 타이타닉호 침몰 소식을 듣고 거리로 뛰쳐나와 비통해 하던 인파의 물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시민들이 보여준 적개심과 광기, 전후 독일의 인플레이션에 따른 극심한 궁핍과 혼란, 그리고 유대인 학살….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전반기만큼 군중 현상이 역사상 폭발했던 시기도 없었다고 카네티는 쓰고 있다. 

카네티는 군중에 의한 권력 현상을 주로 생존 문제와 연관시켰다. 그는 “모든 권력은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지적했다. 살아남는 순간이야말로 권력의 순간이다. “죽음을 목격하며 느꼈던 공포는 죽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만족감으로 변한다”고 설명한다.

카네티는 권력 현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로 종교도 근본적으로는 권력의 본질과 관련된다고 파악했다. 종교는 죽음과 내세를 담보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 벌이는 장사라고 카네티는 주장했다.

그는 군중 행동의 기원을 무리 행동에서 찾고 이렇게 정의한다. “무리는 부족이나 씨족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부족이나 씨족은 정태적인 것에 반해 무리는 동태적이다. 가장 순수한 무리 형태는 사냥 무리다. 무리들 가운데 전투 무리가 가장 보편적이다. 전투 무리는 자신의 재물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아는 사냥 무리와 유사하다. 군중의 심리도 이와 유사하다.”

카네티는 이어 군중 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군중은 언제나 성장하기를 원하며, 군중의 내부는 평등이 지배한다. 군중이 형성되는 것은 평등을 얻기 위해서이다. 특히 군중은 밀집형태를 사랑하며 하나의 방향을 필요로 한다. 군중은 항상 동적이며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이 책을 읽은 서평자들의 일치된 결론은 카네티의 이 저서가 ‘파시즘에 대한 정확한 보고서’라는 것이다. 카네티는 책의 말미에서 히틀러의 광기와 역사상 유례없는 유대인 학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어떻게 예술과 철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독일인들이 그처럼 포악한 권력자의 명령에 복종해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은 카네티뿐 아니라 20세기 지식인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연구하는 지식인들에게 적잖은 과제를 설정해주고 있다.(정승욱 기자)  

10. 08. 28.  

P.S. 이번주에 나온 최성각의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동녘, 2010)에도 <군중과 권력>에 대한 서평이 수록돼 있기에 옮겨놓는다. 저자는 '방대하고 치밀하면서도 극적인 책'이라고 평했다.  

청년 카네티가 처음 ‘군중’을 만난 것은 19살 때였다. 1924년 국수주의자들에 의한 독일 외상 라테나우 암살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벌인 대규모 시위였다. 그는 경악했다. 그것은 성난 물결이었고, 뜨거운 화염이었으며, 동시에 세찬 질풍이었다. 군중은 바위처럼 단단하면서도 비누거품처럼 쉽게 부서지기도 해서 더욱 카네티를 전율시키고, 경악시켰다. 그는 이때의 체험을 이렇게 말한다.

“이 군중은 예전에 내가 보았던 군중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내 피부로 이 군중을 느꼈고, 이 군중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 나는 그때까지 군중을 마치 나를 향해 습격해오는 것 같은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때에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 어떤 저항하기 힘든 힘에 의해 군중 속으로 빨려들어가 나 자신이 군중의 일원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데모가 끝나 군중이 해산하고 각자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갈 때, 나는 나 자신이 지금까지보다 가련한 존재가 되고 무언가 귀중한 것을 잃고 만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3년 후인 1927년, 카네티는 다시 군중 속의 하나가 된다. 성난 시민들이 빈의 법무성 건물을 불태워버릴 때, 그 시위에 참여했던 체험이었다. 카네티는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바스티유의 폭풍우에 대해 책을 통해 보지 않아도 이해해버린다.

이 두 번의 운명적인 체험 이후, 그는 35년여 간 ‘군중연구’에 자신의 삶을 투신한다. 가히 필생의 작업이라 할 만하다. 이 장엄한 책은 실로 방대하고, 치밀하면서도 극적이다. 어마어마한 자료와 넘치는 인용과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카네티만의 독창적이고 깊은 통찰로 점철되어 있다. 문학, 종교, 인류학, 심리학, 생물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카네티는 ‘군중의 물리학’ ‘권력의 정신분석학’을 완성했다. 그래서 세상은 그가 쓴 시나 소설 때문에 그를 시인이나 작가라 말해야 할지, 그가 쓴 희곡 때문에 극작가라 말해야 할지, 이 경이로운 책 때문에 사회과학자라 말해야 할지, 그의 방대한 지적편력으로 말미암아 인류학자라 말해야 할지, 끝내는 사상가라 말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러나 그는 어떤 학파, 어떤 체제(장르),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자신이 헐값으로 분류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단지 ‘카네티’라는 한 정신을 그는 자처했던 것 같다. 1960년, 책이 발간되자 이 놀라운 노작은 곧 ‘20세기의 서양고전’으로 자리매김되면서 그의 생전에 불멸의 가치를 얻게 되었다. 그를 일러 20세기의 ‘르네상스적인 인간’이라 말하는 연유가 여기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결국 이 놀라운 정신이 이 작업과 함께 수행한 소설 『현혹』에 노벨문학상 수여라는 형식으로 최소한의 예를 갖춘다.  

필자가 접한 『군중과 권력』은 반성완 선생이 번역한 1982년 한길사 초판본이었다. 550쪽에 달하는 책을 읽고 난 뒤에 쓴 메모를 펼쳐보니, ‘1992년 3월 2일’에 이 책을 완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몇 달에 걸쳐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어디 있었고 뭘 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었을까? 직장에 매이지 않고 살던 그즈음 내게 의료보험증은 있었을까? 어떻게 이토록 벅찬 치열한 정신을 만날 염을 냈고, 이 책에 무수히 밑줄을 그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인간정신에 대한 경탄과 새로운 발견의 기쁨과  내 정신의 초라함과 편벽,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데 대한 절망을 직시했을 것이다.

학원사판도 있고, 한길사판도 있고, 모두 절판된 뒤 펴낸 바다출판사판도 있다. 하지만 바다출판사판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아마 이 책은 오래된 도서관이나 ‘양식 있는 헌책방’에 가야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나라 새 책방에는 정말 나무에게 너무나 큰 죄를 범하고 있는 쓰레기들이 범람한다. 그건 그렇다손치고, 찾아 읽으려는 뜻만 있으면 그러나 반드시 이 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봄의 우리 촛불집회를 ‘군중’이라 해야 할 것인가, ‘공중’이라 해야 할 것인가, 누군가 이 책을 인용하면서 쓴 칼럼도 있었다. 이런 책을 한번 접하고 나면,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것과 혹 어쩌다 책을 펴냈더라도 책을 펴내기 전보다 더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독자는 그러나 특별히 무장할 필요가 없다. 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위대한 저작을 읽어나가면 될 것이다. 반드시 그 정신이 격랑을 만난 뗏목처럼 요동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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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8-2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반성완 교수가 번역한 한길사 본을 갖고 있습니다. 1982년 초판 발행, 제가 소장하고 있는 건 1987년 10판본이네요. 그 때만해도 이런 책이 10판을 찍어냈었군요. 카네티는 제 의식속에 현장 기억으로 남은 첫 노벨상 수상작가입니다. 노벨상 수상이 알려지자 그의 대표 소설 <현혹>이 <머리없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황급히 번역되었고, 이 책을 아직 소장하고 있습니다. <머리없는 세상>을 읽다가 어린 마음에 참 이런 재미없는 소설에 노벨상이 수여되었을까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생에 불과했으니까요 ㅎㅎ <군중과 권력>은 <머리없는 세상>의 해설을 읽다가 알게 됐고 그 제목에 끌려 대학생 시절에 구입했었습니다.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완독을 하진 못했던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책을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요.^^ 그런데 학원사판은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전 반성완의 한길사 본과 바다출판사 본밖에 몰랐었습니다.^^

로쟈 2010-08-28 20:11   좋아요 0 | URL
학원사판이 강두식 선생 번역입니다. 바다출판사판의 '원판'이죠...

드팀전 2010-08-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년전엔가요 <바다출판사>꺼를 서점에서 산적이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대형서점에는 그때도 모두 품절상태였는데...대학가 앞의 작은 서점에서...^^
음반도 똑같습니다. 품절된 것들이나 단종된 것들이 동네 작은 서점이나 레코드가게에 가면 그대로 있지요. 안팔리니까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이런 길모퉁이 작은 서점에서 절판된 책을 찾을때가 더 기분이 좋다니까요.
그 바로 전에 어떤분이 헌책방에서 사서 보내준게<주우신서>라고 되어있던데...강두식역이구요. 83년 7판이네요

로쟈 2010-08-29 11:23   좋아요 0 | URL
한길사판이 1977년, 대일서관과 주우판, 학원사판이 1982년에 나온 것 같습니다. 1년만에 7판을 찍었다면 놀라운데요...

드팀전 2010-08-29 13:31   좋아요 0 | URL
책에는 7판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요즘 표기로 하면 7쇄 아닐까 싶네요. 많이 안찍었나보죠.그래도 적지 않은 양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8-29 18:49   좋아요 0 | URL
네, 7쇄 정도면 꽤 주목받았던 걸로 보입니다...
 

아침부터 잔뜩 흐린 날씨이지만 '가을의 문턱'이란 느낌은 아직 들지 않는다. 그래도 며칠 있으면 9월이고 가을이다. 그 전에 해야 할일들 때문에 무턱대고 시간이 흘러가는 게 전혀 반갑지 않지만 시간은 냉정한 편이니 기어이 가을이 오고야 말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9월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는다. 언젠가도 적었지만, 이런 페이퍼 만드는 일을 계속하는 건 10년 뒤에 돌이켜보기 위해서다. 당장의 효용은 나중 문제다.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고른 책은 박완서 선생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 2010)다. 어느새 팔순이다. "자서전격으로 읽어도 좋을 대목들이 수두룩하고 죽비로 등을 얻어맞는 듯한 따끔한 비판이 수두룩하고 노년의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의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생명들을 향한 예찬이 또한 음표처럼 수두룩하게 불려 나온다."라고 평했다. 찾아보니 산문집으론 <어른노릇 사람노릇>(작가정신, 2009)과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세계사, 2002)가 더 있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한양출판, 1994)로 읽은 기억이 난다. 어느새 16년 전이군...   

 

어제 갑작스레 타계한 이윤기 선생의 산문집도 추모의 뜻을 담아 (뒤늦게) 골라본다. 내가 아는 타이틀은 <무지개와 프리즘>(생각의나무, 1998)이 마지막이었다.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동아일보사, 2009/2000), <내려올 때 보았네>(비채, 2007), 그리고 <무지개와 프리즘>(미래인, 2007; 생각의나무, 2002/1998)이 우리에게 남겨졌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고른 역사서는 저명한 중국사가 조너선 스펜스의 <룽산으로의 귀환>(이산, 2010)이다. 간단히 말하면 "장다이(張岱)라는 한족(漢族) 출신의 지식인을 통해 명·청 교체기의 역사를 조명한 책"이다. 관심도서로 점찍어 놓고 아직 구하지 못한 터인데 다시금 흥미를 갖게 된다. 사실 조너선 스펜스의 어느 책이건 읽을 만하다. 좀 값싼 표현이지만 역사서의 '블루칩'이라고 할까. 이미 열댓권이 출간돼 있는 가운데 최근에 나온 걸로는 <근대 중국의 서양인 고문들>(이산, 2009), <중국인 후의 기이한 유럽 편력>(서해문집, 2007)을 체크해놓는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철학서는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이다. 이 책의 오역에 대해선 이미 지적한 바 있고, 아직 수정판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추천도서로 올라온 건 의외인데, 추천자가 번역서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으리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아래와 같은 추천사에서 나로선 아이러니를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원저라면 이런 추천사에 값할 수 있다. 속히 개정 번역본이 나오길 기대한다.  

여기 인터뷰한 철학자들이 철학에 대하여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철학과 삶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한 다양성에고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점은 철학 고전을 읽으라고 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전의 지혜를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렛대로 사용하는 창조적 작업이 우리가 해야 할이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철학적 사고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창조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독자로 하여금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철학에 대한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의미있는 삶을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하버드>보다 눈길을 끄는 책은 사실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길, 2010)이다. 오래전 <철학을 위한 선언>(백의, 1995)로 번역됐던 책인데, 이번에 바디우의 제자이자 전문가라고 할 서용순 박사에 의해 재번역됐다. 믿을 만한 정본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한다. 바디우 철학 전반에 대한 역자의 해제도 포함하고 있어서 입문서로도 요긴할 듯싶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고른 책은 강수돌의 <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지성사, 2010)다. '이장이 된 교수'는 물론 저자인 강수돌 고려대 교수를 가리킨다. 이젠 제법 널리 알려진 일인데, 노동문제를 전공한 경영학 교수의 '삶의 경영'에 관한 이야기에 귀기울여 봐도 좋겠다.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은 경영학 교수이자 시골의 농부인 저자가 들려주는 살림살이 농사와 참된 삶의 경영에 관한 얘기다. 저자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방법론으로 ‘오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주문한다. 참된 삶의 경영, 곧 행복은 ‘인간성, 효율성, 생태성’이라는 세 가지 가치 사이에 ‘조화와 균형’을 도모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행복은 자본주의가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돈 많이 버는 삶’ 또는 ‘과시적인 소비에 몰두하는 삶’도 아니며, ‘자아실현’이나 ‘자아완성’ 등 서구 계몽주의가 이상화한 개인주의적 행복도 아니다. 이 세상을 초탈하여 ‘저세상에서의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행복도 아니며, 인위적인 문명을 거부하고 현세초월적인 사유에 노니는 고고한 행복도 아니다. ‘온 사회가 불행한데 나 혼자 행복한 것이 어떤 면에서는 죄악일 수도 있다’는 그러한 공동체 지향적 삶이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고른 책은 피터 번스타인의 <금, 인간의 영혼을 소유하다>(작가정신, 2010)다. 책은 예전에 나온 <황금의 지배>(작가정신, 2001)를 다시 펴낸 것이라 하고, 저자는 나로선 과문하지만 경제/금융분야의 전문 저술가라 한다. 이준구 교수가 팬을 자처할 정도로 탁월한 이야기꾼이라고도 하고. 소개는 이렇다.  

금은 철이나 구리와 다름없는 한낱 금속일 뿐이다. 그런데도 금은 우리의 영혼을 온통 뒤흔들어버릴 만큼 엄청난 마력을 갖고 있다. 그 동안 동서고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금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지옥에 빠진 사람처럼 울부짖었는지 상상해 보라! 그 하찮은 금속을 얻기 위해 귀하디귀한 목숨까지 휴지조각처럼 버린 사람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이 책은 이와 같은 금의 엄청난 마력이 빚어낸 수많은 사건들을 얘기해 주고 있다. 피터 번스타인이 들려주는 금에 얽힌 이야기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흥미진진하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모아놓을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황금의 지배'라고 하니까 폴커 라인하르트의 <탐욕의 지배>(말글빛냄, 2010)도 떠올리게 된다. '돈과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의 인색함'이 책의 주제다.   

6. 과학 

최영주 교수가 추천한 책은 요로 다케시의 <유쾌한 공생을 꿈꾸다>(전나무숲, 2010). 곤충 채집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까지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곤충 채집을 열정적으로 좋아하여 그 연구를 희망하였지만 최종 진로는 결국 의과대학을 선택하고 해부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은퇴 후 평생 원했던 곤충 채집에 다시 발 벗고 나섰던 일본 지성인의 <유쾌한 공생을 꿈꾸다>는 곤충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책은 활동하는 지식인의 철학 에세이기도 하고 또 자연과학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아니 사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해부하는 행동하는 비판가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론 다소 뒤늦게 출간된 데이비드 봄의 <전체와 접힌 질서>(시스테마, 2010)에 눈길이 간다(<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민음사, 1991)로 번역됐던 책이다). 예전에 '신과학'이라고 한창 소개되던 시절에 자주 언급된 물리학계의 이단아. 양자물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제시한 책이니 나로선 판단하기 어렵지만, 여하튼 '데이비드 봄'이란 이름은 반갑다. 저자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오펜하이머의 제자, 아인슈타인의 동료라는 사실처럼 봄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론물리학자였다. 하지만 버클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공산단에 가입하고 정치활동을 했던 전력이 매카시즘의 도마 위에 올랐고 졸지에 공산주의자로 내몰리며 평생을 망명과 이민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데이비드 봄은 학계의 변방에서 연구를 이어나가며 양자론의 대안 해석을 발표한다. 양자론의 아킬레스 건인 '숨은 변수'를 해결한 '숨은 변수 이론'으로 양자론을 설명하는 코펜하겐 해석의 대안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책은 이용숙의 <춤의 유혹>(열대림, 2010). <춤에 빠져들다>(열대림, 2004)의 개정판이다. 추천의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최근 들어 나이와 직업을 불문하고 춤의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 큰 관심 속에 책이 다시 읽힐 것이라는 데 있다. 둘째는 저자 역시 춤과는 멀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문학과 음악학 공부를 한 분으로 어느 날 소설을 읽다가 그 안에 등장하는 춤 이야기가 재미있어 문화센터를 찾게 되었고, 그러면서 책까지 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춤의 유혹을 느끼고 있는 독자의 마음을 잘 안다.(...) 그리고 아마 이 책에서 제일 먼저 읽는 게 좋을 듯한 인터뷰 코너가 책의 세 번째 장점이다. 춤과 더불어 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담 았다. 다양한 일을 하면서 생활에 바쁜 사람들이 제각각 무슨 이유에서 어떤 통로로 춤을 접하게 되었고, 춤을 통해 어떻게 생활의 활력을 찾았는지, 이 코너에서는 그 생생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개인적으론 '춤의 유혹'이란 말이 떠올려주는 건 영화 <탱고 레슨>(1997)이다. 말 그대로 춤(특히 탱고)의 유혹에 바쳐진 영화였다.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책은 <후세 다츠지>(지식여행, 2010)이다. "일본인으로 일제하 조선인을 위해 봉사했던 한 인물을 재조명한 책"이라고 간명하게 소개된다. 그래도 몇 줄 더한 소개를 읽어보면 이렇다. 

1920년 5월 '전통적인 변호사'에서 '민중의 변호사'로 거듭나겠다는 '자기 혁명의 고백'을 선언한 후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양심적인 인권변호사로 활약한 후세 다츠지. 그는 전 생애에 걸쳐 핍박받는 민족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헌신했다. 이 책은 '후세 다츠지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강연회의 강연록과 후세 다츠지의 행보와 사상에 대한 논고 두 편을 엮어서 만든 책이다.

내친 김에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책들도 꼽아본다. 1910년의 기사들을 엮은 <1910년 오늘은>(서해문집, 2010)과 정혜경의 <조선 청년이여 황국의 신민이 되어라>(서해문집, 2010) 등이다. 후자는 식민지 시절 강제동원의 역사를 살피고 있는 책이다.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추천한 책은 오경순의<번역투의 유혹>(이학사, 2010)이다. "우리 말과 글에 스며든 일본어의 실상을 파헤치고 있는 책". '번역투'보다 좀더 본질적인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번역과 한국의 근대'를 다룰 수밖에 없는데, 김욱동 교수의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2010), <근대의 세 번역자>(소명출판, 2010)을 통해서 문제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겠다.  

10. 우리 시대 환경책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은 최근에 나온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동녘, 2010)가 인상적이어서 생명운동가 겸 '외로운 잡독가' 최성각의 독서잡설과 산문집으로 한다. "책은 나의 담요이고, 모닥불이고, 때로는 몽둥이였다"고 고백하는 저자에 대해서 소설가 김성동 선생은 이렇게 평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막막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하늘 밑의 벌레라면 꼭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치명적인 독주와도 같은 이 책을 읽는 이는 어지러워서 시원한 냉수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냉장고 속에 넣어둔 얼음물 또한 오염된 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부르르 몸을 떨게 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몇 편은 안 읽는 것이 좋겠다. 너무나도 무섭고 끔찍하며 그리고 슬픈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생명운동가 최성각이 쓴 이 책은 어떤 공포소설보다도 무서운 책이다. ‘환경운동을 하는 글쟁이’라고 스스로 낮추고 있지만 최성각은 사상가이다. 이 기절초풍하고 혼비백산하는 정신의 대공황시대에 한 점 등불 든 생명사상가인 것이다.

특히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에는 부록으로 우리 시대 환경책 목록이 수록돼 있다. 저자가 고른 '환경고전 17권'과 '다음 100년을 살리는 141권의 환경책' 리스트다. 리스트만 일람해보는 것으로도 뭔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10. 08. 28.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으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고른다. 괴테의 작품 중에서도 이제까지 가장 많이 번역된 작품이지만 최근 들어 또 3종 이상이 출간됐다. 비교해서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문학동네판과 펭귄클래식판은 관행적인 제목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그대로 쓰고 있고, 을유문화사판은 전공자들의 문제제기를 반영하여 <젊은 베르터의 고통>으로 고쳤다. 이미 굳어진 제목이긴 한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젊은 베르터의 고통'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9월에 생각해볼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가을은 또 왠지 슬퍼지기 시작하는 계절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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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8-28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 선생의 사망 소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고 더 좋은 업적을 내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가 딸과 시작했던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 작업도 이렇게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게 되는 군요. 따님 혼자서라도 그 일을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의 책들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고, 몇몇 번역본에 논란이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아무튼 그는 열심히 노력하신 분이고 서양문화의 이해에 대한 공헌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데이비드 봄의 책은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라는 제목으로 민음사 대우학술총서로 번역되었던 책입니다. 오래된 새책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the implicate order'는 보통 '내함된 질서' 혹은 '내포 질서(민음사 판)'로 번역되었는데 '접힌 질서'는 새로운 번역용어로군요. 전 개인적으론 '내함된 질서'라는 말을 좋아합니다만... '접힌 질서'는 잘 와닿지 않습니다.^^ 아무튼 새번역본은 구 번역본보다 나은 점이 있겠지요.

독일어에 문외한인 저로선 '고통'이 '슬픔'보다 독일어 단어의 의미에 더 가까우리란 걸 부정할 도린 없지만, '슬픔'이 이미 한국어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데 굳이 '고통'으로 바꾸어야할 이유를 이해하긴 힘들군요. '슬픔'이라는 단어는 '고통'이라는 한국어 단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독일어의 원의가 무엇이었던 간에 베르테르가 느낀 것은 단순한 '고통'이 아닌 '슬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10-08-28 12:51   좋아요 0 | URL
아, 책은 기억이 나는데, 저자가 '데이비드 보음'이라고 돼 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 말씀대로 슬픔이 고통보단 의미역이 넓지요. '고뇌'란 후보도 있는데, 이번 번역서는 '고통'을 골랐더군요. 차별화 전략이긴 한데, 번역에서도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는 읽어봐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윤기 선생은 담배 때문에 건강이 안 좋으시단 얘기는 전부터 있었어요...

2010-08-28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8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번에 밀란 쿤데라의 '서사적 바람둥이'를 다룬 걸 고려해 이번엔 '돈 후안 텍스트'의 원조 격인 티르소 데 몰리나의 <돈 후안>(을유문화사, 2010)을 골랐다. 이전에 두 차례 번역됐지만 현재는 구하기 어려운 책들이어서 최근 번듯하게 새로 번역돼 나온 것이 반갑기도 했다(한 가지 미스터리한 건 영역본까지 포함해서 이 티르소의 텍스트가 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무엇이 정본인지 헷갈린다). 내친 김에 바이런의 <돈 주안>까지 번역돼 나오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한겨레(10. 08. 28) 미래 저당잡힌 ‘사기꾼’ 돈 후안의 최후 

<소설의 발생>이란 저작으로 유명한 이언 와트의 유작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서양 문학사의 네 신화적 인물의 형상을 근대 개인주의의 시조로 조명하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파우스트와 돈키호테, 돈 후안과 함께 로빈슨 크루소가 그가 분석하는 네 인물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제외하면 모두 신화적 인물들로서 많은 작품군을 거느리고 있는데, 특히 돈 후안과 관련하여 와트는 17세기 스페인의 성직자 겸 극작가 티르소 데몰리나의 <돈 후안>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몰리에르의 <동 쥐앙>과 모차르트와 다 폰테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대중적으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조 격’ 작품은 티르소의 <돈 후안>이다.

 

작품명이 <돈 후안>이라고 줄여서 표기되지만 원제목은 좀 길다. 처음 번역됐을 때는 <세빌랴의 난봉꾼 돌부처에 맞아죽다>(1995)라고 의역된 제목이었고, 두번째 번역본은 <돈 후안-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2002)란 제목을 갖고 있었다. 모두 절판된 상태에서 나온 세번째 번역본은 <돈 후안-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2010·을유문화사)라고 읽어준다.

특이하게도 이 문학사적인 작품의 제목이 아직 고정돼 있지 않은데, 그래도 공통적인 건 원제의 ‘burlador’를 ‘난봉꾼’ 혹은 ‘유혹자’로 옮긴다는 점이다. 물론 주인공 돈 후안의 화려한 여성편력과 유혹술을 고려하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와트에 따르면 이 단어의 스페인어 의미에 더 가까운 건 ‘사기꾼’이다. 사람들을 속여 넘기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위인이 바로 돈 후안이라는 것이다. 반복해서 여인들을 속이고 배신하는 돈 후안의 유혹술은 실상 사기술이기도 하다.

‘스페인 최고의 사기꾼’ 돈 후안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Tan largo me lo fiais’이다. 초고본의 제목으로도 쓰인 문구라고 하니까 티르소판 <돈 후안>의 핵심 주제라고도 할 만하다. 우리말 번역본들은 “참으로 오래도록 나를 믿어주네” “오래도 두고 보시는구먼” “정말 오래도록 나를 봐주시는군” 등으로 옮겼다. 원문구는 상투적인 스페인어 표현이라고 하는데, “청산의 날은 아직 멀었다”란 뜻도 있다고 한다. ‘청산의 날’은 물론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돈 후안은 자신이 아직 젊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참회는 늙어서 해도 충분하다는 계산이다. “돈 후안은 원칙적으로 무법자가 아니며,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이지도 않다. 단지 자신의 경우에는 그 법칙이 유예될 수 있다고 믿을 뿐이다”라고 와트는 정리한다. 곧 돈 후안주의의 핵심은 현재의 젊음을 근거로 미래의 죽음과 심판을 간과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무분별한 여성편력은 그러한 태도의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하지만 티르소판 <돈 후안>에서 돈 후안의 판단은 들어맞지 않는다. 작품의 말미에서 코러스는 “이승에 살아 있는 동안/ 정말 오래도록 나를 봐주시는군!/ 이런 말 하는 자 저주 있을지니./ 그 말의 대가를 치르리라”라고 노래하며 결말을 암시하는데, 예언대로 돈 후안은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불의 심판을 받는다. 마지막 순간에 돈 후안은 고해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의 참회는 너무 늦었다. 결국 그는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으며 지옥에 떨어진다. 요즘 인기를 끄는 뮤지컬 <돈 주앙>의 ‘사랑스러운 매력남 돈 주앙’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교훈을 주는 ‘사기꾼 돈 후안’의 운명이다

10. 08. 27.  

P.S. '돈 후안 텍스트'에 대해서는 예전에 푸슈킨의 <석상손님>(<석상방문객>이라 번역돼 있다)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관심을 갖게 됐는데, 티르소 데 몰리나판 <돈 후안>의 매력은 돈 후안에 대한 단호한 응징에 있다. 시간과의 내기에서 아주 오만했던 돈 후안에겐 참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점이 후대 작가 호세 소리야 이 모랄의 <돈 후안 테노리오>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안다. 언젠가 돈 후안 텍스트에 대해서는 몇 작품 더 읽고 비교해고픈 욕심이 있다. 소개된 책 가운데 더 참고할 만한 것은 페터 한트케의 <돈 후안>(베가북스, 2005), 그리고 더글라스 에이브람스의소설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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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8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9 0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9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6회 서울와우북페스티벌(9월7일-12일)에 참여하게 됐다. 내가 맡은 건 '와우판타스틱서재'의 한 코너로 주로 곧 나올 두번째 책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 관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눌 예정이다. 행사 소개는 아래 포스터를 참고하시길. 

 

10.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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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을 읽을 자유' 표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04 00:01 
    두 번째 책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이 오늘 최종 교정을 거쳐서 인쇄소로 넘어갔다. 내가 더 거든 일이 없어서 수고한 편집진에는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책은 내주에 나오고 아마 와우북 행사에 오시는 분들은 처음 구경하시게 되지 않을까 싶다. 서점 배포는 그 다음주에 이뤄질 것 같다. 궁금해하실 만한 몇몇 분들을 위해서 책의 표지 이미지를 공개한다. 표지 디자인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 때와 같은 분이 맡아주셨다.
  2. "책꽃이 피었습니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0-04 23:41 
    지난달에 서울와우북페스티벌 행사의 일환으로 저자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마침 취재기사가 뜨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사진도 덤으로 챙겨놓고.    캠퍼스라이프(10. 10. 04) 책꽃이 피는 계절 '서울와우북페스티벌' 제6회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이 지난 9월 7일부터 12일까지 서울 홍대 거리와 주변 카페 등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은 책과 문화예술공연이 함께하고 책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
 
 
루체오페르 2010-08-2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두번째 저서가 출간되는군요! 축하합니다!^^

로쟈 2010-08-27 15: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쓰다 보니 분량이 찼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8-2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 드립니다.
<인문학 서재>도 좋았는데, 이 책도 기대 됩니다.
아직 알라딘엔 책이 뜨질 않았네요?

로쟈 2010-08-27 15:46   좋아요 0 | URL
근간이고요, 시중엔 아마 9월 셋째주부터 깔릴 것 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8-27 15:53   좋아요 0 | URL
네, 조금 더 기다리겠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8-2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로쟈님 축하드려요.^^

로쟈 2010-08-27 16:45   좋아요 0 | URL
감사.^^

헌내 2010-08-2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그러면 12일에 나오실 예정인가요?

로쟈 2010-08-27 17:19   좋아요 0 | URL
행사장엔 당연히 가지요.^^ 책은 그때까지 나올 예정이고요.

헌내 2010-08-27 17:23   좋아요 0 | URL
아... 갈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12일이 중간고사 2주 전이라... ^^;

로쟈 2010-08-27 21:56   좋아요 0 | URL
^^

2010-08-27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7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쉽싸리 2010-08-28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로써 환영합니다.

로쟈 2010-08-28 12: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반딧불이 2010-08-2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헉헉거리며 첫번째 책을 읽고 제대로 소화도 안된 상태인데 두번째 책이 나오네요.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8-28 12:48   좋아요 0 | URL
두번째 책은 대부분 발표한 글들 모음이어서 평이합니다.^^;

미지 2010-08-2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8-28 20: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6회

지난 주 이사로 원고들이 밀린 데다가 외부 일정들까지 겹쳐서 아주 긴 한 주를 보내고 있다. 점심을 먹고 이번주 마지막 원고에 들어가기 전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6회를 발췌해놓는다. 부산에 내려가기 전 어제 새벽에 쓴 글이다.   

<실재계 사막>의 서문에서 지젝이 자주 드는 예를 만날 수 있다(다큐영화 <지젝!>에도 인용된다). 구동독의 농담인데, 이런 것이다.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친구한테 이렇게 미리 일러둔다. “모든 우편물이 검열될 테니까 암호를 정하자. 나한테 받은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진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이야.” 친구는 한 달 후에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를 받게 된다. 시베리아의 친구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쾌적하며 만족스럽다고 적는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훌륭해. 가게에는 상품들이 가득하고, 음식이 풍부하며,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적절해. 영화관에서는 서양영화를 보여주고 관심을 끌 만한 아가씨도 많고…….” 그러고는 끝에 가서 한 가지를 덧붙인다. “단 하나 빨간 잉크만 없어.”

영화 <식스 센스> 마지막 장면의 반전이 연상되지 않으신지? “단 하나 빨간 잉크만 없어.”라는 마지막 멘트가 앞에 나오는 모든 메시지를 무효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란 잉크로 썼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실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빨간 잉크로 쓰였어야 한다는 걸 암시함으로써 이 노동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진실을 친구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한다. 설사 “빨간 잉크를 사용할 수 있었을지라도, 사용할 수 없다는 거짓말이 이런 특수한 검열상황에서 진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고 지젝은 덧붙인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효과적인 모체(matrix)이며,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검열상황에서, 곧 우리의 현실에서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우리의 부자유를 표명할 수 있는 바로 그 언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바로 이런 빨간 잉크의 결여가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든가,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등과 같은 현금의 갈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주요 용어들이 거짓된 용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상황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끔 허용하는 대신에 우리의 상황인식을 신비화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정확한 의미에서 우리의 ‘자유’ 그 자체는 우리의 좀더 내밀한 부자유를 가려버리고 지속시켜 준다.(<실재계 사막>, 25쪽)

우리에게서 ‘자유’란 말이 오히려 현실인식을 오도하고 ‘내밀한 부자유’를 은폐시켜준다는 것인데, 이러한 지적은 이미 G. K. 체스터턴(1874-1936)이 100년 전에 한 것이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 작가 체스터턴은 언론인이자 평론가, 그리고 기독교 변증가이기도 했다. 그는 <정통신앙(Orthodoxy)>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이단(Heretics)>이란 책과 짝을 이루고 있기에 <정통신앙>이라고 옮겼다. 우리말 번역본은 <오소독시>(이끌리오, 2003)이고, <실재계 사막>에서는 제목을 <정설>이라고 옮겼다).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를 지켜내는 가장 안전한 보호물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현대 스타일로 말해서, 노예의 마음의 해방이 노예해방을 가로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유롭게 되길 원하는지 어떤지 그에 대해 고민하라고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않을 것이다.”

첫 문장은 “We may say broadly that free thought is the best of all safeguards against freedom.”의 번역이라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against freedom”의 번역이란 걸 고려하면 “자유를 지켜내는”은 “자유를 막아내는”이라고 해야 맞다. 번역본 <오소독시>에서는 이 대목을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 자유를 방지하는 안전장치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제대로 옮겼다. 여기서의 역설은 물론 ‘자유사상’이 실제적인 ‘자유’의 장애물이라는 주장에 놓인다.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도록 하면 오히려 자신이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게 돼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노예로 하여금 자신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관해 고민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오소독시>, 204쪽)

 

여담을 덧붙이자면, ‘역설의 대가’로도 불리는 체스터턴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와 동시대인이었다. 체스터턴과 비교하자면 쇼는 ‘독설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이 거리에서 만났다. 버나드 쇼는 말라깽이였고 체스터턴은 한 덩치 하는 뚱보여서 서로 대조적이었다. 체스터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을 보면 지금 영국이 기근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군요.” 쇼가 응수했다. “그렇지. 그러나 그 원인은 자네 때문이 아니겠나?” 두 사람이 서로 만만찮은 호적수였을 법하다. 참고로, 국역본 <오소독시>는 현재 품절상태인데, 교정해서 읽을 대목이 있어서 막간에 지적해둔다. 서문에서 체스터턴이 자신의 책을 누구 읽어야 하는가를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꽃밭의 꽃이나 저작집 한 권 속의 문장들, 정치적 사건과 젊은 날의 고통이 어떤 질서 체계 속에 함께 모여, 어떻게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에 대한 어떤 확실한 신념을 낳았는지 알아가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그에 합당한 노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을 썼다. 그러므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18쪽)

체스터턴은 이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여 정통 기독교인이 되었는가를 보여주는데, 그런 과정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읽어봐도 좋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읽지 않겠다고? 인용문 후반부의 원문은 이렇다. “But there is in everything a reasonable division of labor. I have written the book, and nothing on earth would induce me to read it.” 번역문이 생략한 건 ‘분업(division of labor)’이란 말이다. 모든 일에는 합당한 분업이라는 게 있고, 자신은 책을 썼으니까 읽는 일에서는 면제된다는 논리는 거기에서 나온다. 체스터턴의 은근한 유머를 배여 있는 대목이다.

다시 자유의 문제로 돌아오면, 지젝은 체스터턴의 말이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스스로를 해체하고 의심하고 거리를 두려는 시대에 더없이 잘 들어맞는 게 아닐까라고 말한다. 가령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Don't think, obey!)”는 낡은 모토(이건 전형적인 군대식 모토인데)는 요즘 같으면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물론 아직도 그런 것이 통용되는, 강요되는 나라가 없지는 않다. 대낮에도 군대처럼 조인트 까고 까이는 나라 말이다). 이럴 때 사회적 예속상태를 안전하게 지속시킬 수 있는 방책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이런 건 언론의 자유가 뒷걸음치고 있는 한국보다는 미국사회에 더 적합한 지적이다). 물론 그런 예속에서의 탈피, 곧 자유를 위한 투쟁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도그마에 대한 참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체스터턴의 또 다른 역설적 주장이다. 정리하면, 체스터턴의 역설은 상호 연계적이며 양면적이다. (1)자유사상은 진정한 자유의 장애물이다. (2)진정한 자유는 도그마를 필요로 한다.

(...) 

10.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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