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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책 앞에서 가장 솔직해진다 - 제인 오스틴부터 프로이트까지 책으로 위로받는 사람들
안드레아 게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책 읽는 사람 syo의 솔직한 탄생 설화
syo는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수능 본 지 한 달이 더 지났지만 syo가 갈 곳은 학교가 아니라 학원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사가 죄 의미 없었다. 수능 다음 날부터 수능 공부를 시작했더니 어느덧 <수학의 정석 실력편> 안에 못 푸는 문제가 없어진 시점이기도 했다. 뭔가 사건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일탈! 일탈이다! 하지만 일탈이란? 그건 뭐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 다시 말해, 내가 이제부터 그걸 할 거라고 공지하면 온누리가 “와, 네가 그걸 한다고? syo 네가 그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다른 무엇도 아닌 그것을?” 이라며 화들짝 놀랄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정석을 탁 덮고 syo는 곰곰 생각했다. 기왕이면 공부에 엄청 방해되는 걸 하는 게 좋겠어. 뭐가 있을까. 게임? 질렸어. 만화? 질렸어. 술? 맛없어. 담배? 맛없어. 운동? 와, 생각만 해도 입에서 쇠맛 난다. 연애? 맛없……나?
연애는 도대체 무슨 맛일까?
호밀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는 연애는 잘 모르겠고, 섹스는 해봤거든? 좌중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 syo : 뭐 이 새끼야? 니가 뭘 해봤다고?
- 三 : 지금 니 입에서 나온 그 ㅅ…… ㅅ 그거 우리가 아는 그 ㅅ…… ㅅ 그거 맞냐?
- 박곰돌 : 취소해. 취소하라고! 내 나이 스물하나, 나도 아직 못 해봤는데……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해 임마, 제발…….
- 호밀 : 음, 왜 재작년까지 우리 윗집에 XX여고 다니는 누나 혼자 살았잖아. 가족들 다 이사 가고.
- 좌중 : 그래, 그 누나! 돈가스 잘 튀겨주는 그 누나!
- 호밀 : 그 누나가 충남댄가 충북댄가 거기 갔댔잖아.
- 좌중 : 그래, 그 누나! 충남댄가 충북댄가 거기 간 그 누나!
- 호밀 : 그때, 대학 붙어서 충청도로 간다면서 그 누나가, 우리 집에 와서 마지막 돈가스 튀겨줬거든? 근데, 그때…….
- 좌중 : 근데! 근데, 그때! 근데, 그때?
- 호밀 : (말없이 얼굴을 붉히더니 엄지 손가락을 세운다.)
- 좌중 : (말없이 얼굴을 붉히더니 일어나서 호밀을 밟는다.)
- 호밀 : (실컷 밟혔으나 하나도 아파 보이지 않는다. 계속 웃는다.) 하여튼, 나는 그래서 연애는 잘 모르겠다 무슨 맛인지. 내가 아는 맛은 ㅅ……
- 좌중 : (지극히 분개하며 다시 일어나서 호밀을 밟는다.) 야, 터뜨려! 터뜨려 버려! 어차피 이 새끼는 맛을 봤다니까 미련이 없겠지. 이 배신자 놈아, 플리즈 고 투 헬…….
syo에게는 돈가스 잘 튀겨주는 윗집 누나 같은 게 없었고, 호밀의 말에 따르면 그런 누나가 있어도 연애의 맛을 알 수 있는 건 또 아닌 듯했다. 그러나 때마침 박곰돌 또한 연애중이었다.
- 호밀 : 아 근데, 형은 랭이누나도 있으면서 왜 아직 못해봤냐 ㅅ…….
- 三 : 와, 둘이 있겠다고 날 그렇게 집에서 내쫓드만. 내실 없다 내실 없어 우리 형.
- 박곰돌 : 야 씨, 아픈 데 찌르지 마라…….
- syo : 그러니까, 연애의 맛이 어떤 맛이냐고. 그건 말해줄 수 있을 거 아니냐.
- 박곰돌 : 그건 말해줄 수 없다.
- syo : 밟아라. (좌중 일어선다. 호밀의 눈에는 복수의 핏발이 섰다.)
- 박곰돌 : (손사래를 치며) 아니아니. 말을 안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말로 못 하는 거라니까? 해 봐야 알지 그게 말로 되는 게 아니라고.
- syo : 형은 랭이누나 어떻게 만난 건데?
- 박곰돌 : 나야 대학 가서 만난 거지. 그러니까……(사랑에 빠진 과정과 서투른 고백과 얼떨결에 사귀게 된 정황들을 신나서 이야기해주었는데 재미가 없었고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연애의 맛이란 대학생이 되어 줘야 알 수 있는 듯한데, syo는 대학생이 아니었고 비참하게도 다음 해 역시 대학생이 아닐 예정이었다. 방법이 없는 것일까? 연애, 너란 대체 무엇이건대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하느뇨…… 하던 찰나 三이 입을 열었다.
- 三 : 내가 형한테 쫓겨나서 갈 데가 없어 가지고 도서관 가잖아. 거기 가면, 책 많다? 연애 책.
- syo : 진짜?
- 三 : 어, 특히 일본 소설들. 걔넨 겁나 연애만 해!
- syo : 혼또니?
- 三 : 아, 스고이데스…….
우리는 크게 혹은 작게 망할 때면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연애를 글로 배워서……. 그건 망할지언정 연애를 글로 배울 수는 있다는 말이렸다. 그래서 윗집 누나도 없고 대학생도 아닌 syo는 정석을 책상 서랍 속 깊은 곳에 봉인하고 三과 함께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한다. 특히 일본 소설 서가를 닳도록 드나드는데……. 오늘날 알라딘에서 철학 개론서에 미친 자로 활동하는 syo의 본령은 바로 일본 연애소설이었다는 사실.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 요시다 슈이치,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독서의 기원이 불온합니까? 사실, 하기 전이건 하는 중이건 혹은 하고 난 후이건, 연애는 독서의 시발점으로 너무도 절실하고 효과적입니다.
그렇다면 독서의 쾌락적 요소가 독서의 진짜 핵심이자 원동력이 아닐까? 신경생물학자 게랄트 휘터는 기쁘게 배운 것(읽은 것)만이 정말로 주입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휘터는 베를린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중국 여자를 사랑하게 된 80세의 남자는 비교적 쉽게 중국어 기본 단어들을 배운다고 발표했다. "감탄은 쉽게 말해서 뇌에 거름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기억하려면 언제나 감탄이 필요하다.“ (155)
책 읽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는 이유
진정 연애를 글로 배울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소설로 배우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특히 무라카미 류가 그랬다. 이젠 이 바닥을 떠나야 할 땐가 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대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독서의 물길이 나쓰메 소세키에 1차 종착점을 찍고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는 중이었으므로, 책은 연애의 지침으로써 효능을 잃었다.
그럼에도 책이 연애에 하등 쓸모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책을 ‘읽는’ 공대남이라는 특성(‘많이 읽는’ 아니고 그냥 ‘읽는’입니다)은 적용 범위가 마이너하긴 하지만 일단 먹히는 사람에겐 치명적인 매력 포인트였음이 밝혀졌고, 대충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쯤은 그런 남자에 취향이 있는 듯했다. 5:5 미팅을 나갔고, 당연하게도 다섯 명 중 한 명이 걸려들었다. 와, 이건 싸이언스야. syo는 생각했다. 그때는 브라이언 그린과 리처드 파인만을 읽는 시기였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저는 책을 읽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보다는 높은 기본점수를 깔고 시작한다. 그 이유가 오래 궁금했다. 책 읽는 사람들은 책 읽는 사람을 아낀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은 자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말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같은 책을 읽고 같은 대목에 밑줄을 그은 사람은 사랑할 수조차 있다. 그것은 일종의 동류의식일까?
책을 많이 읽지 못한다는 말을 부끄러이 하는 사람들 역시 책 읽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호감을 장착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읽지 않은 책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에 대해 책 많이 읽는 이가 좋은 평을 하면 신나 한다. 다음에 읽을 좋은 책을 소개받으면 ‘저 말씀하신 책 지금 바로 사려구요,’ 하면서 즉시 주문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사람의 감정이나 지갑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어지간한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책 많이 읽는 이들이 지닌 아우라가 일종의 수동적 호감으로 작용하는 걸까?
반면에 이런 사건도 있다. 우리는 책을 많이 읽은 이에게 어느 정도의 도덕성, 편협하지 않은 마음,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을 기대한다. 책이 그저 지식의 뭉텅이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의지를 가지고 읽든 그렇지 않든, 읽다 보면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책의 효용을 어느 정도씩은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면 훨씬 더 큰 폭으로 실망하게 되기도 한다.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에, 역시 책 많이 읽는다고 다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씁쓸한 마음이 묻어나기도 한다. 그런 판단 자체가 나의 오만이거나 내 좁은 소견으로 인한 오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마음이 낙차를 실감하는 것이다.
책 읽는 사람에 대한 이런저런 호감과 기대감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솔직함일지도
무슈크의 친구가 홍콩에서 중국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의사는 친구의 병에 관해 묻지 않고 대신 직업, 이루지 못한 옛사랑, 습관 등을 물었다. 그리고 끝으로 친구에게 차를 한 잔 주고 조용히 창밖을 내다봤다. 친구가 진료는 언제 할 거냐고 묻자 의사는 찻잔을 넌지시 가리키며 아까부터 진료 중이었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겸허히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 걸음걸이를 살피고 앉은 자세, 동작, 눈, 손톱을 관찰했노라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친구의 등 두 곳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물었습니다. 여기와 여기가 아프지 않나요?" (30)
이 책의 원제는 독일어 ”Lesen als Medizin“다. 모르긴 몰라도 ‘치유로서의 읽기’, ‘나으려면 읽어요’ 뭐 이런 느낌인 듯하다. 한국어 제목인 ”우리는 책 앞에서 가장 솔직해진다“는 원제로부터 멀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정도의 거리감이 있음에도 확실히 매혹적이다. 책을 읽는 내내 솔직함에 대해 생각하게 할 만큼 막강하다.
위에 늘어놓은 다양하고도 비슷한 질문들을 관통하는 원리가 어쩌면 이 한국어 제목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맞다. 나는 책 앞에서 늘 솔직해진다. 솔직한 나는 아무런 가식도 없이 오직 나로서 책과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다.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말이 아니라,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내 안에 들어 있는 선입견, 온갖 잡스러운 감정, 이상적 자아상, 가끔은 나조차 이해할 수가 없는 주관적인 호오의 기준 같은 것들을 오롯이 품고 책과 맞부딪힌다는 뜻 이다. 그렇게 어떤 책은 삼키고 어떤 책은 뱉는다. 그렇게 독서를 마치면 다시 또 어떤 내가 되어 있다. 이것은 내가 책을 솔직하게 대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르고 읽은 책은 피부가 아니라 그런 외피들에 붙는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벗어던지고 거울을 보면, 그 안에는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얼굴의 내가 들어있다. 그렇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책으로 자기를 빚어 여기에 왔다면 그는 최소한 책 앞에서만큼은 충분히 솔직한 사람인 셈이다. 책 앞에서 나를 나로서 있게 하는 사람들. 우리는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이 그런 이들이기를 알게 모르게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앞에 앉은 독서가들이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운 대로, 실망스러우면 실망스러운 대로, 그것이 그들이 가진 그들로서의 모습임을 더 선명하게 직감하게 된다.
솔직함, 그리고 솔직함을 향한 기대. 읽는 사람이 겪고 겪어내야 할 이런 감정들은 어쩌면 치유로서의 읽기에도 전제조건은 아닐까. 중국 의사가 등을 눌러 아픈 곳을 짚어낼 수 있도록, 우리는 더함도 뺌도 없는 우리로서 책 앞에(그리고 가끔은 사람 앞에도) 나서야 한다.
하여 결국 우리는
어떤 책은 사람을 다정하게 만든다. 또 어떤 책은 사람을 선명하게 만든다. 또 어떤 책은…… 이 모든 게 책이 혼자 하는 일이라면 책만큼 위대한 것이 없었을 텐데. 그러나 책은 사실 우리 앞에서 우리를 솔직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솔직하게 다정해지고 선명해지고 그런다. 같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책도 우리도 완벽하게 위대하지 않다.
뻔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에겐 항상 울림을 주는 두 개의 구절로 마무리하자.
제인 데이비스가 내게 설명한 것처럼 문학에는 실질적인 효용이 있다. 모든 사람이 책을 읽는다면 세계가 더 나은 곳이 되리라고, 그녀는 확고하게 믿는다. 책을 읽는 사람은 상호 간에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배우고 더 공감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92)
그러나 문학의 세계는 작가의 창의성과 상상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다음 단계로서 독자의 내면에서 재생될 때 마침내 완성된다. "잘 읽으려면 잘 지어낼 줄 알아야 한다."라고 미국 철학자 랄프 월도 에머슨이 말한다. 그러므로 작가와 독자 모두 창의적이어야 한다. 작가는 허구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독자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러니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거나 더 생생하게 재생하기 위해.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