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

어제 리뷰를 옮겨놓은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는 UAT시리즈의 두번째 책으로 나온 것이다. UAT는 'Ubiquitous Art & Technology'의 약자인데, '유비쿼터스 시대의 예술과 기술' 정도의 뜻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미래교육준비단에서 추진하는 출판 프로젝트로 앞으로 나올 3, 4권의 가제는 각각 '인공생명 예술의 이론과 실천', '예술과 바이오테크놀로지'로 돼 있다(1권은 이미 출간된 <컴퓨터 예술의 탄생>).   

한데, 지난번 한예종 사태 때 직격탄을 맞은 것 중의 하나가 기술과 예술, 그리고 인문학을 한데 아우르려는 이 '한예종판' 통섭 프로젝트여서 이후의 출간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건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이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는 한예종 심광현 교수의 신작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 2009)는 그런 시의성 때문에 눈에 띈다. 인터뷰기사를 보니 최재천 교수가 이끄는 이대 통섭원 주도의 통섭 담론에 대한 대항담론을 구성하는 것도 이 한예종 통섭론의 목표다. 그 대립의 구도는 '수직적 통섭론 VS 수평적 통섭론' 혹은 '환원적 통섭론 VS 비환원적 통섭론'이다. 통섭론의 향방에 대해서도 겸사겸사 가늠해볼 수 있겠다.  

한겨레(09. 08. 13) 기술공학-인문학 수평적 통섭 못하면 미래는 재앙

지난봄 계간 <문화과학>이 ‘지엔알(GNR·생명공학 나노 로봇) 시대의 도래와 문화변동’이란 주제를 특집으로 다뤘을 때 독자들은 당혹스러웠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서민의 삶은 벼랑에 내몰리고 용산 학살이 야기한 사회적 분노가 정치적 임계점을 향해 치닫던 상황이었으니, 유전학·나노기술·로봇공학이 가져올 미래의 변화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현실의 긴박함을 외면한 ‘먹물들의 한담’쯤으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편집위원들 사이에서도 너무 ‘앞선’ 주제가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기술결정론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고요. 하지만 눈앞의 사태에 매몰돼 사회의 심층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심광현(사진) 교수의 문제의식은 최근 그가 펴낸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도르노 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영상이론을 가르쳐온 그가 ‘유비쿼터스’라는 기술공학적 주제로 책을 쓴 것이 의아할 법도 하지만, 그는 4년 전 프리고진의 복잡계 과학의 사유에서 인류 문명의 돌파구를 모색한 <프랙탈>(현실문화연구)의 저자이기도 하다.

심 교수가 <유비쿼터스…>에서 다루는 내용은 지엔알 혁명에서 탈근대 문화정치, 학술·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데, 핵심 주제를 꼽으라면 ‘예술-인문학-과학기술의 통섭’이다. 지엔알 혁명이 가속화하는 유비쿼터스 사회는 필연적으로 자연과학과 기술공학, 인문사회과학, 예술 간의 접속과 소통을 요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지엔알로 상징되는 새로운 지식혁명이 근대화 과정에서 수백 개의 분과학문과 전공지식들로 세분화됐던 지식들을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을 매개로 하나의 통합적 지식으로 융합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본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지식의 통·융합이 대단히 위계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등이 주도하는 ‘통섭’ 담론이 대표적이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과 제자인 최재천 교수는 모든 지식의 대통합을 강조하면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물론 예술까지도 자연과학적(사회생물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심리현상도 인과관계가 있고, 이걸 찾아내면 사회도 인간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끔찍한 결정론입니까.”   

심 교수는 이런 자연과학 중심의 통섭 담론에는 예술을 과학자들에 의해 언젠가 정복될 ‘처녀림’으로 간주하는 근대 과학기술 제국주의의 오만한 전제가 함축돼 있다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수직적 통섭론이 신자유주의적 권력관계와 결합되는 상황이다. “유비쿼터스로 상징되는 기술 발전의 성과를 자본과 국가권력이 독점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라크전에서 선보인 무인공격 시스템 등에서도 드러났지만,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기계-기계(M2M) 간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와 같은 묵시론적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 첨단 과학기술이 민주적 사회관계와 결합된다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지식과 지식 간의 수평적(비환원주의적) 통섭이다. 수평적 통섭에서는 예술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 이유를 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평적으로 통섭하려면 과학·기술·인문학·사회과학·예술이 대등한 지위에서 접속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이걸 시작하기가 어려워요. 전문가일수록 자기 영역이 아닌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술의 전문성이 뭡니까. 자기도 모르는 것을 떠드는 것입니다. 다른 분야에 손 내밀고, 이질적인 것을 섞고, 실험하고, 상상력을 제공하고…. 통섭의 촉매제이자 예인선 역할로는 예술이 제격인 셈이죠.”

심 교수는 이처럼 예술이 매개하는 수평적 통섭을 자신이 가르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유-에이티(U-AT) 통섭교육사업’을 통해 실천하려고 했지만, 상급기관인 문화부의 반대로 좌절된 상태다. 이 과정에서 ‘장관의 사업 중단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지난 6월 문화부로부터 ‘중징계’(파면·해임·정직) 처분 요구까지 받았다.  

 

“장관이 통섭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요. 자기가 아는 예술은 기악·발레·연극·회화 등 장르적으로 전문화된 것인데, 여기에 과학기술과 인문학이 들어오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거지요. 모르면 토론을 하면 되는데, 일방적으로 누르고 (인력과 예산을) 자릅니다. 이건 예술과 학문의 자율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지시가 그런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불통공화국’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이세영 기자)  

09. 08. 13. 

P.S. 과학·기술·인문학·사회과학·예술이 대등한 지위에서 접속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주장인 듯싶다. 에드워드 윌슨과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는 '수직적 통섭론'이 과연 '끔찍한 결정론'으로만 귀결되는 건지는 의문이지만(맞거나 틀릴 수는 있지만 '끔찍하다'는 뭔가?), 책의 부제대로 예술-학문-사회가 수평적 통섭을 이룬다면 나쁠 것도 없다. 구체적인 방안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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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08-13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거나 틀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끔찍할' 수도 있는 거겠죠.

로쟈 2009-08-14 07:37   좋아요 0 | URL
예술은 자연과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는 게 일종의 고정관념이란 생각이 들어요. '예술의 최첨단'은 과학기술(유비쿼터스)과의 공생을 모색하면서, 담론상으론 대립적 구도를 설정하는 듯싶어서요. 그리고 통섭 프로젝트도 다 국가지원 사업인데요...

Sati 2009-08-14 20:25   좋아요 0 | URL
그럼 문학도 환원론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오!^^
대립적 구도 설정이라고 지적하신 부분은... <매트릭스>의 네오와 스미스 요원의 관계와 비슷하겠죠.

로쟈 2009-08-14 20:52   좋아요 0 | URL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환원'을 포함한다고 봐요. 그것이 얼마나 생산적인가, 혹은 유효한가라는 환원의 질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펠릭스 2009-08-15 12:33   좋아요 0 | URL
우린 이미 메트릭스에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읍니다.
디지털 매체속에 있습니다.(아날로그와 공존하지만),,,
이진법의 겉만 보고 있으니 착각하고 있는듯 하지만,
실상은 관련 프로그래밍이 2진법이 기본,,,

Sati 2009-08-15 20:55   좋아요 0 | URL
'환원'이라는 말 자체가 '통제'를 암시하는 동시에 폭력적인 것 같습니다. 생로병사를 쥐락펴락하고 인간정신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세상은 '끔찍'하죠. 특히 탐미자와 산 채로 해부 당하는 자가 갈릴 때는 말이죠.

펠릭스 2009-08-16 07:32   좋아요 0 | URL
환원,현미경,폭력,,,현상학적인(자연과학) 의미가 크죠. 두렵기도 합니다. 말씀처럼 질적인 유효성이 어느 정도냐를 생각해봄직합니다. 인간은 생존을 지향합니다. 발해의 멸망은 백두산 화산폭발이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처럼,,,자연의 재앙이 없다면요.

펠릭스 2009-08-13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공지영 님은 의과대학(병원),법과대학(법원 등)에 필수교양으로 문학(소설 등)이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김탁환 교수는 KIST에서 문학관련 강의중, 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에게의 문학적 감동(응) 등.

저는 마그리트의 어떤 그림을 보면서 제 전공과 컴퓨터(애플8bit) 활용을 상상했던때가
있었습니다. 수평,수직적 통섭에 대한 큰그림은 잘은 모르지만 필요한 부분같읍니다.
인공지능적인 컴퓨터예술이란 말에 감이 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또한 예술적 감각
성이 개입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무언가 융합되고 혼용되는 참길을 찾는다면,,,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문가중에 비전공자들이 많이 있습니다.(안철수 등)

인문,사회,과학,예술 등의 기본이 언어라 하면 새로운 상상이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고전의 아류중에 '컴퓨터 예술' 또한 의미있습니다.

진중권 님은 현재 IT강국인 우리의 수준이 기능적인 면에 머물고 있으므로,
좀더 창의적인 응용이나 그 너머의 길(예술)로 가자는 의미같습니다.

로쟈 2009-08-14 07:39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게 어떻게 연결되고 서로 도움을 주는지 뇌과학자들이 연구해볼 만합니다...

skyrider 2009-08-1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 진짜 통섭의 전문가 선생님들(한국과학기술학회, KASTS)이 왜 가만히 계시는지 안타깝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의 통섭개념의 오류에 대해선 이미 작년 학회에서 김종영 교수님(경희대 사회학과)이 지적하신 바가 있죠. 통섭 담론을 약 10년 전부터 펴오고 계신 홍성욱 교수님(서울대 과사철 협동과정 phps.snu.ac.kr)을 비롯하여, 이중원 교수님(서울시립대 철학), 이상욱 교수님(한양대 철학), 김환석 교수님(국민대 사회학), 김경만 교수님(서강대 사회학) 등의 책을 강력히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한예종에도 이런 쪽에 관심있으신 분이 계신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가급적 해외학계와도 폭넓은 교류를 통해, 좁은 한국땅에서 우물안 논의가 되는 것을 피하고 세계적 수준의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사실 BK나 HK, WCU (월드-클래스 유니버시티?) 등 정부 프로젝트의 목적도 궁극적으로 이러한 측면의 강조에 있을 테니까요.



많은 분들이 담론의 장을 형성하시고, 정부 차원에서 연구소 수준의 지원(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 같은?) 것도 이루어지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

항상 로쟈님 글 잘 보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펠릭스 2009-08-14 07:20   좋아요 0 | URL
최교수의 통섭개념의 오류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자연과학분야에서 관심을 갖은 분은 더 없을까요? (생물학 : 사회학, 과사철, 철학,,,)

로쟈 2009-08-14 07:31   좋아요 0 | URL
'통섭'이란 말이 이렇게 유행어가 될 줄은 최재천 교수도 예상치 못했을 거 같아요. 소위 학문의 '대통합'을 뜻하는데, 과학철학이나 과학사회학을 하시는 분들도 그런 방향으로 연구를 하시는 건가요? 방향이 다른 통섭?..

펠릭스 2009-08-14 09:48   좋아요 0 | URL
물리학에서도 통일된 하나의 힘을 찾는다는데요. 통섭, 역시 한 뿌리로 서로 통합이 가능하다는 얘기 같은데, 저는 어떤 소설가의 독서목록과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처음 들은 말(통섭)입니다. 그 개념을 조금 알고서야 생각했습니다. 우리 안으로 그 개념이 들오고 있거나, 이미 들어와 어느 정도 앞서가 있던가 싶더군요.
 

이번달 잡지 <공간>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에 대한 것이다. 미디어아트에 절반을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에 별반 관심이 없다 보니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는 못한 책이다. 미디어아트의 현단계가 궁금한 독자라면 일독해봄 직하다.

 

공간(09년 8월호) 미디어아트, 예술의 최전선

“20세기에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기술이 벤야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미학을 구상하게 했듯이, 21세기에 컴퓨터와 디지털이라는 합성기술 또는 기술생성 역시 우리에게 새로운 미학을 구성할 과제를 제기하다.”   

‘예술의 최전선’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책 <미디어아트>의 편자가 서문에 적어놓은 문제의식이다.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8명의 인터뷰를 모은 이 책은 그러한 과제가 아직 완전한 형태로는 아니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게 한다. 디지털 예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서 미디어아트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현 단계의 성취를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상응하는 미디어아트의 구호는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이다. 소위 정보혁명의 생산패러다임이 가능하게 만든 ‘기술합성’은 오늘날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게 하는 대신 ‘혼합현실’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당초 군사․산업 용도에서 개발된 영상기술은 ‘뉴미디어아트’ 혹은 ‘디지털 예술 실천’을 낳았다. 이것은 전통적인 예술의 성격을 얼마만큼 바꿔놓을 수 있을까? 몇 사람의 주장을 따라가 본다.   

텔레마티크 아트의 선구자인 로이 애스콧은 디지털 아트가 창출해낸 ‘가변현실’이 우리의 자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여러 개의 인격과 정체성을 갖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며, 이러한 변형적 인격의 추가가 미디어아트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많은 자아, 많은 현존, 많은 세계, 많은 의식의 수준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네트 위의 모든 파이버와, 노드, 서버가 우리 자신의 일부이고 잠재성이라면, 이 네트와의 상호작용은 분명 우리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통합된 자아 대신에 다중자아를 갖게 될 것이며 그 결과는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게 애스콧의 낙관주의다.  

컴퓨터게임의 열광자인 도널드 마리넬리는 지금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다면 “세계는 비디오게임이고, 모든 인간은 그저 아바타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초당 100메가바이트의 속도로 어디서나 무선 접속이 가능해지는 현실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북한 전역에 비행기로 닌텐도 DS 시스템을 대량으로 뿌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한다.    

인터랙티브 아트 작업을 하는 사이먼 페니는 신체와 공간과 사물 사이의 ‘교섭’, 곧 오브제와의 신체적 인터랙션을 화두로 삼는다. 흥미롭게도 그는 아직까지 많은 미디어아트가 사람들에게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도 인정하는데, 작업의 목적과 거기에 사용되는 기술이 잘 융합되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그 역시 낙관주의의 대열에 선다. 20세기가 영화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게임의 세기가 될 것이며, 게임의 멜리에스나 뤼미에르가 등장하고 있는 만큼, 언젠가는 모바일 게임의 셰익스피어도 탄생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인터랙티브 아트에서도 ‘작가’는 전통적 예술에서와 같은 의의를 갖는 것일까?).   

새로운 3D 디스플레이를 발전시켜온 일본의 가와구치 요이치로는 자기복제를 하는 인공생명의 창조를 예술적 과제로 삼고 있는데, 그에게 예술이란 한마디로 ‘생존’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과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생명체를 만들고 싶어 하지만, 컴퓨터그래픽이나 로봇의 형태로 아직까지 고안해낼 수 있는 유전적 알고리듬은 5억 년 전의 생명체 수준이다. 진짜 생명체의 신비로운 부분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며, 새와 물고기와 나비와 지네, 바퀴벌레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키네틱 아트 작업에서 로보틱 아트로 넘어가고자 하는 한국의 작가 최우람은 기계에 인간과 동등한 욕망이나 욕심, 잠재욕구까지 불어넣고 싶어 한다. 마치 조물주처럼 기계 생명체들의 생태계까지 만드는 것이 그의 예술적 야심이다. 그가 작업을 구상하는 시간의 30-40%는 동물과 식물을 바라보는 데 바친다고 한다. 그것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완결된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은 예술과 기술의 공조이고, 공진화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첨단 기술을 통해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나고, 기술자(엔지니어)들은 그러한 예술에서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 미학을 관장해온 칸트적 미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듯하다. ‘미적 자율성’이나 ‘무목적의 목적성’ 같은 개념이 예술과 기술의 극단적인 결합 형태인 미디어아트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과 ‘기술’을 모두 뜻하던 ‘아트(Art)’란 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싶다. ‘예술의 최전선’은 그렇게 ‘예술의 기원’과 만난다.  

09.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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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술-인문학-과학기술의 통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8-13 19:22 
    어제 리뷰를 옮겨놓은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는 UAT시리즈의 두번째 책으로 나온 것이다. UAT는 'Ubiquitous Art & Technology'의 약자인데, '유비쿼터스 시대의 예술과 기술' 정도의 뜻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미래교육준비단에서 추진하는 출판 프로젝트로 앞으로 나올 3, 4권의 가제는 각각 '인공생명 예술의 이론과 실천', '예술과 바이오테크놀로지'로 돼
  2. 현대적 미술이란 무엇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27 11:56 
    오랜만에 학교에 와보니 건축전문 월간지 <공간(Space)>(506호)가 책상에 놓여 있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의 <이것이 현대적 미술>(갤리온, 2009)에 대한 서평을 실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미술평론가 반이정씨가 꼽은 '올해의 미술책' 두 권이 진중권의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와 바로 이 책 <이것이 현대적 미술>이었다. 우연찮게도 두 권에 대한 서평을 같은 지면에 
 
 
펠릭스 2009-08-1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사 목적용 작전(출구전략 등), 기술(영상,로봇 등), 행정 등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군요.

펠릭스 2009-08-1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 교수가 대학의 '학내규정'에 따라 재임용에 거부되었군요.
조직과 개인 그리고 생각, 반대든 찬성하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면 눈여겨 볼만한 것들이 있을텐데,,,결정자들이 여유를 갖었으면,
"차이의 존중(조너선 색스/ 말글빛냄)"이 생각납니다.
 

지난달말에 나온 책으로 언론리뷰에서 '묻힌' 책의 하나는 이택광 교수의 <무례한 복음>(난장, 2009)이다. "엉터리 시장주의와 먹고사니즘이 판치는 한국사회에 날리는 직격탄!"이란 카피가 책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시사칼럼/비평 모음집인데(저자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들을 갈무리한 일종의 '블룩'이기도 하다), '무례한 복음'이란 타이틀은 좀 의외다(의외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의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경제>(부키, 2005)를 연상시키는 부제 '쾌도난마 한국문화'도 좀 덜 참신하다. '문화연대기 2008-2009'라는 영어 제목이 책의 실상에 가장 가깝다. 그리고 그게 이 책의 의의이기도 하다. 가장 적극적으로, 대놓고 '실시간 문화비평'을 하는 '문화비평가'들이 드물어진 시점이라(그 많던 문화평론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의 작업이 도드라져 보인다. 쌓이게 되면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력한 자료(연대기!)의 하나가 될 듯싶다.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9. 08. 08) "우리 사회, 먹고사니즘만이 횡행" 

2007년 12월 4일부터 2009년 2월 13일까지의 대한민국.

문화평론가 이택광(41ㆍ사진)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가 쓴 비평집 <무례한 복음>(난장 발행)의 평론 대상이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강마에와 용산참사와 ‘디자인 서울’과 김연아에 열광하는 40대 아저씨들이 한 두름으로 엮여 도마에 오른다. 정신분석의 방법론을 회칼 삼아 이 교수가 가른 대한민국은, 비릿한 쾌락과 ‘먹고사니즘’으로 뱃속을 채우고 있다.

“지금 사회에서 정치는 실종됐습니다. 자본주의가 주는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어요.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비평이 사회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 교수는 “숨어 있는 문화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문화비평이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서 영화 비평, 음악 비평과 같은 장르 비평은 이미 설 자리를 잃었다”며 비평의 책무, 또는 존재 가치를 사회에 대한 ‘개입’에서 찾았다.

“나는 문화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을 발굴해내는 것을 비평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문화비평은 이론의 자기지시성을 벗어나 그 이론의 대상을 현실로 돌려세우는 실천적이고 수행적인 작업입니다.”

예컨대 원더걸스에 대한 열광에서 이 교수는 귀엽고 섹시한 이미지를 ‘나눠 갖는’ 방식에 주목한다. 각 세대가 원더걸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원더걸스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10대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시각이다. 10대가 ‘어른들’의 시선을 받으려면 원더걸스처럼 기성세대의 감수성에 맞는 존재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기성 사회가 강조하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우리 사회에는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는 쾌락의 평등주의, 그리고 ‘나도 먹고 살아야되지 않겠느냐’는 먹고사니즘이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실용과 경제를 구원이라 외치는 ‘무례한 복음’이 너무도 강렬하게 파고들고 있어요. 문화비평의 역할은 대중에게 그러한 진실을 간파하는 감식안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유상호기자) 

09. 08. 11.  

P.S. 다양한 문화현상과 사건들을 스케치하고 촌평과 함께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저자의 '문화비평' 대상에 '로쟈'도 한 차례가 거명되고 있는데, '이론수입국의 징후'(08. 03. 09)란 꼭지에서다. 랑시에르 번역논쟁을 아예 사건일지로까지 정리해놓기도 했다(215쪽). '로쟈'와 관련된 부분은 이렇다(213-214쪽).   

일전에 랑시에르 번역본을 가지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바 있다. 유명한 알라디너 로쟈가 랑시에르의 한글 번역본에 대해 비평한 것이 발단이었다. 옛날에 비한다면 훨씬 살살 다룬 것 같은데도, 옮긴이가 로쟈의 오역 지적을 참지 못했는지 고소까지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한 건 알라딘이 옮긴이의 항의로 로쟈의 원 글을 블라인드 처리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이게 더 황당하고 우려스러운 일이다. 알라딘이 로쟈 때문에 덕본 게 얼마인가? 지금이야 어떤 '계약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초기에 알라딘에 '자발적'으로 논평을 올려준 건 로쟈였다. 알라딘도 기업이기 때문에 '기업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건가? 슬라보예 지젝은 아마존에 오르는 자기 책에 대한 험담에 불평을 하곤 하는데, 이런 불평 때문에 아마존이 '자발적'으로 그 논평들을 지워버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런 문제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게 이른바 '시장질서'다. '시장질서'가 싫다면, 뭐 그때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겠지만, 기업논리를 내세우겠다면 시장질서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가 만년 이론수입국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면, 인문학자들끼리 연대의식을 기를 필요가 있다. 학문은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 학문 집단의 구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나아가서 보면 학문은 일종의 체계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학문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거인' 위에 올라탄 난장이에 불과하다. 좀 틀렸다고 해서 잡아먹을 듯이 덤빌 이유도 없고, 그 틀린 걸 누가 폭로했다고 해서 발끈할 이유도 없다. 틀렸다면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힘을 모아 조금씩 수정해가는 게 올바른 길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사법부'의 힘을 빌려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 옮긴이의 발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론수입국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건 '정확한' 번역일 테고, 이런 완벽한 번역물을 혼자 만들어낸다는 건 여러 모로 한계가 있다. 사후 교정이 필수적인 거다. 따라서 이런 '소란'은 어쩔 수 없이 거쳐야할 통과의례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오역을 지적하는 걸 하나의 장르로 만든 게 로쟈의 업적이라면 업적이고, 이런 '불경한' 업적에서 우리 방식의 '사유'가 출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알고 보면, 서양의 철학이란 것도 모두 고전에 대한 오역과 오독을 지적하면서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인문학자들의 '연대의식' 필요성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덧붙여 한가지 해명하자면 알라딘과 '로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계약관계'도 아니다. '알라딘 서재'의 이용약관에 동의한 것 말고는 그렇다(주 거래서점이니 돈은 내가 더 많이 쓰는군!). 가끔 접하는 이런 의혹/오해는 그 관계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뻘짓'을 내가 하고 있는 건가란 의문은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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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1 16:24   좋아요 0 | URL
생산되는 물건에 대한 아무런 말이 없다면,
그것은 고여있는 물과 같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각각의 입장에서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문화비평과 관련 학자간의 연대의식은
매우 중요하며, 꼭 필요합니다.

논쟁이 없다는 것은 사유가 없다는 것이며, 사유가 없는
사회는 왜곡되거나 자존력을 잃고 쓸어집니다. 우리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살인자에 대한 증오심은 불같지만,
그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라 했습니다.
꾸준한 피드백만이 건강히 발전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로쟈 2009-08-11 16:51   좋아요 0 | URL
'연대'가 잘 안되죠. 되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하고, 잘 안하는 '성향'들이기도 해서요...

펠릭스 2009-08-11 16:56   좋아요 0 | URL
'만년 이론수입국의 처지'라는 말에 "찡" 합니다.

로쟈 2009-08-11 22:21   좋아요 0 | URL
그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영어가 공용화되면 '해소'될 수는 있을 듯싶지만...

2009-08-11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1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2:14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를 평등의식이 강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냥 시샘만 강한 것이지요.평등은 연대를 수반하니까요.나는 남들이 누리는 권리를 누려야 하지만 남들은 내가 누리는 권리를 누리지 못해도 당연하다는 사고 방식은 평등이 아닙니다.여기서 무슨 연대가 나오겠습니까?

로쟈 2009-08-11 22:17   좋아요 0 | URL
예리한 지적이신데요. 송호근 교수의 책 제목이 바뀌어야겠습니다. '한국인의 시샘주의'라고.^^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3:01   좋아요 0 | URL
아...그 책 보셨군요.공병호나 송호근을 비롯하여 '한국인은 평등의식이 강하여 부자들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요.
그런데 송호근의 러시아 문학 감상수준은 어느 정도로 평가하세요? 전문가 의견을 듣고 싶네요.

로쟈 2009-08-11 23:03   좋아요 0 | URL
취향에 대해 가타부타할 건 아닐 듯싶은데요. 러시아문학 애호가라면 환영할 일이죠. 전에 한 책에서 투르게네프의 <아샤> 이야기를 <첫사랑>으로 잘못 적어놓은 건 있더군요. 하지만 오래전 기억이어서 그럴 테니 흠이라고 할 순 없지요...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3:20   좋아요 0 | URL
송호근이 신문에 쓰는 과격한 칼럼을 읽을 땐 무섭기도 해요.문학애호가 같은 글과는 딴판인 것 같아서요.요즘 그의 초창기 저작인 <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을 구하려고 헌책방 순례 때 찾아 보는데 안 나오더라구요.

로쟈 2009-08-11 23:29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전에 좀 들춰본 책 같군요. 나이들면 보수화되는 게 다반사인 듯해요...

Sati 2009-08-12 00:43   좋아요 0 | URL
나이들면서 보수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 같아요.

펠릭스 2009-08-12 20:52   좋아요 0 | URL
송호근 교수의 칼럼을 읽어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숭례문 화재 이후에 쓴 글을요.(문학애호가 같은 글이라)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3:22   좋아요 0 | URL
랑시에르 건은 이제 완전히 끝난 겁니까?

로쟈 2009-08-11 23:30   좋아요 0 | URL
네, 작년에 종료된 일이죠...
 
죽음과 내셔널리즘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미 며칠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과 미학>(도서출판b, 2009)에 대한 것이다. 책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걸 적당한 분량으로 요령있게 정리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걸 한번 더 깨닫게 해준 기사다. 가라타니가 사용하는 몇가지 용어들이 문제였는데('스테이트'니 '호수적'이니 하는 말들이 그렇다), '어소시에이셔니즘' 같은 경우는 편집자가 친절하게 원어를 병기해주었다. '서평의 달인'이 아직 멀었다...  

한겨레21(09. 08. 17) 네이션이여, 칸트적 상상력을 발휘하라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의 세 번째 책 <네이션과 미학>(도서출판b 펴냄)이 출간됨으로써 현 일본 최대 비평가의 주요 저작을 이제 우리말로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 1997)을 필두로 하여 소개된 그의 저작은 단행본만 열네 권이 나온 상태다. 앞으로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의 개정증보판이 추가로 번역될 예정인데, 한 비평가의 저작이 이만한 규모로 국내에 소개된 일은 극히 드물다.  

‘비평가’라고 했지만 사실 가라타니의 작업은 문학비평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분야를 아우른다. 도쿄대학 경제학부 출신으로 그의 출세작이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었으니 출발점부터가 조금 달랐다. 그가 ‘사상가’라는 타이틀로도 불리는 이유인데, 실제로 영어권에 소개된 <은유로서의 건축>과 <트랜스크리틱>은 모두 서구의 철학사상과의 대결하는 저작으로, 독특한 재해석을 통해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특히 칸트와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교환양식을 통한 네이션과 국가 체제 해명은 가라타니의 고유한 기여로 평가된다.  

<네이션과 미학>은 가라타니 자신이 전폭적으로 개고(改稿)하면서 <트랜스크리틱>의 ‘속편’이라고 부른 책이다. 그는 <세계공화국으로>에서 자신의 이론적 주장을 일반 독자들을 위해 간결하게 정리한 바 있으므로 이 세 저작을 한 데 묶어서 읽어보아도 좋겠다. 가라타니의 핵심적인 주장은 ‘서설 - 네이션과 미학’에서 잘 제시된다. 흔히 국가나 네이션(민족 혹은 국민)을 정치적이거나 문화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데 반해서 그는 경제적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가 도입하는 것은 생산양식이 아니라 교환양식이다. 그는 ‘상품교환’ 외에 ‘수탈과 재분배’, ‘호수적(호혜적) 교환’, 그리고 ‘자발적인 상호교환’이라는 네 가지 교환양식을 구분한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근대국가에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봉건국가적 교환양식이 남아있다. 다만 국민의 납세와 관료에 의한 재분배라는 형태로 변형돼 있을 뿐이다. 그리고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부른 네이션도 기본적으론 호수적 교환관계에서 유래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네이션-스테이트(국민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하지만, 가라타니는 이 세 가지가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묶여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구성한다고 본다. 이때 국가(스테이트)와 자본(시장사회)을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네이션이다.  

가라타니의 독특한 착안은 이 세 항의 관계를 칸트의 비판철학을 구성하는 세 항과 연관짓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과 감성이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이성과 감성이 종합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 가능성은 상상(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상상력은 타인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도덕법칙과 연결되기에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라”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타인을 수단으로서만 다루는 정치․경제적 상태를 폐기하라는 지상명령을 함축한다. 그런 점에서 가라타니는 칸트가 ‘독일 최초의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별칭에 값한다고 본다. 단, 이때의 사회주의는 국가 사회주의와는 다른 ‘어소시에이션이즘’(associationism)이다.  

가라타니는 헤르더나 피히테, 그리고 헤겔과 같은 낭만파 철학자들이 칸트의 어소시에이션이즘을 부정하고 그것을 내셔널리즘으로 전환시켰다고 본다. ‘칸트 대 헤겔’이라는 철학사적 구도를 ‘어소시에이션이즘 대 내셔널리즘’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그가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근대국가체제를 넘어 세계시민주의로, 세계공화국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칸트적 이념이다. 칸트는 국가나 공동체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어소시에이션의 가능성을 계속 찾았다고 한다. 가라타니의 이론적 작업 또한 그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하다. ‘칸트 그 가능성의 중심’을 통해서 네이션을 사고하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현단계다.   

09.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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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9-08-11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는 이성과 감성이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이성과 감성이 종합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 가능성은 상상(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상상력은 타인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도덕법칙과 연결되기에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라”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타인을 수단으로서만 다루는 정치․경제적 상태를 폐기하라는 지상명령을 함축한다. -> 제가 지식이 짧아서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ㅠ

로쟈 2009-08-11 08:53   좋아요 0 | URL
오성과 감성이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까지는 상식인데요, 가라타니는 거기서 그 매개가능성이 직접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가상)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상상력이란 윤리적 태도(다른 사람의 입장을 상상하는 것)의 근거이기에 어소시에이셔니즘이라는 정치 경제적 입장과 결합된다고 봅니다. 제가 정리할 수 있는 건 그렇고요. 조금 자세한 건 역시 책을 참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caline 2009-09-26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나마 글을 읽고 댓글을 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성과 오성(백종현씨는 지성이라고 번역 합니다만)은 명백히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력이 윤리와 관련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네요..칸트는 오히려 윤리를 이성의 영역으로 규정했고 인식(오성)의 영역과 윤리(이성)의 영역을 매개하는 것으로 판단력을 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아무래도 저건 고진의 실수라기 보단 서평가가 용어를 착각한거 같네요

로쟈 2009-09-26 01:50   좋아요 0 | URL
번역본은 '오성'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백종현 선생의 번역본은 '지성'이라고 쓰고 있어서 부득블 그렇게 처리했습니다. 고진이 '이성 혹은 오성'이라고 쓴 대목도 있어서요. 그리고 상상력을 윤리와 관련짓는 것이 고진의 고유한 주장이자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잊혀진 혁명가의 생애를 소설화한 정철훈의 <소설 김알렉산드라>(실천문학사, 2009)도 지난주에 나온 책이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기자인 저자가 러시아사 전공자이기도 하다는 건 이번에 알게 됐는데, 김알렉산드라는 그의 전공과도 관련되는 듯하다. <김알렉산드라 평전>(필담, 1996)에 이어서 이번에 소설로 한 여성 혁명가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하고 있다. '러시아 이야기'로 분류하여 관련기사를 정리해놓는다.

 

서울신문(09. 08. 08) “삶을 바꾸려 했던 에너지… 사랑… 여전히 우리사회에 유효한 것들”  

이토록 뜨거웠던 삶이 있었을까. 서른의 나이로 러시아혁명의 한가운데에서 활약했던, 또 한국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었던 여성혁명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1885~1918). 이미 90여년 전 떠난 그녀가 소설가이자 시인, 기자인 정철훈(50)의 손에 되살아 났다. 혁명가로서 그녀의 활약을 담은 ‘소설 김알렉산드라’(실천문학사 펴냄)를 내고 지난 6일 서울 종로에서 기자와 만난 작가는 “한마디로 그녀는 여성 김산(1905~1938·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혁명가)”이라고 말을 꺼냈다. 누구보다 그 영역에서 활약했지만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얘기였다.   

알렉산드라와 작가의 인연은 오래 됐다. 그는 1990년 한·소련 수교를 기회로 북방에서 활약한 운동가들의 자료를 찾기 위해 3년 정도 러시아에 머물렀다. 거기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김알렉산드라의 존재도 그때 알게 됐고, 그녀의 매력에 순식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공산당문서보관소, 중앙아시아 쪽에 있는 고문서보관소 등을 모두 뒤졌죠. 중앙아시아를 7차례 왔다갔다 했습니다.” 같이 활동했던 지인들을 수소문해 만나서는 구술까지 받았다. 그렇게 나온 것이 ‘김알렉산드라 평전’(1996). 이번 소설도 그때 모은 것을 활용했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에서는 현재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그는 “그녀가 보여줬던 자기 삶을 바꾸려는 진보적 에너지, 치열했던 사랑은 여전히 우리와 우리 사회에 유효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현재성을 위한 장치로 작품은 3부로 나눈 액자소설 형식을 취했다. 1·3부는 그녀의 아들이 등장해 어머니의 흔적을 좇으며 그 삶의 의의를 짚어본다. 본문 격인 2부에는 김알렉산드라가 직접 화자로 나와 처음 우랄 지방의 한 목재소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때부터의 생생한 활약상을 전한다.  

1900년대, 1950년대가 작품배경이지만, 작가는 “이건 오늘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는 “그녀가 곁에서 함께 했던 노동자들의 삶은 너무나 억눌려 있었다.”면서 “그랬기에 격렬한 시위나 노동운동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쌍용차 노동자들도 그런 비참한 상황”이라고 아쉬움을 전한다.  

혁명가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의외로 문체는 서정적이다. 사건을 중심으로 한 2부는 짧게 끊어친 문장이 긴박감을 주지만, 픽션이 많은 1·3부에서 배경을 그리는 솜씨나 도입부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한편의 동화나 애틋한 편지를 읽는 것 같다.    

일간지 문학전문기자 출신으로서의 자기 작품을 보면 어떨까. “2% 정도 모자란다고 할까요. 상업성의 눈치를 좀 안 본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팔리는 글도 있어야겠지만, 누군가는 써서 남겨야 할 글도 있다.”라고 자부심을 드러낸다.(강병철기자)  

09. 08. 09.  

P.S. 찾아보니 러시아에서는 작년에 김알렉산드라 자료집이 출간됐다. 저자의 참고문헌에 포함돼 있을 듯싶다. 김알렉산드라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박노자 교수가 약술한 기사도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3. 05. 25) 김알렉산드라의 독립운동 

우리 나라 학생들을 접하면서 필자가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는 조선독립운동사에 대해 대다수가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고 있는 점이었다. 대부분은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존경의 감정을 가지면서도 독립운동을 현재와는 전혀 무관한 과거사로 여겼다. 이처럼 생각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 교육이 독립운동을 일률적으로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건국을 위한 민족적 투쟁”만으로 묘사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식민지 암흑 속에서 투쟁의 중요한 목표는 일제로부터의 독립 쟁취와 민족국가 건설이었다. 문제는, 제도권의 서술이 ‘민족독립’만을 획일적으로 강조하고 식민지 시기 국내외 반체제운동의 여러 갈래들의 보편주의적·초(超)국가적 지향은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가 그들에게 강요한 일제 타도라는 급선무만이 강조되고, 세계와 미래를 향해 나아간 그들의 고귀한 뜻이 도외시되어 학생들이 자연히 독립운동을 지금의 우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옛날 일’만으로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선열들이 ‘건국’만을 염두에 두었을까 오늘의 대한민국의 존재가 바로 그들 뜻의 바른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예로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활동의 무대로 삼은 한국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1918년) 발기인이었던 탁월한 여류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스딴께비치:1885-1918)를 들어보자.  

1918년 9월에 러시아 반(反)혁명 세력에 붙잡힌 김알렉산드라는 타민족 출신으로 왜 러시아의 내전에 간여하느냐는 추궁에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사회주의자다. 러시아 볼셰비키와 함께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조선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는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만약 더 이상 볼셰비키와 손잡지 않겠다고 하면 석방해주겠다”라는 제안에 그는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고 대답하여 동지와 함께 총살을 당하는 것을 선택했다.

조국의 해방을 갈망하면서도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과 하나되기를 원했던 그가 만약 세계 각국에서 우리 나라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노동착취와 폭력, 폭언 등을 당하고 있는 것을 봤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자국의 노동자를 천민으로 만들고 외국에서 온 노동자는 거의 노예로 만드는 사회체제가 과연 그의 목표이었겠는가 그가 생각했던 해방 투쟁은 과연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끝나야 하는 것일까

김알렉산드라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만든 사람은 바로 이승만에 대해서 “미국의 제도를 민주주의 발전의 최종 결과로 아는 편협된 세계관의 소유자”라는 적절한 평을 한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1935)였다. 시종일관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군인 출신의 이동휘였지만, 1920년 말에 중국인, 일본인 동지와 함께 상하이에서 동아공산당연맹을 조직하면서 술자리에 같이 어울리며 장난도 치는 등 소박한 국제주의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와 또 다른 수많은 조선 공산주의자·아나키스트들의 국적을 초월한 연대투쟁은 지금 우리에게 동아시아 각국의 지역적 연대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1920년대 초반 연해주의 한국 빨치산들이 일본 군인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하여 그들의 계급의식을 깨우치는 데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국제주의자로서의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전세계의 근·현대사에서 조선의 진보적인 독립운동가만큼 큰 희생을 치른 집단은 드물 것이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으로부터, 북한에서는 독재체제 구축에 착수한 김일성 일파로부터, 남한에서는 역대의 반공정권으로부터 각각 탄압을 당해온 그들의 역경과 고난의 무게만큼 그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조선의 애국자로 남으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국제적인 시각을 우리는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다.(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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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0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 추억이 있다. 아련한...",
1980년 초여름, 교회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여자가 정면으로 보였다.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가르치던 그 여자는 스몰바지(검정군복)를 입고 있었다.
"아련한 추억이 있다. 우리에게는..".
여성혁명가(김알렉산드라),나혜석(최초서양화가),노서아가비(주인공/따냐)
그리고 80년대 어떤 노동운동가(그 여자),,,,
옛 혁명도 사랑도 다 지난 일이 되어버린, 작가의 아쉬움속에 조선의 진보적인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그들의 꿈이었던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봅니다.

로쟈 2009-08-11 09:05   좋아요 0 | URL
그나마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주 없진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듯해요...

카스피 2009-08-10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구 소련에서 많이 숙청된 공산주의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국내의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네요.
친일한 사람의 후손은 국내에서 호의호식(뭐 뉴스보니 친일 후손들의 국가의 땅 찾기에 소송으로 맞대응한다고 하니 참 염치 없지요)하는데 비해 독립 운동가의 자손들은 국내와 국외(중국과 러시아등)에 참 많은 고생을 하니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로쟈 2009-08-11 09:03   좋아요 0 | URL
현대사가 일그러진 원인이죠...

2009-08-10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1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