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선덕여왕. 내가 얼마나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치니님이 지적하신 유신랑 마빡 사건까지도
그냥, 우, 웃길라고 그랬을거야. 정도로 너그러이 넘어갔는데


이번 미실의 난,
아무리 치졸하고 비겁한게 그 난의 컨셉이라고 하지만,
도무지 재미가 없어서 봐줄 수가 없다.  


영현언니. 안그러셨잖아요. ㅜㅜ
아무리 치졸한 궁내 경합을 다루더라도,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뭐,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유치찬란치졸억지에
내가 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이나라 정치상황이 유치찬란치졸억지에 리얼리티를 더해준다고 해도,
졸린눈 비비며 드라마한번 보겠다고 꿈뻑꿈뻑 충성심을 보인 시청자에게
절대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ㅜㅜ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09-10-23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에 웃어요~~ 드라마를 한 편도 안보는 나는 당근 선덕여왕도 안봐서 몰라요.
어제 최규석 초청강연 잘 마쳤고 장장 7시간 30분의 데이트를 즐겼다는 걸 말씀드리죠.ㅋㅋ
내가 훔친 여름, 읽고 리뷰 올렸는데 보셨을려나~~~
하여간 두루두루 웬디님께 감사와 사랑을 보내요! 뽀~~~ ^^

웽스북스 2009-10-28 01:26   좋아요 0 | URL
네 봤어요 순오기님. ^-^
데이트라니. 아. 부러워요~

2009-11-02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9-10-23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도 그렇게 느꼈구나.^^ 그동안 저는 늙은 유신랑이 맨날 뭘 혼자만 몰라서 "무슨 일이냐?" 라고 말하는 게 넘 우스웠는데. 조만간 미실이 죽는다는데 그때부터는 또 어떻게 진행될지.

최근에 시작된 아이리스는 더 심해요. 본 씨리즈를 엿가락처럼 끈적끈적 늘여놓은 것 같은 지루함.ㅠ

웽스북스 2009-10-28 01:27   좋아요 0 | URL
아아아 아이리스. 깐따삐야님 말을 들으니 역시 내 예상이 다르지 않았다는 것에 기쁘군요 ㅎㅎ

전 그럼에도 지금도 선덕여왕 보고있어요 ㅋ

메르헨 2009-10-2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아이리스는 본 시리즈가 생각났어요.
그제 본 선덕여왕은 화가 나더군요.
마지막 장면...유신이 덕만에게 빨랑 가라고 말하고 덕만은 성문을 두드리며
울는데...뭔 신파도 아니고 한나라의 왕이 되겠다는 자의 모습이랑 도저히 ... 매치가 안되더군요. 호호호...
암턴, 이요원씨의 연기력 부족인가...대본의 문제인가...좀 생각했죠.
암턴, 올만에 가을에 느닷없이 찾아와서 댓글 남기고 갑니다.^^
이번 가을엔 자주 뵈면 좋겠어요. 저도 좀 한가해지구요.^^

웽스북스 2009-10-31 11:50   좋아요 0 | URL
그죠. 둘의 러브라인이 수면 아래로 내려간게 언젠데
갑자기 좀 생뚱맞아서 저도 보며 뭥미했었어요.

그나저나 메르헨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

후니마미 2009-11-16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고현정 목소리가 억지스러워서 다른 사람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안 봐 주다가
또 사람들이 볼만하다고 해서 봐 주려고 했더니
이요원이 다른 건 다 잘하다가
"뭐" 이 단어는 왜 그리 연기가 안 되는지요?
이 "뭐? "라고 할 때는 현대물의 20대 철부지 처녀같은 느낌이라
도저히 시대물이라고 여겨기지가 않는거에요
왜 꼭 그 ㅂ부분에서 걸리는지
그 대사를 잘 못하고 있으면 각본하는 사람이 다른 단어로 바꾸든지
뭐라고? 라고 더 붙이든가...
그런데 또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많이 " 뭐?" 하는 대사를 하던데
"뭐?"는 고현정 다음으로 유명한 미실의대사가 되는 건 아닌지?
ㅎㅎ

이요원의 " 뭐?" 를 눈여겨 보시압 ㅎㅎ
 


기러기 

- 메리 올리버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 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밝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괙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달뜬 2009-10-0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아 김연수 작가님이 번역하신 기러기네요. 류시화 시선집에 있는 기러기도 좋지만 저는 이 버전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

웽스북스 2009-10-12 01:11   좋아요 0 | URL
흑. 김연수는 번역도 잘해...흑..흑..
 
고맙습니다
드라마아가씨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아 독서량이 바닥을 치고 있는 요즘, 사실 가을은 드라마의 계절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스스로에게 품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나를 버닝하게 만든 두 드라마는 선덕여왕(이건 다 알라딘 또 모님 때문) 그리고 지붕 뚫고 하이킥 (빨리 시작한 건 옆에서 부채질 해준 알라딘 치 모님 때문이기도 하고 ㅋ) 올봄 그사세 이후로 처음 보는 드라마들이다. 이 두 작품 모두 실은 이전에 페이퍼로 쓴 적이 있는 나의 드라마 작가주의와 시트콤 PD 주의에 부합하는 작품들이어서 언젠가 봐도 봤을테지만, 암튼 이렇게 도통 책도 잘 안읽히는 시기가 와 주는 바람에, 둘다 예상보다 조금 빨리 시작하기는 했다. 선덕여왕 이야기는 언젠가 할 기회가 있을테고, 오늘은 이번 주말 나를 좀 버닝하게 해주었던 지붕뚫고 하이킥 이야기.



아. 이런 슬픈 사진으로 시작하게 되다니. 이 아이. 서신애.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는 신신애. 내가 좋아하던 고맙습니다,에서 봄이로 나왔던 아이. 이 아이는 드디어 내게, 봄이에서 신애가 되었다. 고맙습니다에서부터 봄이만 보면 반사적으로 울었던 기억 때문인지.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신애가 눈물만 글썽여도 나는 그저 마음이 짠하다. 반대로 엉엉 울면서 우유도 먹고 라면도 먹고 단무지도 꼭 챙겨먹고 할 때면 나는 또 그게 재밌어서 막 웃는다. 놀라운 힘을 가진 배우다. 치 모님 말처럼 하이킥에서 신애가 제일 연기를 잘 하는 거 맞는 것 같다.  





우리 신애, 곧 음식 씨에프 하나 들어오지 싶다.


야동 순재에서 멜로 순재로 바뀐 이순재도 재미있다. 여기저기 글을 보니 이순재-김자옥 라인은 재미없어서 넘긴다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이 둘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알콩달콩 재미있는지. 아. 둘의 이별 장면에서 김병욱 PD는 그의 특기인 노래로 표현하기 신공을 보이는데 (거침없이 하이킥의 '범아 어디냐' 나 똑바로 살아라의 과외송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 된다 ㅋ) 이문세의 <이별 이야기>를 과감히 차용했다. 하하.



이것이 그 유명한 '탁자 위에 물로 쓰신 마지막 그 한마디'렷다.



그사세에서, 왜저러고 살까, 싶었던 최다니엘은, 암튼 여기서도 뭐 좀 다른 의미로 왜저러고 살까, 싶은 캐릭터이긴 하지만, 꽤 매력있다. 그리고 그의 스타일은, 아하하핫, 그저 감탄을 자아낼 뿐이다.특히나 저 패션에서 매우 깜짝 놀랐다. 연보라색 와이셔츠에 카키색 니트를 매치할 생각을 하다니, 아, 그런데 저걸 저렇게, 소화해내다니. 아, 놀랍다, 놀랍다, 예전에 올드미스다이어리에서 비비드한 지피디의 수트차림을 보던 재미와, 강마에의 고품격 수트차림을 보던 재미와는 또 다른 스타일의 재미랄까.

그 외에도, 잘생기고 멍청한 캐릭터의 아성에 도전하는 (개인적으로는 그 캐릭터의 최고봉은 지금까지는 세친구의 이동건이었다) 정보석의 연기도 재미있고, 얼빵한 황정음도 꽤 매력있다. 나머지 캐릭터들은 아직 신학기에 친구들과 첫인사 나누는 것처럼 어색해서, 좀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아직 시작에 불과하고, 이제 몇백개의 이야기들을 더 만나게 될텐데. 기대되고, 또 기대된다. 가끔씩은 서선생을 비롯한 거침없이 하이킥 식구들이 그리워질테지만. (아. 역시 나는 서선생이 제일 좋았던거야. 제일먼저 생각나다니 ㅜㅜ)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노아 2009-09-2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침 없이 하이킥만큼 좋아질까요? 아직 보지 못했는데 좀 더 쌓이면 모아서 볼까 생각 중이에요. 최다니엘 군은 무척 핸썸하게 나오네요. 저 패션 저도 맘에 들어요. 감히 도전하기 힘든, 사실은 상상하기도 힘든 구성이군요!

웽스북스 2009-09-21 00:23   좋아요 0 | URL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공존해요.

저 패션은 아무나 따라하면 진짜 큰일나죠. 워워. 애들은 가. ㅋㅋㅋ

마냐 2009-09-2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게 읽다가...최군의 패션에서 그만...사고가 정지되고 말았슴다....@.@ 어쩜좋을꼬..

웽스북스 2009-09-26 10:47   좋아요 0 | URL
헉. 여기부터 덧글을 안달았는지 몰랐어요.
최근 완전 근사하죠 근사하죠. 흐흐흐흐

또치 2009-09-2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주말에 하이킥 한꺼번에 몰아서 봤는데 히힛~
최군의 패션은, 일단, 키가 커야 해요, 암~!
나도 순재-자옥 러브라인은 왠지 마음이 찡...하더라구요.
세경이도 너무 이쁘고...
아아, 역시 김병욱 PD는 악마예요. 만드는 거마다 마음을... 으흑.

웽스북스 2009-09-26 10:48   좋아요 0 | URL
또치님. 네덜란드는 어떤가요오오오오~
저는 이번주는 집에가서 하나씩 다운받아서 봤어요.
흐흐. 김병욱은 악마라기보다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게 아닐까요 ㅋㅋ

다락방 2009-09-2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거나 재방송으로 해줄때 몇번 봤는데요, 저는 최다니엘(이름은 지금 웬디양님의 페이퍼 보고 처음 알았음)완전 흥미진진한 캐릭터에요. 간지 작렬에. 흐흣. 그리고 저는 오현경 아들도 완전 쏙 맘에 들어요. 엄마한테 불쌍한 사람을 함부러 대하지 말라고 버럭버럭할때마다 좋구요, 과외선생한테 막 하는 것도 쏙 맘에 들어요. ㅋㅋ


웽스북스 2009-09-26 10:49   좋아요 0 | URL
이번주는 최다니엘이 좀 시시했어요.
오현경 아들은 처음에는 2%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보다보니 괜찮고.

그나저나 다락방님 스타일이 명확하군요 ㅋㅋ

치니 2009-09-2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애는, 소름 끼칠 정도에요. 정말 큰 배우가 되겠지 싶어서 므흣하기도 하고.

으흐흐흐흐, 오늘도 7시40분 본방사수의 기대로 행복합니다. 비록 비 오는 월요일이지만.

웽스북스 2009-09-26 10:50   좋아요 0 | URL
우후훗. 저는 본방사수는 못하지만, 방송일 사수?
이번주는 그날그날 다운받아서 봤지요. ㅋㅋ

비오는 월요일은 어찌 보내셨나요. 아. ㅅㅊㄷ...ㅠㅠ

선익에미 2009-09-21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분간 보는것 포기. 신애랑 세경이가 너무 불쌍하게 나와서. ㅠ.ㅠ
요즘 애들이 불쌍하게 나오는 설정은 어쩐지 아동학대 같아서
슬럼독미려네어도 보다가 포기했다는...

웽스북스 2009-09-26 10:51   좋아요 0 | URL
아. 역시 선익에미의 심정. 알겠는데요.
초반에는 진짜 좀 심하게 불쌍했죠 ㅜㅜ 지금도,
근데 전 오히려 해리가 더 불쌍하더라고요.

지난주에는 애 성격이 저래서 어떻게 사나,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번주에 보니 외로운 아이더라고요.

개인주의 2009-09-25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붕뚫고는 안보지만
신애 얼굴이 어디선가 보이면 좋아요..
봄이..
재방 안하나요..;;

웽스북스 2009-09-26 10:51   좋아요 0 | URL
아...봄이! 스누피님도 좋아하셨군요
지붕뚫고 보세요 사랑스러워요!
 


대학시절 은사님께서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라는 책을 출간하셨다. 졸업하고서 세번째 듣는 출간 소식이다.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라는 제목을 듣고 참 선생님답구나, 생각을 했다. 저 간결하고 딱딱한 제목만 봐도 그간 하고 싶으셨을 이야기들이, 심지어 얼마전 공동 출간하신 한국 기독교의 역사 3권에 미처 담지 못했을 이야기들이 내게 흘러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선생님은 내가 제출한 서평 읽기를 즐거워하셨었는데, 그건 내가 글을 잘 써서라기보다는, 다른 친구들이랑은 좀 다르게 솔직하고 웃기게 (-_-) 썼기 때문일 거다. 그 속에서 내가 엿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내가 쓴 서평들은 지금 내가 봐도 좀 귀엽다. 하하하. -_-) 마찬가지로 나도 선생님이 낸 책의 서문 읽기를 좋아한다. 단정하게 고른 단어와 문장들 하나하나에서 역시나 선생님의 고민과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선생님 말처럼, 의미 있는 학술지들을 출판사가 손해를 무릅쓰고 내주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저자들이 그 출판사에 보내는 감사와 다른 의미의 감사를 보내야 할 것만 같다. 어쨌든 그런 고마운 마음들이 있기에, 우리도 이런 저서들을 만나볼 수 있는 거겠지. 그러니, 더 똑똑해지고, 더 많이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해서, 좋은 것들을 알아볼 줄 아는 눈을 기르고, 기꺼이 가치를 지불하는 것은 또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다. 이 기회에 나도 선생님과는 다른 이유로 <푸른 역사>에 감사를.

학교에 남아 TA를 하고 있는 후배가, 선생님 방에 여전히 내 사진이 붙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졸업한지 6년, 여전히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던 그 곳에서, 그 사진을 찍었던 계절도 딱 이 계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던 가을날의 깊숙한 그 어딘가에서 활짝 웃으며 찍었던 그 사진이 나는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나는 올해 휴가도 못내는데, 진작 좀 다녀올걸 하는 후회와 함께, 더 늦기 전에 한 번 다녀오겠다, 라는 실현 가능성 없는 다짐도 불끈. 해본다.



책을 내면서      

학교의 요청으로 지난 해 연구실적을 정부통합전산망에 입력하면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0년 동안 국내외 전문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20편이 훨씬 넘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 년에 두 편 이상을 쓴 셈이니 편수로만 본다면 공부를 게을리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 논문 하나를 제대로 쓰려면 일 년에 한 편 내기도 힘들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그 글들이 얼마나 잘 된 것인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전 대통령의 비상한 죽음이 내 삶의 무게가 너무 가볍고 내가 하며 사는 일이 너무 사소하다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학자의 무게를 논문 편수로 재는 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애써온 모습이 처량했기 때문인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 동안 발표한 논문 목록을 훑어보면서, 내 관심이 대체로 기독교의 여러 현상을 “종교외적”인 요인, 특히 정치나 이데올로기와 연관시켜 조명하는 데 있었음을 발견했다. 이번에 책으로 묶어서 내는 글들도 모두 그런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신학교를 다녔고 한 때 구약학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왜 기독교의 역사적 현상들을 “종교적”인 차원보다는 종교외적 맥락에서 바라보게 되었는지, 먼저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 현상 속에 종교적 차원과 종교외적 차원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종교를 신화나 의례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종교학 이론에 단 한 번도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마르크스(Karl Marx)나 트뢸치(Ernst Troeltsch)가 종교 현상의 본질을 훨씬 깊게 통찰했다고 믿는다. 종교의 진면목은 신화나 의례, 혹은 상징을 분석하기보다는 정치-경제-사회와 만나는 지점을 관찰하면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부터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순결하게 고유한 종교의 영역이 있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만 하더라도, 공교회의 역사는 곧 정치화 한 종교 혹은 종교화 한 정치의 역사였다. 개항기에 서구문명의 전도사로 들어와서 해방 후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선에 서게 된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가장 종교적으로 보이는 현상도 정치-사회적 차원을 가지며, 종교적 신념과 이데올로기적 신념은 놀라우리만치 친밀도가 높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그런 점을 璿擅막졍?시도였다. (응? 아니 왜 이런 오타가 ㄷㄷ) 

여기 실린 10편의 글 가운데 제2부에 있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관련 글 두 편은  각각 남북 학술대회와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던 글이다. 그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한국기독교의 역사》, 《종교문화비평》, 《경제와 사회》 등에 게재했던 논문이다. 책으로 묶기 위해 다시 읽으면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내용은 둘째 치고 문장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논문의 내용에 앞서 문장에 집착하는 버릇은 아마도 학부시절 문학을 전공한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 소설이건 논문이건 글로 된 것의 제일가는 미덕은 좋은 문장에 있다고 믿는다. 이전에 여러 차례 읽고 고친 글인데도 다시 읽어보면 적절하지 않은 단어, 매끄럽지 않은 문맥, 분명하지 않은 표현, 그리고 심지어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도 여전히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을 손보면서, 제 나라 말로 글 한 편 쓰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우며, 나는 언제가 되어야 글다운 글 한 편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글과 내 생각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아득하다. 

종교와 정치의 경계가 모호하다면, 역사와 문학의 관계는 더 말 할 필요도 없다. 헤로도토스(Herodotus)부터 기번(Edward Gibbon)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역사학은 본질적으로 문학적 추구였다. 랑케(Leopold von Ranke)이후 역사를 “과학”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한동안 경주되었지만 문학과 결별한 역사는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지만 역사는 문학과 동일하지도 않다. 텍스트 바깥의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는 최근 문학이론은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려 결국 역사적 탐구를 무의미하게 만들 기세로 역사학의 정체성을 위협했다. 20세기 후반의 세계사적 격변은 보수적인 학문에 속하는 역사학마저 세포분열 시켰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톰슨(E. P. Thompson), 아날의 브로델(Fernand Braudel), 빌레펠트의 벨러(Hans-Ulrich Wehler) 사이의 거리는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역사가라는 범주에 묶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어떤 것도 역사의 일부로 다루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역사 서술도 선입관, 소속감, 공명심 같은 무형의 영향력, 돈과 권력이라는 유형의 압력,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참된 역사는 결코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모름지기 모든 학문의 본질은 일반화에 있다고 본다. 독특하고 일회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 무슨 큰 가치가 있겠는가? 법칙을 좋아하는 소위 과학이라는 것과 친밀도가 높은 학문일수록 일반화 하려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다. 그러나 지나친 일반화는 좋지 않은 학문으로 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반화라는 것은 학자에게 마치 밥과 같아서,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고, 너무 많이 먹으면 병들게 되는 어떤 것이다. 나는 논문을 쓸 때마다 일반화 시키려는 직업의식과 지나친 일반화는 피해야 한다는 양식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곤 한다. 

여기 소개된 10편의 논문은 사료가 허락하는 한계 속에서 내 이성과 상상이 구축한 세계다. 그 글들이 다루는 주제들의 객관적 실체가 바로 그 글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이 적어도 허구는 아니며, 각 주제에 관한 개연성 있는 해석을 보여주고, 같이 모여서 한국 개신교 역사의 잘 보이지 않는 단면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10편 모두 복잡한 현상을 일반화시킨 것이겠지만, 기왕이면 지나치지 않고 통찰력을 제공하는 일반화이기를 바란다. 

이 책을 낼 욕심이 났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최기영 선생이었다. 그에게 출판사 소개를 부탁한 것은 그가 그쪽 사람들을 많이 알기도 하지만, 보기보다 마음 약한 분이라 후배의 소망을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주려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내기 위해 마치 중매쟁이와 같은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그에게 큰 마음의 빚을 졌다. 아울러, 그의 감언이설에 속아 이름값 없는 시골 서생의 책을 출간해준 푸른역사의 박혜숙 사장과 신통찮은 원고를 좋은 책으로 만드느라 수고한 출판사의 여러분들께도 미안하고 감사하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 실린 논문을 쓰도록 혹은 부탁하고, 혹은 강권하고, 혹은 돈으로 유혹한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그분들께도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감사를 드린다. 내가 공부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아내다. 논문 한 편 쓸 때마다 부실한 몸이 더 수척해지는 모습을 매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아내가 반가워할지 모르지만, 이것밖에 드릴 것이 없다.  

공들여 쓴 학자의 책이 팔리지 않아 출판사가 의무감으로 책을 내주어야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류가 책이라는 것을 발명한 이래로 그렇지 않았던 시대가 과연 있었는지 모르겠다. 대중이 외면하는 연구서를 뜻있는 출판사가 손해를 감수하고 출간해주는 것은 대중의 구미에 맞고 유행을 따르는 글보다 좋은 학술서가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훨씬 더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책 속의 글 한 편이라도 꼼꼼히 읽어주는 독자라면 시류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의 무게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이 책 속에서 한국 개신교에 대해 흔히 얻기 어려운 관점과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학자로서 그것 이상 가는 보람이 어디 있을까. 

좋은 논문을 쓴다는 것이 갈수록 힘에 부치고 어렵다. 쓰면 쓸수록 글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한계만 깨닫게 되니, 학문의 참된 의미는 자기수련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술적인 글과 대중적인 글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아마도 거기에 있지 않은가 싶다. 고인이 된 박재삼 시인이 오래 전에 낸 시집 후기에, “시집을 낼 때마다 새로운 각오가 생긴다고 하건만, 나의 경우는 그것도 빈약하고, 또 다른 길로 떠날 차비를 하는 것이 고작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꼭 그 꼴이다. 

 

2009년 여름, 한반도의 남동쪽 끝자락에서 류대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비 (파울라 헤르난데스)

갑자기 빗속으로 뛰어든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 우연한 교감. 

사실 내 이야기를 하기 가장 편안한 상대는 매우 오랜시간 동고동락해온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지속되는 빗소리에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은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인가보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던 마음들이 슬며시 흘러나오며 그렇게 소통해 나가는 영화. 

전주에 가면서 유일하게 골라갔던 영화다. 하하. 뭐, 순전히 제목때문이었고,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단 빗소리는 정말 실컷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테라마드레 (에르마노올미)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감독도 배우(?)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이 필요 없다, 라는 말을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일까.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삶이 어떻냐고, 훨씬 가치 있어보이지 않느냐고 영화는 관객들에게 묻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잘 말하는 법을 아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라마드레는 전세계적인 슬로우푸드 운동을 일컫는 단어이다. 영화를 함께 본 블리언니는 우리가 생명을 경시하는 이유가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살리는 일에 귀한 노력과 마음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언니의 생각에 정말 공감한다. 

영화 중간에 철저하게 가난과 무소유를 몸으로 살다 간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그 사람의 삶을 보며 권정생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권정생 선생님 2주기네) 혼자서 그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혼자만의 삶으로는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를 포함한) 그냥 거기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이후의 사람들에게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되어버린 사람들. 당장 무엇을 바꿔내지 못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명확한 기준이 되어 일침을 가하는 듯하다. 


 


* 요시노 이발관 (오기가미나오코)

오기가미나오코 감독의 데뷔작. 정말 대단하잖아. 데뷔 때부터 이런 똑똑한 영화를 만들었다니. 

요시노이발관은 가장 멍청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가장 똑똑하게, 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쉽지만 제법 진지하게 하고 있는 영화이다. 왜 아이들은 모두 바가지머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왜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할렐루야'를 불러야 하는지,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에는 이상한 것들 투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전학생들을 낯설어하지 말고, 그들이 우리의 삶에 던지는 물음들을 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의 관념,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삶 속의 작은 습관들까지도. 

2003년 제작되어 국내에는 2006년 전주에서 상영되었는데 다시 보고 싶은 과거 영화제 영화로 선정되어 올해, 다시 전주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절대 '서울로 안올라올 것 같은 영화'들만 보자고 했는데, 이건 데뷔작이어서 안올라올 줄 알았는데 6월 18일, 서울에서도 이 영화를 만날 수 있게 됐다. 우리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참 기쁘다. 이런 재밌는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흐흣.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매지 2009-05-17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시노 이발관 정말 느무느무 기대중. ㅎㅎㅎ
<비>도 괜찮을 것 같아요~~

웽스북스 2009-05-18 00:44   좋아요 0 | URL
흐흐 네네 전주에서 만난 세 영화 모두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