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을 참조할 필요가 있어서 들춰보다가 관련기사를 검색해봤다. 두달 전 기사 가운데 흥미를 끄는 것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가라타니가 인용하고 있는 저작들이 대부분 일역본이며, 이것은 자국 번역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의 표현이라는 지적이다. 그의 책을 즐겨 읽는 독자에겐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지만, 우리 학계/비평계의 현실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일이기도 해서 음미해볼 여지를 남긴다.  

조선일보(09. 06. 01) [일사일언] 번역에 대한 자신감 

한국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3~4년 전 '근대문학은 끝났다'라는, 듣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황망한 선언을 앞세워 한국에 상륙한 가라타니는 문단에 그야말로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일부는 그를 따라 오늘의 한국문학에 무차별한 사망 선고를 내렸고, 또 다른 이는 문학에 대한 그의 이해 폭이 협소하다면서 반감을 피력하였다. 가라타니에 대한 한때의 뜨거운 열기는 이제 어느 정도 가셨지만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언급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톺아보면, 최소한 그가 일본이라는 국경을 넘어 세계적 지식인으로 발돋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얼마 전 그를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알리는 데 공헌한 주저 《트랜스크리틱》을 다시 읽다가 새삼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칸트와 마르크스 등 서양 철학자들을 활용하는 대목에서 버젓이 일본어 번역판을 인용하고 있음을 각주로 알렸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원어(原語)에 대한 강박은 일반의 상식을 초월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번역서에 의존하여 글을 읽는데도, 특정 대목을 자신의 글에 인용할 때는 가능한 한 원서의 내용을 참조했다는 사실을 알리려 애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라타니는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무엇보다도 자국어에 대한 애정과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150여년 번역사에 대한 깊은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가라타니에 호의적이지 않은 나 자신도, 자국어에 대한 그의 저 도저한 자부심 앞에서는 난연(赧然)해질 수밖에 없다.(강동호_문학평론가) 

09. 08. 08.   

P.S.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자신감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다. 당장 <트랜스크리틱>(힌길사, 2005)만 하더라도 이런저런 번역상의 오류를 적잖게 포함하고 있다. 예전에 '자세히 읽기'를 시도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는데(밥벌이가 아니잖은가!) 그때 마저 지적하지 못한 대목도 다시 보니 아직 많다. 가라타니의 대표적인 저작인 만큼 다시 손을 보아 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다(현재 품절상태다).  

개인적으론 지젝의 <시차적 관점>과 함께 필독해볼 만한 '우리시대의 고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최근엔 한 설문에 추천도 했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젊은 대학(원)생이라면 이 두 권을 독파함으로써 사고의 높이를 두 단계 이상 높여놓을 수 있을 것이다. 도전해보기를 권장해마지 않는다. 물론 가급적이면 원서와 같이 읽는 게 좋겠다. 그게 원문에 대한 독해력도 키워줄 뿐더러 다른 책들을 읽을 때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런 오류들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해준다.   

가령, "칸트가 보편성을 일반성과 엄격하게 구별한 것은 코페르니쿠스 이후이 근대과학이 초래한 문제에서 나왔다. 그것은 베이컨(Roger Bacon, 1214-94)으로 대표되는 실증 귀납의 중시와는 다르다."(83쪽)에서는 무엇이 잘못됐을까?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을 엉뚱하게도 13세기 사람 '로저 베이컨'으로 탈바꿈시켜놓은 것이 오류다. 일어판의 오류인지 한국어본 편집자의 부주의인지는 모르겠으나 애꿎게도 독자만 골탕을 먹는다. 

이보다 더 문제적인 건 물론 오역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확실히 하나의 주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주관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주관과의 합의 또는 공동 주관성이 보편성을 가져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85쪽)라는 대목 같은 것. 영어본으론 이렇다. "Critique of Pure Reason begins by describing a single subjectivity, to be sure. This does not mean, however, that Kant neglected the existence of the multitude of other subjects. Rather, he did not even dream that univesality could be attained by an agreement among plural subjectivities, that is, by intersubjectivity."(43쪽)  

요즘 우리의 번역관행을 보면 'subjectivity'는 '주관'보다는 '주체성'이라고 옮겨질 가능성이 높은데, 가라타니의 용례를 따라서 뒷부분(뒷문장)을 다시 옮기면 "실상 칸트는 보편성이 복수의 주관들 간의 합의를 통해서, 곧 상호주관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으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을 뿐이다." 정도다. 일어본과 영어본의 편차를 감안하더라도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옮긴 건 가장 안 좋은 종류의 오역이다. 이렇게 되면 '번역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실제로는 번역서에 의존하여 글을 읽는데도, 특정 대목을 자신의 글에 인용할 때는 가능한 한 원서의 내용을 참조했다는 사실을 알리려 애쓰는" 허황한 작태가 관행적인 현실이 된다. 번역자들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마가편'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번역에 흠이나 잡자는 것이 아니다. 번역본만 인용하면서 한국어로도 <트랜스크리틱> 같은 이론적 저작이 쓰여질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무망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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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08-08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아쇠를 누가 당기냐가 관건일 거 같아요. 번역을 학위논문으로 인정해주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듯요. <번역비평>을 적어도 계간으로만 바꿔도 좀 활기가 생기지 않을까요?

로쟈 2009-08-09 12:10   좋아요 0 | URL
계간지가 나온다고 사정이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팔리는 책은 아니니까요) 문제의식을 확산시킬 순 있을 듯해요. 먹거리나 읽을거리나 마찬가지라고 하면 좀더 관심을 두어볼 만한데요...

2009-08-08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9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PhEAV 2009-08-09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사학위 논문 정도라면 정말 번역으로 대체될만 할텐데요...

로쟈 2009-08-09 12:07   좋아요 0 | URL
분야에 따라선 박사논문도 번역과 주해로 대체될 수 있겠죠. 미국 등지에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걸로 압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8-09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탕화면은 어느 나라 경치인가요? 멋지네요.

Sati 2009-08-09 20:47   좋아요 0 | URL
당나귀 등에 책 한 짐 싣고 저기 들어가서 한 십 년 썩으면 행복하겠어요 :)

펠릭스 2009-08-10 06:26   좋아요 0 | URL
그리스의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에는 책이 많이 있는데요.
줄타고 올라가서 희귀본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로쟈 2009-08-11 09:36   좋아요 0 | URL
네, 그리스의 수도원이랍니다...

베토벤 2009-08-0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3~4년 전 '근대문학은 끝났다'라는, 듣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황망한 선언을 앞세워 한국에 상륙한 가라타니는 문단에 그야말로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

태클을 걸자면 '상륙'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위의 문장도 그닥 맘에 들지 않네요. 가라타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문장과 이후의 문장들로 인해 '근대문학의 종언' 이전의 작업들이 그닥 제대로 취급받지 못한 인상을 줄 수 있을 듯 합니다. 제가 과민한 건가요.

로쟈 2009-08-11 09:37   좋아요 0 | URL
네, '상륙'은 그보다 먼저죠...

2009-08-10 0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1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프심 2009-08-14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랜스크리틱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는데, 직장인이 읽기에는 조금 부담감이 있더군요. 더불어서, 고진이 언급하는 각 책들을 잘 읽어보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각 사상가들을 가로지르면서 언급하는 대목과 앞서의 서평에서도 언급했듯이, 번역서만으로도 자신의 사상의 토대를 이룰수 있는 환경이 무척 부럽네요. 조금씩 조금씩 읽어가고 있지만,215페이지의 키에르케고르의 인용구 중 「사랑의 기술」은 조금 의아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역서로는 국역으로「사랑의 역사」가 있고 영문으로는 「Work of Love」는 있어도 이것이 일본의 번역본인지 잘모르겠네요. 아마존과 일본아마존을 조금 살펴보았는데 그런 책은 없는 것 같은데..

로쟈 2009-08-14 21:50   좋아요 0 | URL
네, <사랑의 기술>도 오역입니다. 말씀대로, <사랑의 역사>가 맞습니다...
 

눈길을 끄는 역사서들이 여러 권 출간됐고 피터 싱어의 새 책도 나왔지만 개인적으로 이번주의 '발견'은 종교서 두 권이다. 이미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은 <순교와 포르노그래피>(지식의날개, 2009)와 함께 필립 젠킨스의 <신의 미래>(도마의길, 2009)가 그것이다. 원제는 'The Next Christendom'(알라딘 책소개에는 'Nest'라고 오타가 났다). '신의 미래'라고 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기독교의 미래', '기독교세계의 미래'라고 해야겠다. '종교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란 부제도 적합해보이진 않는다. 인구변화가 기독교를 어떻게 바꾸어놓을까, 란 것이 주된 착안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관심을 끄는 '종교학' 서적이다... 

 

세계일보(09. 08,. 08) 다시 낮은 곳으로… 神들의 대이동 

“믿음의 수준, 교인 출석률, 성직자의 수 등에서 유럽 기독교는 크게 쇠퇴하고 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이자 종교사학자인 필립 젠킨스(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석좌교수)는 ‘신의 미래-종교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에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줬다. 젠킨스는 지금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못한, 기독교가 인구통계학상 유럽에서 남반구로 대이동하는 현상을 깨닫고 남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 등 남반부에서 현저하게 확장된 기독교를 조명함과 동시에 9·11사태 이후 첨예화된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충돌과 미래를 예측했다. 

 

젠킨스는 조만간 다가올 2050년쯤에는 라틴계를 제외한 백인 기독교인이 세계 기독인구 30억명 가운데 5분의 1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50년의 기독교는 지난 1300년 동안 유럽을 주축으로 성장한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며 남반구 가난한 유색 인종의 신앙이 부유한 북반구 기존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을 뒤엎는다는 것이다.

1950년 세계에서 기독교 국가를 꼽을 때 영국·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가 앞줄을 차지했다. 하지만 2050년이 되면 이 나라들은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1900년, 유럽에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3분의 2가 살았지만 지금은 4분의 1 미만이고, 2050년까지 이 비율은 5분의 1 미만으로 급속히 떨어질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에 대해서도 젠킨스는 그동안 기독교계 일부에서 이슬람 교세의 확장으로 내심 이슬람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언급하며, 앞으로는 이슬람의 성장을 당연시하면서 그에 못지않게 기독교 역시 성장하여 교인들의 수가 역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말한다. 물론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에서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기독교인의 수적 증가에만 그치지 않고 정치에도 반영되어 아랍의 이슬람 국가들과 유사한 기독교 신정국가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또한 민주주의를 탈피해 신정체제를 추구하는 남반구 국가들의 새로운 물결은 이슬람 세력과 새로운 양상으로 맞설 것이라고 경고한다.

기독교와 무슬림의 갈등은 사실상 예전에 존재했던 기독교 세계와 앞으로 다가올 기독교 세계의 공통점이 될 것이다. 기독교에 못지않게 무슬림 세계도 다가오는 시대에 무슬림 인구의 증가로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것이다. 중동과 인도네시아 등 일부 지역에 고립됐던 무슬림 인구의 3분의 2가 세계 각지로 점차 이동한다. 무슬림과 기독교 세계는 각각 확장하여 서로 이웃할 것이며, 같은 나라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일도 적잖이 생길 것이다.

또한 최근 나이지리아·인도네시아·수단·필리핀의 예에서 보듯 인구의 성장은 과열된 종교 간의 경쟁, 개종자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 세속법을 통해서 종교적 도덕법을 강요하려는 경쟁적인 노력 등 부작용을 동반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종교적으로 신실하다는 것은 늘 광신도로 변해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남반구에서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그 역사가 길다. 식민지 정권 아래서 교회는 국가의 지원을 후하게 받았고 그 대가로 온건한 정치적 입장을 표방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교회는 나라가 해방된 뒤에도 이전의 특혜를 계속 누렸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정치적 갈등이 터져 나오는 동안에도 가톨릭교회는 전통 지배 권력의 편에 섰고 그들의 압제를 묵인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제3세계 교회들은 차츰 개혁 또는 혁명의 동인이 되었다.

개신교 신도들은 교회가 독일 나치에 맞서지 못한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인종차별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면서 급진주의자가 되었다. 이 사상은 1960년대 후기부터 급진 좌파의 정치명분을 자주 옹호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안에 뿌리를 단단히 내렸다. 1970년대 WCC는 아프리카 해방운동에 무기를 댔다. 해방신학이 라틴아메리카에 자리 잡고 1970년대 절정을 이루다가 1978년 보수주의자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이 되면서 중앙아메리카에서 기독교 좌파 운동이 마감된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에서는 기독교와 독립 투쟁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독립국가의 1세대 정치 지도자 대다수는 미션스쿨 출신의 기독교였고 이 선구자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교인이었다. 탄자니아 수장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급진적 민족주의자였지만 가장 좋은 것, 곧 교회와 생활양식을 아프리카에 가져온 선교사를 칭송하며 기독교 사상과 언어를 풍부하게 차용해서 급진적 아프리카 사회주의 체계를 세웠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 기독교 공산주의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종교의 본질도 점차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젠킨스는 기독교의 정체성 회복이 이 세상 국가에 대한 충성심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유럽 중심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드러난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적 관계를 재조명하며, 겉으로는 평화로운 듯하나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는 힌두교의 본질까지 파헤친다. 또한 주요 주제 가운데 북미 교회가 골머리를 앓는 동성연애, 성도덕 문제, 이주민들의 처우나 기타 윤리적 문제에 대한 북반구와 남반구 교회 사이의 증대되는 분쟁도 교회가 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조정진 기자)

09. 08. 08.  

  

P.S. 요컨대, 인구통계학적으로 볼 때 기독교 인구의 구성비가 변화함에 따라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옮겨갈 것이라는 게 젠킨스 교수의 전망이고 '신의 미래'다. 그런 점에서 연상하게 되는 책은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 2004)다. 역시나 인구구성비의 변화 때문에 '미국의 정체성'이 달라질 것을 매우 우려하고 있는 보수 정치학자의 책이다. 그렇듯 '인구'는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기독교란 무엇인가'도 다시 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세계를 변화시키는 건 '의견'이나 '사상'이 아니라 '머릿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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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8-09 15:00 
    남반구로 이동하는 기독교 (로쟈)
 
 
펠릭스 2009-08-09 08:08   좋아요 0 | URL
블러그 배경사진이 맘에 듭니다.

가끔 섬에서 출발하여 제가 사는 도시안까지 차를 타고 들어오면 무엇인가
다른 느낌을 갖게합니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었습니다.
(공기,물이 맑은 섬에서부터 소음과 공해 등이 많은 도시까지)

그 무엇은 도시의 웅장함, 도시의 편리성, 도시의 사람이었습니다.
도시는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그들의 일부는
새벽 기도를 다닙니다.

기독교 신정국가, 세계교회협의회(WCC), 해방신학, 기독교 좌파 운동,
기독교 공산주의 등에서의 느낌은 종교와 정치가 함께 어울여 있다는
생각입니다. (초딩수준인가요?)

'식민지 근대의 페러독스는 초민족주의 및 전 지구적 공시성 강조' 가
예견된 미래는 사람의 이동이 곧 종교의 이동이 되지 않을까, 토착 종교와의
갈등이 예견되며, 갈등은 교육과 정치에서 뚜렸하게 표출,,,,

로쟈 2009-08-09 12:12   좋아요 0 | URL
기독교계에서 호평을 받은 책이라고 돼 있는데, 기사만으론 이유가 잘 감지되지 않습니다. '북반구 기독교'의 시대는 갔다, 정도인데요.^^;

카스피 2009-08-09 09:40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유일신 사상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종교인데 내 신을 믿지않는 자는 모두 이단이자 적이라는 생각을 갖는 근본주의자들이 자꾸만 득세하게 되면서 서로 맞서는데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종교가 평화대신 불신과 다툼을 초래하니 세상이 시끄럽지요.정말 신은 자기 신도들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로쟈 2009-08-09 12:11   좋아요 0 | URL
'우리 신' '너네 신'하게 되면 이미 유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인데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내일자 한겨레의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고명섭 기자가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과 미학>(도서출판b, 2009)을 다루고 있다. 사실 기사를 발견하고 잠시 당황했는데, 오전에 보낸 다음주 한겨레21의 출판면 기사에서 <네이션과 미학>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가급적 이런 서평의 중복을 피하려고 애쓰지만, 본의 아니게 이런 식으로 중복이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두번째 논문 '죽음과 내셔널리즘'을 주로 다룬 고기자와 달리 나는 '서설-네이션과 미학'에 한정하여 기사를 썼다. 애초엔 나도 두번째 논문에 초점을 맞추려다가(역자도 강추하고 있다) 표제가 되는 글을 언급하는 게 좋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짧은 지면이라 모두 다루긴 어려운 것. 때문에 아주 중복은 아니니 지면의 낭비에선 벗어날 수 있겠다...

  

한겨레(09. 08. 08) 칸트·프로이트와 '민족·국가'를 뛰어넘다

<네이션과 미학>은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사진)의 ‘네이션’(국민·민족·국가)에 관한 숙고가 담긴 논문을 모은 책이다. 특히 책 앞쪽에 배치된 두 편의 논문은 가라타니의 최근 사유를 집약적으로 품고 있다. 1990년대 말 이후 가라타니의 사상은 ‘트랜스크리틱’과 ‘세계공화국’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트랜스크리틱(횡단비판)이라는 방법으로 세계공화국이라는 이념을 도출하는 것이 가라타니의 최근 관심사인 것이다.  

 

가라타니는 2001년 출간한 <트랜스크리틱>(한국어판 2005년)에서 이 ‘횡단비판’을 실험한 바 있다. 그 책에서 그는 ‘비판’의 두 대가라 할 이마누엘 칸트와 카를 마르크스를 불러내,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는” 시도를 했다. <네이션과 미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논문 ‘죽음과 내셔널리즘-칸트와 프로이트’는 선행 작업을 이어받아 칸트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횡단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두 사람을 겹쳐 읽음으로써 ‘네이션’의 구성과 기능을 밝히고, 그 네이션을 극복한 ‘세계공화국’의 이념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 논문, 나아가 이 책의 목표다.

이 논문에서 가라타니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후기 프로이트’와 ‘후기 칸트’다. 이 둘 사이에는 외면하기 어려운 상동관계가 있다. “후기 프로이트와 후기 칸트가 유사한 것은 무엇보다도 후기에 그들 모두가 ‘영구평화’라는 문제에 온힘을 쏟았다는 점이다.” 말년의 칸트가 제출한 ‘영구평화론’은 1차세계대전이 참화를 남기고 끝난 뒤에 재발견됐다. 19세기 내내 칸트의 평화론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프로이트는 참전 군인들의 전쟁신경증을 통해 ‘초자아’를 발견함으로써 무의식의 구조를 재편했다.  

 

전기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초자아’의 원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1900)에서 꿈의 소망 실현을 방해하는 ‘검열관’의 기능을 거론하는데, 이 검열관이 바로 초자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검열관은 말하자면, 무의식에 장착된 ‘아버지의 법’이나 ‘사회적 규범’이었다. 전기 프로이트는 초자아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강제·주입돼 생겨난 것으로 본 것이다. 이와 달리 후기 프로이트가 발견한 초자아는 외적 강제의 결과가 아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 형성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죽음충동’이 외부로 향한 것이 ‘공격충동’인데, 이 공격충동이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와 그 장소를 공격함으로써 초자아가 만들어진다. 공격충동이 스스로 안으로 향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초자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초자아가 양심과 죄의식을 낳아 공격충동 자체를 억제한다는 사실이다. 초자아가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라타니는 초자아가 자아 안에서 ‘자율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초자아의 형성 메커니즘은 칸트의 ‘도덕법칙’에도 적용된다.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도덕법칙은 일종의 의무이자 명령인데, 칸트는 그 의무의 이행을 ‘자유’라고 말한다. 가라타니는 ‘의무가 어떻게 자유가 되는가?’ 하고 자문한 뒤 답한다. 도덕적 명령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입법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은 자율이고, 외적 강제 없이 스스로 행하므로 자유인 것이다. 그런 자율(=자유) 행위는 프로이트의 초자아가 스스로 자기 안의 공격충동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이 대목에서 가라타니는 프로이트가 초자아를 네이션과 같은 공동체 차원에서도 발견했음을 강조한다. “공동체도 초자아를 가질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 공동체적 초자아를 ‘문화’(문명)라고 불렀는데, 그 문명이 공동체의 건강성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인식했다. 마찬가지로 칸트의 자율도 공동체적 차원에서 작동할 수 있음을 가라타니는 상기시킨다. 이 ‘초자아적 자율’을 논리적으로 밀고나가면 인류적 차원의 공격충동·파괴충동을 극복한 세계공화국의 이념이 나타난다. 가라타니는 말년의 칸트가 자신의 역사철학을 통해 이 세계공화국의 이념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세계공화국 이념에 담긴 영구평화의 문제를 말년의 프로이트도 자신의 방식으로 고민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 세계공화국의 실현 가능성이다. 세계공화국이 실현된다는 것은 국민국가(네이션 스테이트)를 극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관건이 되는 것은 네이션이라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그가 보기에 네이션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네이션이 베네딕트 앤더슨 말대로 ‘상상의 공동체’라 하더라도,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적 힘과 근거를 지닌 ‘공동체’다. 가라타니는 이 네이션이 전근대 사회의 농촌공동체나 종교가 했던 공동체적 상호부조 기능을 대신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계급 착취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국민·민족 공동체’가 호명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네이션(국민·민족)은 자본주의체제의 약점을 보완하는 기능을 함으로써 자본주의체제의 불가결한 보충물로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내셔널리즘은 지적 계몽으로 비판한다고 해서 당장 해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장기적 실천을 통해서야 세계공화국 형태로 지양될 수 있다고 가라타니는 강조한다.(고명섭기자) 

09.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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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소시에이셔니즘 대 내셔널리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8-10 21:12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미 며칠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과 미학>(도서출판b, 2009)에 대한 것이다. 책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걸 적당한 분량으로 요령있게 정리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걸 한번 더 깨닫게 해준 기사다. 가라타니가 사용하는 몇가지 용어들이 문제였는데('스테이트'니 '호수적'이니 하는 말들이 그렇다), '어소시에이셔니즘' 같은 경우는 편집자가 친절하게 원어
 
 
펠릭스 2009-08-08 06:28   좋아요 0 | URL
마치 신문화전체주의적인(세계공화국) 발상같읍니다.
서로를(중국,한국,일본)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보다는 자신을(일본) 위해서는 상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발전시켜, 서로 하나가 되어 영구히 행복하자는 말처럼 들립니다. "초자아적 자율을 논리적으로 밀고나가면 인류적 차원의 공격충동·파괴충동을 극복한 세계공화국의 이념이 나타난다."

'식민지 근대의 페러독스는 초민족주의 및 전 지구적 공시성 강조'라는 말의 최종 지향점이 '세계공화국'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봤습니다.

중국과 구소련의 소수민족문제, 중동분쟁 그리고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주도권 싸움 등이 최종적으로 세계공화국를 향해 갈 수 있을까요, 초자아를 극복할 방법이 일을까요, 시간이 갈 수록 자아를 더 분명하게 할 도구들이 경제원리에 의해 발전되고 있는데, 물론 현재의 민주주의를 극복할 대안이라 제시하지만,,,,'초자아'가 걸립니다.

로쟈 2009-08-08 09:30   좋아요 0 | URL
두 가지 초자아가 있는데, 하나가 '법'과 관련된다면 다른 하나는 '유머'와 관련됩니다. 가라타니가 재해석하고 있는 건 두번째 초자아입니다...
 

'키보드워리어' 한윤형의 두번째 책이 나왔다.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란 부제를 달고 있는 <뉴라이트 사용후기>(개마고원, 2009). 하루종일 원고를 쓰는 날이라 진빼는 시간을 보내는 틈에 잠시 숨을 돌려 이 <사용후기>의 매뉴얼을 읽어본다. '뉴라이트 뜯기, 꺼내기, 맛보기'가 책의 서문이며 알라딘에서는 미리보기를 통해서 읽어볼 수 있다. 한윤형의 블로그에서 옮겨놓는다.   

  

뉴라이트 뜯기, 꺼내기, 맛보기

1.
뉴라이트 논쟁은 역사전쟁이면서 정치논쟁이다. 단순하게는 8․15를 ‘광복절’로 부를 것인가 ‘건국절’로 부를 것인가라는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일제 식민지기와 대한민국 건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관점을 둘러싼 역사전쟁의 차원이 있다. 하지만 그 전쟁의 이면엔 현존하는 정치세력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와 대한민국의 향후 과제는 무엇인지를 둘러싼 정치논쟁의 차원도 겹쳐 있다. 

뉴라이트 논쟁의 이러한 양면성은 그것에 대한 적절한 개입을 어렵게 만든다. 역사학 전공자들은 자신의 발언이 어떤 정치적 맥락의 프리즘을 거쳐 어느 한쪽의 견해를 편드는 것으로 해석될까봐 소신 있게 얘기하기가 어렵다. 반면 정치적인 얘기를 하는 이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나친 당파적 해석을 통해 이 논쟁을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기 일쑤다. 그래서 이 논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쉬운 논쟁이다. 이를 보다 못해 아마추어가 겁없이 이 논쟁에 뛰어들기로 했지만, 역사학에도 정치학에도 전문적 지식이 없는 나는 물론 이 문제를 온전히 해명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몇몇 2차 자료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이 논쟁을 정리해가다 보니, 적어도 상식인의 눈에 이 문제가 어떻게 비치는지 정도는 또렷이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청소에 비유한다면 어지러이 놓여 있는 큼직큼직한 물건들을 있어야 할 곳에 가져다놓는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논의 이후에 필자의 무지와 오해를 지적하면서 좀 더 세밀한 빗질과 걸레질을 하는 상식인이나 지식인의 논의가 이어진다면 그보다 더 반가울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잡고 있는 스탠스를 먼저 고백한다면, 나는 이 논쟁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자들을 둘 다 비판할 생각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이유 하나는 논리적 필요성이다. 말하자면 양쪽 다 틀린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이유 둘은 정치적 필요성이다. 한국 사회가 ‘단일 민족국가’ 운운할 때는 이미 지났다고 본다. 이제는 다민족주의 공화국의 유지를 위한 민주주의 정치철학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그런데 뉴라이트가 오히려 ‘탈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이런 문제의식이 엉뚱하게 떠밀려 묻혀버린 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뉴라이트를 일컬어 ‘탈민족주의에 대한 지능적 안티 세력’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뉴라이트를 비판하기 위해 기존의 민족주의 담론을 그대로 끌어온다면 이 논쟁은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퇴행적인 논쟁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이 책은 뉴라이트를 비판하는 책이다. 민족주의자 비판은 뉴라이트에 대한 정밀한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이다. 즉, 기존의 민족주의 방식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뉴라이트의 문제들을 세밀하게 잡아내 보겠다는 것이 내 의도이다. 좀 더 단순화시키면, “탈민족주의자는 뉴라이트를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 책의 주제의식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을 ‘뉴라이트 사용후기’라고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뉴라이트를 비판하지만, 비유하자면 포장지도 뜯어보지 않고 제품을 욕하는 수준이 대부분이다. 몇몇 개혁진영 역사학자들 역시 포장지만 겨우 뜯어보고 상자 모양을 보고 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뉴라이트라는 ‘담론’에 대한 성실한 구매 리뷰를 쓸 것을 약속한다. 제품을 실제로 사용해 보고 어디에서 어떤 문제가 보이는지를 구체적으로 짚을 것이다.

2.
하고많은 주제들 가운데 사학 전공자도 아닌 나는 왜 하필 뉴라이트 문제에 천착하게 되었을까? 나는 두 가지 계기를 설명해야겠다. 하나는 지난 십년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정치평론들이 결국엔 한국 현대사 문제로 수렴되더란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는 1999년부터 이른바 ‘안티조선 운동’이란 것을 계기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흘러 흘러 민주노동당원도 되고 진보신당원도 되면서 이럭저럭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러 세대들, 즉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우리 아버지 세대와 특히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386세대를 많이 만났다. 나는 이들과 오랜 시간 동안 대화하면서 이들이 정치를 바라보는 틀이 결국 그 세대에 고유한 하나의 판타지로 수렴된다는 것을 느꼈으며, 그 틀이 오늘날의 사회를 바라보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
 
이 양측의 감수성이 부딪히면 대한민국은 ‘두 개의 나라’가 된다. 386세대는 독재정권의 지지자들과 뉴라이트를 ‘민주헌정을 부인하는 이들’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 반대측에서는 진보개혁 진영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양측 다 상대방을 비-국민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양측 다 ‘혁명세력’인 셈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를 만들 때 한번 그렇게 ‘좌익 청소’를 했던 것처럼 지금도 상대방을 숙청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한 것 같다. 반면 개혁진영도 ‘한 번도 왕의 목을 베어보지 못한 역사’ 운운하며 역시 언젠가 좋은 날이 있어 우리가 승리하여 그들을 몽땅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죽이겠다는 건 아니고 저들의 정치적 목줄을 끊어버려야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로 발돋움하는 기틀(완성도 아니고!!)이 되겠다는 소망이지만, 그렇게 얘기해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양쪽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그걸 결국 실현해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저들은 ‘보수’도 아니다, 저들은 ‘진보’도 아니다, 그런 식의 앵앵거림이 많지만 여기는 다른 나라가 아닌 대한민국이니까, 대한민국에서 보수라고 불리는 이들과 진보라고 불리는 이들을 그냥 보수와 진보라고 불러보자.(나도 꼭 이런 규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닌데, 실은 계속 늘여 쓰기가 귀찮아서 그렇다.) 대한민국의 보수와 진보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보수!’,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진보!’의 이상형을 공책에 덕지덕지 그려놓고 그 공책에 그린 그로테스크한 그림에 들어맞는 사람이 나오기 전까진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자폐증적 사춘기 소년 소녀들과 같다. 보수와 진보 모두 변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양 진영의 상호비판은 물론 타당하기도 하고 맥락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이 “그러므로, 나와 얘기할 수 있는 보수/진보는 없다!!”는 심리의 알리바이가 된다면 이를 어찌할 것인가. (얘기를 해야 변하든 말든 할텐데 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부부라도 이렇게 서로가 미우면 이혼하고 새 짝을 찾을 수 있겠지만,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버리고 어느 나라에 가서 짝을 찾아 정치를 할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한국의 보수세력과 개혁세력이 이제 그만 사춘기 감성의 증표인 공책을 덮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거울도 봤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이 부족한 책을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계기 하나는,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운동 비스무리한 걸 하는 이들을 만나보니, 특히나 좌파 운동권들은 “민족, 그딴 건 없다”는 걸 아예 교리처럼 외우고 있더란 것이다. 청소년 시절 흔히 ‘환빠’(<환단고기>빠)라 불리는 울트라 민족주의자였다가 거기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던 나로서는. 그들이 사실 민족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없으면서 그냥 없다고 하면 쿨해 보일 것 같아서 그러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이 ‘민족’이란 것에 애착을 가진다면 이를 존중하고 거기서부터 평론을 시작하는 것이 또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이 있다, 혹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서로가 인정해야 할 역사적 사실의 기본이란 건 있을 게다. 그리고 민족론이라는 게 어떤 맥락에서 도움이 되고, 또 어떤 맥락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것일 테다. 특히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런 작업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나는 여지껏 민족주의 담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관심이 자연스럽게 뉴라이트 논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3.
다시 이 책에 대해 말한다면, 읽기가 어렵진 않겠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의 담론 지형이 제법 복잡미묘해서 소략한 안내도지만 잠시나마 이를 펼쳐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다.

이 책의 1부는 일제 식민지기에 관련된 역사논쟁들을 친일파 문제라는 정치논쟁으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1장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상식인들에게 과도하게 비난받는 이유를 고민한 나는 친일파 논쟁이 역사논쟁과 정치투쟁을 매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 논쟁에 개입하여 2장과 3장에 걸쳐 복거일의 친일파 옹호론을 검토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4장과 5장에 걸쳐 식민지 근대화론과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의 정확한 입장에 대해 요약하여 세간의 섣부른 오해를 넘어선 비판의 지점을 탐색한다. 6장에서는 뉴라이트 역사관이 지닌 맹점의 실례로 북한의 경제성장 문제를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뉴라이트의 문제를 명확하게 인지하기 위해서는 좌파 담론이 복권될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할 것이며, 그 관점으로 7장에서 민족주의적 친일파 청산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이 검토의 과정에서 나는 탈민족주의적 친일파 옹호론을 끌어들일 것인데, 8장에서는 이 관점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를 모색하고, 친일파 논쟁과 일제 식민지기 논쟁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정리를 할 것이다.

이 책의 2부는 대한민국 건국의 문제에서부터 현재의 정치평론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뉴라이트와 개혁진영 양자가 논쟁하는 문제들을 다룬다. 2부의 내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개혁세력의 정치적 판타지를 스스로 극복하지 않고는 뉴라이트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뉴라이트에 대해서는, 뉴라이트의 ‘민족주의 비판’의 내용을 수긍할 경우(나는 그것에 대해 충분히 수긍하는데) 그들이 바라는 정치적인 결과는 파생하지 않음을 증명해볼 것이다. 1장에서, 나는 뉴라이트와 개혁세력이 자기들 좋을 대로 조금씩 활용해먹는 임시정부 정통성론 그 자체를 비판하면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 노선의 의미에 대해 복권을 시도한다. 여기서 친일파 논쟁의 맥락을 이어와 김구와 이승만의 대립을 숙청론과 속죄론으로 규정하고, 그것들이 둘 다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2장에서는, 김구를 테러리스트라 규정하는 뉴라이트에 분노하는 자세가 과연 선조 독립운동가들을 공대하는 자세인지를 문제 삼을 것이다. 3장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면서 ‘김구주의’와 ‘이승만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뉴라이트가 반탁운동을 옹호할 경우 그것은 민족주의 과잉을 우려하는 그들의 담론과 모순될 수밖에 없음을 밝힐 것이다. 4장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정당했는가라는 일명 ‘정통성 논쟁’에 개입하면서 표준적인 뉴라이트와 개혁세력이 잘못 생각하는 부분을 역사적 전거와 민주주의 정치학의 논리로 드러내고자 한다. 5장에서는 ‘탈민족주의자는 통일, 혹은 햇볕정책에 반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통일 담론과 남북관계에 대한 정치적인 주장을 비평하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선진화’ 담론의 전제조건으로서 ‘민주화 완성론’을 논박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민주주의 정치철학의 기본을 돌이켜볼 것이다.  

 

4.
대중들에게 좀 더 쉽게 지식을 전달하려는 교양도서 저자들의 노력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쓸 수 있었다. 1차 사료를 보지 않고도 대략의 맥락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책들이 나와 있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작업에 임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대한민국 교양도서의 질이 두터워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몇 사람에게는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 언론학자 강준만 선생님의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문외한이 역사의 미로에서 헤매지 않도록 도와주는 사실관계와 정보가 빼곡한 거대한 지도였다. 역사학자 윤해동 선생님의 저서들, 특히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는 뉴라이트와는 다른 탈민족주의자의 역사적 식견을 깔끔하게 보여주면서 또한 그 자체로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크게 넓혀주는 책이었다. 윤해동의 견해를 인용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책의 논변을 구성하는 데 훨씬 애를 먹었을 것이다. 『대한민국史』(한홍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과 『대한민국 이야기』(이영훈) 같은 책들도 서로 다른 의미에서 내게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이 책에는 비록 마지막에서야 조금 인용되지만,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이 있다. 정치학자 고(故) 전인권 선생님이다. 그는 『남자의 탄생』에서 당면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자신의 정체성의 탄생과정에 대한 그의 해명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 남자 일반의 것이기도 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인 것일 게다. 그 지점에서 『남자의 탄생』의 인문학적 논의는 역사적인 것이 되고, 정치성을 지니게 된다. 『남자의 탄생』에 나오는 ‘고아의식’이란 개념에 대한 한 주석을 보면 전인권은 그 사실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 『박정희 평전』은 박정희를 ‘심리적 고아’라는 개념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남자의 탄생』에 나오는 ‘고아의식’ 개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왕성한 활동을 시작할 즈음 돌연 사망함으로써 그 작업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이를테면 정치학과 역사학을 넘나드는 나의 이 책은, 그가 하고 싶었던 작업 중의 극히 일부를 계승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전인권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지는 이유는 그의 사후에야 그의 저서들을 군대 내무반에 읽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역시 너무 일찍 돌아가신 내 작은아버지와 생몰연대가 일치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죽음을 예감한 작은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책으로 정리해줄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이 책의 내용은 그가 하고 싶었던 말과 관련이 없겠지만, 나는 왠지 이 책이 그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한국 현대사는 죽음과 그것에 대한 망각이 반복되는 장(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압도적인 정서적 흐름에 공명해서는 논쟁을 정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매우 논변적으로 때로는 공격적으로 사태를 정리해야만 했다. 그러한 문체가 한국 현대사에 대한 내 무거운 존중의 마음을 가리는 일은 없기 바란다.
 
이 책을 내 작은아버지와, 전인권 박사,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를 몸으로 살아낸 모든 어른들에게 바치고자 한다. 

09.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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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07 23:03   좋아요 0 | URL
'뉴라이터(New Right)의 개념', '뉴라이터는 탈민족주의를 위한 지능적인 안티세력', '진보.보수 모두 변해야한다', '모든 근대는 식민지 근대다', '식민지 근대의 페러독스는 초민족주의 및 전 지구적 공시성 강조', '나는 왠지 이 책이 그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등이 눈에 들어 옵니다.

로쟈 2009-08-09 12:16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도 '신자유주의' 마냥 허울만 내세운 '프레임' 같은데, 실상에 대해선 잘 정리해줄 것 같은 기대가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8-07 22:50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가 탈식민,탈민족주의의 일부를 차용한 것에 대해서 단순히 애국적 시각으로만 비판해서는 안되지요.작년에 뉴라이트가 건국논쟁 임시정부 법통 논쟁을 제기했을 때 반 뉴라이트 진영이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반론을 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로쟈 2009-08-09 12:14   좋아요 0 | URL
'사용후기'라고 돼 있지만, 이슈가 묻힌 감도 있습니다. 한땐 '역사전쟁'을 방불케 했는데요...

bam 2009-08-09 04:42   좋아요 0 | URL
그의 블로그와 달리, 겸손해보이는 서문이 인상적이네요. 뭐랄까, 공격적이란 느낌이 상당히 강했는데, 재고해봐야겠네요.

로쟈 2009-08-09 12:13   좋아요 0 | URL
대개 그렇지만, 전사들에겐 여린 부분도 있습니다.^^
 

연이어 저널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publishingjournal.co.kr/?p=1819). 출판저널의 '서재에서 만남 삶'이란 꼭지에서 이달에 '로쟈의 서재'를 다루었다. 아니 이번엔 '이현우 박사의 서재'이다. 실제 내가 앉아 있는 방의 풍경을 지면에서, 그리고 온라인에서 보는 일이 좀 낯설긴 하다. 취재는 지난달 초순에 이루어졌다. 방은 어지러운 상태가 더 좋다고 하여 전혀 정리하지 않았다. 지금 현재의 모양새도 거의 이런 수준이다(다만 한달새 약간 더 빼곡해졌다). 온라인에는 기사의 일부만 공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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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09년 8월호) 인문학자 ‘로쟈’ 이현우 박사의 서재

소박해 보이는 책장에 수북하게 꽂힌 책들에 둘러싸여서 고상하고 호사가적인 취미를 만끽하는 귀족주의적인 책 숭배자를 만나는 것은 절대정신으로 가득 찬 낭만적 세계를 보는 것만 같다. 러시아문학자로 안주하지 않으며 이미 인문학자로서 경계를 확장한 이현우 박사는 한국 인문학 연구의 토대를 쉼 없이 흔드는 이 가운데 하나이다. 깊게 패인 그윽한 눈동자로 세상을 예리하게 꿰뚫으려는 그에게, 책은 세상을 성찰하는 텍스트로 짜인 거울 같다. 책들의 보고 같은 그의 서재를 찾아서 ‘로쟈’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육성으로 경청하였다.  



가족 중 유일한 다독가  
적잖은 책 신봉자들이 인문학적 교양이 출중한 독서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부모가 마련한 서재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성장한 현실이 잦기에, 기자에게 이현우 씨의 집안이 선입견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지레 짐작했던 고정관념은 가볍게 빗나갔다.

“어릴 적 책이 별로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그다지 책을 즐기지 않으셨어요. 그나마 아버지께서 세계문학전집이나 방정환 선생님의 동화책을 사주신 것이 책과 관련된 으뜸 되는 추억입니다.”

그는“책을 탐독하는 유전자”를 타고난 것처럼 줄기차게 책을 읽으며 자랐다고 회고했다. 줄곧 책과 동무한 삶은 다른 세계를 사는 생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 그에게는‘문청’기질이 다분한 골치 아픈 룸펜보다,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 더욱 흥미롭게 와 닿았다. 자신과 유사한 분신과 결혼하지 않고 이질적인 세계에 두 발을 깊게 담근 이와 결혼한 것도, 책이라는 성에 칩거한 이들을 일면 경계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책을 유난스레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결혼할 무렵 석·박사논문에 치이면서 책을 다소 멀리하는 게 설핏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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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 없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긴장관계가 글쓰기의 근간
하지만 그는 책과 오래도록 연애하며 어떻게 책을 접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책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질 때는“책을 섭렵한 이후 달성하는 자유로움”이라고 통찰한 것이다. 오늘날의 그를 키운 것은 학부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릴케와 장자 등의 저작들의 영향이 지대하다. 특히 자유롭게 세상을 보기위해서 필연적으로 대붕의 관점에 서야 한다는 깨달음을 안겨준 장자를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했다. 동시에 소요유(逍遙遊)의 드넓은 경지에 근접한 대가는 현실문제에 둔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설핏 예술가적 영혼을 지닌 그가 아직껏 자신감 있게 살 수있었던 배경은 좀처럼 입신출세를 강요하지 않은 부모님 덕분이라고 토로했다. 

“저공비행의 이미지는 현실에서 떠있다는 점과 동시에, 언제라도 추락할 위험이 상존한다는 점입니다. 날아다니는 대가로 언젠가 가차 없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긴장관계가 어쩌면 제 글쓰기의 근간일 지도 모릅니다.”  

그가 몇 년째 정성껏 열정을 다해 꾸려오는 블로그 역시 생계문제나 가족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기에 시종일관 글쓰기와 글읽기를 부단한 긴장 속에서 이어오고 있다. 그나마 최근에 나온 책 덕분에 책으로 넘쳐나는 집을 타박했던 잔소리가 다소 잠잠해졌다고 이야기했다. 경제적인 효용성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으며 그의 논문 집필 시간을 깎아먹기도 하는 블로그를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주할 때 블로그는 성가신 짐 같죠. 하지만 읽은 책들을 블로그에 게재하기 위해 글을 쓰고 퇴고하는 과정에서 좀 더 잘 읽게 되기에 도움이 됩니다. 혹자는 저를 스페셜리스트이기보다 제네럴리스트라고 부르곤 하는데, 제네럴리스트를 거쳐서 언젠가 스페셜리스트로 도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려면 어느 한 분야에만 관심이 국한되는 것은 곤란합니다. 자못 인문학자라면 여러 분야에 관해 어느 정도 통달해야 하지 않을까요? 협소하고 지나치게 학구적이며 규격화된 이해를 거부하면서 말이죠.”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 '로쟈' 
이러한 생각을 견지한 그는 올해 5월에 발표된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문학전공자의 제한된 시각만을 보여주는 것을 탈피해서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와 철학, 러시아 지역학, 여성문제 등에 관해 수많은 글들을 명징하게 담아냈다.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자는 것이 단행본을 기획한 의도였습니다. 여러 관심분야를 한 권의 책에 담는 것이 목표였고, 후속적으로 다양한 꼭지들을 새끼 쳐서 추가적인 단행본으로 내려는 계획을 품고 있습니다.”

그의 서재에는 그의 광활한 관심분야와 사유의 깊이를 내보이듯 온갖 분야의 책들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문학자이자 인문학자로 살아가는 그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나타내듯 대부분의 책들은 문학과 철학 등 인문철학에 집중돼 있었다. 그의 필명인 ‘로쟈’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Rodion Romanovich Raskolnikov)의 애칭 로쟈(Rodja)에서 따온 것이다.  

문학 극대론자에 대한 동경 
자신의 전공분야에 안착해있기보다 인문학자로의 길을 선택했지만, 러시아문학이 국내에서 열띠게 각광받지 않는 현실은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 같았다.  

“동시대 러시아 문학이 국내에 잘 소개되어 있지 않아요. 일단, 러시아문학 수요층이 적다 보니 출판사에서 좀처럼 엄두를 내기 쉽지 않죠. 작금에 러시아문학이 드물게 번역되는 경향은 러시아문학 전공자뿐만 아니라 독자, 시장의 문제가 모조리 섞여 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문학의 경우 번역자들이 다른 주요언어들에 비해 부족한 점도 이러한 현상에 일조합니다. 비단 러시아문학뿐만 아니라 러시아 영화도 아주 가끔 국내에 개봉됩니다. 현실적인 제반문제로 인해 러시아문학 전공자로 살아가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늘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문학에 대한 서평의뢰보다 인문학 서적에 관한 서평 의뢰가 주를 이룬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실려 있는 러시아문학 및 문화에 대한 빼어난 글들은, 그가 앞으로 러시아문학 연구풍토에 굳건하게 이바지할 밑바탕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자연스레 문학 극대론자에 관한 자신의 꿈을 소개하였다.  

“문학을 이해하려면 문학이 전부가 되어야 하고, 문학이 말하려는 총량을 오롯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텍스트에 대한 접촉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려면 일단 텍스트를 깊이 있게 향유하고 충분히 음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나긴 역사에 비해 한없이 짧기만 한 인간의 유한한 삶을 그나마 초월하는 방법은, 책을 통해서라도 여러 시대와 만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종종 저더러 ‘책상물림’이나 ‘책벌레’라고 부르곤 하는데, 저 같은 사람들에 비해 철저히 책 밖에 사는 사람들이 더욱 현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어쩌면 주마간산 같은 구경꾼의 엿봄 내지 얕은 앎일 수도 있죠. 깊이 천착된 앎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책에서 지식의 간극을 메우며 인간의 한계성을 어느 정도 극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책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여러 곳에 분산된 서재 
“책이 한곳에 없다 보니 연구할 때 사소한 불편이 생겨서 언젠가 여건이 된다면 책들은 한곳에 모을 작업실을 꾸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봅니다.”  

그의 수많은 책들은 한곳에 모아지지 못한 채 세 곳에 분산돼 있다. 자신의 아파트에 모조리 보관할 수 없어서, 지인이 마련해준 서재에 상당수의 책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나머지 책들은 서울대학교 연구실에 있다. 책수집가가 되기를 추호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미 어느 누구와도 필적할 만큼 수많은 책들을 소장한 그가 책을 고르는 기준을 무엇일까.  

“일단 값비싼 고서들이나 희귀본을 사서 모으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미 재정적으로 거덜이 났겠죠. 또한, 책을 무조건 사서 읽습니다. 책을 살 때는 관심 분야의 책인지 따져봅니다. 또한,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관심사와 대중의 관심사가 맞아떨어지는 책을 주로 고르며, 특히 여러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책들을 선택해서 서평을 쓰곤 합니다.”

세 곳에 분산된 책들,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는 성어가 곧바로 떠오를 만큼 많은 책들을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어서 신발장뿐만 아니라 침대 아래나 베란다에까지 보관한 그는 책이 가끔 환멸을 머금은 짐짝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언젠가 지인에게 향수를 선물 받았는데, 지인에게 양해를 구한 후 책으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산다고 하더라도 갖추지 못하는 책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일단 장만한 다음에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정독합니다.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것은 아니고, 종종 지인에게 주기도 하고 가끔 아예 버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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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가가 책을 고르는 기준
서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 진행하는 대학 강의뿐만 아니라 성인교육 강좌까지 맡고 있는 그는 분초를 다툴 만큼 분주하게 살아간다. 강의에서부터 서평 작성, 번역 등을 모조리 병행하는 그가 블로그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자못 신기할 정도이다. 책이 흔해진 시대에 책을 소개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그는 자신이 대학시절을 보냈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에 비해 요즘에는 여럿이 모여서 학문적 공동체로 세미나를 하는 문화가 괄목상대하게 준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호주머니 사정이 얇아져서 책이 많아도 온전히 사보지 못하는 요즘 대학생들의 고충은, 과거 책값은 싸도 출판시장이 빈약해서 제대로 독서할 수 없었던 당시의 젊은이들과 궁극적인 고충은 통하는 것 같아요.”

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의 바람은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지성 수준이 향상되기를 바랍니다.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블로거들이 책을 정독한 후 서평을 쓰는 문화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책이 좋아서 책에서 사는 이현우 씨는 세상과 고립된 채 자신만의 성에 갇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세상에 말을 걸며 소통하는 학자이다. 그가 몇 년째 운영하는 블로그는 독서대중의 저변 확대 차원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며, 책을 읽는 의미 있는 독법을 제시하면서 지식의 확산과 토론에 이바지하고 있다. 언젠가 이산된 그의 책들이 한곳에 모여서 그의 연구 및 글쓰기가 더욱 집약되기를 바란다. 청빈한 삶 속에서 열정적으로 책을 후벼 파는 그의 ‘보수적인’ 시간표에서 생산된 결과물들이, 우리들에게 메아리칠 담론이 흥미진진할 것을 기대하며 인터뷰를 마쳤다.(박정준 객원기자)

09. 08. 05. 

P.S. 잡지는 어제 받아서 읽어봤는데, "한국 인문학 연구의 토대를 쉼 없이 흔드는 이 가운데 하나"라고 소개돼 있어서 좀 놀랐다(나는 '곁다리'라고 했건만!). 의례적인 과장인가? 인터뷰가 대개 그렇지만 나의 '육성'은 기자의 기억이 재구성해놓은 것이다. 가령 '으뜸 되는' '유난스레' '설핏' 같은 표현은 나의 것이 아니어서 눈길이 간다. 내가 그런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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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9-08-05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비교적 정돈이 잘 됐다는 느낌도 드네요. 설마 저것이 다는 아니겠죠?ㅎ
그런데 가끔 궁금할 때가 있어요. 저렇게 책이 많으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ㅋ

로쟈 2009-08-05 13:47   좋아요 0 | URL
기사에 나오는데, 몇군데 분산돼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건 집에 있는 책 가운데 1/3쯤인 듯해요. 뭐가 있는지는 알지만, 못찾을 때가 있지요.--;

펠릭스 2009-08-05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책을 보는 눈빛이 책을 뚫고 있군요. 굉장히 호기심에 찬 눈빛입니다. 근래에 저런 눈빛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정신이 밧딱 듭니다.
음~ 잘 짜여진 원목 책장과 오디오 등이 있는 서재보다는 동네 청년 소설가의 서재같습니다.


로쟈 2009-08-05 14:20   좋아요 0 | URL
잘 갖춰진 서재는 모처에 따로 있습니다.^^

드팀전 2009-08-05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사진빨이 좋아지고 계십니다.

로쟈 2009-08-05 19:11   좋아요 0 | URL
거실 식탁에 앉아 찍은 건데, 사진'작가'의 작품입니다...

[해이] 2009-08-05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에 집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아파트면 조금 덜하겠지만 단독주택이나 이러면 조심해야 해요ㅋㅋ

로쟈 2009-08-05 19:1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자주 듣는 얘깁니다.^^;

가시장미 2009-08-0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사진빨이 좋아지고 계십니다.2

그런 인상 충분히 주시는데요? :)
저도 결혼하면서 혼수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게 책장인데, 많지도 않은 책인데, 점점 꽂을 곳이 없어지네요. 저도 쌓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ㅋㅋ

로쟈 2009-08-05 19:12   좋아요 0 | URL
쌓은 다음이 문젭니다.^^;

2009-08-05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5 2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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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5 2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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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5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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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6 18: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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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6 18: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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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7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7 1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7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7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r 2009-08-08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너무 깔끔해서 놀랐습니다^^;

로쟈 2009-08-08 10:04   좋아요 0 | URL
어떤 기대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