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들어 몇 편의 영화를 봤다. 그에 대한 간단한 기록.
1. 신이 찾은 아이들
기독교 영화제 개막작이었다는데, 나는 개막식에서 본 건 아니구, 개천절날, 몇몇 사람들과 함께 봤다. 원작 책이 있다는데, 영화가 끝나고야 알았다. 내전이 끊이지 않는 수단의 청년들이 미국 지원 시스템을 통해 미국으로 오게 되고, 그 곳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 미국이 꿈의 나라다, 라는 말을 들으면 팽! 하고 웃는 나이지만, 그들에게 미국이 꿈의 땅이었음을 부정할 정도로 매정하지는 않다. 적어도 그들은 정말로 그 땅을 토대로 꿈을 꾸었으니까. 그들은 미국에게, 또 사람들에게 동정의 대상이었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동정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촌스러움의 상징이었고, 몰려다니면 무섭다,는 이유로 이웃들에게 신고를 당하는 대상이었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차곡 차곡 하나씩 하나씩, 생각하던 것을 놓지 않고,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을 잊지 않고 한걸음씩 나가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런 것들이 멍에가 되어 그들이 날개를 활짝 펼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볼 때면, 참 속도 상하고... 답답도 하고... 남자주인공인 존불 멋지다. 이날, 본의 아니게(?) 희생과 봉사정신을 보여주게 된 나는 <여자 존불>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하하. ★★★★☆
2. 고고70
머리를 기른 조승우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조금은 괴로운 마음으로 봤던 영화. 아무리 봐도 안멋져보여서, 나중에는 내가 조승우를 왜 좋아했더라,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조승우보다는 신민아의 필모그래피에 도움이 될 영화다. 영화관을 나올 때 엔딩 크래딧과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신민아가 했던 동작을 따라하고 있다. 신나게 들썩들썩 하면서 봤던 영화. 역시 중독성엔 장사 없다구. 그게 고고의 매력. 억압된 시대일수록 자유를 갈망할 수 밖에 없지. 비상식이 상식이던 세상에서, 상식적인 즐거움을 누리게 위해 당시의 상식에 비추어 비상식이었던 그 무언가를 계속해서 지향할 수 밖에 없던 이들의 이야기. ★★★☆
3. 비몽
오다기리죠 무대인사 때문에 개봉 전에 가서 봤다. 오다기리죠가 나가자 관객의 1/5 정도는 영화도 보지 않고 나가더라. (덜덜 돈많은 사람들...인..가봐...) 끝나고 나오자마자 몇몇 관객들은 이렇게 말하더라. '또라이 아냐?' ㅎㅎ 뭐 암튼 이 영화 수익의 대부분은 이날 강남에서 강북까지 수회간 있었던, 오다기리가 아니었으면 김기덕 영화같은 건 돈내고 보지 않을 언니들까지 끌어들였던 오다기리죠와 이나영 무대인사에서 창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마르고 얼굴작은 이세상사람같지 않은 둘이 함께 서 있으니 - ㅈ씨는 초소두라는 표현을 - 그 세상이 이세상이고, 내가 다른 세상 사람 같드라) 행복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희생과 포기를 담보로 하는 거구나. 불가항력적으로 양보될 수 없는 욕망이라는 게 부딪치면 깊은 생채기가 되고, 또 그게 참 아프구나. 남자가 사랑하는 이를 꿈에서 찾아가면, 여자는 현실에서 무의식 중에 그 꿈을 실행한다. 문제는 무의식에만 존재하던 것이 수면 바깥 현실의 세계로 나왔을 때, 현실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다잡았던 것들은 흔들릴 수 밖에 없으며, 결국 혼돈에 빠지게 된다는 것. 영화관에 있던 사람은 모두 마음속으로 제발 부디 2교대를 해주세요, 라고 한두번쯤은 외쳤겠지만, 쉬운 길을 가실리 없잖아. 그런 바람같은 건 싹 무시해주시고, 결국은 오다기리를 조각도로 스스로의 머리에 피를 내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잔인한 김감독님. 다행히 곳곳에 웃음을 자아내는 몇몇 장면들이 어색하지 않게 영화에 녹아든다. (웃음을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뒷부분만 아니면 미스테리스릴러로맨틱코미디 장르로 다시 만들어도 될듯. ㅎㅎ. 일본어와 한국어로 대화하는 건 어색함의 극치였으나, 나중에는 인식조차 어려울 정도로 영화의 자연스런 일부가 된다. 잠들지 않으려 짓는 괴로운 표정들은 처음엔 우스꽝스러웠으나, 결국은 희화를 넘어선 절절한 괴로움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물론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나영 옷 겁나 예쁘고, 나비 목걸이도 예쁘고 (집에와서 이나영 목걸이, 이나영 스타일, 뭐 이런거 쳐봤다는 거) 오다기리를 둘러싼 모든 풍경은 간지가 좔좔 흐른다,라는 거. 침대위 이불 색깔까지도 근사하다. 예상치 못했던 미적 즐거움이라니. 김기덕은 아무래도 스타일리스트. ㅎㅎ ★★★★
4. 모던보이
조승우에 이어 박해일까지. 한 때 좋아하던 남자배우들이 왜 옛시대 역할을 맡아서는 다들 머리 모양을 이상하게 하고 나와 식어가는 마음에 확인사살을 해주시는 건지. 역시 머리빨은 여자만 중요한 게 아닌가보다. 장발이 어울리는 사람은 장동건 외에는 없다오, 그런데 장동건도 짧은 머리가 더 멋있다오. 부디 감우성만은 우리시대의 연기를 계속해 주시길. 으흑. (왕의 남자는 잘 넘어가서 참 다행이야) 1930년대 경성 최고의 미남이자 낭만의 화신이라 우겨대는 이해명의 말 뒤에 나는 계속 한마디밖에 덧붙일 수 없었다. 아, 이토록 찌질할 수가! 당신은 찌질함의 화신이구나. 싫다고 도망간 여자 끝까지 찾아다니고, 그것 때문에 고문까지 받고 나와서는 하는 말이, 테러박이 정말로 부럽다, 라니. 그러고 다시 들어왔다고 마냥 행복해하고, 촐랑촐랑 춤도 추고, 덜덜 떨면서 폭탄조끼까지 입다니. 지금 생각하니 귀여워서 막 웃음이 나려고 그러네. ㅎㅎㅎ (화면으로 보면 정말 찌질한데 쓰고나니 왜이리 귀엽누 ㅎㅎ) 그렇다. 난 찌질남에게 일말의 매력도 느끼지 못하지만, 외면하지도 못하나보다. 크크섬에서도... 심형탁 같은 스타일이 분명 좋지만 자꾸만 윤대리 쪽으로 마음이 쓰이는 걸 보면. (드라마 보면서 왠 -_-) 그래, 허세보단 찌질이 낫지. 어쩜 모던보이라는 제목은 조선시대 남자들의 이런 허세, 가오를 벗어버린 현대적 찌질한 남자를 가리키는 중의적 의미는 아니었을까. ㅎㅎ (김혜수는 당시로서는 매우 매력적이던 여성의 역할을 맡았으나,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쿵! 내 눈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