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을 때리는 마음이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올해는 참 많은 일이 있었(그래서 예년보다 적게 읽었)고, 내년에는 많은 일을 해야 하(그래서 내년에는 더 적게 읽어야 하)기 때문이겠습니다.
맨날 우려먹는 이야기들이라 또 하기가 뭣합니다만,
일단 취업을 했습니다. 공무원이란 것은 인생관에 따라서 누구는 굉장히 박하게, 또 누구는 굉장히 후하게 쳐주는 직업이지요. 최고 말단 그지 호봉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출퇴근과 따박따박 꽂히는 월급은 평생 처음 겪는 사건이네요. 지금 겪고 있는 것은 아니고, 새해 벽두부터 벌어질 일들입니다.
엄마가 방광암에 걸렸습니다. 검사해보니 신장에도 문제가 있어서 방광암 수술과 동시에 신장 한쪽을 절제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기간이 있었고, 집에 돌아와 지낸 지도 두 달이 넘었군요. 신장이 하나뿐인데 암 수술로 인한 충격 때문에 걔도 제 기능을 못 한다고 해서 투석을 받으러 다니는 중입니다. 내년부터는 재발 방지를 위한 항암 요법도 들어갈 모양이네요.
10년의 백수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10년의 긴 연애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하나는 한 거고 하나는 된 거네요. 그렇게 했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할 일은 하고 될 일은 되도록 두는 거죠. 도리 없는 인생입니다. 생각만큼 쓰라리지 않았고, 저는 생각보다 잘 삽니다. 만약에 이 사람하고 헤어지면 결혼 같은 거 안 하고 띵까띵까 내 맘대로 살 거지롱- 했던 술자리의 반진담-반농담이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돌아왔습니다. 안온하게, 내 한 몸만 잘 건사하면서, 욕심내지 말고 딱 120살만 찍고 갈까 싶습니다. 복상사는 오랜 꿈이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꿈은 꿈이겠지요.
거주지를 옮깁니다. 일터는 서울 강동구의 어디겠지만 가난한 청년들이 아무리 대출을 껴도 서울에서 방 하나 구하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성남시의 어느 산간지방(?)에 방 두 칸 작은 전세를 얻었습니다. 아직 입주 전이고, 은행에서 변덕 부리면 싹 나가리 되는 거니까 아직 확실하게 ‘얻었습니다’라고 할 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대충 잘 될 거라 예상 중입니다만. 어쨌든 제가 한 건 없고, 같이 살 친구가 은행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죠. 2020에는 아무래도 정황상 많이 읽기는 어렵고 대신 많이 부대끼며 살 것 같으니까, <남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느낌의 잡글이 심심찮게 올라오는 syo의 서재가 되지 않을까요.
더덕단이라는 재미난 모임이 발족했습니다. ㄷㄷㄷ 혹은 DDD라고도 부릅니다. the德, more德 이런 거 아니고 그냥 더덕입니다. 네. 먹는 거요.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본질은 ‘여성주의 독서모임’인데 대체로 ‘의식의 흐름 잡담모임’ 같은 유쾌한 느낌입니다. ‘월남에서 돌아온 복상사실주의자’라는 알 수 없는 깃발 제작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현란한 대화의 꽃들이 피었을까요. 말의 물길이 어디서 솟아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어서 즐겁습니다.
이제 책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북플이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올해는 이렇습니다.
01월 : 42권
02월 : 35권
03월 : 20권
04월 : 24권
05월 : 40권
06월 : 35권
07월 : 38권
08월 : 27권
09월 : 37권
10월 : 53권
11월 : 33권
12월 : 2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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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 4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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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500권
2017 : 689권
매년 꾸준히 영락하고 있군요. 이런 추세는 내년에도 계속되겠지요. 그래도 하루에 한 권은 더 읽었으니, 일단은 칭찬을 해 주고 다음 해로 넘어가겠습니다. 참 잘했어요, syo군.
올해의 소설가 : 옌롄커
전작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러려고 마음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syo는 올해 옌롄커를 맨 앞줄에 놓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남의 나라 이야기 같기만 하다 싶으면 별 매력 없는 작가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그 와중에 할 거 다 하는 우리 인간들 눈물나게 멋지다 파이팅’ 이런 느낌으로 읽었드랬습니다.
올해의 철학자 : 헤겔
올해는 어떻게 한번 자빠뜨려보자고 덤벼들었으나 역시 실패했네요. 이렇게 덤볐다가 지고 덤볐다가 지고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게 syo의 스타일입니다. 마르크스도 프로이트도 그런 식으로 겨우 입문적 지식을 획득했지요. 지금은 또 들뢰즈에 꽂혀서 스피노자를 뒤적거리고 있지만, 헤겔의 이름은 피해갈 수 없으니까요. 내년 여름쯤 다시 또 헤겔 책들을 긁어모으지 않을까 합니다.
그 외에 올해 인상깊게 읽었던 책들은 대충 이렇습니다.
< 에세이 >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 김소연
소로의 일기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아무튼, 술 / 김혼비
희망 대신 욕망 / 김원영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 위근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 황선우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 악셀 린덴
< 소설 >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낭만주의 / 박형서
어제는 봄 / 최은미
나의 사랑 매기 / 김금희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 박상영
< 외국 소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옌롄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연을 쫓는 아이 / 할레드 호세이니
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전락 / 알베르 카뮈
키 재기 외 / 히구치 이치요
프랑스어의 실종 / 아시아 제바르
< 과학 수학 공학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카를로 로벨리
어느 칠레 선생님의 물리학 산책 / 안드레스 곰베로프
이토록 쉬운 통계 & R / 임경덕
모스에서 잡스까지 / 신동흔
< 인문학?? 에세이?? >
마취의 시대 / 로랑 드 쉬테르
권력 / 스기타 아쓰시
소설처럼 / 다니엘 페낙
진심의 공간 / 김현진
< 시 >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 오규원
저녁의 연인들 / 황학주
Lo-fi / 강성은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 홍일표
< 철학 >
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 서한겸
왜 칸트인가 / 김상환
슬픈 열대를 읽다 / 양자오
중국사상사 / 모리 미키사부로
무신론자와 교수 / 데니스 C. 라스무센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 브누아 페터스
제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syo가 스스로 나는 알라디너야, 하고 다니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활동하기 시작한 게 2017년 5월이었으니, 2년 반을 좀 넘긴 셈이네요. 20년쯤 찌끄리고 다닌 것 같은데 또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네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서재이웃님들 좋은 글 잔뜩 읽으며 늘 즐거운 알라딘 생활입니다. 시간을 돈이랑 바꿔먹어야 하는 내년에는 더욱 이 공간이 소중해지겠군요. 많이 벌고 적게 쓰는 것도 좋지만, 적게 읽고 많이 쓰는 syo가 되고 싶면 더 좋겠네요.
힘든 일 있을 때마다 많은 분들이 진심 어린 댓글로 위로하고 북돋아 주셨어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올 한해도 역시 참 감사했습니다. 2020년 새해에도 웃으며 읽고 쓰자구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