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

오늘 저녁에 수유너머N에서 발표하는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 발표문 가운데 일부를 옮겨놓는다. 혹 궁금해 하시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면 좋겠고, 나머지 부분은 발표 이후에 다시 정리해서 올려놓을 예정이다.  

 

“우리는 레닌을 반복하고 재장전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의 성좌에서 똑같은 추동력을 되살려내야 한다. 레닌으로의 변증법적 회귀는 "좋았던 옛 혁명기"를 향수 속에서 재연하는 것도,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옛 프로그램을 "새로운 조건"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 귀환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 - 더 정확히는 1914년의 파국으로 진보주의라는 긴 시기가 정치적 이념적으로 붕괴되고 난 뒤 - 이라는 조건 속에서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는 "레닌의" 제스처를 현재의 지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라는 개념을 자본주의의 오랜 평화로운 확장이 끝난 1914년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식이 생겨난 1990년 사이의 시간으로 정의한다. 레닌이 1914년에 한 것을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해야만 한다.”(<레닌 재장전>)

지젝이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레닌 재장전>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2001년에 독일에서 개최된 국제컨퍼런스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레닌의 복구”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그것이 영어본으로는 <Lenin Reloaded: Toward a Politics of Truth>(2007)로 묶여서 나왔습니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도 영어본 <Revolution at the Gates>(2002)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습니다. 9.11을 다룬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2001) 직후에 나온 것인데, 그의 다산성과 순발력에는 자주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1년엔 논문 한두 편 쓰는 게 버거운 한국 학계의 현실과는 대비됩니다. 물론 ‘괴물’과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하지만요). 올해만 하더라도 알랭 바디우와의 공저 <현재의 철학(Philosophy in the Present)>이 출간됐고,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기(Living in the End Times)>가 이번 봄에 나올 예정입니다(슬로베니아에서 출간한 책과 공저들까지 포함하면 대략 56번째 책입니다). 2001-2002년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지젝의 ‘레닌을 반복하기’론은 1991년 소비에트 몰락 이후 숙고되어 90년대 후반에는 이미 전체적인 윤곽이 잡힌 걸로 보입니다.   



<지젝이 만난 레닌>의 기본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던가요? “우리가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레닌주의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실질적인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273쪽)는 것입니다.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합의’만 유지된다면 아무리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이라 할지라도 관용/용인된다는 것입니다(똘레랑스는 언제나 강자의 윤리/논리죠. 한때의 프랑스 같은). “네 마음대로 말하고 써라. 단 지배적인 정치적 합의에 실제로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방해하지만 마라. 비판적 논제로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아니, 제발 그렇게 해 달라. 지국 생태계의 파국에 대한 예상. 인권 침해. 성 차별, 동성애 혐오, 반페미니즘. 멀리 떨어진 나라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 도시에서 점점 늘어나는 폭력. 제1세계와 제3세계, 부유한 사람들과 빈곤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 디지털화가 우리 일상생활에 가하는 강력한 충격...” 등등.  

예컨대, 한국사회에서 성문법적으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합의만 유지될 수 있다면 무얼 해도 괜찮다는 것이고, 그러한 ‘자유’에 실상은 어떤 ‘금지’가 기입돼 있다는 것이 요점입니다(우리는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조차도 제한받고 있는 우리의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 나열한 여러 주제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가 국가나 기업의 지원하에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죠. 지젝이 들고 있는 한 가지는 이런 것입니다. 인도에서 맥도널드가 감자 칩을 동물성(소의 지방에서 나온)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납니다. 맥도널드는 바로 사실을 시인하고 인도에서 파는 모든 감자 칩은 식물성 기름으로만 튀긴다고 약속합니다. 신속한 조치에 만족한 힌두교도는 다시금 감자 칩을 우적우적 씹기 시작하고요... 힌두교도가 자신의 전통을 방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근대성의 논리에 기입/포섭돼 있는 것이죠. 지젝이 보기에 맥도널드의 힌두교도 ‘존중’은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생색내기’입니다. 우리가 어인아이들을 진지하게 대하진 않지만 그들의 환상을 굳이 깨뜨리지 않으려고 무해한 습관들을 ‘존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외부인이 어떤 마을에 가서 그곳 관습들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서투르게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인종)차별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관용은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불에 태워 죽이는 힌두교의 전통에 이르면 쉽게 ‘불관용’으로 바뀝니다. 즉 ‘타자’가 ‘진짜 타자’가 아닌 경우에만 ‘관용’은 유지되며, 이것은 언제나 타자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함정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모든 타자의 향락에 무관심한 ‘성자적’ 태도, 보편적 대의를 믿는 ‘근본주의자들’의 태도입니다. 또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감정을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서사의 권리’는 “오직 동성애 흑인 여자만이 동성애 흑인 여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하고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귀결됩니다(“니들이 게맛을 알어?”). “이런 식으로 보편화할 수 없는 특수한 경험에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명백하게 보수적인 정치적 제스처”입니다(“구관이 명관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 “정치도 해본 놈이 한다” 등).  

반대로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입니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다. 자유주의적 정치적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모두 진리의 정치를 배척한다. 물론 민주주의는 소피스트들의 통치다. 오직 의견들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전체주의’ 체제 역시 진리의 닮은꼴만을 강요한다. 독단적인 ‘교시’의 기능은 통치자의 실용적 결정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지만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 정반대입니다.

이러한 근본주의는 위험한 ‘극단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요? 지젝은 ‘좌익 소아병’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상기시킵니다. 그가 보기에 정치적 극단주의(extremism) 혹은 과잉 근본주의(excessive radicalism)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전치(displacement) 현상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이자 제한으로, “끝까지 가는 것”의 거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코뱅이 급진적 테러에 의존한 것은 경제 질서의 근본적 기초를 흔들어놓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종의 히스테리적인 행동화(acting out)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정치적 올바름’의 이른바 ‘과잉’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또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의 현실적(경제적 등) 원인들을 흔들어놓는 것으로부터 후퇴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라는 것이 지젝의 반문입니다. ‘순수 정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됩니다. 그것이 정치 투쟁이 경제 영역을 참조해야만 제대로 독해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핵심적 통찰(정치경제학!)을 간과한다는 것입니다(지젝은 알랭 바디우가 ‘경제주의’와 결별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을 <국가와 혁명>의 레닌보다 더 좋아하는 것도 ‘순수 정치’를 주장하는 입장의 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에 대한 고려라고 봅니다.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는 것이죠.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으며 ‘레닌을 반복하라!’는 지젝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됩니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세계화(반지구화) 운동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실상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에만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이 될 수 있습니다(거꾸로 1990년 공산주의의 붕괴에 이어진 정치적 민주화는 사적 소유에 대한 광적인 충동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485쪽) 가령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다룬 영화들이 ‘반자본주의’를 표면상 내세우더라도 “대기업의 음모를 무너뜨리는 정직한 미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는 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의 견고한 중핵(민주주의) 자체는 제거할 수 없습니다. 지젝이 ‘진정한 마오주의자’라고 칭하는 알랭 바디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한편, 자본주의의 혁명적인 ‘탈영토화’ 효과는 마르크스도 매혹되었을 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무자비한 동력으로 인간 상호작용의 모든 안정된 전통적 형식을 무너뜨렸습니다(“모든 견고한 것은 녹아 허공으로 사라진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자체가 자본주의의 궁극적 장애라고 진단했지만, 한편으론 이 내재적 장애/적대는 그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는 그런 의미에서도 대단히 막강한 체제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진단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수세기 만에 국제 질서가 가장 극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는 출발점에 서 있다. 이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유럽 열강들이 처음으로 패권 질서를 형성했던 시절 이후에 가장 대대적인 변동이 될 수 있다. 이 변화는 불가항력적이다. 전염성도 강하다. 그것은 우리의 일, 은행계좌, 희망 그리고 건강까지, 우리 삶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번질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소련의 몰락, 금융위기처럼 단발성 변동이나 혁명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의 눈사태다.(...)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이 세계가 더 안정적이거나 이해하기 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혁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죠수아 쿠퍼 라모, <언싱커블 에이지>)

 

“정치적 자유화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시장경제 요소를 최대한 도입하는 중국식 발전모델”을 지칭하는 ‘베이징 컨센서스’를 주창한 컨설턴트 지식인의 주장입니다.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는 좌파들만 “혁명이 문 앞에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죠. 그보다 한 걸음 먼저 내달리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혁명, 혹은 혁명적 자본주의가 아닌가 합니다(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자신의 원리 자체가 끊임없는 자기 혁명인 질서를 혁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컨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는 ‘이건희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마누라와 자식도 바꾸는 것밖에 없지 않을까요? 지젝은 브라이언 싱어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회상장면을 한 예로 듭니다.  



주인공 카이저 소제가 집에 돌아와 보니 라이벌 갱들이 자기 아내와 작은 딸의 이마에 권총을 대고 협박을 합니다. 소제는 즉각 자기 아내와 딸을 쏩니다. 그리고 그는 라이벌 갱단 한 놈 한 놈을 그들의 부모, 자식, 친구들까지 모두 찾아내 죽여 버리겠다고 선포합니다. “강요된 선택의 상황에서 카이저 소제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죽임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죽이는 미치거나 불가능한 선택을 한다. 이런 행동(act)은 무력한 자기 공격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주체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상황의 좌표를 바꾸는 행동이다.”(<잃어버린 대의>, 258-9쪽) 이제 그러한 행동의 역사로서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를 잠시 훑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0.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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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24 13:01 
    어제 수유너머N에서 발표한 글을 마저 옮겨놓는다. '코뮌적' 공간에서 '레닌주의'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한,다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밤기차로 지방에 문상을 가야 했던 탓에(오늘 새벽차로 올라왔다) 뒷풀이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발표회는 여러모로 유익한 경험이었다. 아래의 글은 약간 조정한 걸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
  2.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풍경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5 23:55 
    <레닌 재장전>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다 보니 지난 2월 수유너머N에서 가졌던 화요토론회 자리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토론회 장면을 찍은 사진을 홈피에 올려놓았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던 참이어서 들어가봤다(http://nomadist.org/xe/galary/13552). 이런저런 근심으로 무거운 머리를 잠시 내려놓는다. 발표문은 이미 두 개의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10.
 
 
아포지 2010-02-2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표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로쟈 2010-02-24 18:43   좋아요 0 | URL
^^

비로그인 2010-02-2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지젝.. 카이저 소제를 그렇게 호명했군요..

수유너머.. 후끈한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도 기대 됩니다.

로쟈 2010-02-24 18:43   좋아요 0 | URL
기대에 부응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카스피 2010-02-2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주얼 서스펙트,반전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영화지요.근데 유주얼 서스펙트2란 영화가 나와서 기대했다가 벙 쩌버린 일인이었죠ㅡ.ㅜ

로쟈 2010-02-24 18:43   좋아요 0 | URL
제목 사기였던 것 같은데요...
 

한국사회에서 생전에 '신화'가 된 지식인은 많지 않은데, '리영희'는 그 중 대표적인 이름이다. 최근 그의 팔순을 기념하여 <리영희 프리즘>(사계절, 2010)이 출간되어 눈길을 끈다. 마침 공동필자들 가운데 두 사람의 대담 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12권짜리 <리영희 저작집>(한길사, 2006)까지는 넘보지 못하더라도 이 참에 한두 권 정도는 챙겨도 좋겠다. 개인적으론 아직 읽지 못한 <대화>(한길사, 2005)가 일순위이다.

경향신문(10. 02. 22) 경쟁에 지치고, 공통문화 없는 ‘모래알 청년세대’  

고은 시인이 ‘1970년대 대학생의 아버지’라고 썼던 리영희. 군부독재 정권이 ‘대학생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해 탄압했던 그를 프랑스 신문 르 몽드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리영희는 지난해 12월 팔순을 맞았지만 대학생 혹은 청년이라는 단어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리영희 선생 팔순을 기념해 최근 출간된 <리영희 프리즘>(사계절)은 리영희를 이 시대 청년을 위한 교양의 기초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다. 이 책은 고병권, 천정환, 김동춘, 이찬수, 오길영, 이대근, 안수찬, 은수미, 한윤형, 김현진 등 10명의 각 분야 ‘논객’이 리영희의 삶과 사상이 던진 생각거리를 각각 풀어냈다. 필자로 참여한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41)와 20대 논객 한윤형씨(27)가 경향신문사에서 만나 대학생으로 뭉뚱그려지는 이 시대 청년세대의 교양과 삶, 책읽기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청년세대의 교양
천정환(천) = 리영희 선생은 저희 세대만 해도 영향을 덜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리영희 프리즘> 기획서를 처음 받았을 때 한윤형씨가 필자에 들어 있어 흥미롭기도 했고 어떻게 볼지 궁금했습니다.

한윤형(한) = 리영희가 지금 20대에게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누군지 모른다가 정답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니까요. 제가 쓴 글도 그런 취지인데 그때 리영희에 해당했던 것이 지금의 20대에게는 왜 없는가, 어떤 조건이 바뀌었는가라고 묻는 것이 옳은 질문이 아닌가 합니다. 리영희 선생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세대에겐 꼭 리영희를 읽지 않더라도 공통의 무엇인가가 있었을 텐데, 지금 시대는 텍스트로서 그런 것은 없습니다.

천 = 저희 세대는 미리 짜여져 있는 커리큘럼을 가지고 정치에 관심을 갖고 의식화됐는데 지금은 같이 읽기라든지 세미나가 존재하지 않고 의식의 편차도 세대 안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20대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든지 옛날말로 지식인스러운 태도를 갖고자 할 때 어떤 경로로 인식을 넓혀가는지 궁금합니다.

한 = 저 같은 경우는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케이스인데, 인터넷을 별로 안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여기에서도 패턴이 좀 나뉘는 것 같습니다. 책을 많이 보는 쪽은 박노자의 영향력이 큰 것 같고, 인터넷 많이 하는 친구들은 진중권을 많이 보는 것 같아요. 강준만은 90년대 후반 학번에게 좀 더 영향력을 미쳤던 것 같고요. 어디까지나 정치에 관심 있는 친구들 얘깁니다만.

천 = 88만원 세대라는 규정이 있긴 하지만 대학생 내부의 격차가 그야말로 극심하잖아요? 세대로 규정 당했지만 하나로 묶일 수 있을까 회의적입니다. 같은 대학생이지만 고민하는 주제나 행동하는 양식이 다 다르기 때문이죠. 일테면 어떤 여학생이 소개팅을 할 때 서열상 어떤 위치 이하 대학의 남학생과는 절대 안 만나겠다고 말하더군요.

한 = 그 부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옛날에 비해 대학생 집단이 엄청나게 넓어졌습니다. 대학진학률이 86%에 달합니다.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90년대 초반만 해도 농촌 출신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만 해도 같은 수준의 텍스트를 읽고 섞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같은 학교, 같은 과라고 해도 계층이 다르면 서로 안 섞이고 사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수능을 비슷하게 쳐서 들어와도 그 안에서 이미 계층이 갈라지는 것이죠.

청년세대의 현실
천 = 결국 대학생들이 끝없이 경쟁하게 만드는, 원자화하는 구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로 압축되는 것 같습니다. 옛날 방식처럼 ‘100만 청년학도’라고 호명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겠지만 가능한 부분에서 공동체성 같은 것들을 회복하거나 대학생 공통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20대를 사회 전체의 변혁을 위해 복무하는 전사로 동일시하거나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겠죠. 그럼에도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 역시 등록금 문제입니다. 대학생들이 영어와 컴퓨터 등을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사교육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도 있죠. 이건 전체 사회의 문제이자 자기 자신의 문제이고 내 주머니에서 돈을 갈취해가는 문제인데 정치의식이 없더라도 같이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요.

한 = 설문조사를 보면 운동이 필요하다고 답하는 비율이 많은데 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들 합니다. 원자화가 완료된 상태에서 문제의식은 느끼는데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 거죠. 시간이 지나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 지금은 부모가 돈을 투자해서 대학만 가면 취직이 된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 때를 대비해서 삶의 문제가 곧 정치의 문제라는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천 = 작은 단위의 실천 같은 것이 중요하겠죠. 예를 들어 제가 몸담고 있는 학교에 ‘여학생자취연대’ 같은게 있더군요. 자취하는 여학생들이 같은 문제에 처해 있으니 같이 대응하자라는 취지인 것 같았습니다.

한 = 20대가 운동을 해서 당장 정권을 바꾸고 하는 것보다는 작은 것부터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20대 내부의 논쟁이 많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대끼리 서로 누가 옳네 그르네 하며 싸우면 20대가 보게 되고 힘이 세지는 것 아닌가 합니다.

청년세대의 책읽기
천 = 주제를 책읽기로 돌려보죠. 대학생들이 책을 덜보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물론 문화적 조건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많이 보니까요. 저희 세대에 책은 사회과학, 인문·교양서 이미지가 강한데 2000년대 들어 인문사회과학 시장이 굉장히 쪼그라들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독자가 재생산이 안된다는 것이고 그 핵심은 20대 독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자기계발로서의 교양이든 삶의 태도나 지향점으로서의 교양이든 교양을 다 포기했다거나 열망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 20대는 어릴 적부터 아이폰을 갖고 노는 초등학생하고는 다른 세대이므로 책읽기에 대한 강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엄청나게 바쁩니다. 경쟁하느라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거죠.

한 = 제가 아는 후배는 이공계를 다니는데 제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책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 쳐다봅니다. 자기 주변에 전공서적 이외에 다른 책을 보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바쁘니까요. 전공 외에도 영어, 컴퓨터, 중국어를 시간표를 짜놓고 공부합니다.

천 = 처절한거죠. 학원 5~6개씩 다니는 강남 초등학생들도 불쌍하지만 20대들도 자기 책임을 이행하느라 엄청난 압박에 시달립니다. 구조적인 문제라 어디서부터 뚫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대학 간 경쟁, 대학 내부의 경쟁이 너무 치열합니다. 대학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것을 해소하지 않으면 당분간 희망은 없다고 봅니다. 청년문화가 붕괴된다고들 하는데 청년이라는 말 자체가 20세기 들어서면서 처음 쓰인 것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청년문화가 아예 없는 시대, 청년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합니다. 

10. 02. 21.  

P.S. 대담의 초첨은 리영희보다는 리영희라는 프리즘으로 본 이 시대의 청년문화인 듯싶다. 천정환 교수와 같은 세대인 나도 대학에 들어왔을 때 이미 리영희란 이름을 자주 접하지 못했다. 그때는 이미 '리영회 신화 비판'이 오히려 힘을 얻기도 했다.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연이은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이 그러한 비판의 배경이 돼 주었다. 특히 문학비평가 이동하의 비판이 기억에 남는다(어지간한 문학평론집은 다 읽어보던 시절이었다). 리영희 선생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로부터 멀어지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균형을 잡자면 '신화 비판' 이전에 '신화'를 먼저 읽었어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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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1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케 2010-02-22 09:06   좋아요 0 | URL
제가 리영희 선생의 소위<전-논>을 읽던 87년 봄날이 생각납니다.

인문관 마당에는 목련이 잔뜩 피었다가 하염없이 지고
전두환이 호헌을 이야기하던 87년 봄.
나름 신산스러웠던 이십대가 시작되었던 그해 봄날.

물론 한 인간의 삶이 책 하나로 바뀌는건 아니지만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은..
참 예전 이야기네요.



로쟈 2010-02-24 18:40   좋아요 0 | URL
어케 저랑 비슷한 연배시네요.^^

비로그인 2010-02-22 16:55   좋아요 0 | URL
요기 위에분도 저와 같은 느낌이셨나봐요. 2007년 리영희님의 '대화'를 읽고는 제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면서 눈이 떠지는 경험을 했더랬습니다. 젊은이의 사상의 은사이시겠지만, 저에게 있어서도 사상의 은사인 셈이지요. 찜만 해두고 주문 전인데...빨리 주문해야겠습니다.

로쟈 2010-02-24 18:41   좋아요 0 | URL
필자들의 무료강좌도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23 17:45   좋아요 0 | URL
<전환시대의 논리>< 우성과 이성>에 한해 말하자면 70년대엔 대학생 수가 얼마 없었고,80년대에는 금서였던 기간이 많았으며,이미 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젊은이들이 그런 책을 안 읽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이 책들에는 외교나 군사에 관한 내용이 많은게 과연 대학에 막 들어온 신입생들이 그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좀 아리송합니다.신문에서도 외교나 군사 기사는 잘 안 보는데 말이죠.

로쟈 2010-02-24 18:42   좋아요 0 | URL
창비 영인본 외판원을 교정에서 자주 보던 시절이었죠...

페크pek0501 2010-02-24 11:09   좋아요 0 | URL
리영희님에 대한 비판이 한때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사고를 확 엎었다는 사실로 그는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분입니다. 우리의 관점을 흔들어 놓았으니...소설가 박완서님도 그의 저작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어요. 전 그래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알게 되었죠. 또 유시민님의 <청춘의 독서>에서도 그 분을 사상의 은사라고 썼지요.

어쨌든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 주고 사고의 영역을 넓혀 주시는 분은 소중합니다.

로쟈 2010-02-24 18:42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뒤에 리영희 '선생'이 붙지요.
 
후스-지셴린-정수일

작년에 세상을 떠난 중국의 석학 지셴린(계선림) 선생의 에세이집이 두 권 더 출간됐다. 며칠 전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인생>(멜론, 2010), <병상잡기>(뮤진트리,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우붕잡억>(미다스북스, 2004)이 품절상태라 현재 읽을 수 있는 건 <다 지나간다>(추수밭, 2009)까지 세  권이다. 노(老)석학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관련서평을 찾아서 옮겨놓는다.   

시사IN(10. 02 18) 아흔여덟 어르신이 말하는 인생이란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사는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전형적인 에세이집이다. 그러나 저자 지셴린(季羨林)은 결코 전형적이지 않다. 2009년 아흔여덟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중국인의 스승으로 널리 존경받았다. ‘나라의 큰 어르신’이라고나 할까. 독일에서 인도학과 고대 언어학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베이징 대학 교수,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위원, 베이징 대학 부총장 등을 지내면서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았다.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사는가? 지셴린은 답한다.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는 인생에 대한 질문의 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그의 대답은 확고하다. “인생에 정말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인간 사회가 앞으로 꾸준히 발전할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행운과 불행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행운과 불행은 서로 통한다. 행운이 찾아왔을 때는 불행이 올 것을 생각해 지나치게 기뻐하지 말라. 또 불행이 왔을 때는 행운이 찾아올 것을 생각해 지나치게 낙심하지 말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또한 장수의 비법이기도 하다.’ 문화대혁명 시기 지셴린은 오랜 기간 감금당한 상황에서 고대 산스크리트 서사시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이런 경험이 삶의 행·불행에 대한 달관과 평정심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책에 실린 글의 내용 대부분은 평범하다면 평범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말로도 보인다. 그러나 그 ‘아무나’가 다른 사람이 아닌 지셴린이기에 그 울림이 크고 깊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바른 삶의 태도로 장수한 어르신들은 그 연륜 자체가 요즘 말로 강한 ‘포스’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런 포스를 지닌 어르신을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고 보면, 평범한 이 책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을 바보로 여기는 진짜 바보는 요즘 들어 더욱 많아지고 있다. 스스로를 똑똑하다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도 바보가 되지 않는다.” “인생에서 화목한 가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니 세심하게 가꾸어야 한다. 가정이 화목해질 수 있는 방법은 정직과 인내뿐이다.” “다른 이의 존경을 받고 싶다면 당신에게 그럴 만한 자질이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그저 자기 나이만 믿고 유세를 부리면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의 글과 생각은 간단명료하고 솔직담백하다. 알싸한 고추냉이 맛이 아니라 담백한 나물 맛이다. 지셴린은 첫머리에 글의 주제, 소재, 때로는 일종의 결론까지 명료하게 제시하고 시작한다. “천하에 바보가 있을까? 있다.” “사람들은 모두 완벽한 인생을 추구한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뒤져보아도 100% 완벽한 인생이란 없다.” “두보는 그의 유명한 ‘곡강시’에서 ‘예로부터 일흔까지 사는 것은 드무노니’라고 읊었다.” 질문으로 시작하거나 확신에 찬 단정으로, 때로는 고전 인용으로 글의 방향을 확실하게 다잡고 시작하는 셈이다. 울림이 큰 글을 쓰는 데 효과적인 방안이라 하겠다.(표정훈_출판 평론가)  

10. 02. 21.   

P.S. 아흔 여덟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장수한 학자로 떠오르는 이는 일본 동양학의 태두로 불리는 모로하시 데쓰지(1883-1982)이다. <공자 노자 석가>란 책을 백세가 되던 해에 펴냈다는 석학이다. 원래 설 연휴 같은 때 펴보면 좋을 책들인데, 며칠 늦어지는 바람에 '뒷북'처럼 돼 버렸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석학 드미트리 리하초프에 대해서도 몇 자 적으려다가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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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1 0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21 16:17   좋아요 0 | URL
로쟈 님.저 노학자 말마따나 나이를 내세워 유세 부리는 못난 어른만 아니라면 인생의 후배들에게 존경은 못받아도 최소한 욕은 안 얻어먹을 겁니다.그러기 위해서 저는 하루빨리 우리나라 학교에서 선후배 없이 친구처럼 지내는 관행이 정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2-24 22:52   좋아요 0 | URL
존대법이 있는 한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비로그인 2010-02-24 22:47   좋아요 0 | URL
노자님 마지막 문장에 동의 1표를 보냅니다.
그나저나 로쟈님 자서전(?)을 기다리는 광팬 1인이 책이 언제 나오냐고 묻더군요.

로쟈 2010-02-24 22:53   좋아요 0 | URL
편집자도 굉장히 궁금해해요.^^;
 

며칠 전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의 하나는 앤 노튼의 <정치, 문화, 인간을 움직이는 95개 테제>(앨피, 2010)이다. 일종의 '문화연구 해설집'이라고 소개되는데, 강의준비를 겸하여 읽어보려고 한다. 역자의 책소개 기사가 올라왔기에 먼저 챙겨놓는다.

서울신문(10. 02. 20) 정치는 문화이고, 문화는 곧 정치다  

‘정치, 문화, 인간을 움직이는 95개 테제’(앤 노튼 지음, 오문석 옮김, 앨피 펴냄)라니. 그런 게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의문부터 들 것이다. ‘테제’라는 말부터가 정치적인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이 책은, 실제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인 저자가 미국정치학회에 제출한 글에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정치면 정치지, 왜 문화이고 인간이란 말까지 붙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면 일단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정치는 곧 문화이고, 문화는 곧 정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출판사에서 ‘인간’이란 인문학의 궁극적인 주제어를 첨가하긴 했지만, 원래 제목에도 정치(학)(politics)와 문화(culture)가 나란히 붙어 있다. 저자가 95개 테제 중 맨 처음에 제시한 것이 “문화는 매트릭스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매트릭스’는 어떠한 것도 고립된 채 존재하지 않는 의미와 관계의 ‘자궁’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문화를 어떤 상황의 가변적 요인, 즉 변수(變數)로 간주하는 것은 (의도적인) 무지의 산물이 된다.

왜 그러한가. 문화는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의 간격이며, 사람과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사이의 간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있는 것이다. 저자가 이처럼 문화와 사람, 곧 우리 삶과 세계를 연결짓는 까닭은, 문화를 자꾸 우리 삶, 특히 정치와 구분지어 생각하려는 모종의 시도들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그 시도들은 자꾸 문화를 우리 삶과 정치와 분리하여 생각하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시도를 획책하는 특정 집단을 불러내어 그들의 의도를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들은 바로 미국의 학계,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주류 학자들이다. 저자는 오늘날 전 세계의 학문계를 선도하는 미국의 주류 학계에 팽배해 있는 ‘사이비’ 문화 연구 행태를 버리고, ‘문화 그 자체’로 문화 연구의 방향을 바로잡으라고 말한다. 미국 학계에 만연한 ‘과학적 연구’에 대한 광적인 ‘미신’이 참된 학문적 ‘신앙’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과학적 연구’가 학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면죄부처럼 남용되는 경향까지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정치, 문화, 인간을 움직이는 95개 테제’(원제 ‘95 Theses on Politics, Cultrue & Method’)가 되었다. 1517년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맞서 비텐베르크 성 정문에 못 박은 ‘95개조 항의문’처럼, 이 책은 문화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재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는 단순한 기호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나’란 존재와 그 주변을 촘촘히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자, 삶의 전제 조건이다. 지금 내가 쓰는 글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모두 2010년/대한민국/서울 혹은 강원도/사무실 혹은 집이라는 문화적 맥락에 위치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대체 문화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이 이 책의 95개 테제에 담겨 있다. 여기서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95개 주장들은 테제, 곧 실천을 전제로 한 ‘운동 강령’이라는 점이다.(오문석 조선대 국문과 교수·번역자) 

10. 0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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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20 22:30   좋아요 0 | URL
95개 테제들이 실천을 전제로 한 '운동강령'이라니... 정말 읽고 싶어지는 군요.

미래 작가를 지향하는 사람들로서는 더욱이...

비로그인 2010-02-20 22:29   좋아요 0 | URL
95개 테제중 이런 것들이 눈에 띄어서 이상스레 반가웠습니다.

82. 거짓말과 오류에도 의미가 있다.
86. 문화에는 다양한 시공간의 차원이 있다.
95. 이론은 특수자를 전부 설명할 수 없다.
 

프레시안북에서 나오고 있는 '레볼루션' 시리즈의 2차분이 1년만에 출간됐다. <카스트로: 아바나선언>과 <토머스 제퍼슨: 독립선언문> 두 권. 쿠바혁명과 미국혁명을 대표하는 문건들로서 각각 타리크 알리와 마이클 하트가 해제를 썼다. <독립선언문>에 대해서는 이미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 가운데 <세계를 뒤흔든 독립선언서>(그린비, 2005)가 출간돼 있어서 같이 참조할 수 있다. <아바나 선언>은 처음 소개되는 듯싶지만, 카스트로 관련서는 제퍼슨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나와 있다. 겸사겸사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카스트로 : 아바나 선언
피델 카스트로 지음, 강문구 옮김, 타리크 알리 / 프레시안북 / 2010년 2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2010년 02월 20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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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미국이여- 카스트로 연설 모음집
피델 카스트로 지음, 강문구 옮김, 이창우 그림 / 산지니 / 2007년 3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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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마이라이프
피델 카스트로.이냐시오 라모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4월
32,000원 → 28,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00원(5% 적립)
2010년 02월 20일에 저장
절판
토머스 제퍼슨 : 독립선언문
토마스 제퍼슨 지음, 차태서 옮김, 마이클 하트 / 프레시안북 / 2010년 2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2010년 02월 20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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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0 1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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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0 2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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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1 09: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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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2010-02-20 19:33   좋아요 0 | URL
저는 원서의 표지가 너무 마음에 드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