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에 '로쟈'와 관련한 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도서출판 텍스트에서 펴내는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소개기사인데, 나도 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미 마감을 여러 차례 넘겨서 자주 독촉받고 있는 처지이긴 하지만, 애쓰고 있는 편집팀의 환한 미소를 보니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그나저나 원고는 언제 다 넘기나...  

시사IN(10. 01. 06) “젊은이여, 자서전 써라”  

텍스트 출판사가 펴내는 시리즈물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는 ‘20·30대 젊은이들이 쓰는 자서전’을 표방한다. 극소수 스타 필진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낯선 저자들이 채 절반도 지나지 않았을 인생을 소재로 ‘자서전’을 쓴다. 왜?

이 시리즈를 기획한 박선화 편집장은 “소위 ‘88만원 세대론’이 나온 이후 젊은 세대에 대한 비판은 많아졌는데 정작 20·30대 본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는 게 기획 의도다”라고 말했다. 블로그를 뒤지고, 홍대 인디신과 영화계와 시민단체를 훑고, 언론의 독자투고란까지 꼼꼼히 살피며 필자를 발굴한다.

박 편집장은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세대론’으로 치환하는 풍토가 마땅찮다. 그 자신 386 세대이지만, 추상적 담론을 먼저 꺼내들고 그걸 기준으로 20·30대 젊은이의 구체적 현실을 끼워 맞추는 태도야말로 전형적인 ‘386스러움’이라는 것. 만인보 시리즈는 말하자면 ‘구체에서 추상으로’ 순서를 뒤집어보자는 접근법이다.

“정말로 젊은이 1만명의 자서전을 만들어 한데 모아보면, 그때는 정말 이 세대를 두고 뭔가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박 편집장의 ‘야심찬’ 목표다. 자서전 하면 흔히 떠오르는 대필 작가는 전혀 쓰지 않는다. 저자로 선정된 이들은 원고지 700장 정도의 분량을 손수 채운다. 한눈에 봐도 돈 될 기획은 아니지만, 얼마 전 뚝심 있게 열 권을 채웠다. 내년에도 젊은 인문학자 로쟈, 만화가 기선 등 20여 명의 ‘젊은 자서전’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천관율기자)   

10. 01. 11. 

 

P.S. 작년말에 나온 '만인보' 3차분 세 권이다. 나는 4차분에 맞추기로 했는데, 계획대로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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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12 00:24   좋아요 0 | URL
출판기획이라는게 새로운 유형의 통계 모델을 만드는 수학자같군요. 기다려집니다.

로쟈 2010-01-12 09:10   좋아요 0 | URL
기획이란 게 없는 걸 만들어내는 거죠. 수학적 계산도 필요하지만 예술적 영감도 필요해보입니다. 거기에 사회학적 상상력과 인문적 교양도 덧붙이고요..

L.SHIN 2010-01-12 09:04   좋아요 0 | URL
헤, 괜찮은 생각이군요.
수백년 뒤의 후손들이 이 시대를 쳐다보는데 도움이 되겠군요.
'20-21세기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삶과 생각들은 이러했다'
본인이 직접 쓰는 것이라 약간 주관적인 시각이 들어가긴 해도.

로쟈 2010-01-12 09:08   좋아요 0 | URL
한번 동참해보시는 것도.^^

L.SHIN 2010-01-13 16:55   좋아요 0 | URL
안됩니다. 그건, '지구인 젊은이들의 자서전'이잖아요.(웃음)

지나갈께요 2010-01-12 13:45   좋아요 0 | URL
이 책 잼있죠. 만권까지 채워졌으면 좋겠네요. 그 안에 참여할 수 있다면 더 좋겠구요(첫 댓글이네요 ㅋㅋ)

로쟈 2010-01-13 23:12   좋아요 0 | URL
만권은 '정서적' 목표치이지만, 수백 권은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0-01-12 15:53   좋아요 0 | URL
참신한 기획인데, 로쟈님도 그 주자라니 급 관심 모드. 700매라면 경장편 분량인데, 한 두달 이상 걸릴 것 같네요. 로쟈님이라면 더 빠를 수도... 달려가는 로쟈님, 파이팅!

로쟈 2010-01-13 23:12   좋아요 0 | URL
제가 걸음이 좀 느려서요.^^;

정서방 2010-01-13 13:17   좋아요 0 | URL
흠.. 근데. 로쟈님.. 2, 30대에 해당되기는 하신거죠?. ^^;; 살짝 태클

로쟈 2010-01-13 23:13   좋아요 0 | URL
계약은 30대에 했습니다.^^;

델러웨이부인 2010-03-02 23:15   좋아요 0 | URL
와 멋집니다!!! 저도 30대가 가기전에 삶을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좋은 기획이네요.
 

온라인 당비의생각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http://dangbi.tistory.com/). 신년초의 독서나 독서계획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인데, 말을 꺼내놓고 보니 <미토콘드리아>와 <윤리적 노하우>에 대한 독후감이 돼 버렸다. 같이 생각해둔 풍우란의 <중국철학사>와 프랑수아 줄리앙의 <사물의 성향> 등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몇 마디 적어야겠다.  

 

온라인 당비의생각(10. 01. 11) 다시 한 해의 책읽기를 시작하며 - 책읽기와 자비에 대하여

지난 연말에 마지막으로 손에 들었던 책 중의 하나는 <권력, 섹스, 자살>이다. 제목만으로는 세간을 들썩이게 했던 고 장자연씨 자살사건을 바로 떠올리게 하지만, 아직 그 사건을 다룬 ‘책’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의 재수사 결과 전 소속사 대표와 매니저가 불구속 기소되고 성상납 의혹을 받은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의 인물들은 모두 무혐의 처리됐다. 한국사회에서 익숙한 ‘사법 불의’이다.  

<권력, 섹스, 자살>이란 ‘미래의 책’ 대신에 내가 읽은 건 ‘진화의 숨은 지배자’를 다룬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뿌리와이파리). 이 책의 원제가 ‘권력, 섹스, 자살(Power, Sex, Suicide)’이다. 내심 ‘올해의 책’의 하나로 꼽아두었지만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읽은 흉내라도 내야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책장을 펼쳤다. 이런 경우 보통은 서론 정도를 읽어두는데, 그 정도라도 성과가 없진 않다. 미토콘드리아에 대한 지식을 업데이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라고 하면 바로 연상하게 되는 것은 린 마굴리스의 ‘세포 공생설’이지만 그게 어느덧 ‘1970년대’ 이야기이다. 하지만, 최근 20여 년 사이 과학계에서는 미토콘드리아의 새로운 면들이 속속 밝혀졌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저자가 일러주는 것은 예정된 세포자살, ‘아포토시스(apoptosis)’이다. 모든 세포가 더 큰 이익, 즉 몸 전체를 위해 하는 자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과학자들은 이 아포토시스를 결정하는 것이 핵 유전자가 아니라 미토콘드리아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이게 단순히 ‘과학적 발견’ 정도의 의미만을 갖는 게 아니다. 세포들이 알아서 죽지 않는 것, 곧 아토포시스가 일어날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암의 근본원인이기에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의학적 발견’이기도 하다. 조금 인용해보자.  

“암에 걸린 세포는 한 생명체의 일부라는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 진화의 초기단계에서 이런 속박은 분명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포가 죽음이라는 형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더 커다란 세포집단의 일원으로 살고자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때 독립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아포토시스가 없었다면 세포들을 연결해 다세포 생물로 만들어주는 결속력은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포토시스는 미토콘드리아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다세포 생물은 미토콘드리아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세균 수준을 넘어 진화하는 일은 미토콘드리아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결론”이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보자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때” 세포집단의 일부로 예속되기보다는 자유로운 독립생활을 선택한 세포도 있었으리라. 다만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승자가 되지는 못한 것이리라. 즉, ‘가지 않은 길’이라기보다는 ‘가다 끊긴 길’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 ‘자유’에 대한 그리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암세포들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물론 숙주인 유기체가 죽으면 결과적으로 암세포 자신 또한 죽음을 맞게 되므로 그의 ‘독립생활’도 자살과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하여, 공생을 위한 자살이냐 자유를 위한 자살이냐, 세포들의 두 갈래 길이다.     



두 갈래 길에 대한 명상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윤리적 노하우>(갈무리)에서도 빌미를 얻을 수 있다. 사회성 곤충들에 대한 연구가 1970년대에 많이 진행되었는데, 그중 네오포네라 아피칼리스라는 개미 집단에 관해서는 이런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가장 유능한 보모개미들만 모아서 새로운 작은 개미집단을 만들어놓았더니 보모개미들의 사회적 역할이 급격히 달라져서 양육하는 대신에 먹이를 구하는 일에 나서더라는 것. 원래의 개미집단에서는 반대로 낮은 등급의 보모개미들이 양육활동을 많이 하게 됐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단 전체 개미집단이 어떤 구성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 즉 개체의 정체성이 상대적 배치에 따라 정해진다는 점이다. 한데, 문제는 이 개미사회는 전체를 조정하는 ‘중앙 통제적인 자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럼에도 전체는 마치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전체의 중앙에서 조정하는 행위자가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생물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바렐라는 이것을 ‘무아적 자아’ 혹은 ‘가상적 자아’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자아 없는 자아’이고, “간단한 구성 요소들의 활동으로부터 창발하는 정합적 전체 패턴이 마치 중심부에 있는 것 같지만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경우다.  

바렐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자아 없는 자아’가 대뇌의 뉴런 앙상블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중심적이고 개인적인 자아” 또한 ‘중심’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자아가 가상적이고 비어있다는 ‘깨달음’은 동양적, 특히 불교적 전통에서 보자면 낯설지 않다. 이 비어있음을 채우는 것이 곧 자비이다. 이때 자비란 무조건적이고 무자비한 자발적 연민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 하면, “주체와 객체의 비이원적 드러남 속에서 자아의 비어있음의 실현을 체화하고 표현하는 행동”이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말하면, 자아라는 환상의 횡단이 되겠다. 때문에 비어있음(공성)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무조건적인 자비라는 긍정적인 상태의 예비단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보모개미들이 자신의 상대적 배치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양육에 종사하기도 하고 먹이를 구하러 나서기도 하는 것은 윤리적 숙련의 높은 단계에 이미 도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들은 이미 불성(佛性)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개미와 인간은 진화의 여정에서 각기 다른 진로를 선택하긴 했지만, 그러한 불성과 자비를 통해서 만난다. 만날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는 어떤 형태의 지속되고 훈련된 수련 또는 주체의 변화를 위한 수련”에 전념해야 하고 “개인 스스로 발견하고 가상자아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키워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한 해의 책읽기를 시작한다. 미토콘드리아와 개미를 머릿속에 넣고서 ‘자유냐 자비냐’를 오래 저울질해볼 참이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책읽기 또한 ‘숙련’의 문제라면 그것은 ‘자아실현’과는 무관하다는 사실. 고로 ‘나는 책을 읽는다’는 맞지 않다. 그냥 ‘책을 읽는다’. 자비로 세상이 가득할 때까지.  

10.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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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오르다>(현대문학사, 2004)에 이어서 이성복 시인의 두번째 사진 에세이집 <타오르는 물>(현대문학, 2009)이 지난해 말에 출간됐다. 해가 넘어오면서 여유가 없었던 탓에 미처 챙겨놓지 못했다. 다행히 소개기사가 눈에 띄기에 기꺼이 옮겨놓는다. 책은 내주에 구해봐야겠다.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에세이 12편에다 미발표작 12편을 더해 사진에세이집을 펴낸 이성복 시인. 이 책은 “졸린 눈으로 바라보는 포식자 곁에서 태연히 풀을 뜯는 가젤의 무리처럼 삶은 고통 바로 옆에서, 고통과 함께 자고 먹고 새끼 친다” 같은 명징한 아포리즘으로 가득하다. 

세계일보(10. 01. 09) 이성복 시인 사진에세이집 ‘타오르는 물’

해가 바뀌는 어수선한 시기에 얼굴을 내민 책이 있다. 이성복(58) 시인의 사진에세이집 ‘타오르는 물’(현대문학)이 그것인데, 사진작가 이경홍의 추상적인 흑백사진 24장을 붙들고 시인의 사유를 길게 이어가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남해 금산’의 시인이 공들여 음각한 문장이 명징하게 빛나는 근래 보기 드문 명품 에세이집이다.

갯벌 위로 가득 찼던 바닷물이 간조 때가 되어 햇빛을 받으며 빠져나가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앵글로 찍어낸 흑백사진들은 대단히 추상적인 빛과 어둠의 무늬를 그려낸다. 시인은 이 사진들 하나하나에 다양한 은유의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에게 은유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맨 처음 등장하는 사진은 이 책에 실린 것들 중에서도 비교적 쉽게 어떤 형상을 연상해낼 수 있는 편인데, 시인의 은유는 “어두운 밤 곧추 일어선 몽구스가 두 다리를 내려뜨리고 늑대의 기습을 경계하는 모습이라거나, 불시에 낯선 별에 착륙한 외계인이 은빛 금빛 가루를 방사하며 망연자실 서 있는 모습이라거나, 그도 아니면 어미 짐승의 자궁 속에서 눈도 뜨지 못한 채 혼몽한 잠을 자고 있는 태아의 모습이라거나…”(13쪽)로 이어진다.

그는 “이처럼 다양한 연상을 통해 떠오르는 은유들은 그러나 결코 무작위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라며 “그것들을 조심스레 포개놓고 보면 막막한 삶의 가장자리에서 떨고 있는 존재들의 고독감과 무력감이 공통 속성으로 드러난다”고 첫머리부터 분명하게 은유의 속성을 규정하고 넘어간다. 한마디로 “모든 형체는 은유의 조명을 받아 의미를 갖게 되며,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모르는 숲 속에서 저 혼자 쓰러지는 나무와 같을 것”이라는 언설이다.  

이 에세이집 각 장마다 큼직하게 제시되는 사진을 보고 읽는 이들이 각자 자신의 느낌을 독자적으로 전개해 본 뒤 시인의 사유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방식일 것 같다. 사람마다 체험과 무의식의 밑그림들이 각자 다를 수밖에 없어서 똑같은 추상 무늬를 앞에 두고도 수백 수천 가지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성복 시인이 사진을 붙들고 전개해나가는 자신의 ‘무의식 탐사 여행’은 명징한 아포리즘으로 가득 채워져 찬찬히 읽고 밑줄 긋게 되는 대목이 곳곳에 보인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 자체가 상처라 하듯이, 모든 형체의 생겨남 또한 상처에서 비롯된다. 달리 말해 형체 자체가 이미 상처인 것이다. 애초에 시간과 공간이 우주와 더불어 태어난 것이기에 우주 이전과 이후의 시공을 생각할 수 없듯이, 상처보다 앞선 형체는 없으며 상처보다 나중 형제도 없다.”(34쪽)

시인의 생각을 좇아가자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체는 태생으로 상처를 안고 나왔으니 서럽지 않은 것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떤 회한도 슬픔도 묻어있지 않은 눈물, 때로 삶 앞에서 고통이 내보이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또한 “결핍과 상처는 아름다움이라는 생체(生體)의 두 숨구멍”이라고 규정하며 아름다움이란 “결핍과 상처의 구멍을 통해 숨 쉬고 살아 있는 어떤 것, 달리 명명하거나 묘사할 수 없는 어떤 것의 이름”이라고 명명한다.

왜 이리 시인은 환한 빛의 긍정보다는 실루엣의 슬픔을 본능적으로 떠올리고 따라가는 것일까. 시인 자신도 “어째서 기쁨은 슬픔에 비해 감동적인 은유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인지 자문한다. 그는 “은유는 본디 은유하는 자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들에게 은유하는 자 자신의 기억과 욕망을 각인시키려는 부질없는 시도”일 뿐이라고 자답한다. 이는 일견 모든 형체는 은유의 조명을 받아야만 의미를 갖게 된다는 자신의 말을 정면에서 부인하는 모순된 진술로 다가오는데, 그만큼 역설적으로 ‘은유의 바깥’이란 얼마나 황폐하고 무의미한 것인지 강조하기 위한 언설로 들린다.(조용호 선임기자)  

10. 01. 10. 

 

P.S. 아포리즘집을 제외하면 이성복의 산문집/에세이집은 세 권이다. 더듬어 보니,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2003) 이후에 아직 시집이 묶이지 않았다. 올해는 시인의 새 시집도 기대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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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나온 국내서 가운데 가장 묵직한 책은 역시나 조희연 교수의 <동원된 근대화>(후마니타스, 2010)이다. 박정희 체제의 이해와 평가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역사비평사, 2007) 등과 함께 챙겨둔 몇 권의 책을 동시에 '호출'하지만, 사정상 일단은 리뷰만 챙겨놓는다.  

 

한겨레(10. 01. 09) 압축 성장, 저항의 힘을 농축시키다 

<동원된 근대화>는 박정희 독재체제를 붙들고 숙고해온 사회학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의 야심작이다. 지은이는 2007년 출간한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에서 박정희 시대의 역사를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조망한 바 있다. <동원된 근대화>는 이 역사 서술을 전제로 삼아 박정희 체제의 근본성격과 작동방식을 복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박정희 시대 이해의 지평을 넓혀 놓는다.

지은이는 박정희 독재를 규정하는 핵심 용어로 ‘개발동원체제’를 제안한다. 지은이의 설명을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는 후발 국가들이 국민을 동원하여, 개발·발전·성장으로 요약되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체제다. 이 체제는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후발 국가들에서 특히 전형적으로 나타나는데, 박정희 체제는 바로 ‘후-후발 국가의 개발동원체제’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 ‘복합적 분석’의 중요함이다. 박정희 체제를 ‘폭압 독재’의 틀로만 이해하거나 반대로 ‘발전국가’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단선적·일면적 시선은 이 시대의 복합적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에서 말하는 ‘이중성’이 이 복합적 성격을 가리킨다. 박정희 체제는 국민을 억누르고 쥐어짜는 ‘수탈국가’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발전국가’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두 성격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돼 상호작용했으며, 이 상호작용을 통해 체제가 작동하고 위기를 겪고 파국으로 나아갔다고 이 책은 말한다.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에서 지은이가 먼저 주목하는 것이 ‘동원’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국민을 동원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때 국가 또는 권력이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심리적 전제가 필요한데, 지은이는 그 전제를 ‘결손국가·결손국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나라가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경제적 종속상태·후진상태에 있다는 국민적 인식이 이 ‘결손’에 담긴 의미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경제를 발전시켜 정상국가·정상국민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심리적 공감대에서 동원체제가 작동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경우, 이승만 시대에 형성된 ‘반공규율사회’가 사회적 조건으로 따라붙었다. 이런 조건 위에서 박정희 체제는 ‘반공주의’와 ‘개발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가동해 국민을 끌어들였다.

지은이가 두 번째로 주목하는 것이자 이 책의 몸통에 해당하는 것이 ‘헤게모니 분석’이다. 지은이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재구성해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삼는다. 그람시가 말하는 헤게모니는 지배권력이 순전히 강압으로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피지배집단이 지배에 동의할 때 안정적 지배가 이루어지는데, 이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적·도덕적·문화적 주도권이 헤게모니다. 그람시는 그런 헤게모니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이와 달리 지은이가 눈여겨보는 것은 헤게모니 형성이 아니라 헤게모니 균열이다. 헤게모니란 언제나 분열·갈등·적대를 내적 속성으로 안고 있다. 일시적·잠정적으로 그 틈이 봉합될 뿐이다. 이 봉합이 뜯겨 그 내부의 갈등과 적대가 드러나는 것이 헤게모니의 균열이다.

지은이가 볼 때 박정희 개발동원체제는 이 헤게모니가 일시적으로 형성됐다가 이후 봉합이 해체되면서 균열이 드러나고 커지는 과정을 거쳤다. 박정희 체제는 폭력과 강압을 일상적으로 활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절반 정도를 위수령·계엄령·긴급조치 따위로 연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강력한 반공주의·개발주의 이데올로기로 국민을 규합해 동의를 끌어내기도 했다. 박정희 체제는 나라를 준군사적 총력동원체제로 바꾸어 경제성장의 ‘효율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 효율성이 관철되면 될수록 균열성과 파괴성이 함께 커졌다는 데 박정희 체제의 ‘모순적 이중성’이 있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경제가 성장해 그 과실의 일부가 국민에게 돌아가자 생각의 여유, 곧 권리의식이 커졌고, 또 동시에 그 과실이 한쪽에 편중됨으로써 국민의 비판의식이 커졌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국민은 저항주체, 곧 민중이 되어갔다. 1960년대에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부분적으로 얻었던 박정희 개발동원체제는 1970년대에 들어와 그 동의의 근거를 상실했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체제를 세워 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순전한 강압과 폭력이었고, 동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최종 결과가 박정희 체제의 파국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10. 01. 09.  

P.S.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 언급되는 김에 몇 권의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쥬세뻬 피오리의 평전 <안또니오 그람쉬>(이매진, 2004)는 꽤 부피감이 있는 책이다. 헤게모니론에 대해서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이 어서 재출간되면 좋겠다. 기억엔 작년에 나올 예정이었던 듯한데 해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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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관심도서로 추가한 책은 세실 라보로드 등의 <공화주의와 정치이론>(까치, 2009)과 베르나르 마리스의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창비, 2009)이다('케인스'와 '케인즈'조차도 고유명사 통일이 어려운 모양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리뷰가 뜨지 않는데, 공화주의의 개념을 풀어주는 책들을 보완/심화시켜줄 수 있을 듯싶다.   

 

후자의 경우엔 리뷰기사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저자는 <무용지물 경제학>(창비, 2008)을 쓰기도 했는데, 프랑스의 경제학 교수이자 저널리스트라고.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평전 <존 메이너드 케인스>(후마니타스, 2009)에 대한 보충으로도 읽을 수 있을 듯싶다.

 

목차와 리뷰만 읽어도 대충 어떤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는 감을 잡을 수 있다. 리뷰기사를 하나 스크랩해놓는다. 원제는 <경제학 안티매뉴얼>인데, '안티매뉴얼'이란 타이틀은 시리즈감이다(국역본 두 권은 이 <안티매뉴얼 1,2>를 옮긴 모양이다).  

경향신문(10. 01. 09) 돈만 숭배하다 자멸할 것인가

케인스(1883∼1946)가 프로이트(1856~1939)를 숭배했다니? 두 사람 모두 천재적인 사상가이지만 한 사람은 경제학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신분석학자인데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것이 있었던가? 혹시 케인스에게 동성애적 취향이 있었기 때문에 성적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인간의 정신세계에 접근했던 프로이트와 연관됐던 것은 아닐까? 프랑스 파리8대학 경제학 교수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서문에서 ‘자본주의라는 모험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자멸을 택한 것일까?’라고 묻고 ‘케인스와 슘페터처럼 프로이트에 심취했던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고 답함으로써 야릇한 날개를 펼치려던 상상을 접게 만든다. 



그렇다고 독자의 궁금증을 바로 해결해 주진 않는다. 저자는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든 자본주의의 사악한 작동원리,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뻔뻔함, 인간의 합리성과 완전자율경쟁시장이라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사기성을 철학적 해학으로 가득찬 현란한 문제로 헤집으며 뜸을 들인다. 프랑스어 원서가 ‘거꾸로 보는 경제 설명서(Antimanuel d’Economie)’ 정도의 평범한 제목을 달고 있으므로 저자를 탓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케인스는 돈의 축적이 부도덕하고 더럽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목표와 제한이 있어야 하고 성공한 삶이란 모든 자본이 그 주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돈이 돈을 만드는 운동은 인류가 자연과 신에 도전하고, 돈이 인간을 삶에서 축출하는 거대한 모험으로 이끈다. 자본이 인간을 지구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아마도 돈은 행복을 가져오지 못할 텐데, 특히 돈은 욕망의 근원에 다가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인간이 돈에 집작하는 것은 돈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과는 죽음의 충동이다. 이 그림은 쾌락에 빠진 인류의 종말론적 결과를 암시하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제단화 ‘쾌락의 정원’의 일부다.(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그렇다면 케인스는 프로이트의 어떤 점을 숭배했던 것일까. 책에 따르면 케인스는 버지니아 울프 등이 참여한 ‘블룸스버리(Bloomsbury)’라는 예술가·지식인 그룹에 몸담았다. 이 그룹은 프로이트가 내놓은 파격적인 이론에 심취해 있었고 그의 저작을 영어권 국가에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실제로 케인스의 저작에서는 ‘콤플렉스’ ‘리비도’ ‘우울’과 같은 프로이트식 표현이 자주 발견된다. 



프로이트에 대해 “풍부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놀랍고도 확고부동한 가설을 제시했다”고 극찬한 케인스. 우리는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케인스가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얘기를 자주 접한다. 케인스주의자를 자처하는 폴 크루그먼이 노벨 경제학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만능주의’와 ‘합리적 인간’이라는 주술을 반복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여전히 경제학계를 주름잡고 있다. 인간 행동은 ‘야성적 충동’에서 기인한다고 말한 케인스는 그들에게 적이다. 

케인스는 ‘좋은 삶’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쌓아두기 위한 대상으로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구역질 나는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혐오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먹고 사는 사람 가운데 이 병에 걸려 있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돈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숭배하는가? 다시 말해 먹고 살 만큼 돈이 있는 사람조차도 돈에 대한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라는 책에서 동식물이나 물건에 대한 숭배는 현실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을 부정하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은 바로 죽음이다. 케인스는 미래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인간에게 불멸의 환상을 심어준 것이 바로 돈이라는 통찰을 프로이트로부터 건져 올렸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사악한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스스로 돈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불안의 정신(경제)분석학’은 이자율에 대한 설명으로도 이어진다. 이자율은 경제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일 뿐더러 일반인들의 경제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 이자율의 변동은 저축·투자·투기심리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자율이 미래의 소비나 쾌락을 포기하는 대가라고 생각했다. 케인스는 공포나 집단적 불확실성에 대한 가격에 다름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원리에 대한 심대한 견해차를 내포한다. ‘인간의 이성 바로 아래에 두려움과 광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케인스의 설명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자유주의 경제학 최고의 가정을 송두리째 깨부수기 때문이다. 

저자가 케인스와 프로이트를 중심축으로 펼쳐보이려 한 것은 자본주의와 인류의 음울한 미래다.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면 자본주의는 죽음과 파괴에 대한 본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체감하고 있는 환경 대재앙과 인간성 파괴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현금을 계산하기에 여념이 없는 인류의 모습은 이러한 염세적 전망을 귓등으로 흘려버릴 수 없게 만든다.

탈출구는 없는가. 케인스는 무의미하고 침울한 축적에 대한 해결책은 미적인 것, 즉 예술·아름다움·우정·포도주와 같은 삶의 질이 우선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 역시 경제학이 풀어야 하는 것은 복잡한 수학공식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초래한 인간의 불행을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면서 기술적 진보가 인류의 영생을 보장할 것이란 환상에서 벗어나 성장이 아닌 절약,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경제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탈출구 치고는 순진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재앙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더구나 현대의 최첨단 자본주의가 대공황을 연상시키는 금융위기와 함께 악마적 심연을 드러내고 있는 이때에 말이다.(김재중기자) 

10. 01. 09.  

P.S. 어제 올 들어 처음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요시카와 히로시의 <케인스 VS  슘페터>(새로운 제안, 2009)이다. 저자는 일본의 대표적인 케인지언이라고 하는데, 참고문헌을 포함해도 270쪽밖에 안되는 분량에 두 경제학자의 대표작과 경제사상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케인스쪽에 관심이 있다면 박종현의 <케인즈 & 하이에크>(김영사, 2008)도 더 읽어볼 수 있겠다). 개인적으론 슘페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주문했던 책. 그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현재 시중에서는 주니어 만화로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유감스럽다. 자본주의 멸망의 척도로 저출산을 들고 있는 '유니크한' 책이다. 예전에 삼성출판사 세계사상전집에 들어 있었는데, 편하게 읽을 수 있었을 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나이 들면서 읽을 책, 읽고 싶은 책이 점점 더 많아지는 건 '비경제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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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평]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베르나르 마리스/창비)
    from Habracadabrah 2010-01-10 21:38 
    번역서를 접할 때 종종 일어나는 일인데 책 제목이 말 그대로 '섹시' 그 자체여서 집어들지 않고는 못배기지만 막상 책장을 펼치면 전혀 딴판의 내용이 담겨 있곤 한다. 전혀 딴판은 아니더라도 원저의 제목은 평이한데 한국에 맥락에 맞추기 위해 책속 일부를 크게 부각시킨 제목이 나오기도 한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격이라고 할까? 이 책 역시 제목이 좀 뻥튀기 됐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지은이가 분명히 케인스와 프로이트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현실 자본주의..
 
 
펠릭스 2010-01-09 12:15   좋아요 0 | URL
인간의 믿음이 신이든 돈이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한다면, 종교인에게 신은 더 높은 기쁨의 대상이기 때문이겠지만, 신을 부정하는 '도킨스'의 진화론은 '돈'과 더 관련되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돈'의 발명은 생존 유전자의 필연일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나 자신은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를 생각해봤습니다(쌩뚱맞게). 어떤 주의(이즘)라는 것이 조직 관리 시스템의 한 형태라하면 저 또한 자신을 관리하는 개인 시스템체라 궁금해집니다.

로쟈 2010-01-10 09:37   좋아요 0 | URL
돈과 진회심리의 관계는 흥미롭지만 더 설명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이즘은 자신이 지지하는 어떤 믿음이나 가치의 체계죠. 그걸로 자신을 다독이는 거라면 '관리'도 가능하겠구요...

꼬마요정 2010-01-09 14:39   좋아요 0 | URL
그래서 케인즈는 이자율보다는 동물적 감각을 더 사랑(?)했던 거군요.. 경제학이든 철학이든 무엇이든 왜 이렇게 복잡할까요.. 애초에 시작은 살고자 하는 바람과 행복하고 싶다는 바람이었을텐데...

로쟈 2010-01-10 09:38   좋아요 0 | URL
환경이 열악하고 인구가 많아지다 보면 단순한 바람도 복잡하게(만) 구현되는가 봅니다...

바밤바 2010-01-10 16:29   좋아요 0 | URL
이 책 볼까 말까 했는데 로쟈님이 추천해주셨으니 봐야겠네요.
생각보다 뻔한 내용이 아닌 것 같네요^^

로쟈 2010-01-10 17:03   좋아요 0 | URL
저도 실물을 본 책은 아니에요.^^;

노이에자이트 2010-01-10 16:42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는 90년대 말에 완역본이 나왔어요.그 완역본에 '삼성에서 나온 것은 완역본이 아니다'고 나왔길래 그렇구나...했지요.

로쟈 2010-01-10 17:03   좋아요 0 | URL
삼성판 외에 다른 역자의 다른 번역본이 있는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10-01-10 17:41   좋아요 0 | URL
예.정확히 기억은 못하겠는데 완역본이 있어요.그리고 원저의 마르크스 부분만 떼어내어 <마르크스 학설>이라고 나온 좀 얇은 책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