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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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요일(3일) 늦은 밤에 성남집에 처음 입성했는데 그땐 아직 인터넷 설비가 갖춰지지 않았었다. 냉장고도 없고 세탁기도 없는 우리 집엔 인터넷도 되지 않는 노트북 두 대를 품에 안은 남자 둘만 있었다. 사야 할 가전과 가구의 목록을 만들면서 치킨을 뜯었다. 방은 벌판처럼 허허롭고 말을 하면 텅텅 울렸다. 심지어 syo에겐 이불만 있지 베개니 자리니 하등 없어서 그날 밤의 안위조차 확보되지 않았다. 참 암담하다, 말이 절로 나왔다. 암담하다아다아다아다아- 까지는 솔직히 오버지만 다아아아- 정도로는 확실히 울렸다…….
짐 정리하고 주변 탐방하고 간단한 물품 몇 개 구매했더니 주말이 깨끗하게 날아갔고, 월요일(6일)은 연수원에 다녀왔다가 318명 연수참가자 가운데 syo의 헤어가 일등 노답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급하게 옆머리를 눌렀다. 인도사람이 만들고 서빙하는 카레 가게에서 행복한 시간도 보냈다. 그러고는 비 오는 등산길을 밟아 집으로 돌아왔더니 이미 늦은 밤. 허허허.
화요일(7일)부터 서천에 있는 연수원에서 컵도 쌓고 도미노도 쌓고 춤도 추고 합창도 하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 오면 비에 젖어 그냥 막 정신없이 으아아아아 하다가 어떻게 겨우 정신줄을 잡아보니 금요일(10일)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털코트를 이불처럼 덮고 뻗어 있는 syo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스토리…….
그리고 토요일인 어제는 재활. 이제 겨우 사람다운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싶었더니 제길, 창밖에 휴일의 꼬랑지가 내리는 어둠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뭐 이런 식으로 1월의 거의 절반을 뭐 달리 읽은 것도 없이 소진하였습니다. 으하하하하.
2
오늘 냉장고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240L짜리 작은 걸 사려고 했는데, 하이마트에서 실물을 접하고 마음이 바뀌어 418L짜리를 입양했다. 얘는 적어도 두 번은 더 같이 이사를 다닐 녀석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래서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데, 남자 둘이 사는 경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첫 번째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났다. 바로 다수결이 안 된다는 것. 거실 벽에 붙여놓은 접착식 화이트보드에, 지금 이런 글이 적혀 있다.
< 냉장고 이름 투표 >
1. 하이드레이트일렉트릭울트라파워쿨링프레셔브라보롱리브더킹 : 一
2. 냉장이 : 一
그야말로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syo와 三 양쪽 모두 양보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하이드레…… 뭐? 부를 수나 있냐? 왜 못 부르냐. 줄여서 부르면 되지. 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깔끔하게 냉장이로 줄이자고. 야. 누가 너 인간이라고 인간이- 인간아- 이렇게 부르면 좋냐고. 냉장고는 인권도 없냐.
잠깐의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한발씩 물러나 418L니까 성 떼고 18이로 확정 타결.
반갑다, 18아. 잘 지내보자. 뽀득뽀득 아껴줄게.
3
180x80의 긴 탁자를 주문해 조립했는데, 이놈의 다리 나사 구멍이 불량인지 아무리 정성껏 맞춰봐도 흐느적거리기만 한다. 강철로 된 오징어다리라는 느낌인데, 이것도 뭐 신박해서 나쁘지 않지만 키보드를 세게 치면 모니터가 좌우로 움직이면서 멀미를 유발한다. 저는 지금 구토를 이겨가며 이렇게 알라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전동드릴과 경첩을 사서 다리와 상판 프레임을 고정시킬 생각이다.
4
어쨌든 오늘은 여유가 나서 가장 가까운 시립 도서관에 다녀왔다. 성남수정도서관. 오르막 코스라서 그렇지 어쨌든 도보로 20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는 건, 대구에 살 때보다 훨씬 나은 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때마침 1, 2월에는 방학 기간이라는 명목으로 10권까지 대출이 된다고 해서, 이래저래 골라 담아봤더니 금세 대출한도. 어르신복지과에 발령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관련 도서, 그리고 보고서 쓰는 법을 알려주는 책, 공무원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알려주겠다는 책, 커피 책, 뭐 이런 실용적인 책들 위주로 골라 보았다. 철학책과 문학책을 한 권도 꺼내지 않고 10권을 만든 건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군.
5
이게 분명히 오만과 편견인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은근히 이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매달 페이퍼 당선작 하나 정도는 되지 않을까? 리뷰는 원체 쓰지 않으니 언감생심이지만, 에이, 그래도 페이퍼잖아. 매달 2만 원 정도의 적립금은 어떻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헤헤헤…….
그러나 11월, 12월 연속으로 페이퍼고 리뷰고 뭐 하나 당선되지 못하면서, 아, 이제 오만과 자만의 시대도 막을 내렸구나, 하는 좌절감에 빠졌다. 매달 4만 원씩 꼬박꼬박 챙기던 황금기도 있었는데, 요즘은 다들 너무 잘 쓰시니까. 좋아요 70개를 받아도 어림없다니, 허허허. syo 같은 건 이제 열심히 노인복지론이나 공부해야지. 초과 근무 두 시간 더 찍으면 2만 원 금방이야. 힘내자!
근데 이 와중에 마늘 바게트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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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뭐가 뜻대로 잘 안 되는군요. 얼른 회복해야 할 텐데요.
--- 읽은 ---
004.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 209 ~ 326
: 닿지 않음과 닿을 수 없음과 어긋남은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그러나 다르다. 우리는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 놓은 것인지, 놓친 것인지, 애당초 손에 쥔 적이 없었던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의 도움을 받아 뒤늦게 알게 되더라도, 되돌릴 수 없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마주하게 되더라도, 조심스럽게 만져야만 하는 마음이 있다. 손 닿지 않는 곳에 영영 두고 온 마음들. 영원히 돌아오지 않지만 끝없이 돌아오는 마음들. 그런 마음들을 똑바로, 그러나 천천히 오래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무해한 사람이 되는 꿈을 꾸어볼 수 있다.
005. 시민의 교양 과학 / 홍성욱 외 : 201 ~ 287
: 늘 문제는 어디까지가 '교양'인 것인지 정하는 데 있다. 교양 없는 인간이 되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교양과 당신의 교양이 합치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일진대 실제로 그런 건 불가능하고, 스스로의 교양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늘 불안하기만 하다. 그래서 '교양'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은 늘, 아,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 정도 내용을 교양으로 여기는 시기가 얼른 오면 좋겠구나, 근데 일단 나부터……. 이런 기분이 들게 한다.
: 그냥 그렇다구요. 책 자체로 좋은 책입니다.
006.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 요조, 임경선 : 143 ~ 283
: syo는 요조 선생님은 좋아하고 임경선 선생님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어디다 밑줄을 그었나 살펴보니 임경선 선생님이 쓰신 대목이 더 많았다. 희한한 일이다.
: 소소하고, 소소해서 좋은 책이다. 요조의 책이고 임경선의 책이고. 그 이상의 뭔가는 아닌 듯하다. 예를 들어, syo의 책은.
--- 읽는 ---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 한상원 : ~ 97
스피노자 매뉴얼 /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 ~ 131
세상을 알라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167 ~ 331
사랑을 위한 되풀이 / 황인찬 : ~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