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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잡지 <공간>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에 대한 것이다. 미디어아트에 절반을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에 별반 관심이 없다 보니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는 못한 책이다. 미디어아트의 현단계가 궁금한 독자라면 일독해봄 직하다.

 

공간(09년 8월호) 미디어아트, 예술의 최전선

“20세기에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기술이 벤야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미학을 구상하게 했듯이, 21세기에 컴퓨터와 디지털이라는 합성기술 또는 기술생성 역시 우리에게 새로운 미학을 구성할 과제를 제기하다.”   

‘예술의 최전선’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책 <미디어아트>의 편자가 서문에 적어놓은 문제의식이다.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8명의 인터뷰를 모은 이 책은 그러한 과제가 아직 완전한 형태로는 아니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게 한다. 디지털 예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서 미디어아트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현 단계의 성취를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상응하는 미디어아트의 구호는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이다. 소위 정보혁명의 생산패러다임이 가능하게 만든 ‘기술합성’은 오늘날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게 하는 대신 ‘혼합현실’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당초 군사․산업 용도에서 개발된 영상기술은 ‘뉴미디어아트’ 혹은 ‘디지털 예술 실천’을 낳았다. 이것은 전통적인 예술의 성격을 얼마만큼 바꿔놓을 수 있을까? 몇 사람의 주장을 따라가 본다.   

텔레마티크 아트의 선구자인 로이 애스콧은 디지털 아트가 창출해낸 ‘가변현실’이 우리의 자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여러 개의 인격과 정체성을 갖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며, 이러한 변형적 인격의 추가가 미디어아트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많은 자아, 많은 현존, 많은 세계, 많은 의식의 수준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네트 위의 모든 파이버와, 노드, 서버가 우리 자신의 일부이고 잠재성이라면, 이 네트와의 상호작용은 분명 우리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통합된 자아 대신에 다중자아를 갖게 될 것이며 그 결과는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게 애스콧의 낙관주의다.  

컴퓨터게임의 열광자인 도널드 마리넬리는 지금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다면 “세계는 비디오게임이고, 모든 인간은 그저 아바타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초당 100메가바이트의 속도로 어디서나 무선 접속이 가능해지는 현실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북한 전역에 비행기로 닌텐도 DS 시스템을 대량으로 뿌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한다.    

인터랙티브 아트 작업을 하는 사이먼 페니는 신체와 공간과 사물 사이의 ‘교섭’, 곧 오브제와의 신체적 인터랙션을 화두로 삼는다. 흥미롭게도 그는 아직까지 많은 미디어아트가 사람들에게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도 인정하는데, 작업의 목적과 거기에 사용되는 기술이 잘 융합되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그 역시 낙관주의의 대열에 선다. 20세기가 영화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게임의 세기가 될 것이며, 게임의 멜리에스나 뤼미에르가 등장하고 있는 만큼, 언젠가는 모바일 게임의 셰익스피어도 탄생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인터랙티브 아트에서도 ‘작가’는 전통적 예술에서와 같은 의의를 갖는 것일까?).   

새로운 3D 디스플레이를 발전시켜온 일본의 가와구치 요이치로는 자기복제를 하는 인공생명의 창조를 예술적 과제로 삼고 있는데, 그에게 예술이란 한마디로 ‘생존’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과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생명체를 만들고 싶어 하지만, 컴퓨터그래픽이나 로봇의 형태로 아직까지 고안해낼 수 있는 유전적 알고리듬은 5억 년 전의 생명체 수준이다. 진짜 생명체의 신비로운 부분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며, 새와 물고기와 나비와 지네, 바퀴벌레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키네틱 아트 작업에서 로보틱 아트로 넘어가고자 하는 한국의 작가 최우람은 기계에 인간과 동등한 욕망이나 욕심, 잠재욕구까지 불어넣고 싶어 한다. 마치 조물주처럼 기계 생명체들의 생태계까지 만드는 것이 그의 예술적 야심이다. 그가 작업을 구상하는 시간의 30-40%는 동물과 식물을 바라보는 데 바친다고 한다. 그것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완결된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은 예술과 기술의 공조이고, 공진화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첨단 기술을 통해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나고, 기술자(엔지니어)들은 그러한 예술에서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 미학을 관장해온 칸트적 미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듯하다. ‘미적 자율성’이나 ‘무목적의 목적성’ 같은 개념이 예술과 기술의 극단적인 결합 형태인 미디어아트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과 ‘기술’을 모두 뜻하던 ‘아트(Art)’란 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싶다. ‘예술의 최전선’은 그렇게 ‘예술의 기원’과 만난다.  

09.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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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술-인문학-과학기술의 통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8-13 19:22 
    어제 리뷰를 옮겨놓은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는 UAT시리즈의 두번째 책으로 나온 것이다. UAT는 'Ubiquitous Art & Technology'의 약자인데, '유비쿼터스 시대의 예술과 기술' 정도의 뜻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미래교육준비단에서 추진하는 출판 프로젝트로 앞으로 나올 3, 4권의 가제는 각각 '인공생명 예술의 이론과 실천', '예술과 바이오테크놀로지'로 돼
  2. 현대적 미술이란 무엇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27 11:56 
    오랜만에 학교에 와보니 건축전문 월간지 <공간(Space)>(506호)가 책상에 놓여 있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의 <이것이 현대적 미술>(갤리온, 2009)에 대한 서평을 실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미술평론가 반이정씨가 꼽은 '올해의 미술책' 두 권이 진중권의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와 바로 이 책 <이것이 현대적 미술>이었다. 우연찮게도 두 권에 대한 서평을 같은 지면에 
 
 
펠릭스 2009-08-1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사 목적용 작전(출구전략 등), 기술(영상,로봇 등), 행정 등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군요.

펠릭스 2009-08-1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 교수가 대학의 '학내규정'에 따라 재임용에 거부되었군요.
조직과 개인 그리고 생각, 반대든 찬성하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면 눈여겨 볼만한 것들이 있을텐데,,,결정자들이 여유를 갖었으면,
"차이의 존중(조너선 색스/ 말글빛냄)"이 생각납니다.
 

지난달말에 나온 책으로 언론리뷰에서 '묻힌' 책의 하나는 이택광 교수의 <무례한 복음>(난장, 2009)이다. "엉터리 시장주의와 먹고사니즘이 판치는 한국사회에 날리는 직격탄!"이란 카피가 책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시사칼럼/비평 모음집인데(저자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들을 갈무리한 일종의 '블룩'이기도 하다), '무례한 복음'이란 타이틀은 좀 의외다(의외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의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경제>(부키, 2005)를 연상시키는 부제 '쾌도난마 한국문화'도 좀 덜 참신하다. '문화연대기 2008-2009'라는 영어 제목이 책의 실상에 가장 가깝다. 그리고 그게 이 책의 의의이기도 하다. 가장 적극적으로, 대놓고 '실시간 문화비평'을 하는 '문화비평가'들이 드물어진 시점이라(그 많던 문화평론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의 작업이 도드라져 보인다. 쌓이게 되면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력한 자료(연대기!)의 하나가 될 듯싶다.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9. 08. 08) "우리 사회, 먹고사니즘만이 횡행" 

2007년 12월 4일부터 2009년 2월 13일까지의 대한민국.

문화평론가 이택광(41ㆍ사진)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가 쓴 비평집 <무례한 복음>(난장 발행)의 평론 대상이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강마에와 용산참사와 ‘디자인 서울’과 김연아에 열광하는 40대 아저씨들이 한 두름으로 엮여 도마에 오른다. 정신분석의 방법론을 회칼 삼아 이 교수가 가른 대한민국은, 비릿한 쾌락과 ‘먹고사니즘’으로 뱃속을 채우고 있다.

“지금 사회에서 정치는 실종됐습니다. 자본주의가 주는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어요.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비평이 사회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 교수는 “숨어 있는 문화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문화비평이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서 영화 비평, 음악 비평과 같은 장르 비평은 이미 설 자리를 잃었다”며 비평의 책무, 또는 존재 가치를 사회에 대한 ‘개입’에서 찾았다.

“나는 문화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을 발굴해내는 것을 비평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문화비평은 이론의 자기지시성을 벗어나 그 이론의 대상을 현실로 돌려세우는 실천적이고 수행적인 작업입니다.”

예컨대 원더걸스에 대한 열광에서 이 교수는 귀엽고 섹시한 이미지를 ‘나눠 갖는’ 방식에 주목한다. 각 세대가 원더걸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원더걸스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10대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시각이다. 10대가 ‘어른들’의 시선을 받으려면 원더걸스처럼 기성세대의 감수성에 맞는 존재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기성 사회가 강조하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우리 사회에는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는 쾌락의 평등주의, 그리고 ‘나도 먹고 살아야되지 않겠느냐’는 먹고사니즘이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실용과 경제를 구원이라 외치는 ‘무례한 복음’이 너무도 강렬하게 파고들고 있어요. 문화비평의 역할은 대중에게 그러한 진실을 간파하는 감식안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유상호기자) 

09. 08. 11.  

P.S. 다양한 문화현상과 사건들을 스케치하고 촌평과 함께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저자의 '문화비평' 대상에 '로쟈'도 한 차례가 거명되고 있는데, '이론수입국의 징후'(08. 03. 09)란 꼭지에서다. 랑시에르 번역논쟁을 아예 사건일지로까지 정리해놓기도 했다(215쪽). '로쟈'와 관련된 부분은 이렇다(213-214쪽).   

일전에 랑시에르 번역본을 가지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바 있다. 유명한 알라디너 로쟈가 랑시에르의 한글 번역본에 대해 비평한 것이 발단이었다. 옛날에 비한다면 훨씬 살살 다룬 것 같은데도, 옮긴이가 로쟈의 오역 지적을 참지 못했는지 고소까지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한 건 알라딘이 옮긴이의 항의로 로쟈의 원 글을 블라인드 처리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이게 더 황당하고 우려스러운 일이다. 알라딘이 로쟈 때문에 덕본 게 얼마인가? 지금이야 어떤 '계약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초기에 알라딘에 '자발적'으로 논평을 올려준 건 로쟈였다. 알라딘도 기업이기 때문에 '기업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건가? 슬라보예 지젝은 아마존에 오르는 자기 책에 대한 험담에 불평을 하곤 하는데, 이런 불평 때문에 아마존이 '자발적'으로 그 논평들을 지워버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런 문제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게 이른바 '시장질서'다. '시장질서'가 싫다면, 뭐 그때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겠지만, 기업논리를 내세우겠다면 시장질서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가 만년 이론수입국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면, 인문학자들끼리 연대의식을 기를 필요가 있다. 학문은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 학문 집단의 구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나아가서 보면 학문은 일종의 체계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학문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거인' 위에 올라탄 난장이에 불과하다. 좀 틀렸다고 해서 잡아먹을 듯이 덤빌 이유도 없고, 그 틀린 걸 누가 폭로했다고 해서 발끈할 이유도 없다. 틀렸다면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힘을 모아 조금씩 수정해가는 게 올바른 길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사법부'의 힘을 빌려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 옮긴이의 발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론수입국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건 '정확한' 번역일 테고, 이런 완벽한 번역물을 혼자 만들어낸다는 건 여러 모로 한계가 있다. 사후 교정이 필수적인 거다. 따라서 이런 '소란'은 어쩔 수 없이 거쳐야할 통과의례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오역을 지적하는 걸 하나의 장르로 만든 게 로쟈의 업적이라면 업적이고, 이런 '불경한' 업적에서 우리 방식의 '사유'가 출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알고 보면, 서양의 철학이란 것도 모두 고전에 대한 오역과 오독을 지적하면서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인문학자들의 '연대의식' 필요성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덧붙여 한가지 해명하자면 알라딘과 '로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계약관계'도 아니다. '알라딘 서재'의 이용약관에 동의한 것 말고는 그렇다(주 거래서점이니 돈은 내가 더 많이 쓰는군!). 가끔 접하는 이런 의혹/오해는 그 관계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뻘짓'을 내가 하고 있는 건가란 의문은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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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1 16:24   좋아요 0 | URL
생산되는 물건에 대한 아무런 말이 없다면,
그것은 고여있는 물과 같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각각의 입장에서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문화비평과 관련 학자간의 연대의식은
매우 중요하며, 꼭 필요합니다.

논쟁이 없다는 것은 사유가 없다는 것이며, 사유가 없는
사회는 왜곡되거나 자존력을 잃고 쓸어집니다. 우리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살인자에 대한 증오심은 불같지만,
그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라 했습니다.
꾸준한 피드백만이 건강히 발전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로쟈 2009-08-11 16:51   좋아요 0 | URL
'연대'가 잘 안되죠. 되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하고, 잘 안하는 '성향'들이기도 해서요...

펠릭스 2009-08-11 16:56   좋아요 0 | URL
'만년 이론수입국의 처지'라는 말에 "찡" 합니다.

로쟈 2009-08-11 22:21   좋아요 0 | URL
그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영어가 공용화되면 '해소'될 수는 있을 듯싶지만...

2009-08-11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1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2:14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를 평등의식이 강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냥 시샘만 강한 것이지요.평등은 연대를 수반하니까요.나는 남들이 누리는 권리를 누려야 하지만 남들은 내가 누리는 권리를 누리지 못해도 당연하다는 사고 방식은 평등이 아닙니다.여기서 무슨 연대가 나오겠습니까?

로쟈 2009-08-11 22:17   좋아요 0 | URL
예리한 지적이신데요. 송호근 교수의 책 제목이 바뀌어야겠습니다. '한국인의 시샘주의'라고.^^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3:01   좋아요 0 | URL
아...그 책 보셨군요.공병호나 송호근을 비롯하여 '한국인은 평등의식이 강하여 부자들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요.
그런데 송호근의 러시아 문학 감상수준은 어느 정도로 평가하세요? 전문가 의견을 듣고 싶네요.

로쟈 2009-08-11 23:03   좋아요 0 | URL
취향에 대해 가타부타할 건 아닐 듯싶은데요. 러시아문학 애호가라면 환영할 일이죠. 전에 한 책에서 투르게네프의 <아샤> 이야기를 <첫사랑>으로 잘못 적어놓은 건 있더군요. 하지만 오래전 기억이어서 그럴 테니 흠이라고 할 순 없지요...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3:20   좋아요 0 | URL
송호근이 신문에 쓰는 과격한 칼럼을 읽을 땐 무섭기도 해요.문학애호가 같은 글과는 딴판인 것 같아서요.요즘 그의 초창기 저작인 <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을 구하려고 헌책방 순례 때 찾아 보는데 안 나오더라구요.

로쟈 2009-08-11 23:29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전에 좀 들춰본 책 같군요. 나이들면 보수화되는 게 다반사인 듯해요...

Sati 2009-08-12 00:43   좋아요 0 | URL
나이들면서 보수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 같아요.

펠릭스 2009-08-12 20:52   좋아요 0 | URL
송호근 교수의 칼럼을 읽어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숭례문 화재 이후에 쓴 글을요.(문학애호가 같은 글이라)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3:22   좋아요 0 | URL
랑시에르 건은 이제 완전히 끝난 겁니까?

로쟈 2009-08-11 23:30   좋아요 0 | URL
네, 작년에 종료된 일이죠...
 
죽음과 내셔널리즘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미 며칠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과 미학>(도서출판b, 2009)에 대한 것이다. 책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걸 적당한 분량으로 요령있게 정리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걸 한번 더 깨닫게 해준 기사다. 가라타니가 사용하는 몇가지 용어들이 문제였는데('스테이트'니 '호수적'이니 하는 말들이 그렇다), '어소시에이셔니즘' 같은 경우는 편집자가 친절하게 원어를 병기해주었다. '서평의 달인'이 아직 멀었다...  

한겨레21(09. 08. 17) 네이션이여, 칸트적 상상력을 발휘하라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의 세 번째 책 <네이션과 미학>(도서출판b 펴냄)이 출간됨으로써 현 일본 최대 비평가의 주요 저작을 이제 우리말로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 1997)을 필두로 하여 소개된 그의 저작은 단행본만 열네 권이 나온 상태다. 앞으로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의 개정증보판이 추가로 번역될 예정인데, 한 비평가의 저작이 이만한 규모로 국내에 소개된 일은 극히 드물다.  

‘비평가’라고 했지만 사실 가라타니의 작업은 문학비평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분야를 아우른다. 도쿄대학 경제학부 출신으로 그의 출세작이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었으니 출발점부터가 조금 달랐다. 그가 ‘사상가’라는 타이틀로도 불리는 이유인데, 실제로 영어권에 소개된 <은유로서의 건축>과 <트랜스크리틱>은 모두 서구의 철학사상과의 대결하는 저작으로, 독특한 재해석을 통해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특히 칸트와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교환양식을 통한 네이션과 국가 체제 해명은 가라타니의 고유한 기여로 평가된다.  

<네이션과 미학>은 가라타니 자신이 전폭적으로 개고(改稿)하면서 <트랜스크리틱>의 ‘속편’이라고 부른 책이다. 그는 <세계공화국으로>에서 자신의 이론적 주장을 일반 독자들을 위해 간결하게 정리한 바 있으므로 이 세 저작을 한 데 묶어서 읽어보아도 좋겠다. 가라타니의 핵심적인 주장은 ‘서설 - 네이션과 미학’에서 잘 제시된다. 흔히 국가나 네이션(민족 혹은 국민)을 정치적이거나 문화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데 반해서 그는 경제적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가 도입하는 것은 생산양식이 아니라 교환양식이다. 그는 ‘상품교환’ 외에 ‘수탈과 재분배’, ‘호수적(호혜적) 교환’, 그리고 ‘자발적인 상호교환’이라는 네 가지 교환양식을 구분한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근대국가에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봉건국가적 교환양식이 남아있다. 다만 국민의 납세와 관료에 의한 재분배라는 형태로 변형돼 있을 뿐이다. 그리고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부른 네이션도 기본적으론 호수적 교환관계에서 유래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네이션-스테이트(국민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하지만, 가라타니는 이 세 가지가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묶여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구성한다고 본다. 이때 국가(스테이트)와 자본(시장사회)을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네이션이다.  

가라타니의 독특한 착안은 이 세 항의 관계를 칸트의 비판철학을 구성하는 세 항과 연관짓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과 감성이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이성과 감성이 종합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 가능성은 상상(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상상력은 타인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도덕법칙과 연결되기에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라”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타인을 수단으로서만 다루는 정치․경제적 상태를 폐기하라는 지상명령을 함축한다. 그런 점에서 가라타니는 칸트가 ‘독일 최초의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별칭에 값한다고 본다. 단, 이때의 사회주의는 국가 사회주의와는 다른 ‘어소시에이션이즘’(associationism)이다.  

가라타니는 헤르더나 피히테, 그리고 헤겔과 같은 낭만파 철학자들이 칸트의 어소시에이션이즘을 부정하고 그것을 내셔널리즘으로 전환시켰다고 본다. ‘칸트 대 헤겔’이라는 철학사적 구도를 ‘어소시에이션이즘 대 내셔널리즘’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그가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근대국가체제를 넘어 세계시민주의로, 세계공화국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칸트적 이념이다. 칸트는 국가나 공동체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어소시에이션의 가능성을 계속 찾았다고 한다. 가라타니의 이론적 작업 또한 그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하다. ‘칸트 그 가능성의 중심’을 통해서 네이션을 사고하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현단계다.   

09.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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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9-08-11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는 이성과 감성이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이성과 감성이 종합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 가능성은 상상(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상상력은 타인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도덕법칙과 연결되기에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라”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타인을 수단으로서만 다루는 정치․경제적 상태를 폐기하라는 지상명령을 함축한다. -> 제가 지식이 짧아서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ㅠ

로쟈 2009-08-11 08:53   좋아요 0 | URL
오성과 감성이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까지는 상식인데요, 가라타니는 거기서 그 매개가능성이 직접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가상)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상상력이란 윤리적 태도(다른 사람의 입장을 상상하는 것)의 근거이기에 어소시에이셔니즘이라는 정치 경제적 입장과 결합된다고 봅니다. 제가 정리할 수 있는 건 그렇고요. 조금 자세한 건 역시 책을 참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caline 2009-09-26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나마 글을 읽고 댓글을 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성과 오성(백종현씨는 지성이라고 번역 합니다만)은 명백히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력이 윤리와 관련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네요..칸트는 오히려 윤리를 이성의 영역으로 규정했고 인식(오성)의 영역과 윤리(이성)의 영역을 매개하는 것으로 판단력을 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아무래도 저건 고진의 실수라기 보단 서평가가 용어를 착각한거 같네요

로쟈 2009-09-26 01:50   좋아요 0 | URL
번역본은 '오성'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백종현 선생의 번역본은 '지성'이라고 쓰고 있어서 부득블 그렇게 처리했습니다. 고진이 '이성 혹은 오성'이라고 쓴 대목도 있어서요. 그리고 상상력을 윤리와 관련짓는 것이 고진의 고유한 주장이자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잊혀진 혁명가의 생애를 소설화한 정철훈의 <소설 김알렉산드라>(실천문학사, 2009)도 지난주에 나온 책이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기자인 저자가 러시아사 전공자이기도 하다는 건 이번에 알게 됐는데, 김알렉산드라는 그의 전공과도 관련되는 듯하다. <김알렉산드라 평전>(필담, 1996)에 이어서 이번에 소설로 한 여성 혁명가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하고 있다. '러시아 이야기'로 분류하여 관련기사를 정리해놓는다.

 

서울신문(09. 08. 08) “삶을 바꾸려 했던 에너지… 사랑… 여전히 우리사회에 유효한 것들”  

이토록 뜨거웠던 삶이 있었을까. 서른의 나이로 러시아혁명의 한가운데에서 활약했던, 또 한국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었던 여성혁명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1885~1918). 이미 90여년 전 떠난 그녀가 소설가이자 시인, 기자인 정철훈(50)의 손에 되살아 났다. 혁명가로서 그녀의 활약을 담은 ‘소설 김알렉산드라’(실천문학사 펴냄)를 내고 지난 6일 서울 종로에서 기자와 만난 작가는 “한마디로 그녀는 여성 김산(1905~1938·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혁명가)”이라고 말을 꺼냈다. 누구보다 그 영역에서 활약했지만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얘기였다.   

알렉산드라와 작가의 인연은 오래 됐다. 그는 1990년 한·소련 수교를 기회로 북방에서 활약한 운동가들의 자료를 찾기 위해 3년 정도 러시아에 머물렀다. 거기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김알렉산드라의 존재도 그때 알게 됐고, 그녀의 매력에 순식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공산당문서보관소, 중앙아시아 쪽에 있는 고문서보관소 등을 모두 뒤졌죠. 중앙아시아를 7차례 왔다갔다 했습니다.” 같이 활동했던 지인들을 수소문해 만나서는 구술까지 받았다. 그렇게 나온 것이 ‘김알렉산드라 평전’(1996). 이번 소설도 그때 모은 것을 활용했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에서는 현재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그는 “그녀가 보여줬던 자기 삶을 바꾸려는 진보적 에너지, 치열했던 사랑은 여전히 우리와 우리 사회에 유효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현재성을 위한 장치로 작품은 3부로 나눈 액자소설 형식을 취했다. 1·3부는 그녀의 아들이 등장해 어머니의 흔적을 좇으며 그 삶의 의의를 짚어본다. 본문 격인 2부에는 김알렉산드라가 직접 화자로 나와 처음 우랄 지방의 한 목재소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때부터의 생생한 활약상을 전한다.  

1900년대, 1950년대가 작품배경이지만, 작가는 “이건 오늘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는 “그녀가 곁에서 함께 했던 노동자들의 삶은 너무나 억눌려 있었다.”면서 “그랬기에 격렬한 시위나 노동운동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쌍용차 노동자들도 그런 비참한 상황”이라고 아쉬움을 전한다.  

혁명가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의외로 문체는 서정적이다. 사건을 중심으로 한 2부는 짧게 끊어친 문장이 긴박감을 주지만, 픽션이 많은 1·3부에서 배경을 그리는 솜씨나 도입부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한편의 동화나 애틋한 편지를 읽는 것 같다.    

일간지 문학전문기자 출신으로서의 자기 작품을 보면 어떨까. “2% 정도 모자란다고 할까요. 상업성의 눈치를 좀 안 본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팔리는 글도 있어야겠지만, 누군가는 써서 남겨야 할 글도 있다.”라고 자부심을 드러낸다.(강병철기자)  

09. 08. 09.  

P.S. 찾아보니 러시아에서는 작년에 김알렉산드라 자료집이 출간됐다. 저자의 참고문헌에 포함돼 있을 듯싶다. 김알렉산드라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박노자 교수가 약술한 기사도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3. 05. 25) 김알렉산드라의 독립운동 

우리 나라 학생들을 접하면서 필자가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는 조선독립운동사에 대해 대다수가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고 있는 점이었다. 대부분은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존경의 감정을 가지면서도 독립운동을 현재와는 전혀 무관한 과거사로 여겼다. 이처럼 생각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 교육이 독립운동을 일률적으로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건국을 위한 민족적 투쟁”만으로 묘사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식민지 암흑 속에서 투쟁의 중요한 목표는 일제로부터의 독립 쟁취와 민족국가 건설이었다. 문제는, 제도권의 서술이 ‘민족독립’만을 획일적으로 강조하고 식민지 시기 국내외 반체제운동의 여러 갈래들의 보편주의적·초(超)국가적 지향은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가 그들에게 강요한 일제 타도라는 급선무만이 강조되고, 세계와 미래를 향해 나아간 그들의 고귀한 뜻이 도외시되어 학생들이 자연히 독립운동을 지금의 우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옛날 일’만으로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선열들이 ‘건국’만을 염두에 두었을까 오늘의 대한민국의 존재가 바로 그들 뜻의 바른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예로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활동의 무대로 삼은 한국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1918년) 발기인이었던 탁월한 여류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스딴께비치:1885-1918)를 들어보자.  

1918년 9월에 러시아 반(反)혁명 세력에 붙잡힌 김알렉산드라는 타민족 출신으로 왜 러시아의 내전에 간여하느냐는 추궁에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사회주의자다. 러시아 볼셰비키와 함께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조선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는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만약 더 이상 볼셰비키와 손잡지 않겠다고 하면 석방해주겠다”라는 제안에 그는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고 대답하여 동지와 함께 총살을 당하는 것을 선택했다.

조국의 해방을 갈망하면서도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과 하나되기를 원했던 그가 만약 세계 각국에서 우리 나라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노동착취와 폭력, 폭언 등을 당하고 있는 것을 봤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자국의 노동자를 천민으로 만들고 외국에서 온 노동자는 거의 노예로 만드는 사회체제가 과연 그의 목표이었겠는가 그가 생각했던 해방 투쟁은 과연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끝나야 하는 것일까

김알렉산드라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만든 사람은 바로 이승만에 대해서 “미국의 제도를 민주주의 발전의 최종 결과로 아는 편협된 세계관의 소유자”라는 적절한 평을 한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1935)였다. 시종일관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군인 출신의 이동휘였지만, 1920년 말에 중국인, 일본인 동지와 함께 상하이에서 동아공산당연맹을 조직하면서 술자리에 같이 어울리며 장난도 치는 등 소박한 국제주의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와 또 다른 수많은 조선 공산주의자·아나키스트들의 국적을 초월한 연대투쟁은 지금 우리에게 동아시아 각국의 지역적 연대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1920년대 초반 연해주의 한국 빨치산들이 일본 군인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하여 그들의 계급의식을 깨우치는 데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국제주의자로서의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전세계의 근·현대사에서 조선의 진보적인 독립운동가만큼 큰 희생을 치른 집단은 드물 것이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으로부터, 북한에서는 독재체제 구축에 착수한 김일성 일파로부터, 남한에서는 역대의 반공정권으로부터 각각 탄압을 당해온 그들의 역경과 고난의 무게만큼 그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조선의 애국자로 남으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국제적인 시각을 우리는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다.(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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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0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 추억이 있다. 아련한...",
1980년 초여름, 교회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여자가 정면으로 보였다.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가르치던 그 여자는 스몰바지(검정군복)를 입고 있었다.
"아련한 추억이 있다. 우리에게는..".
여성혁명가(김알렉산드라),나혜석(최초서양화가),노서아가비(주인공/따냐)
그리고 80년대 어떤 노동운동가(그 여자),,,,
옛 혁명도 사랑도 다 지난 일이 되어버린, 작가의 아쉬움속에 조선의 진보적인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그들의 꿈이었던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봅니다.

로쟈 2009-08-11 09:05   좋아요 0 | URL
그나마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주 없진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듯해요...

카스피 2009-08-10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구 소련에서 많이 숙청된 공산주의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국내의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네요.
친일한 사람의 후손은 국내에서 호의호식(뭐 뉴스보니 친일 후손들의 국가의 땅 찾기에 소송으로 맞대응한다고 하니 참 염치 없지요)하는데 비해 독립 운동가의 자손들은 국내와 국외(중국과 러시아등)에 참 많은 고생을 하니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로쟈 2009-08-11 09:03   좋아요 0 | URL
현대사가 일그러진 원인이죠...

2009-08-10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1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을 참조할 필요가 있어서 들춰보다가 관련기사를 검색해봤다. 두달 전 기사 가운데 흥미를 끄는 것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가라타니가 인용하고 있는 저작들이 대부분 일역본이며, 이것은 자국 번역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의 표현이라는 지적이다. 그의 책을 즐겨 읽는 독자에겐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지만, 우리 학계/비평계의 현실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일이기도 해서 음미해볼 여지를 남긴다.  

조선일보(09. 06. 01) [일사일언] 번역에 대한 자신감 

한국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3~4년 전 '근대문학은 끝났다'라는, 듣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황망한 선언을 앞세워 한국에 상륙한 가라타니는 문단에 그야말로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일부는 그를 따라 오늘의 한국문학에 무차별한 사망 선고를 내렸고, 또 다른 이는 문학에 대한 그의 이해 폭이 협소하다면서 반감을 피력하였다. 가라타니에 대한 한때의 뜨거운 열기는 이제 어느 정도 가셨지만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언급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톺아보면, 최소한 그가 일본이라는 국경을 넘어 세계적 지식인으로 발돋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얼마 전 그를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알리는 데 공헌한 주저 《트랜스크리틱》을 다시 읽다가 새삼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칸트와 마르크스 등 서양 철학자들을 활용하는 대목에서 버젓이 일본어 번역판을 인용하고 있음을 각주로 알렸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원어(原語)에 대한 강박은 일반의 상식을 초월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번역서에 의존하여 글을 읽는데도, 특정 대목을 자신의 글에 인용할 때는 가능한 한 원서의 내용을 참조했다는 사실을 알리려 애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라타니는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무엇보다도 자국어에 대한 애정과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150여년 번역사에 대한 깊은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가라타니에 호의적이지 않은 나 자신도, 자국어에 대한 그의 저 도저한 자부심 앞에서는 난연(赧然)해질 수밖에 없다.(강동호_문학평론가) 

09. 08. 08.   

P.S.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자신감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다. 당장 <트랜스크리틱>(힌길사, 2005)만 하더라도 이런저런 번역상의 오류를 적잖게 포함하고 있다. 예전에 '자세히 읽기'를 시도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는데(밥벌이가 아니잖은가!) 그때 마저 지적하지 못한 대목도 다시 보니 아직 많다. 가라타니의 대표적인 저작인 만큼 다시 손을 보아 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다(현재 품절상태다).  

개인적으론 지젝의 <시차적 관점>과 함께 필독해볼 만한 '우리시대의 고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최근엔 한 설문에 추천도 했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젊은 대학(원)생이라면 이 두 권을 독파함으로써 사고의 높이를 두 단계 이상 높여놓을 수 있을 것이다. 도전해보기를 권장해마지 않는다. 물론 가급적이면 원서와 같이 읽는 게 좋겠다. 그게 원문에 대한 독해력도 키워줄 뿐더러 다른 책들을 읽을 때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런 오류들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해준다.   

가령, "칸트가 보편성을 일반성과 엄격하게 구별한 것은 코페르니쿠스 이후이 근대과학이 초래한 문제에서 나왔다. 그것은 베이컨(Roger Bacon, 1214-94)으로 대표되는 실증 귀납의 중시와는 다르다."(83쪽)에서는 무엇이 잘못됐을까?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을 엉뚱하게도 13세기 사람 '로저 베이컨'으로 탈바꿈시켜놓은 것이 오류다. 일어판의 오류인지 한국어본 편집자의 부주의인지는 모르겠으나 애꿎게도 독자만 골탕을 먹는다. 

이보다 더 문제적인 건 물론 오역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확실히 하나의 주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주관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주관과의 합의 또는 공동 주관성이 보편성을 가져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85쪽)라는 대목 같은 것. 영어본으론 이렇다. "Critique of Pure Reason begins by describing a single subjectivity, to be sure. This does not mean, however, that Kant neglected the existence of the multitude of other subjects. Rather, he did not even dream that univesality could be attained by an agreement among plural subjectivities, that is, by intersubjectivity."(43쪽)  

요즘 우리의 번역관행을 보면 'subjectivity'는 '주관'보다는 '주체성'이라고 옮겨질 가능성이 높은데, 가라타니의 용례를 따라서 뒷부분(뒷문장)을 다시 옮기면 "실상 칸트는 보편성이 복수의 주관들 간의 합의를 통해서, 곧 상호주관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으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을 뿐이다." 정도다. 일어본과 영어본의 편차를 감안하더라도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옮긴 건 가장 안 좋은 종류의 오역이다. 이렇게 되면 '번역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실제로는 번역서에 의존하여 글을 읽는데도, 특정 대목을 자신의 글에 인용할 때는 가능한 한 원서의 내용을 참조했다는 사실을 알리려 애쓰는" 허황한 작태가 관행적인 현실이 된다. 번역자들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마가편'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번역에 흠이나 잡자는 것이 아니다. 번역본만 인용하면서 한국어로도 <트랜스크리틱> 같은 이론적 저작이 쓰여질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무망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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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08-08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아쇠를 누가 당기냐가 관건일 거 같아요. 번역을 학위논문으로 인정해주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듯요. <번역비평>을 적어도 계간으로만 바꿔도 좀 활기가 생기지 않을까요?

로쟈 2009-08-09 12:10   좋아요 0 | URL
계간지가 나온다고 사정이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팔리는 책은 아니니까요) 문제의식을 확산시킬 순 있을 듯해요. 먹거리나 읽을거리나 마찬가지라고 하면 좀더 관심을 두어볼 만한데요...

2009-08-08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9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PhEAV 2009-08-09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사학위 논문 정도라면 정말 번역으로 대체될만 할텐데요...

로쟈 2009-08-09 12:07   좋아요 0 | URL
분야에 따라선 박사논문도 번역과 주해로 대체될 수 있겠죠. 미국 등지에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걸로 압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8-09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탕화면은 어느 나라 경치인가요? 멋지네요.

Sati 2009-08-09 20:47   좋아요 0 | URL
당나귀 등에 책 한 짐 싣고 저기 들어가서 한 십 년 썩으면 행복하겠어요 :)

펠릭스 2009-08-10 06:26   좋아요 0 | URL
그리스의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에는 책이 많이 있는데요.
줄타고 올라가서 희귀본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로쟈 2009-08-11 09:36   좋아요 0 | URL
네, 그리스의 수도원이랍니다...

베토벤 2009-08-0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3~4년 전 '근대문학은 끝났다'라는, 듣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황망한 선언을 앞세워 한국에 상륙한 가라타니는 문단에 그야말로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

태클을 걸자면 '상륙'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위의 문장도 그닥 맘에 들지 않네요. 가라타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문장과 이후의 문장들로 인해 '근대문학의 종언' 이전의 작업들이 그닥 제대로 취급받지 못한 인상을 줄 수 있을 듯 합니다. 제가 과민한 건가요.

로쟈 2009-08-11 09:37   좋아요 0 | URL
네, '상륙'은 그보다 먼저죠...

2009-08-10 0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1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프심 2009-08-14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랜스크리틱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는데, 직장인이 읽기에는 조금 부담감이 있더군요. 더불어서, 고진이 언급하는 각 책들을 잘 읽어보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각 사상가들을 가로지르면서 언급하는 대목과 앞서의 서평에서도 언급했듯이, 번역서만으로도 자신의 사상의 토대를 이룰수 있는 환경이 무척 부럽네요. 조금씩 조금씩 읽어가고 있지만,215페이지의 키에르케고르의 인용구 중 「사랑의 기술」은 조금 의아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역서로는 국역으로「사랑의 역사」가 있고 영문으로는 「Work of Love」는 있어도 이것이 일본의 번역본인지 잘모르겠네요. 아마존과 일본아마존을 조금 살펴보았는데 그런 책은 없는 것 같은데..

로쟈 2009-08-14 21:50   좋아요 0 | URL
네, <사랑의 기술>도 오역입니다. 말씀대로, <사랑의 역사>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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