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제국과 사고전서

서지학에 과문한지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중국 서지학의 고전도 출간됐다. 섭덕휘의 <서림청화>(푸른역사, 2011). '중국을 이끈 책의 문화사'란 부제가 좀더 다가가기 편하다('중국책'이라곤 하지만 당연히 조선의 지식인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에 대한 욕심이 다시 생긴다. 뤄슈바오의 <중국 책의 역사>(다른생각, 2008)도 배경이 돼줄 수 있겠다. 수년 전 중국여행 시 소주에서 한 장서가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책을 사모으느라 가산을 탕진한 집이었다) 이런 책들을 미리 읽었다면 느낌이 조금 달랐을 듯싶다. 뭐든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까...    

세계일보(11. 06. 18) 100년 전 중국의 서재를 엿보다

‘서림청화’는 청나라 말기 판본학·목록학의 대가 섭덕휘(葉德輝·1864~1927)의 저술로, 책 자체를 다룬 저작으로는 전무후무하다는 평을 듣는 중국 서지학의 고전이다. 고서의 판본에 사용되는 각종 용어와 명칭을 정리하고 그 근원을 추적했으며, 또한 역대 출판기관과 그곳에서 출판한 서적들을 시대별로 개괄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판본학, 목록학 분야의 고전이 된 ‘서림청화’는 이후 등장한 수많은 저술에서 중요하게 인용되고 있다. 중국 고서의 판본과 고대 중국의 출판문화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적당한 저술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옮긴이의 생각이다.

저자 섭덕휘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했고 장서에 취미가 있었다. 섭덕휘가 수집한 고서 중에는 송·원대의 판본도 있었지만, 명·청 이래의 정각본(精刻本)·정교본(精校本)·초인본(初印本) 및 초교본 등이 핵심이었다. 특히 청대 장서가들의 장서가 포함된 별집(別集)은 당대에 독보적이었는데, 이는 섭덕휘 장서만의 특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 시대 고문헌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옮긴이 박철상씨가 ‘서림청화’를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중국의 출판문화와 중국 고서에 대한 이해야말로 조선시대 우리 출판문화 이해의 첩경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중국 고서는 조선시대 출판물의 저본(底本)이었다. 조선시대 출판 방식의 하나는 중국에서 간행된 서적을 수입하여 활자나 목판으로 재간행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의 출판은 정보의 수입과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했기 때문에 중국과 교류를 시작한 이래 꾸준히 추진되었고, 간행된 서적도 상당수에 이른다. 중국 고서가 조선의 출판과 장서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이다.

조선과 중국 출판문화의 가장 큰 차이는 상업출판의 성행 여부에 있었다. 안정적인 수요층을 전제로 하는 상업출판은 광범위한 서적의 유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책이 다양해진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그러나 조선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빈약한 경제력과 주자학 위주의 사상적 흐름, 일부 계층에 한정된 서적 수요는 관판(官版) 중심의 출판 시스템을 유지하게 했고, 본격적인 상업출판의 출현을 지연시켰다. 이때 중국본의 수입은 조선 출판문화의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출판되지 않은 서적들을 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또한 중국 고서는 조선시대 출판의 공백을 보충해 주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출판 시스템이 붕괴되었던 시기에는 그 역할이 더욱 컸다.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문화적 파괴가 자행된 시기였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중요한 전적(典籍)의 상당수가 멸실되었고, 출판의 핵심이었던 동활자와 고려조부터 전해오던 왕실도서들이 약탈당하거나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출판을 하려고 해도 그 저본마저 구하기 어려운 출판 공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멸실된 전적들을 정비하기 위해 국내에 흩어져 있던 서적들을 수집하는 한편, 사행을 통해 명나라로부터 수입을 추진했다. 중국본의 수입은 빠른 시일 안에 부족한 서적을 보충하는 성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조선 지식인들의 장서구조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문학과 사상에까지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다양한 중국본을 대량으로 수장한 새로운 형태의 장서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이후 정조가 등극하면서 출판과 장서문화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난다. 정조가 청나라 문물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면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서적들을 대량으로 수입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본을 직접 수입해 지적 갈증을 채워나갔고, 청나라 문사들과 교유를 넓히면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서적들이 조선 지식인들의 서재에 넘쳐나게 되었다.(조정진기자) 

11.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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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덕끄덕 2011-06-27 03:05   좋아요 0 | URL
葉을 '섭'이라고 읽는 오류를 박철상씨도 범하고 있군요. 분명히 '葉'의 중국어 발음은 '엽'(ye, 중국음으로는 '예')과 '섭'(She, 중국음으로는 '셔') 두 가지입니다. '셔'(She)의 중국어 표기법이 대문자인 이유는 저 발음이 고유명사에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지명인 경우와, 고대인의 성씨인 경우가 그렇습니다. 한문만 공부한 사람들은 저 음을 무조건 '섭'이라고 읽습니다. 물론 이는 잘못이고요. 이런 오류는 중국 고대문헌에 '葉'자가 고유명사로 나온 경우, '섭'으로 발음한다는 주석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도 저 글자가 성씨나 지명으로 읽을 때 '엽'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달린 주석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특히 명청시대에 들어와서는 성씨의 경우도 저 음을 '예'(ye)라고 발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청대부터도 '葉'을 '섭'(She, 중국음으로는 '셔')이라고 발음하는 경우는 점차 사라졌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어떤 중국사람도 葉을 섭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없고요. 따라서 우리는 엽덕휘도 근대인이니, 당연히 섭덕휘가 아닌 엽덕휘라고 발음해야 합니다. 중국사람들이 중국어로 저 인물을 언급할 때 '셔더후이'(She Dehui)가 아니라 '예더후이'(Ye Dehui)라고 발음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덕택에 유명해진 중국의 권법가 '엽문'(葉問)이라든가, 대만출신의 유명한 영화배우 엽천문(葉蒨文)을 영화계에서는 모두 '엽'씨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 경우가 타당해 보입니다.
사소한 문제이겠지만, 국내 한학계 상당수의 학자들이 습관적으로 葉氏를 무조건 섭씨라고 읽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지적해봤습니다.^^

로쟈 2011-06-27 10:5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중국어는 너무 어려운 듯해요.^^;
 

사회적 관심이 반값 등록금에 쏠려 있는 시점이 '기회'인 것인지 정부, 여당이 다시금 인천공항 지분 매각 방침을 들고 나왔다. '공공성'에 대한 관심이나 고려가 백지(백치) 상태라는 걸 말해준다(사실은 '마지막 큰 건'이란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인지 따지는 선대인 씨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세금혁명당이 왜 필요한지 한번 더 상기하게 된다.  

   

한겨레(11. 06. 23) 인천공항공사, 지금 왜 파나?

정부·여당이 인천공항공사 지분 매각을 위한 법 개정안을 6월 국회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이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공공기관의 민영화나 지분 매각 문제는 개별 공공기관의 성격 및 역할, 존속 필요성 등에 따라 달리 판단해야 한다. 또한 시기와 구체적 방법론도 면밀히 따져보아야 한다.

그런데 현 정부의 인천공항공사 지분 매각 방침은 문제가 적지 않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외환위기 직후 부족한 외화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적자 공기업과 시대적 소명을 다한 공기업들을 위주로 민영화를 추진했다. 특히 포항제철이나 한국중공업처럼 더는 공기업 형태를 유지할 필요성이 없는 공공기관들이 민영화됐다. 이에 비춰 보면 현 정부가 왜 굳이 현시점에서 인천공항공사 지분 49%를 민간에 매각하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인천공항에는 1990년 이래 공항·도로·철도·대교 등에 모두 18조원가량이 투입됐다. 그 결과 인천공항공사의 2010년 말 기준 자산가치는 7조8096억원에 이른다. 자본이 꾸준히 확충되는 가운데 부채는 3조1877억원으로, 2년 만에 9000억원 이상 줄어들었다. 또한 2007년 이후 총수익이 크게 늘어난 가운데 2010년 3242억원에 이르는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차입금이 불어나는 다른 공기업들과 달리 인천공항공사의 차입금은 2004년 3조3000억원 수준에서 2010년에는 2조1980억원 수준으로 꾸준히 줄어들었다. 이미 4~5년 전부터 상당히 우수한 경영실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경영 개선이나 자금 확보 등의 명분으로 인천공항공사를 다급하게 매각할 이유가 없다. 또한 인천공항이 안보 측면뿐만 아니라 신종플루 등 각종 국제전염병을 차단하기 위한 검역 시스템 측면에서도 공공성이 매우 강한 시설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공공성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양호한 재무구조와 뛰어난 경영실적을 올리고 있는 인천공항공사 지분을 서둘러 매각할 이유는 없다. 이런 식으로는 군사정권 시절처럼 특정 민간사업자들에 알짜배기 사업을 넘겨주는 특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인천공항공사를 대통령 친인척이 대표로 있는 외국계 자산운용회사에 헐값에 매각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편 인천공항공사의 지분을 매각하면 정부는 수조원대의 세외수입을 올리게 된다. 2010년 예산안의 국토해양부 소관 교통시설 특별회계 가운데 공항 계정에는 유가증권 매각대금으로 약 5909억원이 계상돼 있었다. 이는 정부가 계획한 인천공항공사 지분 10%의 매각대금으로 추정됐다. 정부가 모두 49%의 지분을 비슷한 가격에 판다면 2조8954억원의 세외수입을 얻게 될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인천공항공사의 자산가치나 영업실적 등을 고려할 때 이 정도면 헐값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헐값에 넘긴 돈으로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거나 재정적자 부담으로 할 수 없었던 다른 사업에 매각 수입을 투입할 수 있다. 결국 급증한 재정적자를 건실한 국가 재산을 팔아 메우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현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24개 주요 매각 추진 공공기관의 매각 예상액만 보수적으로 잡아도 19조원에 육박한다.

결국 현 정부의 인천공항공사 매각 추진 방침은 특혜와 재정적자 땜질용 헐값 매각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현 정부가 인천공항공사 지분 매각을 강행한다면 다음 정권에서 반드시 상응하는 책임 추궁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선대인_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 

11. 06. 24.  

P.S. 인천국제공항공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공동발의한 의원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이미 인터넷상에 '인천공항 팔아먹는 법안 발의한 36명의 매국노 명단'으로  공개돼 있다).  

강길부, 강명순, 김낙성, 김성조, 김정훈, 김태환, 김학송, 나성린, 박상은, 박준선, 배영식, 백성운, 송광호, 신영수, 안상수, 안홍준, 유정복, 윤영, 이경재, 이두아, 이사철, 이인제, 이학재, 이한성, 장광근, 전여옥, 정의화, 정진섭, 정태근, 조전혁, 조진래, 조진형, 최병국, 허천, 현경병, 황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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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의 강의 '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여행: 프랑스 현대철학편'이 마무리됐다. 이름이 길지만 그냥 간단히 '로쟈와 함께 읽는 구조주의'였다. 한겨레의 강의는 7월을 건너뛰고 8월에 5주간 다시 진행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도스토예프스키 커넥션'을 주제로 잡았다. 작년 여름의 '도스토예프스키 깊이 읽기'를 염두에 둔 강의다. 공식적으론 '로쟈의 러시아 문학 여행: 도스토예프스키 커넥션'이다. 오늘 커리큘럼이 공지된 김에 좀 일찍 포스팅을 해놓는다. 강의시간은 8월 한달간 매주 화요일 저녁 19:30-21:30이다. 담당 큐레이터의 소개는 이렇다. 

로쟈 이현우 박사는 "톨스토이와 함께 국내 독자들에게도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이지만,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독자들이 의외로 많다"고 했다. 이번 강의에서 러시아 문학, 그 중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루게 된 이유인 셈이다.
이 강좌는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관련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해 가며 함께 읽는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알베르 카뮈, 미시마 유키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은 한국문학까지 두루두루 살피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알베르 카뮈의 <전락>을 함께 펼쳐놓고 두 작품간의 연관성을 살피게 된다. 한 전기작가의 말을 빌면, 두 작품은 모두 '(가장) 비참한, 그러나 낄낄거리며 조소하는 자포자기로 끝나는 유일한 소설'이라고 한다. 

1. 8월 2일_ 도스토예프스키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스토예프스키 <분신> vs 나보코프 <절망> 



2. 8월 9일_ 도스토예프스키와 알베르 카뮈(1)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vs 카뮈 <전락> 



3. 8월 16일_ 도스토예프스키와 알베르 카뮈(2)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vs 카뮈 <페스트>  



4. 8월 23일_ 도스토예프스키와 미시마 유키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vs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5. 8월 30일_ 도스토예프스키와 한국문학   

11.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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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7-28 22:24 
    푸른역사 아카데미의 제안을 받고 8월중 네 차례에 걸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매주 금요일 오후 4시-6시에 이루어지며 장소는 푸른역사 아카데미다(http://blog.daum.net/purunacademy/71). 강의 개요와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일독에 대한 욕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안내를 보태자면 내주부터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커넥션' 강
 
 
 
마야코프스키와 파스테르나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과 단편소설을 묶은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글방, 2011)이 재출간됐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선생의 번역으로 오래전에 나왔지만 절판됐던 책이다(안정효판 <의사 지바고>도 나는 갖고 있다). 예전에 몇차례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기도 한데, 반가운 마음에 파스테르나크에 관한 강의록의 일부를 붙여놓는다. 세계문학전집판의 새로운 <닥터 지바고>도 곧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야코프스키의 자살은 어떤 상징적 의미도 갖습니다. 1930년에 자살했는데,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도 29년에 심장마비로 죽거든요.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연도입니다. 29년에 스탈린 식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고, 작가동맹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그런 식으로 체제 자체가 변하게 됩니다. 사회주의 체제로. 28년까지는 NEP(신경제정책)기였어요. <닥터 지바고>에서는 지바고가 상당히 모호한 시기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사회주의 혁명 해놓고 자본주의 경제하고 있으니까.   

NEP라는 거는 상당히 어리둥절한 시기였어요. 물런 레닌을 비롯한 고위층에서는 전략적인 후퇴를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지만 지바고가 보기에는 혁명을 위해서 4년 동안이나 내전을 하고 서로 피를 흘렸는데 도로 자본주의하니까 상당히 어리둥절하고 넌센스죠. 그게 28년에 끝나고 29년부터 본격적인 사회주의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시기에 지바고가 죽는 걸로 설정한 건 상당히 의도적인 거죠. 주요 인물들이 지바고, 라라, 파샤. 지바고와 파샤는 라라가 사랑했던 두 남자이고, 지바고가 사랑했던 두 여자는 토냐와 라라, 그리고 나중에 같이 사는 마리나도 있죠. 라라의 경우도 코마로프스키가 있기는 하죠. 그래서 각각 세 남자, 세 여자하고 관계를 갖는데, 여기선  세 인물, 지바고, 라라, 파샤의 운명이 이 작품 메시지하고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파샤가 죽고, 토냐는 추방당하고, 지바고가 죽고, 라라는 수용소에서 죽는 걸로 돼 있어요. 수용소에서 죽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죽었다는 거를 알 수가 없습니다. 추정만 할 수 있는 죽음이고, 스탈린 시기에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죽음이기도 합니다. 파샤는 러시아 혁명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파샤 안티포프가 스텔리코프라는 가명을 쓰죠. 저격수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그의 죽음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가 유형에 대한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생각을 알 수가 있고, 죽은 다음 무얼 남기는가, 이게 중요합니다.  

지바고 같은 경우에는 죽은 다음에 작품이 바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지바고의 생애만 다룬다고 하면 죽음이 모든 거의 종언이라고 하면 죽는 데서 끝나겠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아요. 지바고의 무엇인가가 연속됩니다. 지바고의 어떤 삶이 부활해요. 죽음이란 게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건데 그게 지바고가 남긴 시입니다. 이작품의 주제 중의 하나는 혁명에 대한 생각도 중요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 삶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생각 이게 더 중요한 주제를 구성합니다. 그 주제에 비하면 혁명은 차라리 부수적인 걸로 혁명이라든가 시대의 격변이라는 건 오히려 사소한 걸로 그려져요. 마치 지바고가 유리아틴에서 시를 쓰는데 밤에 바깥에서 늑대들이 울부짖는 것처럼, 그 정도. 시대의 소음, 시대의 울부짖음이라는 게 그 늑대들로 상징화되는데, 그런 게 중요한 거는 아니죠. 늑대들이 중요한 건 아니고 중요한 건 지바고가 쓰는 시에요. 파스테르나크가 가졌던 기본적인 생각들을 그런 장면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1929년은 스탈린이 ‘대전환의 해’라 부른 연도이자,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침묵이 시작되는 해이다. 많은 작가들에게 침묵이 강요됩니다. 그리고 침묵할 수 없었던 작가는 마야코프스키처럼 자살하기도 하고, 그리고 침묵이냐 자살이냐 하는 선택에서 우리의 목청 마야코프스키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 그 전에 1925년에는 ‘농민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자살이 있었다. 

이것도 뭔가 상징적이에요. 그러니까 시인들은 뭔가를 상징해 주기 위해서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1921년에 알렉산드르 블로크가 죽고, 이어서 적당한 간격으로 죽어요. 예세닌이 25년에 마야코프스키가 30년에. 그렇게 해서 러시아 혁명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시인들이 각자의 죽음을 통해서 뭔가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이 있습니다. 이게 요새는 구하기가 어렵게 됐는데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고 번역된 작품이에요. 원제는 그냥 ‘안전통행증’ 책인데 '어느 시인의 죽음'으로 의역된 제목이고 거기서 '어느 시인'이 가리키는 게 마야코프스키입니다. 자기 자서전에서 마야코프스키에 대해서 많이 쓰고 있어가지고 국내 소개될 때는 마치 마야코프스키에 대한 책처럼 돼버렸어요... 

11.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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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좌파와 우파 아나키스트의 만남

단짝인 남자 둘이 나오는 영화가 '버디무비'라면 두 남자의 고백을 담은 책은 '버디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난주에 나온 버디북은 악셀 하케와  조반니 디 로렌초의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푸른지식, 2011)이다. 이름에서 풍기지만 독일 남자 둘이다(사실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보다 더 겸손한 표현은 '나는 가끔 성자일 때가 있다'이지만, 사람들은 전자가 더 겸손한 걸로 착각한다). 프랑스 남자 둘이 나오는 버디북 <공공의 적들>(프로네시스, 2010)을 떠올리게 한다. 남자 둘이 아닌 남녀가 등장하는 책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정희와 유시민의 <미래의 진보>(민중의소리, 2011)도 같이. 악셀 하케와 조반니 디 로렌초가 제일 먼저 묻는 질문도 '나에게 정치란 무엇인가'이니 억지스런 연상은 아니다.  

  

한겨레(11. 06. 18) 우리의 투쟁은 젊은 날의 치기였을까

25년 친구인 두 남자가 작심하고 만났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50대 독일 남자들인 유명 작가 악셀 하케와 독일 유명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 편집장 조반니 디 로렌초다. 두 사람은 평생 남들에게 이야기 못했던 마음속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이 꽁꽁 마음속에 숨겨놓고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이야기 못했던 부끄러움은 끔찍하고 커다란 잘못이 아니라 그들의 ‘속물근성’이었다.

학창 시절 새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회운동을 했고, 부조리한 현실을 글로 고발해왔던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변해간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묵인하며 살아왔음을 고해성사하듯 까발려 이 책을 썼다. 학생운동을 했으면서도 군대 신고식에선 신참에게 맥주에 담배가루를 넣어 마시게 했고, 환경을 걱정하면서도 가족이 많아 더 큰 차를 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나이가 들자 투표할 때 돈을 많이 버는 중산층한테 유리한 후보에게 표를 찍었던 등이 그들이 고백한 치부들이다.  

고백을 통해 두 사람은 비로소 외면해왔던 자기 모습을 주체적으로 대면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진짜 영웅은 어떤 사람이며 자신들의 가치관은 어떤 것인지 다시 돌아본다. ‘배울 점이 있는 한 누구나 영웅’이며, 설령 내 마음의 영웅을 잃더라도 삶의 지표가 될 ‘모범’은 결코 잃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고백록은 끝을 맺는다. 마지막에 자기를 돌아보는 점검표도 곁들였다. ‘나의 투쟁은 젊은 날의 치기였을까’ ‘나는 정치에 대한 뚜렷한 소신이 있는가’ ‘나는 삶의 즐거움보다 물질적 성공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등등.(구본준 기자) 

11. 06. 20.  

P.S.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중문화 작가라는 하케의 책은 국내에도 여럿 소개돼 있지만 '인기'란 말이 무색하게도 대부분 절판된 상태다. 독일 역시 먼 나라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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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1-06-20 22:05   좋아요 0 | URL
솔직히 요즘 하는 것 보면 이정희 유시민 사진을 보자마자 거부감이 드는군요.

로쟈 2011-06-21 07:34   좋아요 0 | URL
요즘 욕을 많이 먹는군요...

2011-06-21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1 0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