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연구자인 유세종 교수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특이하게도 만해 한용운과 루쉰을 비교한 <화엄의 세계와 혁명>(차이나하우스, 2010)이 그것인데, 아직 알라딘에는 입고되지 않은 듯하지만 소개기사가 흥미를 끌기에 옮겨놓는다. 봄에는 일본 작가 몇 사람에 대한 강의도 해야 하지만, 개인적으론 올해 중국 관련서들을 챙기기 시작한지라 루쉰에 관해서도 모아놓은 책들을 좀 읽어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 나온 책도 리스트에 넣어두어야겠다.   

  

경향신문(10. 01. 15) '불교적 깨달음’으로 연결된 루쉰과 한용운 

“절망은 허망한 것, 희망이 그러하듯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루쉰(1881~1936)과 한용운(1879~1944)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시기뿐만 아니라 처한 상황도 비슷했다. 둘 다 나라를 잃고 수배와 감시의 망 안에서, 고독과 부자유, 고통을 느끼며 살았던 식민지 지식인이다. 인용한 두 문구는 각각 두 사람의 대표적 작품집인 <들풀>과 <님의 침묵>에 나온다. 조국이 서구 근대의 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이 서양과 똑같은 강자가 되는 것 또한 궁극적인 해답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았던 두 사람으로서 허무와 절망을 피할 길이 있었을까. 하지만 이들이 이 허무와 절망을 극복한 방식은 지금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루쉰 문학을 전공한 유세종 한신대 교수는 최근 저서 <화엄의 세계와 혁명>(차이나하우스)에서 두 사람 작품을 하나의 선상에 놓고 분석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아우르는 사상의 공통점을 불교적 깨달음, 즉 화엄(華嚴)의 세계관으로 보았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이러한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을 보고 겪으며, 머물러 있는 듯한 자신들의 전통을 비판했고, 그래서 강자가 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가거나 러시아를 시작으로 세계를 돌아볼 필요를 느끼기도 했던 두 사람은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들이 근대가 가진 폭력성까지 수용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서구적 근대도 아니고 전통도 아닌 중간 지점에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는 것이 유 교수의 설명이다. 

작가이면서 승려였던 한용운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 해도 그것은 모두 무한의 시간과 무변의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의 진리에 처음부터 비교적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한 곳에 머무름 없이 끊임없이 속세와 법계를 넘나들며 혁명을 꿈꾸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쉰은 구복(求福)적이라는 등의 이유로 현실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자기 안의 화엄적 세계관까지 부인할 수는 없었다. 1914년 10월4일 일기에 “오후에 <화엄경>을 다 읽다”는 구절이 나온다든지 “인간의 일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깊은 곳에 그 근본이 있다”고 쓴 <문화편지론>의 구절은 표면적인 증거일 뿐이다. 신해혁명의 실패 후 민중의 열악한 정신 수준에 절망한 그가 말한 ‘혁명의 일상성’은 ‘지금 이곳에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한 혁명적 대응이 대안이라는 깨달음이다.

이는 한용운이 말한 “사람이 다 각기 그 마음을 가진 동시에 그 마음이 곧 불(佛)인 사람은 오직 자기 마음, 즉 자아를 통해서만 불을 성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물(物)을 떠나서 하는 말은 아니다”라는 깨달음과도 만난다. 그러니까 “근대가 가져온 물질문명의 각종 폐해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힘과 신자유주의의 폐해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동력, 평등과 자유를 향한 꿈꾸기, 그리고 일상 속에서 실천하기” 등 지금 사람들이 처한 난제는 루쉰과 한용운을 읽음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손제민 기자) 

10. 0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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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16 09:43   좋아요 0 | URL
지식인들과 역사의 인물들이 꾸준히 주장했던 것은 일상속의 변화임을 역설했습니다(도산의 4대 정신을 비롯하여). 사회가 발전할 수록 개인부터가 아닌 사회적 시스템이 개인이 원하는 쪽으로 변해주었으면 하는 수동성이 있지만 지난 촛불광장처럼 개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변화(표현 등)를 이끌어 내는 분야별 리더의 스토리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로쟈 2010-01-16 20:41   좋아요 0 | URL
네, 변화는 같이 일어나야죠...

펠릭스 2010-01-16 23:58   좋아요 0 | URL
예,,찔리네요.(저는 관리도 아닌데)
 
'로쟈의 인문학 서재'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오후에 한국출판문화상 시상식이 있었다. 수년 전 박사학위 수여식이 있던 날 이후로 가족들의 꽃다발을 받아본 게 처음이지 싶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몇 사람 언급하지 못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이 블로그를 아끼시는 분들과 <로쟈의 인문학 서재> 독자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한국일보(10. 01. 15) "안팎 어려움 속 출판계 격려… 사회적 자랑" 

"제 56년 출판 인생의 고비마다 한국출판문화상이 힘이 돼 줬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출판인들의 용기를 북돋는 상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윤형두 범우사 대표ㆍ백상특별상 수상소감에서)

출범 50년을 맞은 한국출판문화상의 영예의 수상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일보가 주최하고 ㈜두산이 후원한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 시상식이 14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 한진해운센터빌딩 본관 26층에서 열렸다.

시상식에서는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사계절 발행) 저자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공동체론>(효형출판 발행) 저자 박호성 서강대 교수가 학술 부문 저술상을 공동 수상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발행) 저자 이현우씨(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는 교양 부문 저술상을 받았다.

편집상은 <앤디 워홀 일기>(앤디 워홀 지음)를 발행한 미메시스 출판사, 번역상은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라울 힐베르크 지음ㆍ개마고원 발행)를 번역한 김학이 동아대 교수가 각각 수상했다. 어린이ㆍ청소년 부문에서는 <열정세대>(김진아 지음ㆍ양철북 발행)를 기획한 참여연대 교육홍보팀이 수상했다.

이종승 한국일보 사장과 성낙양 두산동아 대표는 수상자들에게 각각 상금 500만원과 상패를 수여했다. 백상특별상 수상자인 윤형두 범우사 대표에게는 상금 300만원과 상패가 수여됐다.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도정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은 축사에서 "출판계는 창조적인 생각을 유통시켜 우리 사회를 '사람이 살 수 있는 사람의 사회'로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안팎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출판계를 격려하는 한국출판문화상이 50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은 사회적 자랑거리이고 영광"이라고 말했다.

교양 부문 저술상 수상자 이현우씨는 수상 소감을 통해 "대학 사회에서는 논문을 쓰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과 무관한 글쓰기에 시간을 내는 데는 인색하다"며 "저의 수상은 척박한 풍토에서도 묵묵히 저술 활동을 하는 연구자들에게 긍정적 소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시상식에는 한승헌 전 감사원장, 이기웅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등 각계 인사와 수상자의 가족과 친지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유상호기자) 

10. 01. 14. 

P.S. 특별히 수상 소감이 인용돼 있는데, 절반 이상은 기자의 해석이 더해진 것이다. 요지는 이번 수상을 계기로 '뻘짓'이란 얘기도 들었던 인터넷 글쓰기나 블로거 활동을 인정받게 돼 감사하다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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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4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4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10-01-14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멋지네요.

로쟈 2010-01-15 09:11   좋아요 0 | URL
감사.

leopard 2010-01-15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로쟈님 블로그 통해서 많은 점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로쟈 2010-01-15 09:11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이매지 2010-01-1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로쟈 2010-01-15 09:11   좋아요 0 | URL
^^

루체오페르 2010-01-15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일과 해야하는 일,하고있는 일이 같을때 참 행복할것 같습니다.
축하합니다.^^

로쟈 2010-01-15 09:13   좋아요 0 | URL
그게 민폐가 아니면 더 좋지요.^^;

Joule 2010-01-15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로쟈 님 키가 제일 커요. 유전자가 제일 우월한가 봐요.(.. )( '')

로쟈 2010-01-15 09:13   좋아요 0 | URL
그래봐야 '루저'입니다...

starla 2010-01-15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기쁩니다. ^^

로쟈 2010-01-15 09:13   좋아요 0 | URL
감사.

쉽싸리 2010-01-15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습니다.
올 해도 좋은 기운 이어가시길,,,

로쟈 2010-01-15 09:13   좋아요 0 | URL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그렇겠지요.^^;

시페루스 2010-01-15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유익하고 좋은 글 많이 부탁합니다.

로쟈 2010-01-15 09: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권진규샘이시군요.^^

수유 2010-01-1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1-16 20:41   좋아요 0 | URL
감사. 계속 못 뵙는군요.^^;

카스피 2010-01-1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1-16 20:41   좋아요 0 | URL
감사.

은도끼 2010-01-1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축하드립니다...어찌어찌하여 이 블로그를 알게되고 로쟈님을 알게되어 로쟈님의 책을 방금 다 읽었습니다(물론 한 반절은 좀처럼 무슨 말인지 힘들어 패스하구요^^) 저한테는 어려워도 정말 좋은 느낌과 한편의 존경과 기분좋은 독서 경험이었습니다.....천정환님의 발문을 인용하며 줄입니다~ "부디 로쟈의 빠른 뇌와 성실한 손이 오래오래, '눈물'없이 튼튼하기를."

로쟈 2010-01-16 20: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 대목이라도 맘에 드셨기를.^^;

노이에자이트 2010-01-15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저는 앞으로 무슨 상을 탈 수 있을까요? 용감한 시민상?

로쟈 2010-01-16 20:43   좋아요 0 | URL
저술상도 노리셔야죠!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16 21:16   좋아요 0 | URL
따뜻한 격려 감사합니다.하하하...

빵가게재습격 2010-01-15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1-16 20: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건강은 좋아지셨나요?

빵가게재습격 2010-01-17 02:22   좋아요 0 | URL
네,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종종 아프기도 하고, 의사는 늘 조심하라고 하고 있지만요. 직장도 나가고 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 로쟈님도 건강하셔야 합니다.^^

토탈리콜 2010-01-1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많이 배우고있습니다. 새해 더욱 건필하세요^^

로쟈 2010-01-19 09: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혁명의 시대, 레닌을 생각한다

2009년에 이어서 2010년에도 '1월의 책'은 '레닌'이다. 두툼한 분량의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부제는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아래가 원서의 표지이고, 번역본의 표지는 좀 크게 넣었다.
 

 

<레닌 재장전>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과  박노자 외, <레닌과 미래의 혁명>(그린비, 2008)에 이어서 개인적으로는 '레닌 시리즈'의 '3탄'쯤 되는 책으로 평하고 싶다. <레닌 재장전>의 원서 목차와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http://books.google.co.kr/books?id=YCk5GA0QhrYC&dq=Lenin+Reloaded&printsec=frontcover&source=bn&hl=ko&ei=BiE_S_H5G5CgkQWpjM36CA&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4&ved=0CCkQ6AEwAw#v=onepage&q=&f=false 를 참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론 한 꼭지 번역에 참여했는데, 어떤 모양새의 책이 나올지 궁금하다. 다른 역자분들과 편집진의 노고와 마음 고생이 많았다. 조만간 축하의 자리가 마련되면 좋겠다... 

10. 01. 14.  

P.S. 책에 대한 더 자세한 얘기는 책이 나오는 대로 풀어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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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레닌주의적 제스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24 10:55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드디어 출간됐다(아직 이미지는 뜨지 않지만 알라딘에도 입고돼 있다). 책은 어제 배송받았는데, 표지가 깔끔하고 책도 분량에 비해 가벼운 것이 마음에 든다. 속표지(표2)에는 특이하게도 지난 11월 '번역자 간담회' 자리에서 나온 얘기가 발췌돼 있다(7명의 역자 중 5명이 참석했었다). 사진은 마티출판사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영어권 정치철학자들이 쓴 <공화주의와 정치이론>(까치, 2009)이 최근의 관심도서 중 하나라는 건 얼마 전에 적었다. 책은 원서와 함께 주초에 구했고 '역자 서문'을 읽어보았다. 언제 시간을 낼지는 모르겠지만 10편의 독립적인 논문 모음집인 만큼 흥미를 끄는 장을 먼저 읽어볼 수는 있겠다. 마침 공역자의 한 사람이자 번역의 기획자인 곽준혁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올해 공화주의 연구서들을 낼 계획이라 한다.  



한겨레(10. 01. 14) “한국 설익은 공화주의 바람…경계해야

“구체화된 원칙이나 제도적 구상을 깊게 고민하기보다, 공화주의의 수사적·수단적 가치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곽준혁(42·사진) 고려대 교수가 최근 국내 사회과학계와 정치권 일각에서 진행중인 공화주의 논의에 일침을 놓았다.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외래 사조를 수입하던 20~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사상사적 전통이나 사회적 맥락, 담론이 내장한 이론적 문제의식에 진지하게 천착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유행하는 담론을 수입해 적당히 활용하다가 새 사조가 나오면 별 고민 없이 내다버리는 것, 우리 지식인 사회의 고질병입니다. 휴대전화 갈아치우는 것과 다를 게 없어요. 유사한 조짐이 지금의 공화주의 논의에서도 감지됩니다.”

 

최근 영미권 공화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리처드 벨러미와 리처드 대거 등이 함께 쓴 <공화주의와 정치이론>(까치)을 번역해 내놓은 데 이어, <비지배 자유> <비지배적 상호성>이란 제목의 공화주의 연구서를 올해 안에 출간할 예정이다.

12일 안암동의 고려대 연구실에서 만난 곽 교수가 가장 신랄하게 꼬집은 것은 공화주의에 대한 섣부른 일반화였다. 내부의 다양한 갈래들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론적 차이를 무시한 채 무리하게 뭉뚱그려 공화주의를 정의하는가 하면, 학문적 논의가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정치인들이 수사적 차원에서 공화주의란 말을 남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서구 학계의 이론적 성과가 공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한국에선 여전히 공화주의로부터 단합이나 조화, 연대 같은 공동체적 가치만 찾는 경향이 있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최근의 공화주의는 갈등을 균열의 요인으로 위험시하기보다, 당연히 존재하는 사회현상이며, 잘 조정되면 건강한 사회를 형성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거든요. 연대보다는 다양성을, 안정보다는 갈등을 좋은 사회의 징표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공화주의입니다.”

곽 교수가 볼 때 조화와 통합, 공공선만을 강조하는 것은 공화주의라기보다 공동체주의에 가깝다. 이런 공동체주의는 전체의 공익을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 요인을 내포한다. 하지만 공화주의는 다르다. 이 점은 고전적 공화주의의 독특한 자유 개념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 자유는 ‘간섭이 부재한 상태’를 의미하는 자유주의적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자의적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요컨대 사적인 지배나 주종적 예속관계로부터 자유다. 이를 공화주의에서는 ‘비지배 자유’라고 이른다.

“예를 들어볼까요? 갑이란 노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예요. 게다가 주인과 친하기까지 합니다. 어느날 주인이 말합니다. 넌 이제부터 소출의 일부를 갖다주지 않아도 돼.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갑이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겁니다. 신체적 간섭도 경제적 수탈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공화주의자들이 보기에 갑은 여전히 노비입니다. 주인의 마음이 바뀌거나 주인이 죽으면 갑이 누리는 자유도 몰수되니까요.”

이처럼 자유를 ‘비지배’로 파악할 경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개입하고 간섭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례로 세금을 거둬 빈곤층에게 적절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의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비지배’의 관점에서 본다면, 빈곤 때문에 타인의 의지에 예속되는 상황을 막는다는 점에서 복지의 제공은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장하는 조처다. 거꾸로 국가가 비지배의 조건을 훼손하는 형태로 삶에 개입한다면 여기에 저항할 수 있는 논리 역시 공화주의는 제공한다. 곽 교수는 “국가의 개입과 그것에 대한 저항을 동일한 조건에서 정당화하는 개념은 공화주의의 비지배 자유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공화주의에서 신자유주의 광풍 앞에 무기력한 개인으로 전락한 시민들의 삶과, 비효율과 무능력의 상징으로 낙인찍힌 민주주의를 구원할 희망을 찾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곽 교수는 본다. 문제는 재분배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로 공화주의 이념을 활용하는 경우다.

“공화의 조건을 구축하기 위해 재분배의 필요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재분배 정책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공화의 가치를 빌려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경우 굳이 공화주의란 이름을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곽 교수는 지금 시급한 것은 공화주의에 대해 한층 정교한 학문적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의 구호나 지침으로 대중에게 제시하기 전에 밀도 있는 심의와 토론으로 공화주의 내부의 차이를 선별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곽 교수는 그 계기를 <공화주의와 정치이론>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이세영기자) 

10.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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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15 00:08   좋아요 0 | URL
명분(핑게)의 정도를 어디까지 활용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주의, 공화주의, 자유주의 등이 형성되는군요. 민주공화국이 곧 공화주의인데 구지 공론화하려는 의도는 뭘까요?

로쟈 2010-01-16 20:44   좋아요 0 | URL
실종돼서 그렇지요...
 

시사IN에 '로쟈'와 관련한 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도서출판 텍스트에서 펴내는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소개기사인데, 나도 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미 마감을 여러 차례 넘겨서 자주 독촉받고 있는 처지이긴 하지만, 애쓰고 있는 편집팀의 환한 미소를 보니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그나저나 원고는 언제 다 넘기나...  

시사IN(10. 01. 06) “젊은이여, 자서전 써라”  

텍스트 출판사가 펴내는 시리즈물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는 ‘20·30대 젊은이들이 쓰는 자서전’을 표방한다. 극소수 스타 필진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낯선 저자들이 채 절반도 지나지 않았을 인생을 소재로 ‘자서전’을 쓴다. 왜?

이 시리즈를 기획한 박선화 편집장은 “소위 ‘88만원 세대론’이 나온 이후 젊은 세대에 대한 비판은 많아졌는데 정작 20·30대 본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는 게 기획 의도다”라고 말했다. 블로그를 뒤지고, 홍대 인디신과 영화계와 시민단체를 훑고, 언론의 독자투고란까지 꼼꼼히 살피며 필자를 발굴한다.

박 편집장은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세대론’으로 치환하는 풍토가 마땅찮다. 그 자신 386 세대이지만, 추상적 담론을 먼저 꺼내들고 그걸 기준으로 20·30대 젊은이의 구체적 현실을 끼워 맞추는 태도야말로 전형적인 ‘386스러움’이라는 것. 만인보 시리즈는 말하자면 ‘구체에서 추상으로’ 순서를 뒤집어보자는 접근법이다.

“정말로 젊은이 1만명의 자서전을 만들어 한데 모아보면, 그때는 정말 이 세대를 두고 뭔가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박 편집장의 ‘야심찬’ 목표다. 자서전 하면 흔히 떠오르는 대필 작가는 전혀 쓰지 않는다. 저자로 선정된 이들은 원고지 700장 정도의 분량을 손수 채운다. 한눈에 봐도 돈 될 기획은 아니지만, 얼마 전 뚝심 있게 열 권을 채웠다. 내년에도 젊은 인문학자 로쟈, 만화가 기선 등 20여 명의 ‘젊은 자서전’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천관율기자)   

10. 01. 11. 

 

P.S. 작년말에 나온 '만인보' 3차분 세 권이다. 나는 4차분에 맞추기로 했는데, 계획대로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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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12 00:24   좋아요 0 | URL
출판기획이라는게 새로운 유형의 통계 모델을 만드는 수학자같군요. 기다려집니다.

로쟈 2010-01-12 09:10   좋아요 0 | URL
기획이란 게 없는 걸 만들어내는 거죠. 수학적 계산도 필요하지만 예술적 영감도 필요해보입니다. 거기에 사회학적 상상력과 인문적 교양도 덧붙이고요..

L.SHIN 2010-01-12 09:04   좋아요 0 | URL
헤, 괜찮은 생각이군요.
수백년 뒤의 후손들이 이 시대를 쳐다보는데 도움이 되겠군요.
'20-21세기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삶과 생각들은 이러했다'
본인이 직접 쓰는 것이라 약간 주관적인 시각이 들어가긴 해도.

로쟈 2010-01-12 09:08   좋아요 0 | URL
한번 동참해보시는 것도.^^

L.SHIN 2010-01-13 16:55   좋아요 0 | URL
안됩니다. 그건, '지구인 젊은이들의 자서전'이잖아요.(웃음)

지나갈께요 2010-01-12 13:45   좋아요 0 | URL
이 책 잼있죠. 만권까지 채워졌으면 좋겠네요. 그 안에 참여할 수 있다면 더 좋겠구요(첫 댓글이네요 ㅋㅋ)

로쟈 2010-01-13 23:12   좋아요 0 | URL
만권은 '정서적' 목표치이지만, 수백 권은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0-01-12 15:53   좋아요 0 | URL
참신한 기획인데, 로쟈님도 그 주자라니 급 관심 모드. 700매라면 경장편 분량인데, 한 두달 이상 걸릴 것 같네요. 로쟈님이라면 더 빠를 수도... 달려가는 로쟈님, 파이팅!

로쟈 2010-01-13 23:12   좋아요 0 | URL
제가 걸음이 좀 느려서요.^^;

정서방 2010-01-13 13:17   좋아요 0 | URL
흠.. 근데. 로쟈님.. 2, 30대에 해당되기는 하신거죠?. ^^;; 살짝 태클

로쟈 2010-01-13 23:13   좋아요 0 | URL
계약은 30대에 했습니다.^^;

델러웨이부인 2010-03-02 23:15   좋아요 0 | URL
와 멋집니다!!! 저도 30대가 가기전에 삶을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좋은 기획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