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출판계에서는2007년부터 명나라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지만(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35130.html) 아직은 우리와 무관한 듯싶다. 대신에 이번주에 나온 중국사 관련서 두 권은 모두 청나라를 다루고 있다. 일본학자 이시바시 다카오의 <대청제국 1616-1799>(휴머니스트, 2009)와 미국학자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가 그 두 권의 책이다('사고전서'란 말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다). 중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놓치기 어려운 책들이겠다...  

 
왼쪽부터 청조 1대 황제 누르하치, 2대 홍타이지, 3대 순치제, 4대 강희제, 5대 옹정제, 6대 건륭제의 초상.

국제신문(09. 01. 31) 淸 … 다민족국가 중국의 원형    

'만주족이 세운 일개 소국이 만족할 줄 모르는 혁신력에 의지하여 차츰 거대한 중화 세계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힘은 장성 안쪽 세계의 테두리를 아득히 넘어 몽골 세계와 티베트 세계를 통합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중앙아시아로까지 진출하여 이슬람의 위구르 세계도 수중에 넣었다. 청조의 그 만족할 줄 모르는 혁신력이란 도대체 어떠한 역사의 변화를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한국어판 서문 중) 



대청제국의 저자 이시바시 다카오(일본 고쿠시칸대 교수)의 서문은 명쾌하다. 역사학자로서 저자의 과녘은 두 가지. 중국을 정복할 당시 인구 100만에도 미치지 못한 만주족이 1억 명에 가까운 한족을 280년 동안 통치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대청제국은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구축하면서 팽창하고 발전했다. 그 원동력을 혁신력을 중심으로 밝히고자 하는 것이 하나다. 

또 한가지는 대청제국이 태생할 때부터 본질적으로 '복합 다민족 국가'였음을 밝혀내면서 이러한 체제의 형성·운영원리가 현대의 중국에까지 이어져오고 있음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을 알려면 청나라라는 뿌리부터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현대 중국은 1980년대 공포한 헌법에서 복합적인 다민족 국가임을 명기했고, 이런 다민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고민에서 동북공정 등의 대처법이 나온 것인데 이러한 행위와 인식의 뿌리가 대청제국 시절에 형성됐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저자는 논증한다. 



일련의 혁신과정. 이것이 청나라 발전과 팽창의 원동력이다. 1616년 아이신국(후금 또는 만주국)을 세우면서 청 태조가 된 누르하치는 25세에 거병할 때만 해도 일족에서조차 후원받지 못하는 고립무원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속한 여진족에게 숙명처럼 따라붙던 가난에 맞서려고 한족의 농경사회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선대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몽골과 한족을 끌어들이고 내부적으로는 군사제도인 팔기제도를 창시하면서 여진족의 전통적 부족제를 혁신한다. 

누르하치에게 권력이 집중되던 상황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보수파는 그가 죽자 힘없는 권력승계순위 최하위 홍타이지를 2대 황제로 선택해 재기를 노린다. '보수의 반격이었던 것이다.'(121쪽) 홍타이지는 '굴욕감을 참고 분권통치 체제에 안주하는 편안한 길'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집권화에 모든 것을 건다. 홍타이지는 '한족의 정치·경제·군사력과 몽골족 기마병의 기동력'을 새 기반으로 삼고 혁신을 단행해 결국 대청국 건국을 선포한다.

뒤를 이은 순치제는 유목민 전통을 깨고 중화적 방식인 환관제도까지 도입했고 이후 강희·옹정제는 관료적 중앙집권제를 강행하는 두뇌와 강단으로 지배구조를 반석에 올린다. 청나라 전성기의 절정을 장식한 건륭제는 60년 치세 동안 오늘날의 중국보다 훨씬 넓었던 강역을 개척했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혁신-보수의 대립 과정에서 시행된 일련의 혁신 과정을 통해 중국은 '만리장성 이남 한족의 나라'에서 몽골 위구르 티베트 등을 포괄하는 복합적 다민족국가가 되었고 이에 걸맞은 이데올로기와 인식을 형성했다는 점. 이렇게 놓고 보면 청나라를 단순히 한족 왕조를 대체한 정복왕조로 보는 기존 시각은 '천만의 말씀'이다. 대청제국은 이전 '중화제국' 시스템을 해체하고 새로운 복합적 다민족국가로서 중국의 뿌리를 놓았으며 오늘에 이른 것이 된다. 이 점이 이 책의 새로운 점이다. 청나라 팽창기 판도는 성과 자치구로 이뤄진 현대 중국의 시스템과 대비시키면 거의 일치한다.

후반부에 가면 잘 나가던 대청제국이 건륭제 이후 쇠퇴기로 접어든 원인도 고찰한다. 그 중 한가지는 '혁신은 가고 보수만 남았다'는 것. 새가 좌우 날개로 날듯 혁신·보수가 짝을 이뤄야 국가도 활력을 잃지 않는다는 교훈을 여기서 도출하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에서 실용을 배우는 경영서적이나 CEO론이 아닐까 싶을 수 있겠지만 '대청제국'은 역사연구서로서 정통 인문학 책이다. 그럼에도 '혁신력' 또는 '혁신과 보수'라는, 친숙하고도 현명하게 대처해내기 힘든 함수를 푸는 데 영감을 준다.(조봉권 기자) 



문화일보(09. 01.31) 18세기말 中의 세계최대 출판 프로젝트

1772년 2월 중국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총독·순무·학정 등 각 성(省)과 현(縣)의 관리들에게 그들이 관장하는 모든 서고(書庫)에 보관된 희귀본과 귀중본들을 조사하는 한편, 이들을 필사해 그 성과물을 베이징(北京)으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건륭제는 개인 장서가들에게도 그들이 소장한 귀중본을 자발적으로 베이징에 보낼 것을 촉구했다.

1773년 3월에는 각지에서 보내온 책들을 수납하고 내용을 평가하기 위한 행정기구가 베이징에 창설됐고 사업을 위한 실무진도 구성됐다. 당시 조정이나 학술계의 명사로서 이 기구에 참여한 찬수관·분교관·등록관만도 300명이 넘었다. 22년에 걸쳐 완성되고 수정된 최종 결과물은 청 제국에 남아 있던 1만680종의 책을 경전·역사서·철학서·문학서의 사부(四部), 즉 사고(四庫)로 나눠 그에 대한 해제를 작성한 목록과 그중 3593종을 3만6000여 책으로 다시 필사한 방대한 총서였다.  

Cover: The Emperor's Four Treasures 

미 워싱턴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61)가 자신의 하버드대 박사 논문을 기초로 완성한 책은 ‘사고전서’의 편찬 과정을 통해 건륭제 시대의 학자와 국가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고전서:건륭 연간의 학자와 국가’가 원제인 책에서 저자는 ‘사고전서’가 건륭제가 벌인 검열과 탄압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기존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고전서’의 편찬이 당시의 학자와 국가, 건륭황제의 이해가 모두 반영된 복합적 행위의 성과물임을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사고전서’가 편찬될 당시인 1770년대부터 1790년대까지의 청대 사상가들과 그들을 후원한 고위 정치가들의 삶을 다루는 한편, ‘사고전서’의 편찬 과정에서 벌어지는 한학파(漢學派·고증학자)와송학파(宋學派·성리학자)들 사이의 첨예한 논쟁과 갈등, 대립과 반목을 섬세하게 복원해냈다.

사실 ‘사고전서’ 편찬 사업은 1770년대 후반과 1780년대 초반 조정에서 진행된 검열운동 때문에 20세기 내내 비판을 받아왔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 검열운동을 통해 2400여종 이상의 책들이 파괴됐고 400∼500여종의 책은 공식적 명령에 의해 개정됐다. 이는 ‘사고전서’ 편찬이 서지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과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책을 수집하고, 수정하고, 검열하는 과정이 더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청대 고증학이 만주족 통치자들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전하게 된 수동적 학문이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사고전서’ 편찬의 주요 목적은 검열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사고전서’ 검열이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고 검열의 진행 과정도 학자와 국가의 상호반응에 의해 이뤄진 복합적인 결과일 뿐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전대미문 또는 세계 최대의 출판 프로젝트로 평가되는 ‘사고전서’ 편찬사업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절대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최영창기자) 

09. 01. 31.  

 

P.S. 청나라의 치세를 다룬 책으로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이산, 2001), <반역의 책: 옹정제와 사상통제>(이산, 2004), 그리고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이산, 2001)가 떠오른다. 이번에 나온 책들과 같이 묶어서 통독하면 대청제국에 대한 그림이 조금더 자세하게 그려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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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을 이끈 책의 문화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25 09:58 
    서지학에 과문한지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중국 서지학의 고전도 출간됐다. 섭덕휘의<서림청화>(푸른역사, 2011). '중국을 이끈 책의 문화사'란 부제가좀더 다가가기 편하다('중국책'이라곤 하지만 당연히 조선의 지식인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에 대한 욕심이 다시 생긴다. 뤄슈바오의 <중국 책의 역사>(다른생각, 2008)도 배경이돼줄 수 있겠다. 수년 전 중국여행 시 소주
 
 
노이에자이트 2009-01-31 22:29   좋아요 0 | URL
만주 문자로 된 수많은 서적들이 잠자고 있다고 합니다.만주어 해독자가 이제 없어졌다는 말도 있구요.엄청난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이젠 만주족도 없어진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네요.한때 만주문자를 공부해서 청나라 역사서 연구하러 중국에 가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다 헛된 꿈이 되었습니다.

로쟈 2009-02-01 00:37   좋아요 0 | URL
중국에서마저 연구자가 없다는 건 의외인데요. 한데, 한국에선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있으셨나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1 01:33   좋아요 0 | URL
70년대에 만주문자 해독할 줄 아는 사람이 중국에 몇 명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하더라구요.만주족도 만주어를 모르니까요.예전 서울대 외교학과 이용희 씨가 만주어를 해독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분도 고인이 된지 10년이 넘었구요.
제가 먹고 사는 일에 관해선...비밀주의를 내세우기로 했습니다.

로쟈 2009-02-01 10:47   좋아요 0 | URL
동양사 전공자들 가운데에서도 없다면 좀 의외이면서 나름 심각한 문제겠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1 15:09   좋아요 0 | URL
소수민족의 언어가 사라지면서 닥치는 문제점 중의 하나가 그런 것 같아요.한때 대제국을 건설한 만주족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몰락할 수 있는지 참 서글퍼요.

로쟈 2009-02-01 21:39   좋아요 0 | URL
몰락이야 자연사에 속할 수 있지만 그걸 기억/보존하는 건 다른 문제일 텐데 좀 유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