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학기에 내게 가장 유익한 강의는 정치철학과 한국현대시 강의다. 아이러니하게도 수강생은 가장 적은 강의들인데 나로선 그와 무관한 이득이 있다. 두 주제, 혹은 두 분야에 나대로 견적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다른 문학강의들이 큰그림을 이미 마련한 상태에서 퍼즐을 맞추는 식이라면 정치철학과 한국현대시는 먼저 대강을 그려야 하는데 이번에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할 때 그 ‘시작‘이 이번 강의였다.

현대시 강의는 다음주에 종강하지만 기형도에 대한 강의는 이미 진행한 적이 있어서 새로운 건 아니다. 다만 오늘 이성복 시를 다루면서 기형도가 이성복 시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이성복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를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다. <뒹구는 돌>에서 기형도의 유작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까지가 10년이다. 그리고 ‘가족풍경‘의 시화라는 점에서 기형도는 이성복의 직계다.

이성복은 <뒹구는 돌> 이후 <래여애반다라>(2013)까지 모두 일곱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한권의 선집을 제외하면). 시기를 구분하자면, 10년간의 공백기를 사이에 두고 둘로 나누고 싶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남해 금산>(1986)
<그 여름의 끝>(199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

<아, 입이 없는 것들>(200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03)
<래여애반다라>(2013)

이 가운데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 시집은 단연 <뒹구는 돌>이다. 주로 1970년 후반에 쓰인 시들이므로 시인이 26-27세 때 쓴 것들이다. <남해 금산>은 혹 <뒹구는 돌>의 부스러기로 읽을 수 있겠지만 <그 여름의 끝>은 <뒹구는 돌>의 연장선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와는 별개의 ‘리셋‘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번의 리셋이 <아, 입이 없는 것들>에서 이루어지는 식. 이를 결코 ‘진화‘라고 말할 수 없다. 변모라면 모를까.

공백기를 채우고 있는 것이 산문집인데 시인은 1990년에 첫 산문집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을 펴냈고, 2001년에 그 증보판으로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말도 못했는가>를 출간한다. 나는 이 산문집들이 시의 부재에 대한 변론이자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성복 시의 성취는 <뒹구는 돌>에서 <석류 꽃잎>으로 이어진다. 시가 더이상 쓰이지 않을 때 시인의 정신은 시가 아닌 산문에 깃든다. 그리고 그 피날레가 2015년에 펴낸 세 권의 시론집이다. 시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사랑노래들에 해당한다.

이성복 시에 대한 강의는 이런 구도에서 진행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놀란 건 시집을 포함해 그의 책이 한권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 모든 책을 갖고 있음에도! 하는 수없이 몇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다시 구입했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뒹구는 돌>은 바로 작년 11월말에 재판1쇄를 찍었다. 제목과 본문의 한자를 한글로 바꿔서 새로 조판한 것. 초판은 1980년 10월 30일에 1쇄, 2017년 9월에 53쇄를 찍었다. 이성복 시의 독자라면 이 재판도 기념으로 소장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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