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단의 화제는 단연 문태준 시인이다. 최근에 소월시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인데(수상작은 '그맘때에는'), 이런 수상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 2000년대 한국시단이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바퀴벌레들'로 요약될 수 있다고 적은 바 있는데, '바퀴벌레 시인들'의 근황도 계속 소개한 김에 문시인, 혹은 문사마의 족적도 확인해두도록 한다. 아래는 시 '그맘때에는'과 문화일보(06. 04. 13)의 기사이다. "문태준 시인, 서른여섯살의 ‘詩壇 돌풍’"이란 타이틀이고 작성자는 장재선 기자이다(*신작 시집 <가재미> 등의 이미지를 추가한다). 

그맘때에는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보았다

빈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70년 개띠, 만 서른여섯살의 문태준 시인이 권위있는 각종 시문학상을 휩쓸고 있다(*동갑네기 소설가 김연수가 경북 김천 출신이 그의 동향 친구라고). 2004년 말 동서문학상을 시작으로 노작, 유심, 미당문학상을 거머쥔 데 이어 지난 10일엔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제 겨우 두권의 시집을 펴낸 그가 시단의 중진, 원로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스타 시인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문단 일각에서 제기하는 ‘문태준 안티론’의 정체는 또 무엇이며 문 시인 자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나갈 것인가.

“대표주자가 될 만하다”=소월시문학상 심사위원인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소월시문학상 심사위원회(오세영, 김명인, 최동호, 권영민, 문정희)는 문 시인의 시 작품 ‘그맘때에는’ 외 15편을 대상작으로 발표하며 “삶에 대한 깊이있는 천착에서 우러나오는 빼어난 시적 언어를 건져올렸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오세영 시인은 “생에 대한 철학적 깨달음을 미학적 형상성과 잘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문태준 시인의 탁월한 시적 재능”이라고 말했고, 최동호 시인은 “새로운 시대의 서정시의 한 방향성을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로써 보면, 문 시인이 문학상을 많이 받게 된 이유는 진지한 철학적 사유와 언어미학을 건축하는 특별한 재능에 있다. 무엇보다 울림이 깊은 서정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곽효환(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시인은 “찰나의 깨달음을 표현해내는 선적(禪的) 직관이 전문 독자, 즉 선배 시인들에게 좋은 느낌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의 실험, 해체를 통한 난해시 경향을 우려해온 중진, 원로들이 문 시인을 통해 한국 현대시에서 서정성 회복의 가능성을 본다는 것이다(*쉽게 말하면, 문시인은 '어르신'들이 딱 좋아할 만한 시들을 쓴다). 문 시인 자신도 “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선 서정성의 부활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좋은 서정시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메시지를 갖고도 쓸쓸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과도한 스타 만들기”↔“시로 말하겠다”=문 시인이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상을 몰아주는 것은 지나친 스타 만들기라는 지적이 있다. 지난해 말 존재의 소통 문제를 주로 다룬 첫 시집을 펴낸 한 젊은 시인(32)은 “문 시인이 상을 휩쓰는 것은 시단의 주류인 심사위원들의 연령, 성향이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며 “우리 시의 미래를 위해선 서정시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개성적인 실험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바퀴벌레 시인들에게도 주목을!).

 

-문학평론가인 김수이 경희대 교수는 문태준 시의 일정한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작품이 현실에 눈감은 ‘자연의 매트릭스(가상공간)’에 의지하고 있다”며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물들의 갈등과 악전고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그런데, 그게 한국시의 주류 아니었나?) 


-문 시인은 이에 대해 “당대의 현실을 시 작품에 드러내는 것은 다른 시인들이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내 존재의 성찰에 당분간 몰두해 내 안의 갈등, 욕망, 비겁함, 추레함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사찰에 다녔다든지, 중학교 때 크게 아팠다든지 하는 경험이 자신의 시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듯싶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불교의 세계에 천착해온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의 고민이라는 것(*그는 불교방송의 PD로 일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시세계에 대해 “사람 마음이 계속 바뀌며 자아가 분열하는 모습을 악동(惡童)의 마음으로 그려내고 싶다”고 털어놓은 뒤 곧 “시인이 자신의 시쓰기 전략을 직접 말로 하면 안되는데…”라고 중얼거렸다.(*해탈의 경지를 보여주기에는 그는 아직 젊은 시인이다. '악동의 마음'에 더 많은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06. 04. 14./ 06. 0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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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4-14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해인가 지지난해인가 잡지 [GQ]에서 많은 시인들에게 이런 류의 질문을 했었죠. "최근 가장 인상 깊게 본 시는? (뭐, 대략 이런 비스무리한 느낌의 질문이었던 듯) 많은 시인들이 문태준의 '맨발'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더랬죠. 상 때문에 스타가 되었다기보단 이미 많은 시인들에게 그의 시가 인정을 받았다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에또- 최근 "펭귄뉴스"란 소설집을 낸 김중혁 씨도 동향 친구라지요-

로쟈 2006-04-1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그런 내용을 페이퍼에 쓴 적이 있습니다. '가자미'란 시도 올해의 시로 꼽혔었지요. 동시대 시인들에게서 '인정' 받는 시인이기 때문에, '문사마의 시대'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시의 메인스트림.

한데, 어느 시인의 볼멘소리처럼, '상복있는 시인'의 함정은 본의아니게 '시는 이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다른 시인들이나 독자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이죠. 시의 나라는 아주 넒고도 깊은데도 불구하고...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에 관한 페이퍼를 두어 번 올린 바 있는데, 관련기사가 눈에 띄어 다시 옮겨둔다. 하던 일이니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모종의 책임감에 떠밀려서. 일단,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란 제하에 오르는 무대 소개.

한국일보(06. 03. 23)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무대에 오른다. 27일 대학로 라이브소극장에서 열리는 ‘제1회 문학 나눔 콘서트’. 새로운 시 세계를 선보이며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 강정, 황병승, 김민정씨가 나와 자신의 삶과 문학 이야기를 나눈다. 인디록밴드 ‘모레인’이 이들의 시와 호흡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연극연출가 박정의(극단 초인)도 배우들과 함께 시를 테마로 한 퍼포먼스를 선뵐 예정이다. 진행은 소설가 이명랑씨가 맡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사이버문학광장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문학 작품을 책 바깥으로 끌어내 작가와 독자가 서로 소통하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첫 회 참가 시인들은 서정과 서사, 뚜렷한 시적 메시지 등 전통적인 시의 소통 구조를 배격하는 대신 내면에 밀착된 언어에 천착해온 이들이다. 이들을 두고 시인 강정은 “그들은 애당초 공공의 광장이란 걸 믿지 않”으며 “그 허물어진 공간을 제 멋대로 부유하며 (바퀴벌레들처럼) 자신들만의 진지하고도 즐거운 놀이에 전념한다”('한국일보' 12월12일자 ‘강정의 나쁜 취향’)고 말한 바 있다. 첫 회 제목은 그의 이 언명에서 차용됐다. 공연은 무료이며, 모든 관객들은 시인들이 서명한 작품집을 받을 수 있다. 4월에는 소설가 김종광 이기호와 황신혜밴드, 5월에는 젊은 서정시인 문태준 손택수 신용목이 참여해 무대를 꾸밀 예정이라고 주최측은 밝혔다.

그리고 참고자료로서 '젊은 바퀴벌레'의 명명자이자 그 자신 '쇠잔한 바퀴벌레'이기도 한 강정 시인의 기고문 "시인공화국의 젊은 바퀴벌레들"(<무비위크> 199호).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얼마 전, 한 젊은 시인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자리에 갔다가 어질어질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지인 몇몇이 모여 단촐하게 한잔하는 자린 줄 알고 밍밍하게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 모인 사람들의 수와 면면에 새삼 놀란 것이다. 시집출판기념회가 그토록 ‘뻑적지근’하게 펼쳐진 건, 내 기억으론 거의 10년 만의 일이다. 그 잊혀진 10년 사이, 내가 시의 바깥에 있었거나 시가 나의 바깥에 있었거나 둘 중 하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젊은 시인들에게 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어떤 독립적인 삶의 거점처럼 여겨졌다.


-고종석의 표현처럼 우리나라는 이른바 ‘시인공화국’이다. 인구 대비 시인의 숫자를 봤을 때도 그렇고,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와 불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집을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들의 ‘시인 모시기’를 봐도 그렇고, 아주 가끔 특정 시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기이한 독서풍토를 봐도 그렇다. 출판사 입장에서 봤을 때 시집 출간은 숫제 시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가깝다. 이윤은 고사하고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거늘 소위 정통문학을 표방한 출판사들은 끊임없이 시인을 배출하고 시집을 출간한다. 시를 문학의 본령이라 여기고 숭상하는 풍조가 여전히 남아있는 탓이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대한민국 시인공화국은 여전히 번성중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 가을에 출간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유독 많다.


-기형도의 죽음 이후, 대략 15년 동안의 무관심과 침묵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 정도로 최근 젊은 시집들의 득세는 심상찮은 기미가 있다. 이들의 연령대를 훑으면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걸치지만, 나이와는 무관하게 이들의 시 세계는 개인의 경험을 환상적 이미지와 자폐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중음악과 영화, 컴퓨터 문화에 대한 탐닉 등은 이들의 무의식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가 될 만하다. 과잉되거나 뒤틀린 자의식으로 무장하거나, 유약하면서도 섬세한 어조로 삶의 스산한 비의를 읊조리는 이들 감수성의 촉수는 외부세계로 뻗어있기보다는 자아의 심부를 향해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소통불능의 자폐적 진술로 흐르지만, 그 자폐는 의외로 고집스럽고 사나워 역설적인 자기과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시적 에너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시가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는 예민한 성감대’라느니 하는 말들을 믿지 않는다. 시는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기 보다는 한 개인의 아픔과 고뇌를 세상 전체의 아픔으로 변용시키는 힘을 ‘때때로’ (자주 쓸 수 있다면 그건 힘이 아니다)가졌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삶의 무미한 디테일들을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전환시켜 스스로의 내구성을 다지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엿보이는 자폐적인 이기성을 나는 존중한다. 동시에, 천성적인 유약함을 내밀한 읊조림으로 치환하여 스스로의 껍질을 두텁게 하는 그들의 타고난 ‘비사교성’에 더 강퍅한 지지를 보낸다.

 

-대의에 얽매이거나 시류적인 일반론의 강박에서 벗어난 그들의 ‘사적 언어’는 한 개인의 편협한 광증과 무기력함이 편의와 실용으로 무장한 21세기적 속도의식에 맞불을 지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의 경우, 시란 세계보다 먼저 가는 게 아니라 세계보다 늦게 가거나 아예 가지 않음으로써 저 혼자 아득바득 빛나고 저 혼자 용케 신성하거나 철없이 솔직하게 만드는 특별한 자기치장술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왕따’ 당하지만, 그 왕따는 시를 씀으로써 선점하게 된 특출한 고독이나 진배없다. 그 고독은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언정, 적게나마 목격한 이들에겐 일방향의 삶을 근원부터 다시 살피게 하는 끈끈한 설득력을 지녔다. 따라서 나는 시인들의 언어가 좀 더 거칠고 생경하고 느리고 육감적이길 바란다. 극단적으로 말해, 첨단의 주방 귀퉁이에 알을 슨 바퀴벌레처럼 느닷없이 악명 높아지길 바란다.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일말의 악의 없이 파문을 일으키며 미련하게 잠든 세상을 가끔씩 놀래켜 주는 것. 그게 시의 존재의의고 시의 존재방법이며 시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자기방어이다. 시인공화국은 시의 궁창이자 시의 궁전이다.

 

이어서 시인 강정의 신작 시집을 소개한 연초의 기사. <시인 강 정 “나를 뒤집는 전복의 힘으로 시를 쓰지요”>란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국민일보(06. 01. 08.) 지난해 12월말 시인 강정(35)은 홍대 앞 모처에서 인디밴드 ‘모레인’과 특별한 공연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대수의 ‘하루 아침’을 비롯한 올드록 넘버 세 곡을 부르고 자신의 시 두 편을 즉흥연주에 맞춰 낭송했다. 시와 음악과 산문을 아우르는 그이기에 가능한 장면일 것이다. 강정이 10년만에 펴낸 두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문학동네, 2006)은 거친 록 사운드에 실려 전해지는 공연장에서의 그의 격렬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낭송했다는 ‘들판을 달리는 토끼’의 한 대목을 소리내 읽어본다.

“토끼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리는/ 당신이 밤새 두드리는 머릿속의 열기 한가운데 너른 벌판을 열고 뛰어나올지 모른다/ 토끼라는 것이 가벼운 발과/ 소리나지 않는 입과/ 가늘게 찢어진 눈 옆에 길고 뾰쪽한 두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불만을 표시해도 괜찮고/ 박수를 치며 환영해도 나쁘지 않다/ 토끼는 어쩌면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 있으므로”

 

-‘들판을 달리는 토끼’는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겨울호)에 발표했을 때부터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시다. 찢어진 눈이며 껑충한 귀며 강정을 본 순간,어쩌면 우리가 찾던 토끼가 바로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가까운 친구인 시인 이준규가 제목의 영감을 주었는데,30분만에 써내려갔지요. 제목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만든 르네 클레망의 작품에서 따왔어요.”

 

 

 

 

 

 

 

 

 

 

 

-30분만에 무려 80행을 써내려간 그의 머릿속 열기가 훅 끼쳐왔다. 스무 두살에 등단해 1996년 첫 시집 ‘처형극장’을 내놓은 이래 그의 탐미적인 언어는 시를 떠나 음악 미술 영화 등 다채로운 영역을 종횡하며 날카로운 감수성의 표창을 날려왔다. 2000년대에 등장한 황병승 장석원 김행숙 등 젊은 시인이 이른바 ‘미래파’로 지칭되기 전,말하자면 그는 10년전부터 미래파의 선두 주자였다. 그는 한 연재글에서 스스로를 ‘한 쇠잔한 바퀴벌레’라 칭하는 한편 이들 미래파 후배 시인들을 ‘바퀴벌레’라 호칭하며 이들의 약진에 지지와 옹호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바퀴벌레는 낡은 공간을 부식시키고 냄새를 풍기지요. 이 친구들의 존재 방식은 사물을 흉물스럽게 바라보는 느낌 그 자체에 있는데, 일상적이지 않고 낯설다 뿐이지 실은 그들의 시에 새로운 세계의 총체성의 기미가 꿈틀거리고 있어요.”

 

-표면에 떠 있는 감정들을 슬슬 건드려주는 정도의 신서정 계열의 시편들은 비록 대중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진검승부를 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결핍의 언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단이 되어야 해요. 자기가 써왔던 것,했던 것을 까뒤집는 전복이 필요하지요. 요즘 들어 이성복 시인을 제외하고는 선배시인 가운데 그런 전복의 힘을 본 적이 없어요. 근래의 서정시들은 거개가 ‘자기가 눈 똥을 보고 이쁘다’고 자평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하지요.”

 

-이번 시집 가운데 표제시는 빼어난 수작으로 꼽힌다.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강정의 시적 매커니즘은 우주와 몸의 대비에 있다. 빛까지 빨아들이는 우주의 카오스처럼 모든 것을 뒤섞어버리는 혼돈성,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들,성적이고 관능적 환상들,끝까지 규정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색…. 그는 언어가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 감각의 허물을 벗어던진다. “우리 시보다 외국의 번역시를 읽을 때 언어를 뛰어넘는 느낌을 받아요. 언어를 삐딱하게 놓는 행위랄까.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들,뒤섞여 나오는 것들…. 사람도 잡종이 더 이쁘잖아요. 시를 쓰면서 모국어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마음의 모국을 떠나 외계를 발견하는 우주인,그게 시인이지요.” 강정은 우리 시단의 블루칩이다. 

 


 

 

 

 

 

 

 

시인의 마지막 발언에서 시인/평론가 이장욱이 이 '바퀴벌레 시인'들을 다룬 글의 제목을 '외계인 인터뷰 - 시적 윤리와 질문의 형식'라고 붙인 이유가 절실하게 드러난다. 지구 종말 이후에도 살아남을 이 시인들이 굳이 국적에 연연하겠는가?!..

 

06. 03. 23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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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이렇게 '문학의 현장'이 느껴지는 글은 요새 접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3-24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과문하신' 탓입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시인들이고 시적 경향이니 말입니다.^^
 

한파(寒波)라고 하기엔 포근한 감이 없지 않지만 예년보다 내려간 기온을 핑계로 겸사겸사 외출을 포기했다(외출이라고 해야 학교에 나가는 거지만). 그럼 집에서 뭐하는가? 빨래하고 대충 청소도 하고 라면 끓여먹고 신문 본다. 화요일이라 편의점에서 한국일보를 사들고 와 본다. 로버트 러플린 카이스트 총장의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를 고개를 끄덕이며 읽는다. 199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면서(1950년생이니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정상'에 올랐다) "그는 작곡에도 관심이 많으며 그림그리기도 좋아"한다고(올해 피아노 연주회도 가진 적이 있다).

 

 

 

 

지난 여름에 나온 <새로운 우주 - 다시 쓰는 물리학>(까치글방)이 바로 그의 책이며 그 삽화들을 직접 그리기도 했단다. 역시나 노벨화학상 수상자이면서 '시인'인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까치글방, 1996)의 저자 로얼드 호프만만큼이나 다재다능한 석학인 듯하다. 러플린의 기고문은 그 자신의 교육 체험담이면서도 우리의 교육관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데, 후반부를 잠시 옮겨오겠다(인터넷판에서 가져오는데, 실제 지면에 실린 것보다 몇 문장이 보태져 있다. 아마도 분량상 지면에는 누락됐던 모양).

-위대한 과학자들이나 발명가들은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에서 다른 사람들이 겪는 창조성에 대한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 사람들로 보인다. 때로는 괴팍함과 결합한 덕분에. 그들은 스스로 게걸스럽게 배우는 자들이기도 하다. 토마스 에디슨은 교사가 산만하다고 평가해서 어머니가 집에서 교육을 시켰다. 그는 대학에 가지 않고 대신 문학책이나 과학책을 호기심 가는대로 읽었다. 빌 게이츠는 엄마가 공부하라는 것을 거절하고 마이크로 소프트를 만들기 위해 하버드를 중퇴했다. 아이작 뉴튼의 선생은 그를 매우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평가했으나 그의 끊이지 않는 공상과 그의 관심사를 꾸준히 기록한 것이 큰 일을 해냈다. 뉴튼은 혼자서 유클리드의 '원리'와 데카르트의 기하학을 숙독한 끝에 미적분을 창안했다.(*이 단락은 전체가 지면에서 누락돼 있다.) 

-불행하게도 이런 지적인 독립성은 현대 한국에서는 장애물이 많다. 우선 학교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부담스러운데다 국제어인 영어까지 익혀야 한다. 이것은 작은 나라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창의성 세금' 이다. 만일 국제언어를 습득하는데 실패하면 어린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수입이 적다. 그래서 북동아시아에는 뉴튼과 에디슨이 드물다. 문화 때문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에너지를 언어를 배우는데 가장 많이 써야 하는데 따른 부작용이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아, '창의성 세금'이여!)

 

 

 

 

-대신 북동아시아의 예술가들은 언어습득에 많이 투자하지 않고도 성공한다. 작곡가 가와이 겐지는 '공각기동대'에 음악을 맡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일본에서는 그만의 텔레비전 쇼를 갖고 있다. 오모토 가츠히로는 '아키라'가 서양에서 인기를 끌면서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이 소개되는 문을 열었다. 몇 년 전 나는 '아키라'의 한 장면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 썼다가 반응이 좋길래 코단샤 출판사에 오토모씨와 서명본을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시장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젊은 예술가의 값 차이를 알게 됐다.(*이 단락도 지면에는 누락돼 있다.) 

-이런 걸 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교육열은 좋은 것만은 아니다. 경제활동에는 좋겠지만 다른 것에는 나쁘다. 기술과 창의적인 독창성을 필요로 할수록 나쁘다. 금융이나 반도체 연구와 같은 복합적인 업무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영화나 첨단과학 같은 예술적인 활동에는 불리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고등학생들은 오직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려고 공부를 하고 대학생은 오로지 시험을 잘 치려고 공부를 한다. 지적인 내용은 점수나 등수보다 덜 중요하다. 좋은 시험성적과 등수는 첫번째 직업은 보장해주겠지만 40년 동안의 경제생활을 지탱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가족부양을 위한 재정적인 책임이 최고조에 이른 후반생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경제는 너무 빨리 변해서 익힌 기술은 금새 쓸모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는 일생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데 성실하고 꾸준하게 투자를 해야 한다.

로버트 러플린 KAIST총장 

-비행기는 자리를 잡기까지 그 둔한 몸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매우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바퀴가 땅을 박차는 순간 비행기는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을 나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뇌와 몸도 이와 같다. 젊었을 때는 매우 이상하지만 어른으로 가는 시기가 오면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뇌와 몸도 배우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뉴튼과 에디슨 같은 이들에게는 성공은 멋진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니 보기에도 참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공부와 창조도 역시 중요한 것이니 우리들의 끈기있는 노동이 경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뉴튼도 에디슨도 그것은 못했다.(*강조는 나의 것이며, '뉴튼과 에디슨' 이하의 문장들은 지면에서 누락돼 있다.) 

 

 

 

 

마지막 단락의 비유가 아주 시적이며 인상적이다. '배우는 인간은 비상하는 비행기처럼 행복하다'란 큼지막한 타이틀은 거기에서 뽑은 것이겠다. 활주로에서만 뭉개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래도 좀 위안이 되겠고(관제사들이 파업이라도 하는 건가?).  

이어서 읽은 연재가 '강정의 나쁜 취향'이다. 43번째니까 거의 1년이 돼 가는 이 연재의 이번호 타이틀은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하고도 폭넓은 사생활'이다. 이전에 한국일보 지면의 문학기사를 따다놓고 '요즘 시 어떻습니까?'란 페이퍼를 만든 인연도 있고 해서 강정의 글이 더 눈에 끌렸다. 이번에 사진과 함께 그가 거명하고 있는 네댓 명의 젊은 시인들, 혹은 젊은 '바퀴벌레들'은 흔히 '엽기시적' 경향의 대표 주자들이다.

 

 

 

 

김민정, 김근, 황병승, 유형진, 이민하 등이 그들, '바퀴벌레들'이다. 강정의 설명: "몇 달 전 어느 매체에 ‘시인공화국의 젊은 바퀴벌레들’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젊은 시인들에 관한 생각을 짤막하게 밝힌 적이 있다. ‘시인공화국’이란 말이 매주 수요일 본 지면에 연재되는 소설가 고종석의 연재 타이틀을 빌린 것이라는 건 새삼 밝힐 필요도 없을 테지만, ‘바퀴벌레’라는 표현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을 듯싶다. 그다지 좋은 뉘앙스가 아닐지 몰라도 내 본의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퀴벌레’를 상찬의 용어로 쓰는 것도 썩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해명컨대 내가 쓴 ‘바퀴벌레’엔 최근 젊은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차가운 개인성과 예측불허의 감각적 주파능력 및 그들을 바라보는 문단 안팎의 전반적인 시선 등이 포괄적으로 겹쳐 있다."

그러니까 표현은 '바퀴벌레'이지만 거기엔 '상찬'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 이들이 요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올 한해 불현듯 방생된 물고기떼처럼 득시글거린 바퀴벌레들의 공통된 특징을 찾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초반 위대하시고 저명하신 프로이트 박사님께서 ‘빙산의 일각’이라 아슬아슬하게 표현하신 그 지점이 바퀴벌레들에겐 별다른 강박으로 다가오지 않는 듯하다. 통상적으로 무의식은 존재의 내부에 잠재된 외부적 존재라 여겨지지만, 인간의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본원적으로 분리할 수 없듯 무의식을 의식의 대자(對自)적 영역으로 파악하는 건 보다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인간 이해를 방해하는 선험적인 금 긋기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바퀴벌레들은 기존의 인문학이 도구함 정리하듯 배치시켜놓은 인간 개념으로부터 일탈하여 자유롭게 날뛰거나 오로지 그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자기만의 사적 신화에 골몰한다. 소위 영상세대니 인터넷 세대니 하는 말들은 그들을 수식하는 가장 손쉽고도 책임 없는 분류법에 불과하지만, 바퀴벌레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하고 명명할 줄 안다는 데 있다."(강조는 나의 것)

요컨대, '나는 내가 명명한다' 혹은 '내 이름은 내가 불러준다'는 것. 뭐라고? '고슴도치'(김민정)라고, '뱀소년'(김근)이라고, '여장남자 시코쿠'(황병승)라고, '피터래빗'(유형진)이라고, 그리고 '환상수족'(이민하)이라고. 강정이 예로 들고 있는 시는 이민하의 '사진놀이'인데, '엽기'의 사례로선 너무 얌전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튼 이런 종류이다: “사진을 찍었다 필름을 화분에 심었다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화분을 내놓았다 화분 속에서 주렁주렁 사진들이 익어갔다 너무 익은 사진은 바닥에 떨어져 짓물렀다 방안 가득 단물이 고였다 물컹물컹 사진들이 내 발목을 핥았다 한 달 전에도 사진을 찍었다 어제도 찍었다 난간에 매달려 찍었다 화분에서 흘러넘친 필름은 창을 향해 넝쿨처럼 뻗었다”(야콥슨에 근거하면, 시인들이란 인접성 장애를 앓는 실어증 환자들과 유사한데, 가령 그들은 '강낭콩' 대신에 '필름'을 언어의 화분에 심고 '사진놀이'하는 자들이다.)

 

 

 

 



비록 사진놀이하는 바퀴벌레는 다소 귀엽게 보이지만, 이 '바퀴벌레'들이 거북하고 불쾌하며 혐오스러운가? '한 쇠잔한 바퀴벌레'로서 강정이 옹호에 나선다(그는 한때 <처형극장>의 영사기사였다): "시에 대한 유구한 상식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에겐 여전히 곤혹스럽고 위험천만하게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시를 특정한 언어적 형식과 문학적 불문율 아래 가둔 채 공허한 자기위안만을 반복하는 거짓된 물아일체(物我一體)에의 환상이 내겐 더 곤혹스럽고 위험천만한 시적 무사안일주의라 여겨진다. 내가 아는 한, 대상은 결코 주체에 편입되지 않고 주체 또한 그 자체로 완벽한 통일체로서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다. 시가 궁극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건 그 통합되지 않는 자아와 대상 사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종의 에너지덩어리로써의 불가능성뿐이다."

이 노땅 바퀴벌레께서 입은 쇠잔하지 않았는지 어려운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만약 당신이 '바퀴벌레들의 사생활'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시적) '무사안일주의자'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들뢰즈식으로 거들자면, 자신의 존재/거처에서 복지부동, 무사안일 만땅으로 안주하는 당신은 모든 (가면적) '생성'의 거부자이며 따라서 반동 꼴통이다! 그러니 받아들여라! "시적 자아란 그 불가능성을 잠정적으로 지시하는 순간적이고도 영원한 가면에 불과하다. 시인에게 시는 늘 삶의 저편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자기 자신의 불분명한 미래이자 수시로 시간 경계를 초과하며 재생성되는 과거일 뿐"이라는 걸.

그런 식으로 당신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언어의 세상은 바퀴벌레의 온상이 된다: "지구가 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바퀴벌레들처럼 시인이 추구하는 불가능성의 추구는 그 불가능성 덕분에 영원히 유효하다. 그리고 그 유효성은 모든 공식적인 말들을 궁극의 무효로 환원하는 언어의 이중성과 파탄성을 통찰할 때에야 비로소 유효해진다." 만세, 우리의 시인들이여, 우리의 따라깐 따라까노비치여!('따라깐'은 러시아어로 '바퀴벌레'란 뜻이다.) 

 

 

 

 

이상에서 젊은 '바퀴벌레들' 얘기를 소개한 건 공연한 일이 아니다. 내 생각에 그 비유는 제법 적절해 보이며, 한편으론 고전적인 시인관과 분명한 대조를 이룸으로써 시대의 변화를 징후적으로 드러내준다. 어떤 시인관인가? 얼마전에 <김종삼 전집>(나남, 2005)이 새로 나왔지만, 이전까지 김종삼(1921-1984) 문학의 최고 독본은 장석주 편집의 <김종삼 전집>(청하, 1988)이었다. 그의 시 전부와 대표적인 김종삼론을 망라해서 실은 책인데, 소설가 강석경의 인물 스케치는 '문명의 배에서 침몰하는 토끼'란 제목을 갖고 있다('잠수함 속 토끼'는 한때 유행이었으며 박범신은 소설집 제목을 아예 <토끼와 잠수함>이라 붙이기도 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인에 관한 말 중 인상적인 것이 하나 있는데 시인을 토끼에 비유한 말이다. 잠수함에는 늘 토끼가 승선해 있다 한다. 산소량을 측정하기 위해서이다. 산소 희박을 인간이 알아챌 정도면 더이상 손쓸 수 없는 악화된 상태여서 토끼의 호흡으로 그 경계선이 측정된다. 산소가 모자랄 때 토끼가 먼저 질식하기 때문이다.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일 것이다. 하나는 문명이나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본질의 생명을 시의 몫으로 돌려왔던 고전적 해석에 다름 아니고 또 하나는 속죄양의 측면에서이다. 시인이 삶의 높이, 그 척도가 된다는 것은 큰 은총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또한 형벌이기도 하다. 오염된 현실에서 시인은 누구보다 먼저 고통의 제물이 될 것이므로..."

그런 토끼들은 어떤 시를 썼었나? 김종삼의 '서시'이다(학부 1학년때 국문과에 다니던 한 친구가 기숙사 자기방 관물함에 붙여놓은 시여서 특히 인상에 남았던 시이다. 황동규 시인의 의하면 김종삼의 시들은 '잔상의 미학'으로 수렴되는데, 이 시 또한 그러하다).

헬리콥터가 지나가
밭이랑이랑
들꽃들일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갔으리라.

얼마전, 그러니까 지난달 말쯤에 강정의 글에도 언급된 고종석의 '시인공화국 풍경들'(39)에서는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민음사, 1979)를 다루었다(황동규의 '잔상의 미학'은 이 시선집의 해설이다). 고종석은 '정신적 귀족주의자의 세계'로 김종삼 문학을 요약하는데, 그것은 달리 '북치는 소년'의 시구처럼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차라리, 김현의 짐작과는 반대로, 김종삼이 추구한 것 자체가 바로 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이 시의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만이 아니라 김종삼의 시세계 전반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시 말해 무구한 아름다움으로 반짝인다. 그 아름다움은 무구한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다. 김종삼의 육체는 남한 땅에 발을 딛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이 땅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따금 그 마음은 두고 온 북녘 고향 땅을 향했고, 자주 위대한 예술가들의 고향인 유럽 땅을 향했다. 아니, 유럽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그의 마음은 그 예술가들의 상상된 마음에 들려 거기 갇혀있었다.

-아니, 이 말도 옳지 않다. 그의 마음은 예술의 세계에 갇혀 있으려 애썼으나, 그는 오르페우스가 되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 우주복처럼 월곡(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환 시각 미정”(‘올페’ 전문). 김종삼은 시의 세계에서조차 둥둥 떠 있었다. 그러니까 김종삼을 실향민이라고 할 때, 그가 잃어버린 고향은 황해도 은율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본적이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그는 (거의) 단독자였고, 무적자(無籍者)였다. 사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깨닫지 못할 뿐, 단독자와 무적자는 우리 모두의 처지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슈만의 노래도, 조반니 팔레스트리나의 미사곡도 들어보지 못한 독자가 김종삼의 시에 푹 빠져들기는 어렵다. 어쩌면 시인은 그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젠체하기는 얄팍한 속물근성이라 비판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 외롭고 가난했던 시인의 속물근성에는 좋은 의미의 댄디즘(당디슴)이, (부르주아의 반의어로서)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적 귀족주의가 버무려져 있었다.(*참고로, 김종삼의 생업은 음악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한 '귀족주의'에 상응하는 것이 남들보다 일찍 죽을 토끼들의 운명이다. 해서 시인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태도는 바로 그들을 (잠수함 속) 토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젊은 바퀴벌레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갖게 된 시인의 모델은 전통적인 '토끼로서의 시인'과 새로운 세대의 '바퀴벌레로서의 시인'이다. 전자는 가장 먼저 고통의 제물이 되길 감수하는 자들이며, 후자는 지구가 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자들이다. 이들이 시인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종족들이고 부락민들이다. 장차 공화국의 패권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당신도 나처럼 혹 그런 게 궁금하다면 좀더 오래 살아두어야겠다...  

05. 12. 13.

P.S. 강석경 선생의 글이 에피그라프로 쓰고 있는 것은 에밀 시오랑의 단장이다. 대화체의 이 단장은 이런 내용이다."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나 자신을 견딥니다." 오늘 하루도 남은 시간, 마저 견디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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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이 포스트로 오게 돼서 읽었는데요... 여전히 궁금해 하시는 거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