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셔 가의 몰락(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은 음울함의 정점을 보여주는 포의 대표작이다. 어셔 저택에 사는 로더릭 어셔는 병적으로 신경 증세를 보이는 젊은 귀족이다. 이 귀족은 자신의 친구인 소설의 화자를 어셔 저택에 초대한다. 로더릭 어셔는 화자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자신의 집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면서 두려움을 떤다. 자신은 제정신이 아닌 채 죽게 될 것이라는 말도 한다. 이 집에 같이 사는 어셔의 여동생은 병을 앓고 있다. 초대한 친구를 위해 어셔는 자신이 쓴 시를 가사로 붙여 노래를 부른다. 시의 제목은 유령의 왕궁(The Haunted Palace)’이다.

 

 

우리의 계곡 가장 짙푸른 곳에

착한 천사들이 사는 성 하나,

한때 아름답고 장엄하며

찬란했던 궁전 하나 고개 들고 서 있었네.

사유대왕의 왕국

성은 바로 그곳에 서 있었네.

치품천사조차 그렇게 아름다운 궁전 위를

날아 본 적 없을지니.

 

황금빛에 물든 노란 영광의 깃발들,

지붕 위에서 펄럭이고 퍼덕이네.

(아아, 그러나 이 모든 건 멀고도 먼 태곳적 얘기)

달콤했던 그 시절

천사들을 희롱하던 산들바람도,

깃털 장식의 창백한 누벽을 따라 떠돌던

천사들의 향기도 떠나 갔네.

 

행복한 계곡의 방랑자들은

두 개의 빛나는 창문을 통해,

류트의 잘 조율된 리듬에 맞춰

(, 포피로제니투스여!)

그대가 앉아 있는 옥좌를 돌며

춤을 추듯 움직이는 정령들을 보았네.

영광에 어울리는 위엄으로

옥좌에 앉은 지배자도 보았네.

 

아름다운 성문은 온통

반짝이는 진주와 루비로 장식했네.

성문을 통해 달리고, 달리고,

영원히 빛을 발하며 달리나니,

그대 메아리의 군대여,

그대들의 감미로운 임무는 오직 노래뿐이로다.

그러니, 노래하라,

주군의 기지와 지혜를 능가하는 목소리로.

 

아아, 슬픔의 갑옷으로 무장한 악귀들이

군주의 드높은 궁전을 공격했네.

(, 통곡하라. 내일은 결코 그대에게 없을 지어다. 불쌍한 왕이여!)

한때 궁전을 온통 장식하며

찬란한 붉은 꽃을 피우던 영광이여,

지금은 무덤 속에 묻힌 옛 시절의

아련한 향수에 불과할지니.

 

이제 계곡의 여행자들은

붉은 빛의 창문을 통해

거대한 그림자들을 보네.

불협화음에 맞추어 기이하게 움직이는 존재들.

한편 어슴푸레한 문을 통해

빠르게 흘러가는 흙빛의 강물처럼

공포의 무리가 영원히 쏟아져 나오네.

그리고 웃네. 허나 더 이상 미소는 없으리니.

    

 

(‘유령의 왕궁전문,더 레이븐: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어셔 가의 몰락중에서, 160~162, 번역: 조영학)

    

    

 

당연히 이 시는 포가 직접 쓴 것이다. 포의 시와 소설이 늘 그렇듯 글의 화자는 아름답고 행복했던 왕국(지상 낙원)을 회상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왕국의 영광은 사라지고, 그곳에 악귀들이 지배한다. 화자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뒤로 한 채 악귀가 점령한 왕국을 떠나 방랑자가 된다. 찬란한 왕국이 서 있던 계곡이 어딘지, 궁전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시무시한 악의 세력에 점령당한 왕궁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불안해하는 어셔의 심리상태를 상징한다. 이 시는 어셔 가의 몰락이 임박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유령의 왕궁을 원문으로 읽을 때 눈여겨 볼 단어가 있다. 바로 3연에 나오는 ‘Porphyrogene’이다. 번역자들은 ‘Porphyrogene’를 어떻게 우리말로 옮겨 써야할지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Porphyrogene’은 영어사전에 없는 단어다.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탓에 어셔 가의 몰락을 옮기는 번역자들은 제각각 다른 의미로 ‘Porphyrogene’를 해석했다. 이렇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시의 전체적 분위기에 어긋난 오역이 나오기도 한다.

 

 

Wanderers in that happy valley

Through two luminous windows saw

Spirits moving musically

To a lute’s well-tunéd law,

Round about a throne, where sitting

(Porphyrogene!)

In state his glory well befitting,

The sovereign of the realm was seen.

 

 

행복한 골짜기는 나그네를 불렀네

반짝이는 두 창이 그를 유혹하네

류트의 연주는 아름다웠지

춤추는 영혼이 왕좌를 도네

(프로피로게니투스여, 황태자여)

제왕의 영광, 제왕의 풍모

왕국의 지배자를 보네

 

(포 소설 전집 2 : 공포 편어셔 가의 몰락중에서, 38, 번역: 바른번역)

 

 

원문을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건 좋으나, 마치 사람 이름처럼 쓴 것이 아쉽다. 그냥 황태자여!’라고 쓰면 좋을 텐데. 프로피로게니투스황태자를 같이 쓰는 바람에 같은 의미의 단어가 반복되는 구절이 되고 말았다.

 

 

 

원문에는 ‘Porphyrogene’인데 보통 번역자들은 포피로제니투스’, ‘프로피로게니투스’, ‘포오피로진등으로 썼다. ‘Porphyrogene’이 영어사전에 없어도, 이와 비슷한 단어로 ‘porphyrogenite’가 있다. 왕후귀족, 황태자, 왕자를 뜻한다. ‘porphyrogenite’의 복수형이 ‘porphyrogenitus’. 그래서 시에 나오는 ‘porphyrogenite!’를 직역하면 황태자들이여!’라고 쓸 수 있다. 복수형 대신에 단수형으로 황태자여!’라고 써도 충분하다.

 

 

 

 

 

 

 

 

 

 

 

 

 

 

 

 

 

 

 

 

더 레이븐 :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RHK, 2012)의 번역자는 시의 원문을 어색하지 않게 우리말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문맥이 아주 자연스럽다. 다만, 아쉬운 점은 포피로제니투스에 대한 역주이다. 번역자는 포피로제니투스의 역주를 너무 간단하게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한 라틴 왕. 1261년 퇴위이라고 썼다. 번거롭지만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1261년에 퇴위한 라틴 왕이 누군지 찾을 수 있다. 역주를 따르면 포피로제니투스요한네스 4(1250~1305, 재위 1258~1261)가 된다.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세워진 라틴 제국은 니케아 제국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요한네스 4세는 니케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혔듯이 ‘Porphyrogene’은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정말 포가 실존 인물을 염두에 두고 시 유령의 왕궁을 썼을까. 그러면 시에 나오는 왕국은 니케아 제국이며, ‘악귀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다시 세운 미카엘 8(1224? ~ 1282)가 된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원작의 의미에 완전히 벗어난 해석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용도가 부적합한 수정 망치와 같다. 이러한 수정 망치는 원작의 본래 의미를 훼손한다.

 

‘Porphyrogene’을 특정 인물로 해석하는 방식은 오히려 시의 의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번역자의 논리대로 해석하면 포피로제니투스혹은 프로피로게니투스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7(905~959)로 볼 수 있다. 그의 별명이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 이처럼 원작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현학적인 해석은 위험하다. 시도는 좋으나, 너무 앞서갔다. 포는 소설을 집필할 때, 자신의 유식한 지식을 뽐내고 싶어 했다.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고대 라틴 어로 쓰인 책의 문장을 인용한 구절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유령의 궁전을 쓰려고 비잔티움 제국을 소재로 한 역사책까지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까지 소개한 번역자의 실수는 새 발의 피다. 이것보다 더 심한 오역이 있다. 역시 유령의 궁전’ 3연을 번역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원문과 같이 비교해서 읽은 당신은 ‘Oh! My God!’이라고 말할 것이다.

 

 

두 개의 빛나는 창으로부터

은은하게 들려오는 비파 소리에 맞춰

춤추며 옥좌를 돌고 도는

파란 옷 입은 예수 그리스도,

옥좌에 앉아 그럴듯한 위엄을 띠고

나라의 왕 임함이 보이도다.

    

 

(에드거 앨런 포 대표 단편선218, 번역: 이경숙)

    

 

 번역자님, 저는 (원문에) ‘예수를 보지 않았습니다.

 

    

 

 

 

 

 

 

 

 

 

 

 

 

 

 

 

 

 

 

꽤 많은 영문학 작품을 번역한 김병철 선생은 ‘Porphyrogene’남빛 옷을 입은 천자(天子)’로 옮겼다. 동서문화사 책 대부분은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선례가 많으므로 아마도 김병철 선생도 일본식 번역을 그대로 따른 듯하다. 일본은 덴노(てんのう, 天皇)가 지배하는 나라여서 그런지, 이 나라의 번역자들은 황태자를 덴노의 대리자로 이해했을 것이다.

 

 

행복의 골짜기를 헤매는 방랑의 무리들

빛나는 두 개의 창으로부터

은은히 들리는 비파 소리에 따라

춤추며 옥좌를 돌고 도는

신들을 보네

옥좌에는 남빛 옷 입은 천자(天子)!

그럴듯한 위엄을 띠고

나라의 제왕 계신 것이 보인다.

    

 

(황금 벌레34, 번역: 김병철)

    

 

 

 

 

 

 

 

 

 

 

 

 

 

 

 

  

  

 

유령의 궁전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궁금해서 일단 구할 수 있는 대로 여러 권의 번역본을 참조했다. 역량이 부족한 번역자가 쓴 책을 만나면 책값과 시간을 낭비할뿐더러, 나처럼 진지한 사람들은 이것저것 자료를 찾느라 개고생한다. 그래도 가끔 자료를 찾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두 개의 인용문을 비교해보시라. 다른 출판사의 책인데 문장 구조가 비슷하다. 어셔 가의 몰락 외2013 지식의 숲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고,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가 작품 해설을 맡았다. 붉은 여우는 코너스톤 포 전집을 번역한 바른 번역처럼 번역가 모임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더 레이븐 - 더클래식 도네이션 세계문학 컬렉션 5는 세 명의 번역자가 참여한 번역본이다. 더클래식 출판사의 번역본이 2012년에 먼저 나왔고, 이듬해에 지식의 숲 출판사 번역본이 나왔다. 이 두 책의 문장을 같이 보면 유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중에 시의 전문을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이 행복한 골짜기를 헤매는 사람들은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비파 소리에 맞추어

옥좌를 돌면서 춤을 추는

신들을 바라본다네.

황제 포오피로진!’

그 영광에 어울리는 위엄을 갖춘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였다네.

 

(어셔 가의 몰락 외26, 번역: 붉은 여우)

 

      

행복의 골짜기를 헤매는 방랑자들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비판 선율에 맞춰

옥좌를 돌며 춤을 추는 요정들

(황제 포오피로진!)

그 명예에 어울리는 당당한 위엄을 갖춘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이도다.

 

(더 레이븐 - 더클래식 도네이션 세계문학 컬렉션 5104, 번역: 김미란, 김희정, 권지은)

    

 

 

 번역자님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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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12-21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제겐 넘사벽의 영역 입니다...^^

cyrus 2015-12-22 22:50   좋아요 0 | URL
단어 한 개 때문에 번역본 여러 권 찾아다니느라 힘들었습니다. ^^;;

초딩 2015-12-2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도서정가제 덕에 턱 없이 모자라지만 원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ㅎㅎ 물론 지금은 ㅠㅠ iBook 키즈의 책을 보긴합니다만 ㅎㅎㅎ

cyrus 2015-12-22 22:53   좋아요 0 | URL
포의 문장이 긴데다가 고어가 많습니다. 라틴어 문장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포의 소설이 전문 번역가들이 난감해하는 텍스트일 것 같습니다. ^^

hnine 2015-12-22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번역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Porphyrogene은 나비목 곤충에 속하는 종 이름 (genus name)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셔가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설마 아니겠지만 철자는 정확히 일치하네요. 골짜기를 이리 저리 배회하는 모습을 나비가 비행하는 모습 (wanderers in that happy valley) 으로 비유하여 일종의 메타포로 쓰인걸까요?

표맥(漂麥) 2015-12-22 12:44   좋아요 0 | URL
오호~ 나비 즈음의 비행체가 들어가니 해석이 딱 들어맞아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집단지성의 장점을 봅니다)

cyrus 2015-12-22 23:03   좋아요 0 | URL
좋은 의견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Porphyrogene의 뜻을 알고 있는 hnine님이 대단합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아셨는지요? ㅎㅎㅎ

오늘도 `유령의 궁전` 원문 텍스트에 관련된 주석을 찾아봤어요. 제가 영어 독해 실력이 좋지 않아서 Porphyrogene의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hnine님의 독창적인 해석에 저도 동의합니다. ^^

만병통치약 2015-12-2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자님들, 판사님! 이 글에 접속한 것은 제가 아니고 고양이입니다. 저는 그냥 보기만 했습니다 ^^ / 와우 !

cyrus 2015-12-22 23:02   좋아요 0 | URL
판사님 드립을 알아보셨군요. 이 글의 웃음 포인트였습니다. ㅎㅎㅎ

서니데이 2015-12-23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오늘도 편안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5-12-23 20:5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
 
성자가 된 청소부 - 산다는 것과 초월한다는 것
바바 하리 다스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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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은 성자의 해이다. 그 당시 백담사에 숨어 지내던 전() 대통령 영부인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니다. 맨 끝에 아들 자()’를 쓰는 여자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결하고 성스러운 사람(saint)을 의미한다. 19887, 성자가 된 청소부(약칭 청소부’)라는 책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저자는 바바 하리 다스. 그는 침묵을 지키면서 자신의 허리춤에 매단 작은 칠판에 짤막한 글을 써서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전달한다. 바바는 1935년부터 침묵의 수행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23년에 태어나서 열두 살부터 수행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묵언 수행을 했다. 현재 바바는 92세의 나이로 장수를 누리고 있는데, 삶의 절반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살아왔다. (70년 동안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은 묵언 수행의 달인 음 소거바바 선생님) 

 

성자가 된 청소부는 스스로 삶의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총 일곱 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가 바로 성자가 된 청소부. 바바는 동화 또는 우화 형식을 빌려 자신이 터득한 소중한 지혜를 전달했다. 책 마지막에는 바바가 칠판에 남긴 경구들을 가려 뽑아 정리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평범하거나 지위가 낮은 천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여러 차례 역경을 딛고,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어 성자의 반열에 오른다. 몇 년간 시 쓰기를 중단했던 류시화청소부를 번역함으로써 재기에 성공한다. 이 책의 출간을 기점으로 류시화는 본격적으로 명상서적 번역에 몰두한다. 청소부의 인기는 이듬해 89년에도 이어졌다. 책의 인기에 탄력받은 정신세계사는 또 한 번 성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다. 연이어 꼬마 성자(미국 수피즘 협회 엮음), 성자들의 마을(김정빈 저) 등이 출간되었다. (84년에 정신세계사는 환단고기사관을 바탕으로 쓴 환뽕 소설 을 출간했다. 이 책의 저자가 김정빈이다)

 

 

 

 

 

10% 넘는 시청률을 돌파한 케이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약칭 응팔’)에 아주 짧게 청소부가 등장했다. 덕선(혜리 분)은 당시 인기 작가로 상한가를 치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 옆에 선우(고경표 역)청소부를 읽고 있다. 88년에 나온 청소부는 처음에 연녹색 표지였다. 98년에 2판을 찍으면서 표지 색을 흰색으로 바뀐다.

    

 

1988년 서점가에 이문열, 서정윤, 김초혜 같은 작가와 시인들의 문학 작품들이 강세를 보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신수양 관련 서적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정신세계사 대표는 모 언론의 인터뷰에서 도시화의 흐름에 피로감을 느낀 독자들이 정신적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정신수양 서적을 펴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는 정신수양을 소재로 한 책들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에 칼릴 지브란, 오쇼 라즈니쉬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저작자의 정식 계약을 거치지 않은 해적판들도 무분별하게 나왔다.

 

지난 주말 헌책방에서 연녹색 표지의 1판을 샀다. 원래 명상서적을 잘 읽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책들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런데 자꾸 응팔의 그 장면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드라마 간접광고에 낚이고 말았다) 우화 형식이라서 그런지 이야기는 별 무리 없이 술술 읽어나갔지만, 바바가 전달하려는 심오한 교훈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니까 삶의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주인공 삶의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허구적인 요소가 있는 소설이라서 그런지 현실에 맞지 않은 과장된 장면이 보였다.눈먼 시인과 아내 편을 읽다가 제일 황당한 것이 장님 친뚜가 뱀의 독성분이 들어간 연기를 맞고 두 눈이 보이는 장면이다. 친뚜의 아내는 몰래 사귀는 남자와 함께 도망치려고 친뚜를 살해하는 음모에 가담한다. 친뚜의 음식을 담는 냄비에 생선 대신 독사를 넣는다. 친뚜는 냄비 안에 생선이 있는 줄 알고, 열을 가한다. 냄비에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가 친뚜의 눈을 치료했고, 그제야 친뚜는 아내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상황에서 친뚜는 한바탕 웃으면서 초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준 신이 자비롭다고 말한다. 자신이 장님이었을 때 신이 아내를 줬고, 아내가 떠나니 이번에는 두 눈을 줬다고 생각한다. 친뚜는 신의 위대함을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뱀의 독성분이 있는 뜨거운 열기가 장님을 위한 특효약이 될 수 없다. 범인이 신비로운 체험을 하면서 성자로 거듭나도록 뻔한 결말을 유도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다소 아쉬운 면으로 남는다.

 

대부분 책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라든가 책을 읽고 나서 스스로 깨쳤다는 등 자기반성의 시도를 고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나는 이 책을 좋게 보는 독자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벗어나 지나치게 내면세계로 집중하지 않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마음이 평안해진 느낌을 받았어도 고작 한순간일 뿐이다. ‘세상은 존나 힘들어,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면 편해.’ 식으로 결론을 이끄는 책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정신승리만 부단히 일으킨다. 특히 초논리의 세계를 그려내는 정신수양 서적은 치열한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심오한 동양정식을 쉽고 간편하게 풀어냈다는 이유만 믿고, 이런 책을 청소년들에게 권장하는 어른이 있으면 경계하자.

 

 

 

 

우리나라에 바바 하리 디스를 맨 처음 소개한 출판사는 정신세계사가 아니다. 1984년에 샘터사침묵은 말한다 바바 하리 다스의 칠판에서를 펴냈다. 바바의 칠판에 쓰인 경구들을 모아놓은 Silence Speaks - from the chalkboard of Baba Hari Dass(1977년 출간)을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책의 번역자는 안정효. 류시화 번역의 책이 워낙에 잘 팔린 탓에 샘터사의 안정효 번역본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꽤 가격이 비싼 희귀본으로 거래된다.

 

88년 초판본부터 1998(928)에 나온 2판까지 바바 하리 다스의 영문 표기가 고쳐지지 않았다. ‘Baba Hari Das’로 적혀 있다. 이 스펠링으로 검색하면 바바 하리 다스위키피디아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 뒤에 ‘s’ 하나 더 붙여야 한다. ‘Baba Hari Dass’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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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6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12-17 22:15   좋아요 0 | URL
쌍팔년에 제가 이 세상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12-16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자가 된 청소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에요~ 이런스타일의 책을 좋아하지 않아 저는 읽지 않았지만 책 좀 읽는다는 문학소녀들 중 안 읽은 사람이 없을거에요 ㅎ
저는 음지의 책들을 더 좋아했어서 ㅎㅎ

cyrus 2015-12-17 22:19   좋아요 0 | URL
음지의 책이라면 어떤 내용인가요? 응팔에 정봉이가 읽던 야설 제목이 `황홀한 사춘기`였습니다.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12-18 00:09   좋아요 0 | URL
ㅋㅋ 로맨스소설이지요 ㅎㅎ 여러이름을 달고 나온 로맨스 소설...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12-1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호불호를 떠나서 이런 책 정보는 정말 재미도 있고 유익하네요...

cyrus 2015-12-17 22:21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 가면 알라딘에 검색되지 않는 좋은 책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책의 가치를 알게 될 때 기분이 뿌듯합니다.

살리미 2015-12-16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이 책을 구하셨군요 ㅎㅎ 저도 예전에 읽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닙니다^^ 다만 제목이 너무 낯익어서 응팔에서 보고 반가웠어요. 당시엔 세상이 존나 힘들어서 이런 책들이 붐을 일으켰을까요?
왜그런지는 모르지만 (한참 겉멋들 나이라 그랬나..) 한때 이런 동양적인 정서에 많이 끌렸던 기억이 나네요.

cyrus 2015-12-17 22:23   좋아요 0 | URL
운이 좋게도 응팔에 나왔던 책을 만났습니다. 80년대 명상 서적 붐이 몇 년 전에 유행했던 힐링 서적 붐과 유사한 것 같아요.

달걀부인 2015-12-17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샀었고 읽었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처음 사진보고 읽기 시작하면서 응팔에 나왔나, 했더니 나왔네요.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저는 사실 주변에 누가 책 가이드를 해주는 사람들이 전혀없었는데..어떻게 자꾸자꾸 비교적 깊이있는 독서를 할수 있도록 성장했을까 하는 거예요. 동력같은거랐까요? 즉, 중학교 때부터 순정만화에 일본만화들 엄청 팠고 할리퀸로맨스보면서 설레였던 여고시절 보냈고, 저런 베스트셀러도 거의 다 섭렵하면서 지내다가... 어느날부터는 베스트셀러는 안읽는 똥고집쟁이가 되었거든요.

달걀부인 2015-12-17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읽어온 책의 길 같은 게 궁금한 거죠. 누구나 처음부터 철학서를 읽지는 않았을테니까요. 어떻게 신달자에서 이문열에서 이러한 책들이 한심할 수 있는 그 반대의 책들로 넘어오게 되었나. 그 눈은 누가 혹은 어떻게 얻게되었나... 뭐 이런 궁금증? ^^ (제가 외국인지라 말을 할 사람이 별로 없어서..여기다 풀어놓고...가네용)

cyrus 2015-12-17 22:32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입니다. 8, 90년대는 지금처럼 서평가라는 사람이 없었어요. 출판사 홍보가 전부였어요. 좋은 책을 알아본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대박난 책들이 많았어요. 저는 이 시절에 꼬꼬마라서 이런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본 적이 없어요. 이때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독서하던 좋은 시절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으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자신도 그 책을 읽게 되거든요. 요즘은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들어서 그런지 지하철에 책 읽는 사람을 신기하게 쳐다봐요. ^^

표맥(漂麥) 2015-12-1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팔 그거 재미있나 봅니다. 직장 한담시간에 자주 나오는게...^^
이 책은 지금 깔끔히 재출간해도 여전히 인기 있을 듯한 생각을 해 봅니다... 스테디셀러 반열에 들어가는 책 맞죠? ^^

cyrus 2015-12-17 22:33   좋아요 0 | URL
지금도 판매되고 있어요. 다른 출판사들도 바바 하리 다스의 이름으로 책을 낸 적이 있는데 절판되었어요. ^^

인디언밥 2015-12-19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팔년 생이셨구나.. 근데 저보다 훨씬 형같은 느낌 ㅠ

cyrus 2015-12-21 10:24   좋아요 0 | URL
이래서 제가 실제로 애늙은이 소리 듣습니다. ^^;;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한 오귀스트 뒤팽은 아마추어 탐정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뒤팽이 없었더라면 코난 도일셜록 홈즈를 탄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코난 도일은 주홍색 연구에서 홈즈의 입을 빌려 뒤팽의 실력을 애써 무시한다. 뒤팽은 분석 능력이 뛰어나지만, 생각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지적한다. 이 장면으로 홈즈는 재수 없고 냉정한 탐정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했고, 뒤팽은 한물 간 탐정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도일은 뒤팽을 극찬했다. 도일이 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포를 향한 도일의 존경심을 드러낸 소소한 장면일 뿐이다. 주인공 탐정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 탐정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의 실력을 깎아내리는 장면은 포를 위한 도일의 패러디다.

 

뒤팽도 홈즈처럼 자신의 추리 능력을 돋보이려고 뛰어난 수사 실력을 보인 비범한 인물의 문제점을 언급한다. 뒤팽이 처음으로 등장한 추리소설 <모르그가의 살인>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뒤팽은 레스파냐예 모녀의 살인 사건을 어설프게 수사하는 파리 경찰을 비판한다. 그러고는 이 사람을 언급하면서 잘못된 수사 방식이 어떤 건지 덧붙여 설명해준다.

 

 

비도크는 예리한 추측 능력과 끈기를 가진 사람이었네. 하지만 사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에 사건 조사에 깊이 들어가면 실수를 연발했지. 물건을 눈에 너무 가까이 대서 뚜렷이 볼 수 없게 된 거야. 그렇게 바짝 대고 보면 한두 가지 요소는 정확히 보일지 몰라도 전체 그림은 보이지 않아.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은 진실이 늘 우물 속에 있는 게 아니란 걸세. 사실 나는 중요한 정보는 언제나 표면에 드러나 있다고 생각해. 지식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다니는 계곡 속에 있거든.”

 

(포 소설 전집 1 : 미스터리 편모르그가의 살인중에서, 30)

    

 

뒤팽은 비도크라는 사람이 예리한 추측 능력을 가졌음에도 2% 부족한 수사 실력을 보여준다고 까댄다. 비도크는 어떤 사람일까. 이 장면을 유심히 읽은 독자는 비도크의 정체가 궁금할 수 있겠다. 그러나 번역자는 이런 독자의 호기심을 몰랐다. 우울과 몽상과 코너스톤 포 소설 전집에 비도크를 설명해주는 주석이 없었다. 만약에 (정태원 씨처럼 추리문학에 상당한 조예가 깊은 번역자라면 비도크주석을 달았을 것이다. 비도크가 탐정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설명이 없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 추리소설을 자신들 시간 때우기에 좋은 통속소설로 인식하는 독자들은 비도크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다. 국문학을 전공한 전문 번역가들은 순수문학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추리문학의 발달사를 잘 모른다.

 

 

 

 

프랑수아 외젠 비도크

 

 

비도크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홈즈가 뒤팽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과 같다. 흔히 탐정의 원조로 뒤팽을 많이 언급하지만, 최근에는 비도크가 많이 거론되고 있다. 프랑수아 외젠 비도크(1775~1857).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설탐정 직업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비도크는 한 편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원래 흉악한 범죄자였다. 절도, 사기 등 여러 가지 혐의로 감방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다. 탈옥도 여러 번 시도하여 재수감된 적도 있었다. 비도크는 수감 생활을 하면서 만난 범죄자로부터 흥미로운 정보를 듣게 된다. (동료 수감자의 뒷 통수를 친) 그는 이 사실을 파리 경찰 관계자에게 알리고, 공을 인정받아 풀려났다. (야호! 탈출이다) 그 이후로 비도크는 경찰 관계자들이 범죄자들을 소탕할 때마다 결정적 도움을 주는 (경찰 끄나풀) 역할을 했다. 비도크는 자신의 범죄 경력을 토대로 역으로 범죄자들을 골탕먹이는 수사 방식을 만들었다. 비도크가 잠복수사, 범죄기록 작성 및 정리를 처음으로 시도했으나 그의 전과 이력 때문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비도크는 범죄 조직에 자신이 정한 비밀 조직원들을 심어서 잠복 수사를 시도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처음으로 창설된 잠입 수사 전담팀 브리가드 데 라 슈르티(Brigade de la Sûreté)’이다. 파리에 있는 범죄자들과 서로 안면이 있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암흑가 사이에서도 알려졌다. 비도크는 밑바닥 인생의 범죄자로 시작해서 파리 경찰의 앞잡이로 활동하여 수사 책임자까지 오르는 등 화려한 전성기를 지냈다. 하지만 1827년에 비도크는 파면을 당한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비도크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도둑질하다가 적발되고 말았다.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경찰직에서 물러난 비도크는 사설 수사기관을 설립한다. 이때부터 비도크는 역사상 최초의 사립탐정이 되었다. (다시 한 번, 과거 탈세 성공) 

    

 

 

 

 

 

 

 

 

 

 

 

 

 

 

 

 

 

비도크의 활약은 당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은 범죄자 비도크를, 형사 자베르는 경찰직에 몸담은 비도크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다. 그밖에도 발자크의 보트랭(고리오 영감), 알렉상드르 뒤마의 에드몽 당테스(몬테크리스토 백작) 등이 비도크의 영향을 물려받은 인물들이다.

 

 

 

 

 

신웰 존슨을 만나는 홈즈 (하워드 K. 엘록의 삽화)

 

 

코난 도일의 마지막 홈즈 시리즈인 셜록 홈즈의 사건집 수록작 유명한 의뢰인’(황금가지판 작품명은 거물급 의뢰인’)신웰 존슨이라는 인물이 짧게 등장한다. 그는 홈즈의 비밀 정보원으로 런던의 범죄 조직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한다. 그도 역시 과거에 포악한 범죄자로 두 번이나 감방에 생활했다. 그러다가 홈즈를 만나면서부터 개과천선하여 홈즈에게 쏠쏠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신웰 존슨이 비도크를 모티브로 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비도크는 인생을 화려하게 살다 갔다. 뛰어난 머리로 범죄자들을 잡았고, 특별한 매력으로 여성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비도크는 수많은 여성들을 만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공상하는 걸 좋아하는 뒤팽, 그리고 여성을 혐오하는 홈즈의 모습과 무척 대조적이다) 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죽기 직전에 비도크는 막대한 유산을 남기게 되는데, 비도크와 알고 지내던 여인들이 유산 상속권을 요구했다. 비도크는 유산을 자신을 30여 년 동안 뒷바라지해준 하녀에게 물려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 에밀 가보리오의 르루주 사건은 프랑스 최초의 탐정소설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타바레는 괴이한 사건을 해결하는 데 관심이 많은 노인이다. 그는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데, 독거노인을 돌봐주는 유일한 사람이 하녀 마네트. 홈즈는 하숙집 주인 허드슨 부인 덕분에 먹고 지내는 데 불편 없이 지낸다. 허드슨 부인은 거의 20년 동안 홈즈의 방을 관리해주고, 식사까지 챙겨준다. 심지어 홈즈에게 오는 편지들도 받아준다. 이 정도면 허드슨 부인은 최소 하녀 급. 탐정과 하녀의 관계. 설마 이런 사소한 설정도 작가들이 따라 만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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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12-1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몽>을 까신 이후 이책을 바로 올리시다니... 이전 책 중고서점에 버리고 이 책 구매 클릭해야 할까요. ㅠㅠ

cyrus 2015-12-16 18:13   좋아요 0 | URL
지금 생각해보니까 <우몽>을 중고샵에 팔고, 그 돈으로 코너스톤 번역본 5권을 구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코너스톤 포 전집 책 한 권의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우몽> 팔아서 받은 돈에 약간의 금액을 더 보태면 코너스톤 포 전집을 충분히 살 수 있을 겁니다.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이 마음을 아십니까?] 프레시안, 2010년 10월 1일 (링크)

 

 

 

2010년 10월 첫날. 이 한 편의 글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면 독자들은 영원히 속을 뻔했다. 금태섭이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프레시안’에 서평을 게재했다. 한 권의 책을 칭찬의 미사여구로 치장하는 주례사 서평은 아니었다. 여러 권의 책의 번역에 불만을 표출하는 내용이었다. 그중에 가장 화제가 된 내용이 《우울과 몽상》(약칭 ‘우몽’) 번역 비판이었다. 이 책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선집으로 출간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서점에 판매되고 있다. 대표작을 포함한 포의 단편소설 58편을 한 권에 모은 장점 덕분에 큰 인기를 얻었지만, 성의 없는 번역 때문에 포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최악의 책’으로 낙인찍혔다. 금태섭은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에 내용 일부가 빠진 사실을 지적했다. 이 글이 공개된 이후로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 번역 누락은 《우몽》의 대표적 오역 사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 말고도 《우몽》에 오역으로 지적되는 사례가 더 있다. 금태섭은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을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고 밝혔다. 《우몽》 번역에 대한 금태섭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이 문장만 봐도 충분히 느껴진다. (놀랍게도 이 책을 추천하는 유명인들이 꽤 많다)

 

 

 

 

 

 

 

 

 

 

 

 

 

 

 

 

 

 

 

나 또한 똑같은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지난주에 《우몽》과 코너스톤 출판사의 ‘포 소설 전집’을 같이 읽어보고 있다. 올해 선보인 포 소설 전집을 향한 독자의 반응이 아주 좋아서 번역이 어떤지 궁금했다. 출판 번역 전문 기업인 ‘바른번역’이 포 소설 전집 번역을 맡았다. 한 작품에 여러 명의 번역가가 참여하는 ‘집단번역’을 부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책의 옳고 그름을 분별 있게 판단하기 위해서 집단번역에 대한 선입견을 버렸다. 책을 읽는 방식은 이렇다. 《우몽》과 코너스톤 번역본을 같이 읽는다. 두 권을 책을 읽다가 의미의 차이가 확연히 나는 문장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원문을 대조해본다. 소설 원문은 포의 공식 사이트 ‘The Edgar Allan Poe Society of Baltimore’(http://www.eapoe.org/)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이 포 소설은 원문으로 읽는 게 낫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역시 《우몽》은 한마디로 번역이 ‘개판’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제사(題詞)를 삭제했고, 원문의 의미와 상반되는 의역을 감행했다. 또한, 인명이나 지역명 같은 외래어 고유명사를 잘못 쓰기도 했다.

 

최근 《우몽》을 읽으면서 발견한 가장 어이없는 오역을 하나 알려주겠다. 지금 생각하면 화가 난다. 내가 여태까지 사소한 오역 때문에 이야기의 결말을 잘못 알고 있었다. 다음 문장은 ‘함정과 진자(Pit And The Pendulum)’ 원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There was a discordant hum of human voices! There was a loud blast as of many trumpets! There was a harsh grating as of a thousand thunders! The fiery walls rushed back! An outstretched arm caught my own as I fell, fainting, into the abyss. It was that of General Lasalle. The French army had entered Toledo. The Inquisition was in the hands of its enemies.

 

엄청난 군중의 떠들썩하고 수선스런 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트럼펫이 한꺼번에 울려 퍼지는 소리도 들렸다. 수천 개의 천둥이 한 번에 몰아치는 듯한, 거친 쇠창살이 삐꺽거리는 굉음도 들렸다. 공포의 벽이 물러나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나를 붙들어 준 팔이 있었다. 라살레 장군이었다. 프랑스 군대가 톨레도에 입성한 것이다! 종교 재판소는 이제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포 소설 전집 2 : 공포 편》 ‘함정과 진자’ 중에서, 209쪽)

 

어울리지 않는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트럼펫 합주 같은 소리가 크게 들렸다! 수천의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불타는 벽은 뒤로 물러갔다! 기절해서 나락으로 떨어지자 어떤 손이 나를 붙잡았다. (《우몽》 ‘저승과 진자’ 중에서, 749쪽)

 

 

‘Inquisition(종교 재판)’을 제외하면 나 같은 ‘영포자(영어를 포기한 자)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문장이다. 《우몽》의 역자는 라살레 장군이 지휘한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종교 재판소를 점령했다는 문장을 번역하지 않았다. ‘함정과 진자’는 거대한 고문 기구의 위협 속에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일품이다. 주인공은 운 좋게 공포의 방에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주인공을 구해준 ‘어떤 손’은 과연 누구일까. 나는 처음에 《우몽》의 번역으로 읽었을 때 주인공이 극적으로 살아남는 결말이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 그 생각은 틀렸다. 오역으로 인해 생긴 오해였다. 원문과 다른 번역본을 같이 읽고 나서야 ‘진짜 결말’을 알았다. 번역자에게 농락당한 느낌이 들었다.

 

코너스톤 번역본의 장점은 가격이 싸고, 들고 다니기 좋은 판형이다. 출판사는 책의 앞표지에 ‘현대인을 위한 최신 원전 완역본’이라고 소개했다. ‘원전 번역’을 최고로 여기는 독자들의 취향을 겨냥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코너스톤 번역본에 대체로 만족하는 독자 서평이 상당히 많다. 《우몽》과 비교하면 가독성이 좋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독자님들아, 또 속나!)

 

 

《우몽》 번역자도 하지 않는 오역을 저질렀다. 다음 원문은 ‘모르그가의 살인(The Murders in the Rue Morgue)’의 오귀스트 뒤팽이 친구(화자)의 생각을 추리하는 장면에서 인용했다.

 

 

Here your countenance brightened up, and, perceiving your lips move, I could not doubt that you murmured to yourself the word ‘stereotomic.’ You continued the same inaudible murmur, with a knit brow, as is the custom of a man tasking his memory, until I considered that you sought the Greek derivation of the work ‘stereotomy.’ I knew that you could not find this without being brought to think of atomies, and thus of the theories of Epicurus.

 

여기에서 자네 표정이 밝아졌고 이런 종류의 도로포장을 일컫는 용어인 ‘스테레오토미’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는 것을 자네의 입 모양으로 읽어 알아냈어. 스테레오토미(stereotomy)를 떠올리다가 해골(atomies)을 연상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에피쿠로스의 학설로 생각이 흘러간 거지. (《포 소설 전집 1 : 미스터리 편》 ‘모르그가의 살인’ 중에서, 18~19쪽)

 

 

‘stereotomy’는 돌을 특정 모양으로 절단하는 건축기술이다. ‘atomy’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원자와 해골. 뒤팽은 돌을 절단하는 기술에서 원자를 연상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는 과정을 반복하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atom) 상태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계승한 철학자가 에피쿠로스다. 그러므로 ‘atomies’를 ‘해골’이 아닌 ‘원자’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다른 포 소설 번역본들도 ‘atomies’를 '원자'로 번역했다.

 

코너스톤 번역본은 역주가 적은 편이다. 포는 자신이 관심 있는 철학이나 고대 지식을 소재로 소설을 썼고, 사상가의 문장을 많이 인용한다. 그래서 포의 소설은 생각보다 어렵다. 아무리 가독성 좋은 번역이라고 해도, 독자가 이해하기 힘든 단어를 설명 하나 없이 넘어가는 건 무성의하다. 심지어 ‘마리 로제 미스터리(The Mystery of Marie Rogêt)’에 포가 쓴 원주(소설의 집필 배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있다)마저 빠뜨렸다.

 

 

현재 《우몽》 추리 편과 공포 편, 코너스톤 포 소설 전집 1권(미스터리 편), 2권(공포 편)을 다 읽었다. 책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우몽》은 불태워버리고 싶고, 코너스톤 번역본은 던져버리고 싶다.”

 

 

일반적으로 포의 소설을 ‘무서운 이야기’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독자들이 원전을 축약하고, 무서운 장면을 더 강조한 우리나라 번역에 익숙해진 탓이다. 원문을 직접 읽어보시라.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포의 문장은 대체로 길고, 라틴어나 고어를 자주 사용한다. 원문으로 읽어 보면 포의 작품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번역자의 노력 덕분에 우리 독자들은 무시무시한 ‘검은 고양이’나 추리소설의 원조 격인 ‘모르그가의 살인’ 같은 위대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다. 요즘 들어 포의 소설 번역본이 많이 나오고 있다. 어느새 포도 헤르만 헤세처럼 국내에서 많이 번역된 작품의 작가가 되었다. 이러한 독자의 과분한 관심(?)으로 수익을 얻으려는 나쁜 출판업자는 불량스러운 책을 만들어낸다. 독자를 기만하는 엉터리 책의 양산에 번역자의 책임도 있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번역자가 명작을 손대는 순간, ‘망작’이 된다. 이런 책을 만날 때마다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금태섭의 심정이 너무나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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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12-1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거금 들여 이 책 산 전 어찌해야 할까요? ㅠㅠ

cyrus 2015-12-15 19:26   좋아요 1 | URL
문제가 많지만, 보관하는 것이 낫습니다. 코너스톤 번역본 다음으로 포의 단편소설을 많이 수록한 책이거든요. ^^;;

보슬비 2015-12-14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몽은 아직 제대로 읽지 않으고 계속 책장에 두고 있는데, 마침 영어책도 구입했겠다(그것도 책장에 장식용이지만....ㅠ.ㅠ) `우몽` 정리해야할때가 왔네요.^^

cyrus 2015-12-15 19:27   좋아요 0 | URL
코너스톤 번역본으로 좋습니다. 가독성 좋은 건 인정합니다. ^^

해피북 2015-12-1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짝짝짝짝~~ 대단하세요^~^. 저는 포의 작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읽어보지도 못해서 뭐라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렇게 조목 조목 비교 분석하셔서 이야기 하시는 부분들이 멋지세요^^

cyrus 2015-12-15 19:28   좋아요 0 | URL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을 읽다가 강제로 영어 공부까지 하게 되었네요.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12-14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를 그것도 클래식에 가까운 원서들은 특히나 우리글처럼 읽을 능력은 안되고... 그렇다고 허접한 번역본은 읽기 싫고... 답답하네요~~

cyrus 2015-12-15 19:29   좋아요 0 | URL
원문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면서 우리말로 쉽게 옮기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최대한 번역이 잘 된 책을 골라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

2015-12-14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5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5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5-12-1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우몽을 진작에 던져 버렸습니다.코너스톤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쓴적이 있는데 익명의 번역집단의 책들은 좀 거시기하단 생각이 듭니다.코너스톤에서 홈즈와 뤼팽 시리즈가 번역되었는데 전 개인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번역한 정태원님과 성귀수님의 책을 가지고 있지요^^

cyrus 2015-12-15 19:35   좋아요 0 | URL
지금 코너스톤 번역본 2권까지 읽었는데 잘못된 번역이 몇 개 더 있었습니다. 설명이 잘못된 역주도 있었어요. 나머지 3~5권 읽을 자신이 없어요. 책을 읽다가 강제로 영어 공부까지 하게 됐습니다. ^^;;

transient-guest 2015-12-15 0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의 작품을 모아놓았음에 감격하면서 읽었기에 우/몽에 대한 그런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만, 큰 문제네요. 전 개인적으로는 자기 이름이 아닌 번역가집단으로 나오는 번역은 믿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포의 작품번역이 시급하네요.

cyrus 2015-12-15 19:37   좋아요 0 | URL
오역을 인정하고, 개정판을 내면 되는데 요즘 출판시장이 좋지 않아서 이런 절차로 실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단발머리 2015-12-15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집에 <우몽> 있어요. 근사하다고, 폼 난다고, 꼭 읽고 말거라고 작정하고 있는데....
아... 어쩌지요.
cyrus님 자세한 비교 설명 듣고 나니 더 읽기 싫어집니다요.
그나저나, 저기 비밀댓글 혹시......
<우몽> 출판사에서? ㅎㅎㅎ 아니지요? ㅎㅎㅎ

cyrus 2015-12-15 19:38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알라딘 이웃입니다. 출판사 관계자가 이런 조용한 곳에 찾아올 리 없습니다. ㅎㅎㅎ

2017-11-28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8 09:50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몇 편인지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지만, 다음 작품들은 <우울과 몽상>에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 3권 : 하나인 네 짐승, 낙타 표범(소설 한 편의 제목입니다)
* 4권 : 오믈렛 공작, 예루살렘 이야기
* 5권 : 줄리어스 로드먼의 일기

그리고 포의 미완성 소설인 ‘등대‘라는 작품은 <우울과 몽상>, 코너스톤 전집 모두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의 결말을 <사이코>의 작가 로버트 블록이 썼습니다.
 

 

 

 

어제 하루 친구의 일을 도와주었다. 친구는 CCTV 카메라, 감지센서 기기를 설치하는 회사에서 일한다. CCTV 카메라를 설치한 절이나 공공기관에 찾아가서 부품을 정기적으로 점검도 한다. 나는 친구와 같이 점검하는 일을 했다. 친구의 말로는 정기 점검하는 날이 제일 힘들다고 한다. 하루에 절 두세 곳을 찾아가 혼자 점검하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절 내부의 건물이 많고, 절의 구역이 넓을수록 CCTV 카메라 개수가 많아진다. 절 한 곳당 적어도 카메라가 13개다. 13개의 CCTV 카메라 그리고 감지센서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이 많은 것을 혼자 하면 한 시간 반 걸린다. 점검하는 도중에 기계의 문제점을 발견하면 시간이 지체된다. 가야 할 절이 전국 곳곳에 있어서 회사용 차량을 운전하여 이동한다.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도 피곤하다. 그래서 정기 점검하는 날이 오면 친구가 나에게 부탁한다. 친구의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기계를 만질 일이 없다. 그냥 친구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

 

어제는 절 세 군데를 점검했다. 경북 의성에 있는 절 두 곳, 경남 합천에 있는 절 한 곳. 맨 처음 간 절은 의성의 대○사. 절 건물은 화려하지 않지만,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는 곳이었다. CCTV 카메라 화면을 볼 수 있는 기계는 종무소에 있다. 제일 먼저 종무소에 가서 화면 상태를 확인한다. 종무소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아주 반가운 것들을 만났다.

 

 

 

 

 

방 한쪽에 엄청난 양의 책들이 놓여 있었다. 절에서 많은 양의 책을 보게 되다니. 책 무더기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책이다!’라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책 열 권씩 끈에 묶여 있었다. CCTV 카메라가 주변을 샅샅이 살피듯이 내 두 눈도 자연스럽게 책등을 주시하면서 확인하고 있었다. 눈앞에 읽을 만한 책이 하나씩 보였다. 이 많은 책을 소장한 주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큰스님, 주지스님 중 한 분이 차곡차곡 책 탑을 쌓으셨다. 불교 경전이나 불교 관련 서적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온통 불교 서적이었으면 내가 책 탑을 유심히 관찰할 이유가 없다. 스님의 독서 편력이 예사롭지 않다.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 동문선 현대·문예신서 시리즈,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도 있었다.

 

 

 

 

 

 

 

책의 분야가 다양했다. 철학, 종교학, 각종 종교 사상 서적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아마도 스님은 불교부터 시작하여 더 나아가 철학, 종교학까지 살피면서 독서로 수행하셨나 보다.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에는 서양 문학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 89번째 책이 《위대한 개츠비 / 롤리타》다. 국내 세계문학 전집 사상 가장 특이한 작품 조합이다. 이 두 편의 작품을 쓴 작가는 정말 유명하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특별한 정보가 없다. 피츠제럴드와 나보코프는 동시대에 활동한 작가였으나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 러시아 출신의 나보코프는 1919년에 유럽으로 망명하여 20년 가까이 유럽에서만 생활했다.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는데, 그 해에 피츠제럴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서로 어색한 두 편의 소설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 절에서 보게 되니까 기묘한 궁금증이 생겼다. 스님도 ‘롤리타’를 읽어봤을까. ‘위대한 개츠비’와 ‘롤리타’ 조합보다 ‘롤리타’를 읽는 스님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서 더 이상하다. 이것이야말로 불심파괴. 동서문화사판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발견했다. 성(性)을 대담하게 표현한 걸작들이 스님한테 걸리면 색에 대한 욕심을 부추기는 잡스러운 책이 된다. 수행에 맞지 않는 책은 불쏘시개가 되어 생을 마감했을 텐데 용케도 살아남았다.

 

절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검하는 날에는 식당, 분식점, 중화 반점에서 점심을 때운다. 우리 같은 외부 손님에게 따뜻한 차나 음료수를 주는 스님은 많았지만, 음식까지 대접하는 건 대○사 주지스님이 처음이다. 대○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원주(院主)님의 요리 실력이 대단했다. 무청 된장국, 김치전, 감자전, 고추 장아찌, 돼지껍질 김치볶음, 파래무침, 배추김치, 냉이 무침 그리고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인 동치미. 어제 먹은 반찬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군침이 생긴다. 주지스님은 우리에게 밥을 더 먹으라고 권했다. 밥 두 공기에 잔반 없이 다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난 뒤에 원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원주님이 큰스님을 먼저 언급했다. 어제 큰스님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큰스님은 특별한 일 때문에 다른 절에 가셨기 때문이었다. 큰스님이 주지스님, 원주님보다 대○사에 가장 오래 머무른 분이다. 큰스님은 37세 때 대○사에 처음 정착해서 14년 동안 쭉 계셨다고 한다. 큰스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종무소에 있는 책의 주인이 누군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 원주님과의 대화를 오래 할 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서 느긋하게 여유를 가질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질문을 하지 못했다. 특별한 서재를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책 탑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그렇게 대○사와 이별했다. 어제 대○사에서 발견한 수수께끼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 다시 오지 않는 이상, 내 기억 속 미제로 남는다. 책의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그가 책을 읽으려는 이유는 알 것 같다. 책의 주인은 자신을 향해 이러쿵저러쿵할 속세의 소리를 멀리하려고 책 탑을 쌓았을 것이다. 외로움을 잊으려고 이 모든 책을 끌어안을 듯하다. 그때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결정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깨침을 얻은 책 탑의 주인은 세상 떠날 일을 대비하여 서책을 가지런히 쌓아 놓았다. 올 때부터 몸뚱어리 하나 달랑 가져온 사람이기에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친 성철 스님의 준엄한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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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5-12-10 2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니 법정 스님의 글이 생각나네요. 출가 초기 스님은 세속의 책을 잊지 못해 무척 연연해 했었죠. 그러다 무슨 계긴가로 읽던 책을 불태우고 그 연연함을 끊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님께서 보신 책의 주인되는 분도 그와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참 특별한 경험을 하셨어요. ^ ^

cyrus 2015-12-11 23:26   좋아요 1 | URL
법정 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자신의 책을 신문배달부에게 전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끈으로 묶이지 않은 책이 단 한 권도 없는 것으로 봐서는 책 주인이 이별을 단단히 준비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2015-12-10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12-11 23:28   좋아요 1 | URL
모든 책들이 끈으로 묶여 있어서 펼쳐 볼 수 없었어요. 책등만 보여서 사진책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

만병통치약 2015-12-10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딱 보니까 알라딘 중고샵에 내 놓으실 거네요 ㅋㅋ 차떼기 해오시지 그러셨어요....^^

cyrus 2015-12-11 23:33   좋아요 1 | URL
절에 외부 CCTV 카메라가 있어서 훔치다가는 절도범 되고 맙니다. ㅎㅎㅎ

오후즈음 2015-12-10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탑 참 아름답네요, 무엇보다 다양한 장르로 책을 읽으실 스님이 참 존경스럽기까지합니다

cyrus 2015-12-11 23:35   좋아요 1 | URL
책이 많이 있는 절을 처음 봤습니다. 책 많이 읽는 스님과 친하게 지내면 많은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장소] 2015-12-11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지가 있는 분이 그정도 책을 읽는다 해서 불심이 흔들릴까..싶네요..^^
좋은 책들 ㅡ입니다.~

cyrus 2015-12-11 23:38   좋아요 1 | URL
불심을 제대로 알게 되면서 책에서 진리를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

[그장소] 2015-12-11 23:53   좋아요 0 | URL
진리만 알아야 하는건 아니죠..
지금 세상은 ...
어쩌면 ..저 책은 그저 공부에 매진하러 왔다가
출가한 사람의 것...?!^^

transient-guest 2015-12-11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버리려고 쌓아놨는지 알아보고 맞다면 잭팟맞은 기분으로 다 들고왔을 것 같습니다 탐진치가 문제죠???ㅎㅎ

cyrus 2015-12-11 23:39   좋아요 1 | URL
여쭤볼 거 그랬어요. 혹시 버리는 책인지. 그러면 책 몇 권 챙겨올 수도 있으니까요.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5-12-11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트럭 몰고 갔을 겁니다. 알짜배기 책만 있네요. 한길사 그레이트북 여유만 된다면 전집 구매할 만한 가치가 있죠....

stella.K 2015-12-11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왜 그냥 내놓으셨을까? 어디 기증을 하거나 중고샵에 넘겨도 됐을 텐데...
다행히 임자찾아 간 것 같고, 스님들도 무소유를 실천하신 거겠지.
난 봤어도 못 가져왔을 거다. 나도 무소유를 실천 하느라.ㅋㅋ
하지만 동서문화사 책은 정말 탐난다.
어쨌든 대박이다. 축하한다!^^

cyrus 2015-12-11 23:42   좋아요 1 | URL
아마도 기증도서로 내놓았을 것 같아요. 어제 일 때문에 오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려고 했어요. 좋은 책을 만나는 길조로 느꼈거든요. 오늘 사정이 있어서 가지 못했어요. ㅎㅎㅎ

blanca 2015-12-11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너무 재미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법정 스님 <무소유>에 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가 싶어요. 법정 스님이 젊은 시절 책을 좋아해서 소설책 사가지고 오셔서 읽는 장면... 가물가물해요.

cyrus 2015-12-11 23:42   좋아요 1 | URL
블랑카님이 언급한 스님의 이야기를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

boooo 2015-12-1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많네요.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스님도 계시는군요. ^^

cyrus 2015-12-14 19:54   좋아요 0 | URL
스님 소유의 책이 맞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누군지 몰라도 독서량이 대단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