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6월 모스크바 통신에 올린 글에서 두 시인/작가 '마야코프스크와 파스테르나크'에 관련된 대목을 다시 옮겨놓고 이미지들을 덧붙여둔다. 직접적인 관련이 되는 책은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자서전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글방, 1977)인데, 지금은 품절된 듯. 책의 원제는 '안전통행증'이며, 안정효 역에서 제목의 '어느 시인의 죽음'이 가리키는 것은 후배였던 마야코프스키(1893-1930)의 죽음이다.
요즘 들어 드물게 비가 오지 않았지만, 5월 이후 러시아는 비가 오는 날이 잦다. 그래 봐야 대개는 한두 시간 오고 말지만(2분씩 내리기도 한다), 어제 오후에는 꽤 내렸다. 3일 연휴라는 게 기분상 갑갑해서 외출을 했다가 그 비를 쫄딱 맞았다. 하지만, 여름비라고는 해도 (장마비가 아닌) 보슬비 정도이기 때문에 맞아 봐야 옷이 흠뻑 젖거나 하는 건 아니다. 산책길에 좀 맞으면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지는 그런 비다. 물론 작정하고 비를 맞을 일은 없고, 날씨가 하도 변덕스럽기 때문에 준비 없이 나갔다가 비를 맞곤 하는 것이다. 토요일도 그랬다.
오후에 바람도 쐴 겸 <루뱐까>역에 있는 서점 <비블리오-글로부스>에 오랜만에 갔지만(교통이 제일 편한 서점이기도 해서), 뜻밖에도 연휴 3일 동안 휴점이었다. 한국의 대형서점이라면 턱도 없는 일이겠지만, 아직 자본주의에 ‘미숙한’ 러시아에서 아쉬운 건 손님이지 가게 주인들이 아니다(왼쪽이 서점 입구이고, 오른쪽 이미지는 서점의 로고).
다행인 건, 이전에 두 번 그냥 지나쳤던 <마야코프스키 박물관>을 둘러볼 시간이 있었다는 것. 휴일이라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데, 내가 들른 시간이 4시 15분쯤이었다. 이 박물관은 전철역에서 <비블리오-글로부스>서점쪽으로 가다가 박물관 표지가 있는 곳에서 골목 방향으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건물로 들어서면, 복도에는 미술과 문학 등의 관련서적들이 판매용으로 비치돼 있고, 책상 앞에 앉은 한 아줌마가 입장료를 받는다. 나는 ‘학생’이기 때문에 6루블(25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혁명의 목청’이자 미래파의 기수였던, 러시아 최대의 아방가르드 시인의 박물관답게 전시장 또한 아방가르드적이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의 공간 전체가 마치 미술대학의 창고처럼 각종 철골 구조물로 가득 차 있었고, 시인과 관련된 원고나 포스터 등의 각종 자료들이 사이사이에 배치돼 있었는바, 전시장 자체가 일종의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물론 시인이 남긴 퇴색한 원고들처럼 이 아방가르드 ‘설치미술’ 또한 세월의 두께만큼 쌓이는 시간의 먼지마저 털어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지만. 전시장을 층마다 지키고 있는 점잖은 할머니들도 주름살은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아래는 마야코프스키가 그린 수많은 선전 포스터들 중 하나.
30분 정도 둘러본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유언장과 시인의 죽음을 특집으로 다룬 1930년 4월 17일자 <리쩨라뚜르나야 가졔따>(‘문학신문’)이었다. ‘모두에게’라고 제목을 단 이 ‘공식적인’ 유언장은 1930년 4월 12일에 작성된 것인데, 일반노트보다 좀 큰 갱지에 연필로 큼직하게, 그리고 급하게 써 내려간 것이다. 나는 ‘모두에게’라는 제목 때문에 금방 그의 유언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다소 놀란 것은 이 유언장이 아무런 구별이나 표식 없이 다른 자료들과 섞여서 전시돼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의 ‘마지막 말’에 대한 대우로서는 좀 소홀한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이 유언은 내 기억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3권짜리 선집에 번역돼 있다(절판된 책이지만). 그리고, 아마도 각각 ‘역사비평사’와 ‘까치’에서 번역 출간된, <나의 혁명, 나의 노래>와 <마야코프스키>, 두 권의 전기에도 내용이 소개돼 있을 것이다. 그 유언의 시작은 이렇다: “나의 죽음에 대해서 (*나 자신 외에) 아무도 책망하지 마시길, 그리고 바라건대, 크게 떠들어대지도 마시길. 고인은 그런 걸 무척이나 싫어한답니다. 어머니, 누이들, 그리고 동지들, 용서하시길 - 이게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다른 사람들에겐 권하지 않겠소), 나에겐 다른 출구가 없다오. 릴랴 - 나를 사랑해주오.”(릴랴는 그의 연인이자 오십 브릭의 아내였던 릴랴 브릭을 말한다. 아래 사진.)
그리고 다른 페이지에 씌어진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책상 위에 있는 2,000루블은 국고로 환수해주시오. 나머지는 기즈에서 받으시길. V. M.”(‘기즈’는 ‘국립출판사’의 약칭이고, V.M.은 그의 서명이다.) 이 유언을 쓴 이틀 후인 1930년 4월 14일에 시인 마야코프스키는 권총자살하며, 그의 유언장은 다음날인 15일 <프라우다>지에 최초로 공개된다. 그리고, 17일(목)자 <문학신문>은 거의 전 지면을 갑작스런 자살로 전 러시아를 경악하게 한 마야코프스키 특집으로 꾸미고 있다. 아래는 자살한 시인의 유해.
사실, 마야코프스키의 자살은 한 시인의 죽음 이상의 시대적 상징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1920년대 말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행기로서, 정치적으론 레닌의 사망(1924) 이후 스탈린 체제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경제적으론 레닌이 ‘자본주의로의 전략적 후퇴’라고 부른 신경제정책(NEP) 시기(1921-1928)가 마감됨과 함께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준비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NEP 시기에 허용되었던 문학/예술 분야에서의 창작과 비판의 자유가 차츰 위축되고 검열은 강화된다. 이러한 과정은 스탈린주의라는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의해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대체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보리스 그로이스의 <아방가르드와 현대성> 참조). 그러한 과정이 명시적으로 일단락되는 것은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 선포됨으로써이지만, 그 기점은 1920년대 말(1927-1930)이다.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 유리 지바고가 거리에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는 1929년은 이러한 정치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1929년은 스탈린이 ‘대전환의 해’라 부른 년도이자,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침묵이 시작되는 해이다. 그리고, 침묵이냐, 자살이냐는 선택에서 우리의 ‘목청’ 마야코프스키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그보다 먼저 1925년에는 ‘농민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자살이 있었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은 바로 이 시인 마야코프스키와 그의 죽음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어느 시인의 죽음’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자서전의 원제목은 ‘안전통행증’이다. 영어로는 ‘Safe Conduct’). 아래는 국역본에 들어 있는 사진으로 서 있는 사람이 파스테르나크이고, 나비 넥타이를 맨 '빡빡이'가 마야코프스키이다.
<닥터 지바고>로 195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지만(예기치 않은 수상 스캔들로 마음 고생을 하다가 그는 1960년에 ‘일찍’ 죽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무엇보다도 ‘시인’이다(그의 초기시는 ‘미래파’로 분류된다). 유리 지바고가 남긴 시편들은(간혹 이걸 ‘부록’이라고 빼먹는 엉터리 번역서들도 있는데), <닥터 지바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지만, 파스테르나크의 대표작들이기도 하다. 지바고는 소설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서정적 분신이다. 그래서, 언젠가 <닥터 지바고>의 서평에서도 쓴 바 있지만,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시로 쓴 소설’이라면, <닥터 지바고>는 ‘소설로 쓴 시’이다(그러니 이걸 ‘소설미학’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금서이던 <닥터 지바고>가 러시아에서 공식 출판되는 것은 1988년쯤이다. 그래서 1985년에 저명한 러시아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쵸프의 편집하에 출간된 (내 생각엔) 최초의 파스테르나크 전집(2권짜리)에는 <닥터 지바고>가 빠져 있다(한편, 지난달에는 TV에서도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가 방송되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영화속 ‘라라의 테마’는 한국의 애청자가 꼽는 영화음악 베스트에 항상 들어가곤 했는데,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여기에 와서 구한 책인데, 파스테르나크의 전기에 대한 가장 상세한 자료는 그의 아들 예브게니 파스테르나크가 펴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전기를 위한 자료들>(1989>이다. 68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고, 50,000부가 발행되었다. 아래 왼쪽 사진이 아버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이고, 오른쪽은 아들이자 유산 관리인인 예브게니 파스테르나크이다.
특이한 것은 1957년에 파스테르나크가 올가 이빈스카야와 찍은 사진도 책에 들어 있다는 것. 내 기억엔 그녀가 ‘라라’의 모델이고, 아들 예브게니는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그녀를 무척 싫어했다(나는 갖고 있지 않지만, 국내에는 이빈스카야가 쓴 책도 번역 출간됐었다). 이 ‘무뚝뚝한’ 예브게니와의 인터뷰는 한국일보 김성우 기자의 러시아명작기행(매주 한 차례 한 면 전체에 연재됐던 이 기행문을 나는 모두 스크랩했었다), <백화나무 숲에서>에 실려 있다(기억에 의존한 거라서 제목이 확실치는 않다. 제3문학사에서 나왔던가?). 아래 사진은 라라의 모델 올가 이빈스카야. 국내엔 자서전 <올가 이빈스카야>(동흥문화사, 1992)가 출간됐었다. 아래는 만년의 두 사람.
파스테르나크의 저작권은 아마도 예브게니가 갖고 있는 모양으로 최근에 출간되는 <닥터 지바고>에는 그의 ‘소감’이 실려 있다. 어쨌든 러시아문학은 그렇게, ‘최초의 망명작가’ 푸슈킨에서부터 ‘내적 망명작가’ 파스테르나크까지이다(거기에 물론 ‘진짜로’ 망명한 소설가 나보코프와 망명당한 시인 브로드스키가 동급으로 덧붙여질 수 있다). 참고로, 소비에트 문학(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학)은 고리키에서부터 솔제니친까지이다(<밑바닥에서> 시작한 소비에트 문학은 <수용소군도>에서 끝(장)난다)…
하여간에, 파스테르나크가 시인으로서 후배인 마야코프스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옆길로 갔다. 그래서 제목은 '마야코프스키와 파스테르나크'로 해둔다. 두 시인에게 건배를!..
06. 03. 07.
P.S. 내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군. 오늘도 수고하시는 세계 여성들께도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