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의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고명섭 기자가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과 미학>(도서출판b, 2009)을 다루고 있다. 사실 기사를 발견하고 잠시 당황했는데, 오전에 보낸 다음주 한겨레21의 출판면 기사에서 <네이션과 미학>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가급적 이런 서평의 중복을 피하려고 애쓰지만, 본의 아니게 이런 식으로 중복이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두번째 논문 '죽음과 내셔널리즘'을 주로 다룬 고기자와 달리 나는 '서설-네이션과 미학'에 한정하여 기사를 썼다. 애초엔 나도 두번째 논문에 초점을 맞추려다가(역자도 강추하고 있다) 표제가 되는 글을 언급하는 게 좋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짧은 지면이라 모두 다루긴 어려운 것. 때문에 아주 중복은 아니니 지면의 낭비에선 벗어날 수 있겠다...

  

한겨레(09. 08. 08) 칸트·프로이트와 '민족·국가'를 뛰어넘다

<네이션과 미학>은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사진)의 ‘네이션’(국민·민족·국가)에 관한 숙고가 담긴 논문을 모은 책이다. 특히 책 앞쪽에 배치된 두 편의 논문은 가라타니의 최근 사유를 집약적으로 품고 있다. 1990년대 말 이후 가라타니의 사상은 ‘트랜스크리틱’과 ‘세계공화국’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트랜스크리틱(횡단비판)이라는 방법으로 세계공화국이라는 이념을 도출하는 것이 가라타니의 최근 관심사인 것이다.  

 

가라타니는 2001년 출간한 <트랜스크리틱>(한국어판 2005년)에서 이 ‘횡단비판’을 실험한 바 있다. 그 책에서 그는 ‘비판’의 두 대가라 할 이마누엘 칸트와 카를 마르크스를 불러내,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는” 시도를 했다. <네이션과 미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논문 ‘죽음과 내셔널리즘-칸트와 프로이트’는 선행 작업을 이어받아 칸트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횡단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두 사람을 겹쳐 읽음으로써 ‘네이션’의 구성과 기능을 밝히고, 그 네이션을 극복한 ‘세계공화국’의 이념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 논문, 나아가 이 책의 목표다.

이 논문에서 가라타니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후기 프로이트’와 ‘후기 칸트’다. 이 둘 사이에는 외면하기 어려운 상동관계가 있다. “후기 프로이트와 후기 칸트가 유사한 것은 무엇보다도 후기에 그들 모두가 ‘영구평화’라는 문제에 온힘을 쏟았다는 점이다.” 말년의 칸트가 제출한 ‘영구평화론’은 1차세계대전이 참화를 남기고 끝난 뒤에 재발견됐다. 19세기 내내 칸트의 평화론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프로이트는 참전 군인들의 전쟁신경증을 통해 ‘초자아’를 발견함으로써 무의식의 구조를 재편했다.  

 

전기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초자아’의 원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1900)에서 꿈의 소망 실현을 방해하는 ‘검열관’의 기능을 거론하는데, 이 검열관이 바로 초자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검열관은 말하자면, 무의식에 장착된 ‘아버지의 법’이나 ‘사회적 규범’이었다. 전기 프로이트는 초자아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강제·주입돼 생겨난 것으로 본 것이다. 이와 달리 후기 프로이트가 발견한 초자아는 외적 강제의 결과가 아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 형성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죽음충동’이 외부로 향한 것이 ‘공격충동’인데, 이 공격충동이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와 그 장소를 공격함으로써 초자아가 만들어진다. 공격충동이 스스로 안으로 향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초자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초자아가 양심과 죄의식을 낳아 공격충동 자체를 억제한다는 사실이다. 초자아가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라타니는 초자아가 자아 안에서 ‘자율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초자아의 형성 메커니즘은 칸트의 ‘도덕법칙’에도 적용된다.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도덕법칙은 일종의 의무이자 명령인데, 칸트는 그 의무의 이행을 ‘자유’라고 말한다. 가라타니는 ‘의무가 어떻게 자유가 되는가?’ 하고 자문한 뒤 답한다. 도덕적 명령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입법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은 자율이고, 외적 강제 없이 스스로 행하므로 자유인 것이다. 그런 자율(=자유) 행위는 프로이트의 초자아가 스스로 자기 안의 공격충동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이 대목에서 가라타니는 프로이트가 초자아를 네이션과 같은 공동체 차원에서도 발견했음을 강조한다. “공동체도 초자아를 가질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 공동체적 초자아를 ‘문화’(문명)라고 불렀는데, 그 문명이 공동체의 건강성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인식했다. 마찬가지로 칸트의 자율도 공동체적 차원에서 작동할 수 있음을 가라타니는 상기시킨다. 이 ‘초자아적 자율’을 논리적으로 밀고나가면 인류적 차원의 공격충동·파괴충동을 극복한 세계공화국의 이념이 나타난다. 가라타니는 말년의 칸트가 자신의 역사철학을 통해 이 세계공화국의 이념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세계공화국 이념에 담긴 영구평화의 문제를 말년의 프로이트도 자신의 방식으로 고민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 세계공화국의 실현 가능성이다. 세계공화국이 실현된다는 것은 국민국가(네이션 스테이트)를 극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관건이 되는 것은 네이션이라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그가 보기에 네이션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네이션이 베네딕트 앤더슨 말대로 ‘상상의 공동체’라 하더라도,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적 힘과 근거를 지닌 ‘공동체’다. 가라타니는 이 네이션이 전근대 사회의 농촌공동체나 종교가 했던 공동체적 상호부조 기능을 대신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계급 착취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국민·민족 공동체’가 호명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네이션(국민·민족)은 자본주의체제의 약점을 보완하는 기능을 함으로써 자본주의체제의 불가결한 보충물로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내셔널리즘은 지적 계몽으로 비판한다고 해서 당장 해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장기적 실천을 통해서야 세계공화국 형태로 지양될 수 있다고 가라타니는 강조한다.(고명섭기자) 

09.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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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소시에이셔니즘 대 내셔널리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8-10 21:12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미 며칠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과 미학>(도서출판b, 2009)에 대한 것이다. 책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걸 적당한 분량으로 요령있게 정리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걸 한번 더 깨닫게 해준 기사다. 가라타니가 사용하는 몇가지 용어들이 문제였는데('스테이트'니 '호수적'이니 하는 말들이 그렇다), '어소시에이셔니즘' 같은 경우는 편집자가 친절하게 원어
 
 
펠릭스 2009-08-08 06:28   좋아요 0 | URL
마치 신문화전체주의적인(세계공화국) 발상같읍니다.
서로를(중국,한국,일본)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보다는 자신을(일본) 위해서는 상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발전시켜, 서로 하나가 되어 영구히 행복하자는 말처럼 들립니다. "초자아적 자율을 논리적으로 밀고나가면 인류적 차원의 공격충동·파괴충동을 극복한 세계공화국의 이념이 나타난다."

'식민지 근대의 페러독스는 초민족주의 및 전 지구적 공시성 강조'라는 말의 최종 지향점이 '세계공화국'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봤습니다.

중국과 구소련의 소수민족문제, 중동분쟁 그리고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주도권 싸움 등이 최종적으로 세계공화국를 향해 갈 수 있을까요, 초자아를 극복할 방법이 일을까요, 시간이 갈 수록 자아를 더 분명하게 할 도구들이 경제원리에 의해 발전되고 있는데, 물론 현재의 민주주의를 극복할 대안이라 제시하지만,,,,'초자아'가 걸립니다.

로쟈 2009-08-08 09:30   좋아요 0 | URL
두 가지 초자아가 있는데, 하나가 '법'과 관련된다면 다른 하나는 '유머'와 관련됩니다. 가라타니가 재해석하고 있는 건 두번째 초자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