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의 시를 계속 읽고 있다.
죽을 것 같은 무료함에 살고 있는 겨울, 아니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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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가을의 빛 _허수경
개들은 불안한 고독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쫓아다녔다
저수지에 고인 물의 살 속으로 깊이 침입하던 바람은
수초를 기슭으로 자꾸 보냈고
하여 저수지 기슭에는 붉은 물풀들이 행려거지처럼 누워 있었다
고추가 마르던 집 앞에서 빛은 고독한 매운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가지가 마르던 마당에 보랏빛으로 고여들던 어둠은
할머니가 피우는 담배 연기 속으로 들어가 해맑은 죽음의 빛으로 살아났다
병아리가 종종거리는
맨드라미가 붉은 손을 자꾸 흔드는
그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김칫거리를 다듬던 새댁의 눈 안에 고인 눈물 빛
벙어리 소녀는 낡은 거울 앞에서
낡은 결혼예복을 입어보았다
결혼예복 속에는 원앙 두 마리가 낡은 금빛 자수에 안겨 있었다
날아가는 빛을 보면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소녀가 수음을 했다
우물에 기대어 먼 빛만 바라보았다
묵직한 우울함이 우물에 가라앉은 빛이 될 때
먼 산 숲에 핀 버섯이 가만가만 공기 속으로 돋아났고
흙은 아렸다
얼마나 무료한 나날들이 빛 속에 있는가
그날 죽을 것 같은 무료함이 우리를 살게 했지, 아주 어린 짐승의 눈빛 같은 나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