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은 한국일보에서 눈길을 끈 기사는 이번 한국일보문학상 후보로 오른 작가 인터뷰 시리즈의 '편혜영/정미경' 편이었다(이 한국일보문학상의 전년도 수상자가 김애란이다). 모두 10명의 작가와 그 작품들이 후보작에 선정된 걸로 아는데, 두 사람은 각각 '사육장 쪽으로'와 '내 아들의 연인'이란 단편으로 후보에 올라 있다.

 

 

 

 

두 작품은 모두 지난 여름호 계간지들에 실렸었고, 마침 나도 읽어본 작품들이다. 더불어, 여기에 기사를 옮겨온 것에서 속내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두 작가를 신뢰하도록 만든 작품들이기도 하다. 나란히 거명되고는 있지만, 작년에 첫작품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를 펴낸 편혜영과 이미 연초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정미경은 경륜에서 얼마간 차이가 난다(정미경의 첫작품집은 <장밋빛 인생>(민음사, 2002)이다).  

 

 

 

 

그럼에도, 비단 이 인터뷰 기사가 아니더라도, 두 작가를 내가 나란히 떠올리게 되는 건 안정감있고 개성적인 문체 때문이다. 다루는 주제도 독특하지만 편혜영에게는 그녀의 작품임을 인지하도록 만드는 건조하면서도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문체가 있다. 그리고 정미경에게는 인물의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유려하면서도 정밀한 문체가 있다. 이 두 문체가 두 작가에 대한 신뢰를 낳으며 나로선 어느 작가의 작품들보다도 먼저 그들의 작품에 눈길을 주도록 만든다. 반가운 마음으로 두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6. 11. 07)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자 인터뷰] <2> 편혜영·정미경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천성적으로 착하고 교훈적인 얘기엔 흥미가 없어요. 이질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좋아하다 보니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상상력이 발달한 것 같아요.”

작품과 작가의 실제 이미지가 상충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사육장 쪽으로>의 편혜영(33)씨는 그 충돌이 유별나다. 얌전하고 부끄럼 많은 성격을 보면 ‘천상 여자’이지만, 그의 작품은 엽기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통해 독자의 청각과 후각에 극한의 공포를 불어넣는다. “제 소설을 보고 집에 혼자 있을 때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분들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쥐 배 가르며 놀아요’라고 농담했어요.(웃음) 제 작품이 저의 인상과 괴리되는 데서 오는 충격효과가 컸던 것 같아요.”

<사육장 쪽으로>는 평화로운 전원주택 마을의 중산층 소시민이 파산 경고장과 마을 사육장 개들의 습격을 동시에 받게 된, 강렬한 위기의 하루를 그린 단편. “처음부터 중산층의 속물성과 깨지기 쉬운 허구를 드러내자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이미지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생겼어요. 사육되는 개들은 사육장 안에서만 생활하고 삶과 죽음의 방식이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도시인과 비슷하기도 하잖아요.”

편씨는 “전에는 문제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극단으로 이미지를 밀고 나갔는데, 이젠 그런 이미지들에 손이 안 간다”며 요즘의 변화에 대해 말했다. “워낙 강력한 감각이라 중복되면 효과가 체감되게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주인공의 아기가 개한테 물리는 장면도 묘사를 참았는데, 많은 분들이 여전히 잔인하게 느끼시더라구요. 아, 나는 태생이 끔찍해서 이런 걸 너무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자책했어요.”

2000년 등단해 그 이듬해부터 직장생활과 소설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편씨는 “사무원의 쓸쓸함에 관한 소설은 열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며 웃었다. “사실 소설이라는 게 노동으로선 참 형편없는 일이거든요. 하지만 소설을 쓰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유일하게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매혹적이에요. 사회적 인간으로 살다 보면 남들 눈에 보이는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은데, 소설을 쓸 때만은 그런 고민이 없으니까요.”

◆ 심사평: 삶의 부조리 감각적 형상화 탁월
<사육장 쪽으로>는 우리 소설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야생의 상상력이 그로테스크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도시 인근의 전원주택단지를 지배하고 있는 삶의 부조리를 이 소설만큼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소설도 드물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사육장의 개 짖는 소리로 청각화한 이 야만적인 공포는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소시민의 삶을 위협하는 삶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놀라운 메타포라고 할 만하다.

편혜영이 이런 종류의 알레고리에 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상적 삶을 특유의 판타지로 추상화하는 알레고리 작가로서의 편혜영의 독특한 위상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은 역겹고 끔찍하며 엽기적인 상상력의 창고와도 같았다.

그러나 <사육장 쪽으로>에 이르게 되면 이 작가가 그 기괴한 악몽 아래 하나의 현실적인 밑그림을 살짝 배치해 둠으로써 독자들에게 해몽의 실마리를 제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실과 판타지가 절묘하게 섞여있다고 할까. 파산 직전에 이른 가장이 치매에 걸린 노모와 개에게 물어뜯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 헤매는 이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의 현실이 이 끔찍한 악몽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문학평론가 신수정)

 

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결핍을 다루고 싶었어요. 과도한 자본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뭘 잃어가는가를 그리고 싶었던 건데, 작품 속 주인공과 저를 일치시키는 분들이 많더군요. 문단에 나오니 상류층이 다 되네요."(웃음)

정미경(46)씨의 단편 <내 아들의 연인>은 강남의 유한부인이 극빈한 여자를 사랑하는 아들로 인해 겪는 심리적 갈등을 치밀하게 그린 작품이다. "소설 속 '나'의 갈등은 중산층 이상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겁니다. 대부분 자신은 속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과연 그런지 묻고 싶었어요."

주인공이 영문학을 전공한 40대 중년부인이라는 점 등 몇 가지 유사점이 자연스럽게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몇몇 평자들로부터 '가진 자가 바라본 가진 자의 세계'라는 평가를 받았다. "6년쯤 작업하다 보니 오독(誤讀)이란 독자의 고유하고도 즐거운 권리구나 하고 느낍니다. 자본이 주인공이 되면서 자기 삶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쓸쓸하고 비극적인 면을 느꼈으면 했는데, 부유층 삶에 대한 묘사만 눈여겨보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해요."

1987년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가정주부로만 살아오다 2001년 계간지를 통해 다시 등단한 정씨는 치밀한 묘사와 풍부한 디테일로 정평이 났다. "계급이나 직업을 묘사할 때 입체감을 주기 위해 디테일 리서치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글에 빈틈이 너무 없어서 숨막힌다는 분들도 있는데, 글쎄요, 뒤늦게 소설을 시작하면서 군기가 강하게 잡혀서 그런지 어떤 때는 단편 하나를 몇 달씩 주물러요."

<내 아들의 연인>은 가난한 연인과 헤어졌다는 아들의 말에 주인공이 묘한 안도감과 공허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끝난다. "이제 가난은 돈의 문제만이 아니에요. 돈 외에도 다양한 자본과 권력들이 있고, 부(富)라는 것도 부정한 부와 성실한 부 등 스펙트럼이 다양합니다. 삶이 훨씬 복잡해진 만큼 빈부의 문제를 분석할 수 있는 시각도 다양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지난 6년간 친구들과의 교유조차 끊으며 소설쓰기에 매달려왔다는 정씨는 지금에서야 늦게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아휴, 이거 젊어서부터 했으면 지금쯤 골병 들었을 거예요."

◆ 심사평: 상류층 묘사 소설사적 공백 메워
정미경의 소설은 전형적인 부르주아 소설이다. 소설이란 장르가 원래 부르주아 계급의 출범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간 한국 소설은 소위 최상류층 유한계급의 일상을 다룬 적이 별로 없다. 우리 소설은 계급 문제에 관한 한 항상 도덕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유한계급의 삶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우리 문학사에서는 소설적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내 아들의 연인>이 문제적인 첫 번째 이유가 그것이다.

물론 정미경의 소설이 비도덕적이란 이야기가 아니다. <내 아들의 연인>은 유한계급에 속하는 중년 부인을 화자로 등장시켜 계급 간 단절의 강고함을 다룬다. 계급은 경제의 산물일뿐만 아니라 부르디외 식으로 표현해 문화적 '구별짓기'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계급간 갈등이란 강자가 약자에 대해 베푸는 온정이나 약자가 강자에 대해 행사하는 투쟁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란 사실을 세심하게 보여준다. 19세기 영국 소설들의 예에 육박하는 섬세한 세부묘사와 심리묘사가 가히 압권이거니와, 손쉬운 온정주의와 도식적인 화해를 거부한 작가적 치열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문학평론가 김형중)

06.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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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7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소 과장된 타이틀로 보이지만, 최근에 불역된 이승우의 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이 그렇다. '한국문학 유럽서 뿌리내린다'. 이전에 한국문학 번역현황과 관련된 페이퍼를 올린 거 같은데,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기사를 옮겨놓는다. '문학의 뒷계단'이란 카테고리에도 맞을 듯하고(우리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유감스럽게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평일에 한국문학이 아니라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인지라 마땅히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게 핑계이다). 재작년에 러시아 체류시 모스크바의 대형서점에서 단한권의 한국문학 작품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씁쓸했던 기억이 있는데, 러시아쪽 사정도 나아지기를 이 참에 기대해본다.

 

 

 

 

서울신문(06. 10. 27) 한국문학 유럽서 뿌리 내린다

한국문학이 유럽에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프랑스, 독일 등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이 유럽 각지에 소개돼 평단의 호평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오래됐지만 최근 들어 평론가의 관심은 물론 일반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기며 판매에서도 호조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프랑스 서점가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승우의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다. 지난 8월말 프랑스 줄마출판사에서 출간한 ‘식물들의 사생활’은 한국소설로는 이례적으로 출간 한달 만에 초판 2500부가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2000년 ‘생의 이면’을 통해 이미 프랑스 문단에서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이승우의 소설은 출간과 동시에 일간지 ‘르 피가로’와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등 언론매체에서 앞다퉈 기사를 다뤘고, 이어 프랑스 최대 서점체인망인 프낙의 ‘가장 주목받는 신간 외국소설 10권’과 또다른 대형서점 버진의 ‘가을 신간 권장도서목록 30권’에 선정됐다(*독역본 이미지들만 뜬다. 아래는 독역본 <생의 이면>).

번역을 지원한 대산문화재단 곽효환 팀장은 “프랑스에서는 바캉스 시즌이 끝난 가을에 신간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는데 올 가을 680여종의 신간 중에 이승우의 소설이 주목받았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며 줄마출판사측도 놀라워했다.”고 전했다. 이승우 특유의 지적이고 관념적인 작품세계가 프랑스 독자들의 성향과 잘 맞았다는 분석이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독자의 눈길까지 사로잡았다는 점에서 이승우의 소설은 한국문학의 진정한 세계화에 장밋빛 기대를 걸게 하는 사례다.

이에 앞서 지난 4일 스웨덴 최대 일간지 ‘다켄스 니헤테르’는 박완서의 소설 ‘나목’을 문화면에 대서특필하며 큰 관심을 드러냈다.‘한국전쟁의 그늘 아래’라는 제목으로 실린 서평은 “한국전쟁과 1950년대라는 특수한 시공간을 다룬 작품임에도 모든 전쟁에 내재된 무감각한 증오 및 문화적 억압 그리고 전쟁 속에서 성숙해지는 주인공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고 호평했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출간된 한국문학 작품은 세계 45개국, 총 1220여종. 작가별로는 고은 시인의 작품집이 8개국에서 16종이 소개됐고, 황석영 7개국 23종, 이문열 12개국 31종, 이청준 10개국 28종 등이다. 곽효환 팀장은 “한국문학이 세계 각국에 꾸준히 소개되고 있지만 이중 재판을 찍는 경우는 10권에 1권 정도”라며 “작가 선호도가 나라별로 다른 만큼 명확한 타깃마케팅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

문화교류 차원을 넘어 세계 문학시장에서 우리 문학의 상품가치를 높이기위한 지원책도 적극 모색되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원장 윤지관)은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3일까지 프랑스 파리, 스웨덴 스톡홀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등지에서 문학행사와 출판지원 조인식, 해외독후감 대회 시상식 등을 가졌다. 소설가 김훈, 은희경, 윤흥길, 황석영, 김인숙, 시인 김선우, 평론가 신수정 등이 참여했다. 번역원은 특히 내년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해외독후감대회를 확대할 방침이다. 윤부한 팀장은 “전세계 12곳의 한국문화원을 통해 독후감대회를 열어 현지 평론가와 독자 모두에게 우리 문학을 좀더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이순녀기자)

06. 10. 29.

P.S. 아래가 불역본 <식물들의 사생활>이다. 여느 프랑스책들처럼 표지는 단촐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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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0-29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뿌리 내리다'와 '뿌리 내린다'의 차이. 후자는 뭔가 주술적인 바램이 포함된 것 같아요. ^^
날이 갈수록 번역된 문학 작품들을 도저히 못 읽겠어서 한반도에서 쓰인 것을 빼고는 띠엄띠엄 영어권의 작품만 읽어내고 있습니다. 흠.

로쟈 2006-10-2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오타'가 났었네요.^^

테렌티우스 2006-12-02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서재를 읽는 것이 일상생활의 하나가 되었네요...^^
불어본 이미지는 아래의 프낙 서점 사이트에 있고요... 그림을 클릭하면 큰 사진이 뜹니다...

http://www4.fnac.com/Shelf/article.aspx?PRID=1843378&Mn=6&Ra=-1&To=0&Nu=2&Fr=3


로쟈 2006-12-0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이미지를 옮겨놓았습니다. 프랑스쪽은 표지장정에는 돈이 별로 안 들 거 같습니다.^^
 

얼마전에 전해들은 것이지만 한국문학의 '전복적 상상력' 혹은 '수상한 활력'에 대한 심포지엄이 개최된다고한다. 문단의 동향에 관심을 가져온 이라면 대략 어떤 내용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미래파 논쟁'이다. 발표문들은 아마도 겨울호 계간지에 실릴 듯도 한데, 개인적인 의견은 그때 붙이도록 하겠다. 

경향신문(06. 10. 26) '전복적 상상력’ 심포지엄, 한국문학 전위 ‘수상한 활력’ 찾기

사진 위부터 황병승, 강영숙, 강정씨.

2000년대 한국 문학을 향해 흔히 던지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자리가 마련된다. 계간 ‘실천문학’이 2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관에서 개최하는 심포지엄 ‘한국 문학과 전복적 상상력’이 그것이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은 물론 문학판 안에서조차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변화한 한국 문학의 전위에 대해 평가해보는 자리다. ‘문학’이라는 아성, 특히 리얼리즘·모더니즘 등 외부 세계에 어떤 현실·진리가 존재하고 문학은 그것을 재현한다는 식의 근대문학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21세기 문학을 규정하려는 평론가들의 분투라고 할 수 있다.

심포지엄의 총론 발제를 맡은 평론가 손정수씨(계명대 교수)는 “예술로서의 문학과 상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구분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서는 희미해진 반면, 제도적 차원에서만 뚜렷하다”며 “특히 예술로서의 문학은 소규모 취미공동체 내에서만 유통되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손씨는 여기에 ‘교육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범주를 하나 더 보태는데 이는 근대문학 초창기에 계몽 또는 교양의 역할을 하다가 오늘날에는 홈쇼핑 방송에서 논술교재용으로 판매하는 동서양 고전처럼 상품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손씨에 따르면 공공적 성격이 강한 상품·교육으로서의 문학은 자본주의체제에서 자립하는 반면, 사적 활동인 예술로서의 문학은 정부지원에 의해 지탱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는 게 오늘날 현실이다.

그렇다면 예술로서의 문학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손씨는 “문학의 정치성이라는 근대문학의 전제는 사라졌다”면서 그 대신 “2000년대 이후 문학의 종말을 둘러싼 음산한 풍문들 속에서도 수상한 활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지칭하는 작품은 편혜영·김애란·김숨·백가흠·김유진 등의 소설, 황병승·강정·장석원·김행숙·이장욱 등의 시이다. 이 작품들은 ‘분석자의 시선이 사라지고 피분석자의 언어만이 드러나 있는 것’, 즉 관찰·묘사·해석·대안 등 기존 문학적 관습에서 벗어난 것이다. 손씨는 여기서 미래 문학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인터넷 블로그와 같은 자발적 글쓰기, 공동체의 구성원이 하고 싶은 말을 작가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범위 내에서 스스로 말하는 방향”이라는 전망이다.

한편 ‘젊은 시인의 전복적 언어’를 분석한 평론가 신형철씨(서울대 강사)는 2000년대 ‘뉴웨이브’라 명명된 시의 핵심이 ‘자아에 대한 발본적 반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서정시와 생태시를 가능하게 했던 전인적 ‘자아’ 대신, 분열되고 해체된 ‘주체’가 시에 등장했다는 뜻이다. ‘죽을 때까지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으리’(황병승의 ‘시코쿠’), ‘토끼는 달리면서 자꾸만 토끼 아닌 것이 된다’(강정의 ‘들판을 토끼’) 등의 시구가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 신씨는 “‘정상’의 시선에서는 변태와 괴물, 환상과 엽기일지 모르지만 ‘금지에의 저항’이 아니라 ‘유혹에의 거절’만이 가능한 시대에 탈고백, 반계몽, 무질서가 갖는 전복적 미학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젊은 소설가의 전복적 서사’에서 평론가 심진경씨(서강대 강사)는 민족과 국경이 사라진 전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그려낸 소설로 강영숙의 장편 ‘리나’(랜덤하우스)와 한유주의 작품집 ‘달로’(문학과지성사)를 든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라진 1990년대의 작가들이 인도·티베트·몽골·중국 등 해외체류경험을 통해 전(前)자본주의 사회의 정서를 그렸다면 강영숙과 한유주는 더이상 자본주의 아닌 곳이 없는 현실에서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만들어낸다. 심씨는 “강영숙의 주인공 ‘리나’는 단순한 탈북자가 아니라 세계의 여러 국경을 떠도는 이주자이며 한유주의 화자는 미디어를 통한 간접 경험, 기억에 대한 기억만이 가능한 신세대의 표상”이라고 밝혔다.(한윤정 기자)

06. 10. 26.

P.S. 컬쳐뉴스에서 실제 진행된 심포지엄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난 2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관에서 개최된 계간 『실천문학』 심포지엄에서 손정수 문학평론가가 총론을 발표하고 있다

컬쳐뉴스(06. 10. 30) 한국문학의 '내파력'은 어디서 오는가?

편혜영, 김애란, 김숨, 강영숙, 백가흠, 황병승, 강정, 장석원 등 소위 요즘 잘나가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의 작품은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과 같은 전통적 문학 범주로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동시대 작가로서 공통된 경향성을 보이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문학에 따라다니는 공통된 수사가 있다. 바로 ‘전복적 상상력’이 그것인데, 기존의 문학적 형식이나 내용의 틀을 깨트리는 이 ‘전복적 상상력’은 2000년대 문학이 가진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계간 『실천문학』은 이번 겨울호 발간에 앞서 2000년대 한국문학이 지닌 이 같은 ‘전복적 상상력’을 보다 냉철히 성찰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 10월 27일(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관에서 개최된 문학 심포지엄 ‘한국문학과 전복적 상상력’은 2000년대 문단에 제출되고 있는 시와 소설에서 발견되는 ‘전복적 상상력’이 한국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인가를 구체적으로 논하는 격론의 장이었다. 

이날 심포지엄은 총론 ‘한국문학의 전복적 상상력’과 소주제 ‘젊은 시인의 전복적 언어 읽기’, ‘젊은 소설가의 전복적 서사 읽기’로 진행됐다. 심포지엄 총론을 맡은 손정수 문학평론가는 「‘전복적 상상력’을 전복하는 상상력」이라는 발제에서 “2000년대 이후 문학의 종말을 둘러싼 음산한 풍문들 속에서도 시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수상한 활력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이 새로운 경향은 귀족적이라고 비판되곤 하는 모더니즘 내러티브의 순수한 추상화를 향한 초월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의 길을 걷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최근의 문학 작품에서는 증상에 대한 처방이 아니라 증상만 드러나는 경우가 빈번하다”면서 때문에 “누구나 문학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인터넷 블로그와 같은 자발적 글쓰기의 형식은 미래적 글쓰기의 존재방식의 한 측면을 암시”한다고 밝혔다. 결국 “기존의 문학 관념을 벗어난 곳에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놓여 있”으며, “문학의 현재적 존재방식 자체를 전복 혹은 변화시키는 상상력, 즉, 텍스트 차원의 ‘전복적 상상력’을 전복하는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토론에서 “문학의 전복성은 주변성이 아니라 중심의 가운데에서 그것을 해체하거나, 중심의 중심성, 척도의 정당성 자체를 뒤흔드는 혁명성에 있다”면서 “문학이, 문단이 제도화된 상황에서 인터넷을 통한 자발적 글쓰기가 아마추어리즘 이상의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서영인 문학평론가는 “근래에 들어 문학의 새로움을 증명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이전의 원리들에 의거해 설정되고 있다”면서 “지금의 문학이 이전의 것과 다르다면 그리고 그 이전의 문학 역시 새로운 것으로 명명된 바 있다면, 지금의 새로움을 말하기 위해서는 좀 다른 방식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젊은 시인의 전복적 언어읽기’를 분석한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2000년대 한국시의 뉴웨이브’에 대해 “새로워서 좋다”가 아니라 “좋은데 새롭다”고 전제하면서, “뉴웨이브의 핵심은 ‘나’에 대한 발본적 반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뉴웨이브”들을 “‘상투적인’ 서정시”들과 구분하면서 “그들은 ‘나’의 단독성을 보증해주지 못하는 세계에서 ‘자아’라는 헛된 정체성(동일성)과 작별”하고 “세계 여기저기에서 ‘나’를 재확인하는 서정적 여행을 그만”두고, “‘나’의 진실을 찾아 비서정적, 탈서정적 여행을 떠난다”고 분석했다.

신 평론가는 “많은 사람들이 뉴웨이브의 시가 내용 없고 질서 없는 장광설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시 독자의 이반을 초래하고 있다고 걱정”하지만 “이 세상의 깨달음과 지혜라는 것들이 대개 엇비슷하게 닮아있다는 사실에 피로를 느끼는 독자들은 이들의 시에서 어떤 역설적인 가능성을 읽어내기도 한다”면서 “탈-고백, 반-계몽, 무-질서가 궁극의 미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당분간 이 미학들의 전복성은 소진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래파’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한국 시단에 반향을 일으킨 권혁웅 문학평론가는 토론에 앞서 “미래파라는 말은 텅 빈 명명이자 일종의 여백”이라며 “이 여백을 통해 실재하는 것들의 자리가 조금이나마 드러난다면 그것으로 이 용어의 쓸모는 다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황병승에게 이성복이 없었다면, 장석원에게 김수영과 황지우가 없었다면, 강정에게 함성호와 진이정이 없었다면 (중략) 이들의 출현은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라면서 “이들의 시가 전복적인 것은 그 전대의 영향을 미묘하게 변형하고 비켜가고 극단화해서 마침내 새로운 차원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성혁 문학평론가는 신형철 평론가가 ‘좋은데 새롭다’는 것을 마케팅 미학인 ‘새롭기 때문에 좋다’와 구분지어 명명한 것과 관련해 “좋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사용가치가 없다면 교환가치도 가질 수 없다”며 “발표자는 교환가치의 불모지인 문학마저 ‘새롭기 때문에 좋다’라는 마케팅 미학에 흡수된 양상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젊은 소설가의 전복적 서사 읽기’에서 심진경 문학평론가는 민족과 국경의 경계가 사라진 전지구화 시대, 미디어 네트워크 시대의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그리고 있는 강영숙의 장편소설 『리나』와 한유주의 단편집 『달로』를 통해 ‘허공에서 글쓰기’라는 문학적 경향을 읽어낸다.

심 평론가는 “이들 소설의 인물들은 단일한 기원이나 정체성을 주장하기 보다는 세계를 스쳐지나가듯 여행하면서 유령처럼 희미하게만 존재한다”며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견인해왔던 현실적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공중부양하는 이들 소설에서 ‘허공’은 새롭게 발견한 문학적 공간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허공에서 글쓰기는 다국적 기업의 논리가 지배하고 미디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경험하게 된 후기자본주의적 현실과 그리 멀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허공은 무중력의 탈현실적 공간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명철 문학평론가는 “『리나』는 근대적 경계로부터 발산되는 문제들에 맞서는 ‘포월의 서사’가 아니라 악무한의 현실로 빚어진 관념의 공간-국경을 넘는 ‘이월의 서사’에 자족할 뿐이며, 『달로』 역시 주체와 그 주위에 존재하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시간의 물질성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이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났다면, 벗어난 이유들에 대해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강민 문학평론가는 “모든 것은 매개된 기억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한유주의 소설은 과연 2000년대 소설의 새로운 희망일까?”라고 물으며, “2000년대 작가의 진정한 새로움이란 탈주체, 탈근대를 표방한 1990년대 미시서사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 속에 새롭게 태어난 것일 수박에 없는데, 한유주의 경우 1990년대 문학의 연장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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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6-10-2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정 시인 사진은 처음 보네요.
예전에 한번 본 '비행선'이라는 밴드의 보컬하고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검색해보니 같은 사람이군요..;;
성기완 시인도 그렇고 참 다재다능한 사람들이네요

로쟈 2006-10-27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로만 버티기도 힘들다는 게 다재다능의 이면이 아닐까요...
 

요즘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는 젊은 문인들은 문학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유용한 지표가 될 만한 조사결과가 나왔다. 교수신문이 대략 1970년 이후 출생하고 2000년 이후에 등단한 신진문인들을 상대로 가장 과대평가된 문인은 누구인가, 다시 주목해야 될 문인은 누구인가, 가장 주목하는 동료 문인은 누구인가 등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를 짚어보는 특집기사들을 옮겨온다. 소위 '2000년대 문학'의 판도와 실상을 이를 주도하고 있는 젊은 문인들의 의식과 시각을 통해서 이해하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될 만하다. 기사에서의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교수신문(06. 09. 23) 유사이래 문학작품의 물량이 지금처럼 넘쳐나는 때가 없었다. 몇년 전에 비해 발표지면이 10배 이상 늘어난 탓이다. 그만큼 새로운 신진들의 작품도 쏟아져 나오고 그에 대한 비평적 리뷰가 필요한 시점이다. 교수신문은 외재적으로 신세대를 조명하기보다는 이들 신진문인 95명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았다. 과연 이들은 전세대 문학전통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문학적 모티프를 어떻게 만들어왔고 또 만들어나갈 예정인지를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고 이를 통해 향후 한국문학의 전개를 엿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편집자주)

[특집] 신진문인 의식조사(1) 조사결과를 보고

문학사가 보여주듯 어느 시기에나 문학의 새로움은 신진 세대들의 몫이었다. 2000년대 이후 문학판의 크고 작은 지각 변동 역시 기성문인보다는 새로운 세대들의 주도적인 움직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데 비평가의 촉수는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문학판의 흐름에 대해  이 새로움이 과연 어떤 진정성을 갖고 있느냐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그 진정성을 따지는 작업은 신진으로 부상한 문인의 작품을 읽고, 그 시비를 따지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길만이 전부는 아니다. 작품보다는 신진 세대의 문학적 의식의 근저를 훑어보는 방법도 매우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그들의 문학적 토대를 형성한 선이해의 바탕과 그들이 선망하거나 비판하는 작가들을 눈여겨 살피는 길이 그 중의 하나이다.

물론 한 작가나 시인의 문학적 의식의 근저를 더듬는 작업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들의 문학적 의식의 토대를 형성한 요소들이 다양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수신문’에서 젊은 문인들에게 설문으로 들고 있는 항목들은 이들의 문학적 의식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징검다리가 강을 건너는 훌륭한 다리가 되듯, 여기의 항목들이 비록 일부일지라도, 2000년대 새로운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지향 전체를 암시할 만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번 설문이 지닌 의미가 있다.

설문 중 필자의 관심을 끄는 항목은 우선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반응이다. 소설가들의 답변 비율이 동의 쪽으로 기울어진 듯하지만, 시인이나 비평가들의 입장은 동의할 수 없다는 쪽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보면,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문학판의 상황이 위기감으로 팽배해 있지만,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의식의 근저는 무엇일까. 이는 자기세대의 문학에 대한 당위성과 함께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은 아닐까. 문학은 소생 불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고 진화해야 할 시대의 명확한 목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체는 물론 젊은 작가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세대 의식’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젊음을 갱신과 진화의 무기로 인식하고 있다. 기력이 쇠한 늙은 문학이 아니라, 젊고 건강한 문학을 통해 시대에 대한 전망을 이끌어내려 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그 젊고 건강한 문학이 과연 어떤 문학인가. 신세대의 화살이 어느 과녁을 겨냥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물음에 간접적으로 답변을 얻을 수 있는 설문이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문인들, 과대 평가되어 비판이 필요한 문인, 새롭게 조명받아야 할 문인, 마지막으로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동료문인’ 등의 질문이다. 여기에 대한 신진 작가들의 답변은 매우 흥미롭다.

먼저 젊은 비평가들의 응답이다. 이들에게 비평을 문학의 한 장르로 인식하게 해준 김현의 존재는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김현은 우리 비평사에서 비평도 문학작품임을 실천비평을 통해 확인시켜 준 비평가다. 그런데 젊은 비평가들이 김현의 비평적 작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비평을 창작의 한 장르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비평 행위를 작품에 대한 단순한 해석과 평가만으로 인식하는 선이 아니라, 문학예술의 장내로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비평이 지닌 매혹을 경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비평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긍정적인 측면으로 이해된다. 시나 소설처럼 가독성을 지닌 비평이 존재할 때, 비평은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평이 창조적 비평만을 추구할 때는 텍스트에 대한 분석력과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방기할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젊은 비평가들이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자들이 텍스트를 현실과 관련시켜 구심적이면서 원심적으로 꼼꼼하게 읽는 김우창이나 유종호 같은 비평가들과 현실 인식과 예술성을 함께 보여주는 황석영 같은 작가들이란 점이다. 이런 비평가나 작가들의 영향권을 무시할 수 없다면, 이들이 생산할 비평적 작업의 방향은 일방적으로 텍스트 자체에 함몰되거나 텍스트가 현실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전락되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비평가들이 자기세대의 문인으로 전성태에 주목하고 있는 점도 이런 측면에서는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의 소설이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리얼리즘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성과 함께 새로운 소설미학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비평가들의 고민은 자기세대의 모든 작가나 시인들이 문학성과 함께 현실성이 잘 융합된 작품만을 만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젊은 시인들의 설문응답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만난다.

시인들의 응답에서, 자신들이 영향을 받은 시인들의 공통된 사항은 치열성과 실험성이다. 현존하거나 작고한 시인 중 영향을 많이 받은 시인들은 이성복, 김혜순, 백석, 김수영, 이상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에게서는 현실성의 문제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세대의 주목받는 시인으로 오면, 시의 경향은 실험성을 지닌 쪽으로 기울어진다.

젊은 시인들은 김경주, 황병승, 김행숙 등을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시가 지닌 상상력을 통한 실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의 영역에서 실험성 짙은 작품들이 성행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위 리얼리즘 시의 경향이나 서정시 계열의 시인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이미 주류에서 멀찌감치 밀려나 있는 형편이다. 영향을 받은 외국 문인으로 보르헤스나 보들레르를 우선 들고 있다는 점도 이들이 시에서 상상력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과장 평가된 시인의 첫 자리에 고은 시인을 두고 있음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젊은 시인들이 내세우는 새로운 형식과 실험 정신을 소위 미래파라고 명명하며, 그 가능성을 긍정하는 논의들이 일고 있지만, 아직 소통의 시문법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문학 위기론의 가장 큰 이유로 젊은 문인들 역시 독서인구 감소에 의한 문학시장의 협소 침체로 들고 있는데, 시의 영역에서 시도되고 있는 실험시들이 지닌 소통불능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런 현실적인 과제를 풀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의 응답에서는 시에서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본다. 영향을 받은 주요 작가로 김승옥, 오정희, 조세희, 이상 등을 들고 있다는 것은,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의식의 근저가 현실에 뿌리를 내린 상상력을 통한 소설미학을 추구한 작가들에 가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젊은 작가들이 자기세대의 작가로 주목하는 대상을 살펴보면, 김애란, 김중혁 등에 관심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 방식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민석, 김윤영 등 자기세대의 젊은 작가를 새롭게 조명해야 할  대상 작가로 내세우는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된다.

설문 응답에 나타난 결과들의 개관을 마치면서 내리는 결론은, 젊은 문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지향점은 새로움이란 것이다. 이 새로움의 추구는 새로운 세대가 응당 져야할 작가의 몫이다. 자기세대의 문학판을 만들어 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자들이 문인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새로움의 추구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진정성을 지니는 작품으로 읽히느냐 하는 점이다.(남송우 / 부경대, 국문학)

[특집] 신진문인 의식조사(2)소설가

젊은 작가들은 아고타 크리스토프, 파스칼 키냐르, 레이먼드 카버에서 오르한 파묵, 살만 루시디, 프랑코 모레티, 척 폴라닉까지 퍽 다양한 독서편력을 보여줬다. 선호하는 국내 문인도 박상륭에서 김승옥, 오정희, 이인성, 장정일, 천운영 등 범주가 넓다.

그러나 “문학사적으로 과대평가된 외국 문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7명이 공통으로 “하루키”를 꼽았다. 응답자들은 하루키에 대해 “초기작은 좋은데 후기로 갈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아쉬움 겸 불만을 표했다. 이는 그만큼 “하루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들의 삶”과 연관되는 부분일 수도 있다. 몇몇 작가들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하루키를 꼽기도 했다.

현존 국내 문인 중 ‘과대평가된 문인’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이는 이문열이다. “작품의 질에 비해 지나친 문학 권력을 보유”했고, “매체들이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해 반감이 든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의 문학에서 ‘문학적인 무엇’을 바라는 일에 회의적”이며 문학 자체에 대한 “정밀한, 문학적 평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하루키와 이문열에 대한 평가는 상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춘원 이광수 또한 3명이 ‘비판이 필요한 문인’으로 꼽았다.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과장된 수사로 점철된 문인”이라는 것. 김동인에 대해서도 2명의 작가가 “작가적 이데올로기의 실체가 보이지 않”고 “습작기적 자태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라고 평했다. 비교적 젊은 문인으로는 소설가 한강이 “특색이 없”어 “간혹 ‘누구의 목소리’인지 헷갈린다”고 언급됐으며, 김영하에 대해서도 “그의 문학에는 시대적 진정성이 없으며 그것은 전략적으로 제거된 것이 아니라 김영하 자체의 불완전함 때문이다”라는 일침이 가해졌다(*김영하에 대한 평가도 상식적이다. 다만, 한강에 대해서는 내가 별로 읽어본 바 없어서 잘 모르겠다. 최근에 읽은 그녀의 단편은 수작이었다).

문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해야 할 문인에는 세 명의 작가가 이승우를 거론했다. 이승우는 영향을 많이 미친 작가로 거론되기도 했다. 1981년 스물 한 살에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등단한 그는 이후 <생의 이면> 등의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이를 작품을 통해 명쾌하게 결론내린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가볍지 않아서인지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는 않은 편이고, 평단에서도 인기 주제는 아니었다. 이외에 젊은 작가들은 제3세계 문학에 목말라했다.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문학에 대해서는 알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며 보다 많은 번역·연구·관심을 주문했다.

“주목하는 동료 문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5명이 ‘김중혁’을 꼽았다. 한 작가는 김중혁에 대해 “작품의 소재는 아날로그적인데 이것이 또 디지털적이기도 하다”며 “디지털 요소와 아날로그적 요소가 잘 결합돼 있다”라고 밝혔다. 이는 작가적 테크닉에 대한 부러움으로 보인다. 평론가 김형중은 “기능적 가치로부터 해방된 사물들을 작품 속에 수집함으로써 인간까지 해방시킨다”고 ‘김중혁 論’을 펼친 바 있다(*<문학동네>의 가을호 특집이 김중혁을 다루고 있다. 젊은 세대, 혹은 '레고블록 세대'의 감성이 나와 다르다는 걸 알겠다).

<달려라 아비>의 주인공 김애란은 주목받는 만큼 평이 엇갈렸다. “젊고, 잘 쓰고, 인기많은” 김애란에 대해 몇몇 작가들은 “지금의 평가는 80년대 출생이라는 문학 외적 사실, ‘아버지를 부정하는 방식’에만 과도하게 치중됐다”라거나 “잘 읽힌다는 점으로 과하게 주목받고 있다”라며 ‘김애란’ 자체보다는 ‘김애란’에 과도하게 주목하는 평단을 비판했다(*김애란은 주목할 만한 작가이다. 다만, 평단의 그 주목이 다른 작가들에게도 두루 할애되고 있지 않다는 건 문제를 제기할 만하다). 

신예 작가들은 몇몇 작가들에게만 주목하는 비평에 불만이 많았다. 한 작가는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문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조명은 누가 하는 것이냐”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했다. “조명 자체가 문학이라는 사건을 ‘무대화’시키는 것이며 누군가를 새롭게 조명하기보다는 조명받을 기회조차 없는 신인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문학판 또한 얼마간은 '스타 시스템'에 의존한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문학판은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또한 ‘문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문인’으로 공선옥과 전성태를 꼽은 한 작가는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지평에서 담론을 펼치기 쉽거나 혹은 적합한 문학에만 먼저, 자주 손을 대는 경향이 있다”며 “김영하, 성석제, 전경린, 배수아 등이 그런 점에서 많이 노출된 반면, 훨씬 공력이 높은 공선옥, 전성태 등은 비춰지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문학의 위기를 초래하는 내적 요인으로 “몇몇 문예지와 비평가 중심으로 문학 판도가 좌우되는 것”을 꼽기도 했다(*공선옥에 대해서는 판단유보이지만, 전성태가 공들인 작품들을 쓴다는 건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한국 문학 위기론의 이유’에 대해 신진 소설가들은 “독서인구 감소에 따른 문학 시장 협소”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 외에 “문학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 “왜 한국 문학을 접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하는 현 교육 시스템의 결함”을 꼽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의 위기란 문학 내생적인 것”, “세계문학사에 비춰보더라도 한국문학은 이제 시작인데 위기라고 생각하는 인식 자체가 문제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문학이란 더 이상 ‘위기’라고 부를 만큼 커다란 것이 아니며 개인적인 향유와 소통의 차원의 것이다”라는 답변도 나왔다.(박수진 기자)

[특집]신진문인 의식조사 (3)시인

젊은 시인들은 공교롭게도 애증의 사제지간으로 얽힌 고은과 서정주를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시인으로 평가했다(*이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이다. 고은에 대한 평가에는 나도 동의한다). 한편, 주목하는 동료시인으로는 황병승과 김경주를 많이 꼽았다. 2000년 이후 등단한 시인을 중심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현존하는 작가 중에서 과대평가된 시인으로는 4명중 1명이 고은을 꼽았다. 이는 설문조사 문항 자체가 보기 없이 주관식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젊은 작가들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여겨진다.

고은 다음으로 이문열, 김영하, 신경숙 등 기존 문단에서 문학성과 상업성을 겸비했다고 인정받던 소설가들이 각각 2명으로부터 “과대평가 됐다”고 거론됐다. 작고한 문인으로는 “작품성보다는 권력 편에 선 삶의 과오가 컸다”는 이유로 5명이 서정주를 지목했다. 전세대를 매료시킨 서정주의 미학적 魔力은 통하지 않았다. 이 외에 기형도와 윤동주(3명), 김소월·한용운(2명) 순으로 나타났다. 교과서 첫머리를 장식하는 이들이 젊은 시인들의 의식 속에서는 ‘제대로 청산해야 할 과거’가 되고 있었다. 

70~80년대 민중시단을 선도했고,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고은을 과대평가 됐다고 평가한 주된 이유는 “목청과 활동반경에 비해 그다지 개성적이거나 뚜렷한 문학적 성과를 남겼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창비가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인 '신화'가 아닌가도 여겨진다). 실제 작품보다 ‘주변인’들의 주관적 평이 고은의 ‘이미지’를 굳혔다는 얘기며, 나아가 “근작들이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혹평도 더러 있었다. 시인 서정주는 “작품성만으로 평가하기에는 민족에 대한 과오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과대평가된 문인에 올랐다. 이처럼 신인들은 ‘민족’을 중요시 여겼다.

결국 고은과 서정주는 사회적 활동이 작품을 압도한 경우로 해석된다. 기형도에 대해서는 “요절시집에 붙은 문학평론가 김현의 해설이 크게 작용”했고 이후 “요절의 상징이 됐다”, “작품의 폭이 넓지 않고, 암울하며 서술적이다”는 평가가 주어졌다. 한 응답자는 시인 진이정이 기형도 못지 않게 뛰어나지만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기형도와 진이정에 대해서는 나도 짤막한 페이퍼를 쓴 바 있는데, '기형도 못지 않게 뛰어난 진징정'이란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윤동주에 대해서는 “유약한 센티멘털리즘에 도취된 청춘”, “혁명가와  저항시”라는 수식어가 과장됐다는 평가다. 외국 작가로는 “태작이 많고, 상업추수주의”인 점을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4명)와 무라카미 류(2명)를 꼽았다. 작품활동을 하는 데 있어 영향을 받았거나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는 백석(10명), 김수영(8명), 이성복·李箱(6명), 보르헤스(5명), 김혜순(4명), 보들레르(4명) 등을 꼽았다.

지난해 ‘시인세계’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현대시 1백년 최고의 시집으로 백석의 <사슴>이 꼽히기도 했는데, 한 젊은 시인은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만 단단한 갈매나무”라는 싯구로 백석의 시세계를 묘사했다. 고향과 추억, 언어의 순도, 유랑자의 시선으로 백석의 시는 많은 젊은 시인을 매혹시키고 있다. 이는 도회적 시가 유행하는 현대 시단에서 젊은 시인들이 향토적 서정을 갈망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시인 김수영에 대해서는 “현실에 직면하는 詩作”, “치열함에서 오는 새로움”, “첨예한 의식으로 구성된 산문”이란 평가가 뒤따랐으며, 시인 이상에 대해서는 “치열한 부정과 혁신정신”, “실험정신과 문제의식”이란 수식어와 함께 “청소년기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문학정신을 배우고 싶다”며 거론됐다(*20세기 한국시는 점차 '백석이냐 김수영이냐'로 정리되는 듯하다).

현존하는 시인 가운데 젊은 시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 이성복에 대해서는 “문학에의 진정성이 돋보인다”, “치밀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섬세한 감수성과 실험정신, 전통의 조화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현실에 대한 비유의 다양성과 시간초월성이 탁월한 작가”라는 추천사를 받은 보르헤스는 이 세대만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다(*개인적으론 80년대의 이성복이 그러한 문학사적 평가를 감당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시인 김혜순에 대해서는 “초기작에 비해 최근의 시가 더 좋은 시인” , “최승자와 더불어 늙지 않는 시세계” 등 의 이유가 조심스레 들어졌다. “천상의 노래를 지상으로 끌어내린 시인”, “현대성, 현실에 가장 탄력적 반응을 보인 시인”으로는 보들레르가 꼽혔다. 이밖에도 신경림, 김지하, 박상륭, 오규원 등에 각 2명씩 답했다. 하지만 이성복과 더불어 80년대 시단을 양분했던 황지우 시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탈-황지우'는 모처럼 눈에 띄는 현상이다).

새롭게 조명해야할 작고문인으로는 손창섭, 김종삼, 백석, 리처드 브라우티건 등을 각각 3명씩 거론했으며, 현존 작가로는 “노동과 삶의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준” 시인 김신용과 “도시적 감수성에서 자연, 사물의 존재성으로 돌아간 변화에 대해 주목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오규원이, “자기철학을 운동으로 밀고 나가는 신념에 동감한다”는 이유로 김지하가 나란히 2명씩 추천됐다.

낯선 이름인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깨끗한 스타일, 전혀 다른 새로운 소설”이란 이유로  몇몇 젊은 시인으로부터 주목받았다.올 7월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 중앙)를 펴내 문단 안팎으로 주목을 받았던 시인 김경주는 동료시인들로부터 “서정과 실험이 적절히 어울어진다”, “철학적 사유가 독특하다”, “땅에 발 딛고 쓰는 시인이 없는 세상에서 대비되는 시인이다”라는 평을 얻었다. 이밖에도 김행숙, 이준규, 김애란, 진은영, 김언이 2명으로부터 추천됐다.

한편 ‘‘근대문학의 종언’에 동의하는 가’라는 질문에 젊은 시인들 21명은 동의하지 못한다고 답했으며, 12명은 동의 내지 부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했다. 기타의견 2명은 문학은 ‘종언’이기보다는 ‘항상 시작’으로 여긴다는 마음가짐으로 답을 대신했다.

‘한국문학의 위기론’을 묻는 질문에는 “독서인구 감소에 따른 문학시장의 침체화”를 들었으나, “사적 생활로 흐르는 문학적 테마”, ”해외 유명작가들 베끼기에 급급한 상상력 부족”, “매너리즘 답습” 등도 문학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으로 파악됐다. “인터넷 문화 약진으로 인한 문학의 위상 변화”, “변화에 인색한 문단”, “편가르기와 특정작가와 평론가의 상호인정으로 인한 권위 독점”, “저질 작품 과잉생산” 등의 의견도 잇달았다. 하지만 “위기론은 일상적 수사일 뿐, 한국문학은 독자와 너무 많은 소통을 원하는 건 아닌가”, “자본주의 구도에서 자리변화일 뿐 생산담론 형성이 더 중요하다”는 등의 희망적 견해도 있었다.

젊은 시인들의 주요 창작 모티프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 및 ‘독서’가 가장 많았다. 독서는 대부분 문학 외에 철학서와 예술, 영화관련서들을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상의 모든 것이 모티프”라고 말한 시인도 있었다.(신정민 기자)

[특집]신진문인 의식조사 (4)평론가

30대 젊은 문학평론가들은 현존 문인 가운데 소설가 이문열과 무라카미 하루키를, 작고한 문인 중에서는 시인 李箱과 서정주를 과대 평가된 문인으로 꼽았다. 최근 가장 주목하고 있는 문인으로는 소설가 전성태와 시인 황병승을 추천한 평론가들이 많았다. 이번 교수신문이 실시한 의식조사에서 문학평론가는 모두 31명이 참가했다. 30대를 중심으로 40대 초반까지 평단에서는 젊은 편에 속하는 평론가들이다.

문학평론가 31명 가운데 7명은 국내, 국외에서 과대평가된 문인으로 각각 이문열과 무라카미 하루키를 들었다. 소설가 이문열은 △정치적 발언의 의미 파장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의 결여 △초기의 탁월한 미적 재능이 단조롭고 틀에 박힌 정치적 의식으로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한 점 △정신과 지향의 불구성 △봉건성 등 주로 보수 우파의 입장을 대변했던 정치적 행보에 따른 ‘과대평가’ 요인이 많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는 지나친 상업성에 대한 지적이 많았는데 상품으로서의 문학, 세계시장과 문학의 관계에서 그가 미친 영향에 대한 성찰 필요, 일시적 유행 모드라는 지적이었다. 20살 초반의 감수성에 기댈 뿐이라는 혹평도 있었다.
이문열에 이어 고은(3명), 문태준(2명), 신경숙(2명), 공지영(2명)도 과대평가 문인으로 꼽혔으며, 답변이 적었던 외국에서는 하루키 외에 귄터 그라스(2명)도 비판이 필요하다는 응답이었다.

작고한 시인 李箱과 서정주는 각각 5명이 ‘과대평가’ 됐다고 말했다. 李箱은 그의 시세계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명과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인식이 많았고, 작품에 대한 신비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정주는 친일 행각과 전두환 정권 찬양 등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실에 영합하는 태도와 문학권력에 의해 그의 작품들이 교과서를 비롯 대중들에게 많이 소개되는 바람에 다른 뛰어난 시인들의 작품이 사장되거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새롭게 조명해야 할 문인으로 소설가 박태순이 유일하게 중복(2명) 답변이 나왔고, 공선옥, 김애란, 배수아, 임헌영, 장정일 등 23명이 거명됐다. 작고한 문인 가운데서는 김사량, 김종삼, 김소진이 각각 2명씩 의견이 모였다. 이태준 등 월북 작가 재평가 지적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김사량은 식민지적 삶의 극단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문학적 성과에 비해 전집조차 발간되지 못한 상황이 한심스럽다는 평가가 나왔다.

평론가들이 최근에 가장 주목하고 있는 문인으로 꼽힌 소설가 전성태(3명)는 종전의 리얼리즘과는 달리 그의 소설은 환상을 품고, 공간도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않는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크게 봤다. 여전한 문제의식을 다른 각도로 볼 여지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 모순의 진중한 고민도 한몫을 했고,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이유로 들었다.

시인 황병승(3명)도 주목하고 있었는데 시의 새로움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시의 정치성에 대해 새롭게 사고하게 해준다고 평가했다. 한 평론가는 “시는 황병승 전후로 나뉜다”라고 극찬했다. 생물학적 성을 넘어선 여성적인 비평, 폭넓은 교양과 작품을 보는 깊은 눈과 유려한 문체 등을 이유로 신진 평론가 신형철(2명)도 주목을 받았다.

문학평론가들이 시인, 소설가와 달리 가장 두드러진 의식을 드러낸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데 대한 동의 여부 였다. 소설가는 동의한다는 입장이 앞섰고, 시인은 두 배 정도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으나 평론가들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21명)이 ‘동의한다’는 답변(4명)보다 압도적이었다(*나로선 동의한다는 쪽이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자체가 고진의 관점에 원용하자면 이미 근대문학의 종언을 함축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제기의 진정성엔 동의할 수 있지만 한국적 맥락에서 굴절돼 논의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가타라니식 의제 설정 자체에 동의하기 힘들다는 이유를 제시했다.

‘한국문학 위기’의 원인을 묻는 질문엔 낯익은 비판들이 쏟아졌다. ‘독서인구 감소에 따른 문학시장의 협소·침체화’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으나 기타 의견도 많았다. “위기를 늘 품고 있어야 모색도 치열해 질 수 있다는 문인들의 자기 암시도 한몫을 한다”, “문학만 위기일까”를 들기도 했다. 또, 문학의 권력화와 아카데미화(대학중심의 문학판)에서 찾을 수 있다는 지적도 어김없이 나왔다. “절대적인 독서 인구는 결코 줄지 않았다. 한국문학은 지식독자층 뿐만 아니라 대중으로부터도 ‘왕따’를 당하고 있다. 작가들은 대학교수(평론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쓰고, 평론가는 그 장단을 맞추고, 그들이 쓴 평론(논문)은 오직 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만 읽힐 뿐”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문학평론가들이 가장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선배 문인으로 황석영(4명)이 가장 많이꼽혔다. 다음으로 유종호, 오정희가 3명씩, 김우창, 백낙청, 조세희, 최인훈도 2명씩 응답했다. 외국의 문인 중에서는 밀란 쿤데라(4명), 가라타니 고진(2명), 귄터 그라스(2명), 마르께스(2명)가 ‘영향’을 많이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 작고한 문인중에서는 ‘비평도 문학작품임을 일깨워 준’ 김현이 6명으로부터 헌사를 받았다.(김봉억 기자)

설문에 참여해주신 분들
고인환, 권오현, 김나정, 김대산, 김동윤, 김미정, 김양선, 김영찬, 김정남, 김종욱, 김형중, 류신, 복도훈, 안미영, 엄경희, 오윤호, 오창은, 이경수, 이선영, 이성혁, 이수형, 이재영, 이현식, 이희환, 장일구, 정재림, 조강석, 허병식, 허윤진 이상 30명. 가나다순.

06. 09. 23-24.

 

 

 

 

P.S. 결론 삼아, 젊은 문인들이 주목하는 동세대 작가/시인들을 꼽아보자면, 소설가로는 김중혁과 김애란(비록 논란의 대상이지만)이 대표주자라 할 만하다. 더불어, 앞세대 작가로서 <생의 이면>의 작가 이승우가 시에서의 이성복만큼 높이 평가된 것은 이 설문의 '수확'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주목하는 작가로 전성태, 시에서 황병승이 꼽힌 것은 수긍할 만하다. 김경주 시인이 거론된 것이 뜻밖인데, 내가 아직 접해보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어서 그렇다(참고로, 최근에 내가 주목한 작가/시인은 백가흠과 이근화이다). 맛보기로 한 편을 인용해놓는다. 이게 또 왜 목련인가?!..

목련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십 이년동안 자취(自取)했다

삶이 영혼의 청중들이라고
생각한 이후
단 한번만 사랑하고자 했으나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戀人)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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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3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9-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제가 가끔은 부지런을 떨지요. 요즘은 옮겨오는 걸 자제하는 편인데, 용케도 맞히셨네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9-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봤습니다- 퍼갈게용

끼사스 2006-09-24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기사네요. 퍼가겠습니다.

비로그인 2006-09-25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나오는 시인이나 소설가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오히려 일본작가들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자조와 쓴 웃음이 맘에 번집니다. 대학시절 시인 장정일과 이성복을 좋아해 그들의 시집은 아직도 다 가지고 있지요. 서울대 나온 이성복은 제대로 대접받는 것 같은데 아직도 시인 장정일은 아니네요. 서글프군요 현실이. 꽤 친하게 지냈던 교수님조차 장정일을 너절한 시인쯤 알고 있었는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시인 장정일의 위치는 아직도 갈팡질팡이군요 끝에 써 놓은 시 누구시입니까 ?

로쟈 2006-09-25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놓은 대로, 김경주 시인의 시입니다...

니브리티 2006-09-2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도 황당한 질문에 명쾌한 정리더군요.

sommer 2006-09-2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의 존재론과 시인의 존재론이 가능하다면, 위에서 보이는 젊은 문인들의 '고백'은 그 둘이 분간 안 되게 겹쳐서 나타난다는 게 인상적이네요. 더불어 그들의 대답으로 잠재적인 문제/질문을 구성해 보는 것도 흥미있어 뵈네요. 이를테면, 문학판에 들어서기 전과 후의 심경의 변화, '한때'와 '지금'의 차이, 소년에서 어른이 되고 난 뒤의 판단의 변화 등등으로 말이죠.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그들은 일종의 '고백'의 형식을 빌어서 말하고 있었군요...
 

새로운 카테고리를 하나 더 만든다. 이름은 '문학의 뒷계단'이라고 붙이겠다. '문학의 표정'이라는 것도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문학의 뒷계단'이 떠오르자 이내 밀렸다.  

 

'문학의 뒷계단'이란 이름 자체는 빌헬름 바이셰델(1905-1975)의 <철학의 뒤안길>(서광사, 1991)에서 가져온 것이다. 한데, '뒷계단'이 '뒤안길'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실 바이셰델의 번역본은 서광사판 이전에 분도출판사판이 한해 먼저 나왔었다.   

이미 절판되어 알라딘에서는 검색도 되지 않지만 빌헬름 봐이쉐델의 <철학의 뒷계단>(분도출판사, 1990)이 그것이다. 이기상 교수가 옮긴 서광사판의 번역도 좋지만 연효숙 박사의 분도출판사판도 아주 유려하게 읽혔다(역자의 또다른 번역서로는 피터 싱어의 <헤겔>이 있다). 안인희 번역의 <철학의 에스프레소>도 같은 책을 옮긴 것이다.

단, 제목에서만큼은 '철학의 뒷계단'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원저의 제목 'Die philosophosche Hintertreppe'에서 'Hintertreppe'가 뜻하는 것도 일차적으론 아래 이미지와 같은 '뒷계단'이기 때문이다(비록 '뒤안길'의 뜻도 갖는다고는 하지만, 내게 '뒤안길'은 언제나 '젊음의 뒤안길', '세월의 뒤안길' 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정문과 현관으로 연결된 계단이 아니라 후문과 연결된 계단, 그것이 '뒷계단'이 뜻하는 바이다(이건 '뒷골목'과도 다르다).

'대철학자 서른 네분의 일상과 사상'이란 부제에서 예상해볼 수 있지만, 책은 철학자들의 사소한 일상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친근하게 소개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곁들이고 있는 바이셰델판 '철학이야기'이다(개인적으로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와 함께 철학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뒷계단'의 이야기들에 끌리는 건 '곁다리텍스트'들에 끌리는 것과도 상통하는 개인적인 취향이다. 하지만, 욕심을 내어 말하자면 그런 '부수적인' 관심이 때로는 핵심에 근접할 때도 있지 않을까?

일단은 몇 사람의 한국 작가와 작품들을 이 카테고리에서 다루기 위해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이야기는 더 뻗어나갈 수도 있고 사정에 따라선 반대로 흐지부지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뒷계단'에 대한 관심을 조금 부추길 수 있다면 그래서 그 관심을 공유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아마도 '첫계단'의 작가는 최근에 <빛의 제국>을 출간함으로써 올가을에 또 한번 가장 주목받는 작가가 된 김영하씨가 될 것이다.    

06. 09. 23. 

P.S. 그런데, 하느님, 뒷계단으로도 천국에 오를 수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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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3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9-23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마지막 멘트는 웃음을 자아내는군요. 한 유머하십니다.^^

sommer 2006-09-2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뒷계단만이라도 허락하소서...'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