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코프스키와 파스테르나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과 단편소설을 묶은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글방, 2011)이 재출간됐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선생의 번역으로 오래전에 나왔지만 절판됐던 책이다(안정효판 <의사 지바고>도 나는 갖고 있다). 예전에 몇차례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기도 한데, 반가운 마음에 파스테르나크에 관한 강의록의 일부를 붙여놓는다. 세계문학전집판의 새로운 <닥터 지바고>도 곧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야코프스키의 자살은 어떤 상징적 의미도 갖습니다. 1930년에 자살했는데,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도 29년에 심장마비로 죽거든요.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연도입니다. 29년에 스탈린 식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고, 작가동맹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그런 식으로 체제 자체가 변하게 됩니다. 사회주의 체제로. 28년까지는 NEP(신경제정책)기였어요. <닥터 지바고>에서는 지바고가 상당히 모호한 시기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사회주의 혁명 해놓고 자본주의 경제하고 있으니까.   

NEP라는 거는 상당히 어리둥절한 시기였어요. 물런 레닌을 비롯한 고위층에서는 전략적인 후퇴를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지만 지바고가 보기에는 혁명을 위해서 4년 동안이나 내전을 하고 서로 피를 흘렸는데 도로 자본주의하니까 상당히 어리둥절하고 넌센스죠. 그게 28년에 끝나고 29년부터 본격적인 사회주의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시기에 지바고가 죽는 걸로 설정한 건 상당히 의도적인 거죠. 주요 인물들이 지바고, 라라, 파샤. 지바고와 파샤는 라라가 사랑했던 두 남자이고, 지바고가 사랑했던 두 여자는 토냐와 라라, 그리고 나중에 같이 사는 마리나도 있죠. 라라의 경우도 코마로프스키가 있기는 하죠. 그래서 각각 세 남자, 세 여자하고 관계를 갖는데, 여기선  세 인물, 지바고, 라라, 파샤의 운명이 이 작품 메시지하고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파샤가 죽고, 토냐는 추방당하고, 지바고가 죽고, 라라는 수용소에서 죽는 걸로 돼 있어요. 수용소에서 죽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죽었다는 거를 알 수가 없습니다. 추정만 할 수 있는 죽음이고, 스탈린 시기에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죽음이기도 합니다. 파샤는 러시아 혁명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파샤 안티포프가 스텔리코프라는 가명을 쓰죠. 저격수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그의 죽음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가 유형에 대한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생각을 알 수가 있고, 죽은 다음 무얼 남기는가, 이게 중요합니다.  

지바고 같은 경우에는 죽은 다음에 작품이 바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지바고의 생애만 다룬다고 하면 죽음이 모든 거의 종언이라고 하면 죽는 데서 끝나겠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아요. 지바고의 무엇인가가 연속됩니다. 지바고의 어떤 삶이 부활해요. 죽음이란 게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건데 그게 지바고가 남긴 시입니다. 이작품의 주제 중의 하나는 혁명에 대한 생각도 중요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 삶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생각 이게 더 중요한 주제를 구성합니다. 그 주제에 비하면 혁명은 차라리 부수적인 걸로 혁명이라든가 시대의 격변이라는 건 오히려 사소한 걸로 그려져요. 마치 지바고가 유리아틴에서 시를 쓰는데 밤에 바깥에서 늑대들이 울부짖는 것처럼, 그 정도. 시대의 소음, 시대의 울부짖음이라는 게 그 늑대들로 상징화되는데, 그런 게 중요한 거는 아니죠. 늑대들이 중요한 건 아니고 중요한 건 지바고가 쓰는 시에요. 파스테르나크가 가졌던 기본적인 생각들을 그런 장면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1929년은 스탈린이 ‘대전환의 해’라 부른 연도이자,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침묵이 시작되는 해이다. 많은 작가들에게 침묵이 강요됩니다. 그리고 침묵할 수 없었던 작가는 마야코프스키처럼 자살하기도 하고, 그리고 침묵이냐 자살이냐 하는 선택에서 우리의 목청 마야코프스키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 그 전에 1925년에는 ‘농민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자살이 있었다. 

이것도 뭔가 상징적이에요. 그러니까 시인들은 뭔가를 상징해 주기 위해서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1921년에 알렉산드르 블로크가 죽고, 이어서 적당한 간격으로 죽어요. 예세닌이 25년에 마야코프스키가 30년에. 그렇게 해서 러시아 혁명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시인들이 각자의 죽음을 통해서 뭔가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이 있습니다. 이게 요새는 구하기가 어렵게 됐는데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고 번역된 작품이에요. 원제는 그냥 ‘안전통행증’ 책인데 '어느 시인의 죽음'으로 의역된 제목이고 거기서 '어느 시인'이 가리키는 게 마야코프스키입니다. 자기 자서전에서 마야코프스키에 대해서 많이 쓰고 있어가지고 국내 소개될 때는 마치 마야코프스키에 대한 책처럼 돼버렸어요... 

11.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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