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우리는

 

 

 

매일에 매일을 덧붙여 매일매일을 만드는 마음이 가벼운 장난이나 의미 없는 기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와의 온전한 하루가 쏜살같이 달려가고, 취한 마음 부여잡고 내리막을 사박사박 걸어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꼭 잡은 손위로 노을이 아른아른 내릴 때, 연인은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하루여서, 이것이야말로 하루여서, 혼자 돌아오는 오르막길 위에 저녁 그림자처럼 녹아 아련하게 아련하게 사라질 이 마음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하루로 만들어주는 마술이어서, 매일을, 오롯한 열망으로 매일을 생각할 것이다. 이 하루가 매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스라치게 기뻐서, 매일에 매일을 덧붙여 매일매일이라는 말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감히 감당키 어려운 욕심을 부린 건 아닌가 철렁한 마음에 괜스레 도둑눈을 하고 저녁의 이곳저곳을 찔러볼 테다. 바닷물처럼 많은 날들 위로 오늘이 한 방울의 빗물로 부딪혀 그 모든 물들을 오늘 이전의 날과 오늘 이후의 날로 가르는 기적이 일어나면, 오늘부터 그의 세상에서 매일과 매일매일 사이의 간격은 가벼운 장난이나 의미 없는 기교가 아니게 된다. 세상의 모든 말들이 그렇게 된다. 순간의 모든 페이지에 주석이 달린다.

 

 

 

 

--- 읽은 ---


1. 우리는 매일매일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

 

예술이란 모순을 대하는 방식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모순을 만나면 어떤 예술은 그것을 부수려고 하고, 어떤 예술은 그것을 에두르며, 어떤 예술은 그것을 섞어 한 덩어리로 만들려고 한다. 어떤 예술은 그것을 체념하고 어떤 예술은 그것을 승인하며, 또 어떤 예술은 그것을 혐오하거나 사랑하거나 혐오하면서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예술의 앞에 모순과의 마주침이 존재한다. 결코 피할 수 없는 만남이 있다. 이것은 비단 예술의 이야기만은 아니어서, 이 앞 문장들 속의 예술이라는 단어를 전부 인간이라고 바꾸어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활자는 차원이 없으나 인간은 입체이기에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모순이 있다. 시가 모순과 어떤 춤을 출 때, 독자는 가만히 그것을 관조하며 자기 자신의 전략을 재점검한다. 나는 내게 육박하는 모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리하여 나는 어떤 형태의 인간이며 또 어떤 양식의 예술인가. 이 물음 또한 하나의 모순임에 틀림없어서,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독자는 시집을 덮어도 시를 읽고 있다.

 

 

  

--- 읽는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안드레 애치먼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세금의 모든 것 / 김낙회

친절한 강의 대학 / 우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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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11-21 08: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올해 읽은 첫 책이 시집인 문학(쪼끔 밖에 안 틀린) 쇼년(욕 아님) syo님 ㅎㅎㅎ 원조 시 독자 없어서 제가 시 많이 읽는 어린이 취급 받는 요지경이 그간 펼쳐졌더랍니다…

syo 2023-11-25 11:59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반님 정도면 시 많이 읽는 거 맞죠!
한국 독서판에서 시라는 것은 읽는 순간 바로 많이 읽는 게 되는 미친 장르입니다!
 

 

어째서 어쩌자고

 

 

1

 

어제의 syo는 글을 썼고, 오늘의 syo가 그 글을 몇 년 전의 syo가 쓴 글 옆에다 놓고 비교한 결과, 재활, 재활이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퇴보에 감염되는 일은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흔한 일이지만, 퇴보가 퇴락이 되기 전에 그 흐름을 끊어놓는 것은 드물고도 위대한 일이라서, 그 과정을 거듭 거친 사람 가운데 인걸이 난다고 들었다. 인걸은커니와, 걸인이나 되지 말아야 하는 게 오늘 syo의 발등에 떨어진 불인 모양이다.

 

 

 

2

 

그렇지만 어째서 써야만 하는 것일까. 모든 활동은 욕망을 겨냥하고, 욕망의 화살은 과녁을 등지고 쏘아도 허공을 크게 에둘러 결국은 과녁으로 달려가는 법이어서, 쓰기로써 아무것도 겨냥하지 않고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밤은 타로 카드 뒷장처럼 겹겹이 펼쳐지는지. 물위에 달리아 꽃잎들 맴도는지. 어쩌자고 벽이 열려 있는데 문에 자꾸 부딪히는지. 유리공장에서 한 번도 켜지지 않은 전구들이 부서지는지. 어쩌자고 젖은 빨래는 마르지 않는지. 파란 새 우는지, 널 사랑하는지, 검은 버찌나무 위의 가을로 날아가는지, 도대체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어쩌자고 종이를 태운 재들은 부드러운지

_ 진은영, <어쩌자고> 전문

 

어째서 쓰는가를 넘어선 자리에야 어쩌자고 쓰는가는 존재한다. 어째서와 어쩌자고 사이의 간격, 누군가에겐 한 뼘도 되지 않을 그 좁은 간격에 곡진하고 눅진한 이야기를 채워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쓰는 것으로 일단 정하고.

 

 

 

3

 

매일매일 읽고 써야 한다.

 

 

 

 

--- 읽는 ---


우리는 매일매일 / 진은영

모더니즘 / 피터 게이

토지 1 / 박경리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 박찬국

다정소감 / 김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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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1-18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전혀 퇴보 느낌이 나지 않습니다~!!

syo 2023-11-18 13:2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잘 계셨지요? ㅎㅎㅎㅎ 😆

수이 2023-11-18 13: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퇴보했다 느낀다 ㅋㅋㅋㅋ 쇼 매일 보니 좋네 좋아

syo 2023-11-18 13:34   좋아요 3 | URL
나 퇴보했지? ㅋㅋ

수이님은 그동안 좀 진보하셨네요! 이제 나만큼 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매일 나타나서 열심히 재활해야죠 뭐 ㅎㅎ

수이 2023-11-18 13:4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칭찬 맞지? 12월에 봐!

syo 2023-11-18 13:47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그러자구요!

은오 2023-11-18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앙 소문으로만 듣던 syo님이랑 동접?! 저도 댓글달아주세요!! ㅋㅋㅋㅋ 넘반갑습니다!!

syo 2023-11-18 13:47   좋아요 2 | URL
아,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푸바오시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23-11-18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원조 요정 돌아왔으니, 바톤 터치해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대타, 는 발끝도 못 미치던 요마, 요귀 물러가야겠습니다…(나도 syo님이랑 댓글놀이나 하고 허송세월하고 싶은데 이게 수능 끝난 고3 언니 오빠들 보는 고2 기분이구나…하아 나이는 좀 역전되었지만 하아아…공부하기 싫어 방황하는 한숨)

syo 2023-11-18 14:17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ㅎ 저도 요정 활동은 노환으로 인해 은퇴합니다. 이제 뒷방 늙은이 포지션으로 홀홀홀 하면서 곰방대나 털면서 지내려구요. 공부하기 싫은 반님도 화이팅!

반유행열반인 2023-11-18 14:19   좋아요 1 | URL
아니 뭐여…진짜 늙은이(나 포함) 지팡이 들고 다 때리러 온다? 여기는 너무 고이고 고여 syo님이 그런 위치를 점하는 건 다들 돌아가시는 수십년 후가 아니면 어렵지 싶습니다. 뒷방 꼬맹이 화이팅!

yamoo 2023-11-18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알라딘마을에 쇼라는 서재스타가 있었죠.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알라디너의 사랑을 독차지 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사라졌다가 다시 컴백했네요. 다시 보니 반갑고 그간의 생활이 어땠는지 궁금해집니다..ㅎㅎ 쇼님이 알라딘 서재에서 사라진 시기에 제가 미술을 시작했으요~~ㅎㅎ

syo 2023-11-20 20:15   좋아요 1 | URL
제가 기억하는 그 언젠가의 야무님은 철학에 대한 깊은 소양은 물론, 각종 교양 지식이 풍부한 댄디가이였었는데, 이제 심지어 미술까지!

저도 반갑습니다 야무님 ㅎㅎㅎ

초란공 2023-11-18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컴백하심니까? 환영합니다~!! ㅋㅋ

syo 2023-11-20 20:16   좋아요 1 | URL
초란공님 오랜만입니다!
컴백은 뭔가 과하고, 그냥 다시 끼적거리려고 나타났습니다 ㅎㅎㅎ

추풍오장원 2023-11-19 0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일 읽고는 있는데, 쓰는건 아주아주 힘들어서 안하고 있습니다...ㅋㅋ

syo 2023-11-20 20:17   좋아요 1 | URL
그런 면에서 이 동네 분들은 다 대단한 분들이시죠, 읽거나 쓰거나 읽고 쓰거나 다 매일매일 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ㅎ

햇살과함께 2023-11-19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syo 2023-11-20 20:17   좋아요 2 | URL
😊😊😊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추운 아침이고 눈이 내릴 것만 같은데 돌이켜 보면 어제는 수능 날이었다.

 


 

1교시 국어 영역

 

국어는 독서/문학/선택의 삼색 구성인데, 통상적으로 선택은 선지식으로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하고 문학은 난도가 낮다 보니, 승패는 독서에서 갈리는 편이다. 하여 일단 선택과 문학을 먼저 최대한 빠른 속도로 풀어제낀 다음 확보된 시간을 모두 독서에 투여하는 것이 안전한 전략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 남의 말이면 덮어놓고 안 듣고 보는 syo는 그냥 1번부터 순서대로 풀기 때문에 독서-문학-선택 순서대로 문제를 맞닥뜨렸는데, 독서가 너무 쉬운 거라, , 이거 이럼 나가린데- 하며 고개를 갸웃대다가 문학에서 깜놀. 뭐지 이 근본 없는 참신함은? 선지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거칠게 흔들리는 샤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미래의 N+1수생 syo…… 그러면서 이제 막 지난 1년간의 주마등이 깜빡깜빡 켜지-는 순간 무조건 망하는데-려는 찰나에 문득, , 이럼 문학부터 풀었던 애들은 아주 나락 갔겠는데? 싶어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니 아이들의 눈빛에는 이미 영혼이 간데없고, 츄리링 입고 쓰레빠 신은 사시나무 서른 개쯤이 바삭바삭 쓸리는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떨리는 꼴을 보니, , 저거 벌써 만났네, 주마등. 늦었네, 못 살려. 그 순간 모든 떨림이 썰물처럼 사라지며 갑자기 든든해지는 내 마음. 와하하 망해도 혼자 망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1만큼 망할 때 10만큼 망해 주는 이들이 있는 이 훈훈한 세상.

 

그렇게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문학에서 실컷 얻어터졌지만.

 

 

 

2교시 수학 영역

 

킬러 문항이라는 것은 15(가끔 14), 22, 30번 자리에 놓이는 미친 세 문항을 말하는 것으로 일단 개 어렵고, 특히 2230은 주관식이며 보통 세 자리 숫자가 답이 되도록 문제가 구성되다 보니 찍기가 거진 불가능하여 정답률이 10%대를 스치는 편. 최상위권을 변별하기 위해 존재했던 놈들인데, 이 녀석들이 정부의 집중포화를 맞은 자리에 어떤 새로운 전기의자가 설치되어 수험생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게 될 것인지가 초유의 관심사였다. 상위권 학생들의 입장에서 정부놈들이 어쩌자고 이러냐 싶었던 부분은, 아니 킬러를 빼면 잘하는 놈과 겁나 잘하는 놈과 거어어어어어업나 잘하는 놈들은 어떻게 구별할 거냐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9월 평가원 시험에서 수학 만점자가 2500명 가까이 나오는 바람에(2500명이면 상위권 애들이 노리는 메디컬 학과들의 전체 인원수에 육박한다), 이건 뭐 수학 하나 실수로 틀리면 즉시 의치한약수 포기하라는 뜻이냐는 볼멘소리도 소소하게 있었던지라 평가원 요놈시끼들 과연 수능은 어떻게 내나 보자 했던 것. 뚜껑을 열어보니 22(인강 사이트 채점서비스 기준 정답률 5%), 미적분 30(정답률 8%)은 사실상 킬러.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나는 수학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수학이 나를 포기한 바로 그런 남자 syo에게, 어차피 킬러라는 것은 하늘의 뜻이 있으면 운 좋게 풀 수도 있으니 진정으로 이 문제를 풀고 싶다면 수학 공부할 시간에 봉사 및 기부활동을 통해 선업을 쌓는 쪽이 더 효율적인 뭐 그런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22는 보자마자 우회하여 23으로 진출했고, 아예 29가 마지막 문제인 것처럼 30을 회피하여 1로 돌아가 재점검에 들어갔다. 그 덕에 운 좋게 계산 실수 두 개를 발견하여 이득을 좀 봤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 22, 30과 면담 시간을 가져 보았지만 역시 우리는 운명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합의 하에 시원한 마음으로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돌아설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이별이 후회로 남듯 이번에도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던 것. 22번은 나의 수험번호를 그럴싸하게 조합하여 125라고 찍었고, 30번은 샤머니즘을 동원, 마지막 문제니까 기분 좋게 100이라고 찍었는데, 집에 와서 정답표를 확인하니 22번 정답은 483이라 당연하게도 나가리였으나 하필 30번 정답이 125…….

 

 

 

2.5교시 점심 영역

 

수능을 이틀 앞둔 1114일 저녁, syo는 대패삼겹살 쌈장 볶음밥을 만들고 있었고, 등 뒤로는 우리의 친구 이 디아블로2를 하고 있었다. 통통통 마늘을 썰다가 갑자기 빡이 쳐서, 마늘을 썰던 칼을 의 목덜미에 들이대며, 야이 개만도 못하고 개보다 더한 개같은 놈아(멍뭉 미안), 더하기 빼기 하나 없이 말 그대로 내일 모레가 수능인데 나는 니 처먹을 저녁을 만들고 있고 ㅅㅂ 니는 디아블로를 쳐잡고 앉았네? 수험생 둔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이것은 가정폭력이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500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라고 협박한 결과, 수능 날 먹을 점심거리를 이 책임지기로 했다. 15일 퇴근길에 그는 빠리바게트를 들러서 샌드위치 한 팩과 단팥빵 하나, 그리고 비싸지만 두세 모금밖에 되지 않는 오렌지 주스 하나를 사서 돌아왔다. 그래서 16일 점심, syo는 보온도시락을 꺼내는 아이들 사이에서 비니루봉지를 꺼냈으며, 숟가락질을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손가락질을 해야 했지만 부끄러울지언정(놈과 관련된 모든 상황은 syo에게 항상 부끄러움이다) 불행하지는 않았다. 좋겠다, 니들은 엄마 아빠 있어서 도시락 싸온 모양이네, 나는 엄마도 아빠도 없지만 씩씩한 syo! 이러면서 제로 콜라 뚜껑을 힘차게 돌렸는데 콜라도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시원한 축포를 터뜨려 주었다. 제길, 나는 엄마도 아빠도 조심성도 없었다……. 아참, 휴지도 없었다. 저기 죄송한데 티슈 몇 장만……. 내 앞에 앉은 친구는 엄마도 아빠도 측은지심도 있었다. 파이팅, 너어는 너는 잘될 거야, 잘되라.

 

 

 

 

3교시 영어 영역

 

내 옆에 앉아서 다리 떨던 너어는 너는 잘되지 마라. 진짜. 너 때문에 듣기 하나 말리는 바람에 겁나서 듣기 시간에 듣기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시간 부족으로 문제 하나 통으로 날렸다 이 시끼야.

 

 


4교시 탐구 영역

 

여기가 문제 지점이었다. 앞 과목들이야 다들 망한 분위기라 나 정도 망한 건 티도 안 나는데, 여기서 나 혼자 망하는 바람에 인생 행로가 애매해진 것. 언제나 syo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물리의 역습. 초반에 계산 두 개 연속으로 말리는 바람에 멘붕 세게 왔고, 결국 들뜬 마음이 이어지는 지구과학에까지 영향을 미쳐 안 해도 될 실수를 낳은 모양. 물리 이 새끼 난 그동안 니가 너무 효자여서 양자로 삼고 재산까지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넌 그렇게 항시 웃는 낯으로 나를 대하더니 등 뒤로는 이렇게 칼을 갈고 있었구나, , 물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었던가…….

 

 

 

5교시 귀가 및 휴식 영역

 

시험 보는 사이에 내린 비로 젖은 길을 한참 걸어 지하철을 잡아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두고 간 핸드폰에 사람들의 흔적이 잔뜩이었다. 외투 벗다가 전화 받고, 바지 지퍼 내리다가 톡 대답하고, 윗도리 벗었는데 또 전화받고, 실내복 바지에 한 다리 꿰었는데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돈 보내주신 이모께 압도적 감사를 표하고……. 어쨌든 일 년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는 감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은 오랜만이어서 어색하다.

 

필적확인 문구라는 게 있다. 문제지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문구를 OMR카드에 자필로 써넣어 수험생의 필적을 확보하는 건데, 올해의 문구는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였다. 나는 1교시부터 총 다섯 장의 OMR카드에 이 문장을 꼬박꼬박 다섯 번 적어 넣으면서, 좋은 문장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크지는 않지만 없지도 않아서 완전히 닫혀 있지 않은 문장. 문장의 주인이 전달하려는 뜻이 선명할수록 읽는 이에게 주어진 여백은 좁아진다. syo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문장이란 그 선명함과 여백 사이의 어느 지점에 아슬아슬하지만 향기롭게 설 줄 아는 글이어서, 이 문장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고, 수험생들이 매 교시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에 괜찮은 한 줄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이 문장은 양광모 시인의 가장 넓은 길이라는 시의 마지막 두 행이었다. 전문은 이렇다.

 

살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원망하지 말고 기다려라

눈이 덮였다고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요

어둠에 묻혔다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

양광모 가장 넓은 길

 

이 전문을 확인하는 순간, 나의 모든 감동은 즉시 사라졌다. 마지막 두 문장만 있을 때 품었던 미미한 여백까지 모조리 사라지며 이 시는 오직 한 가지 길을 간다. 뜻깊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너무도 많이 듣던 이야기이며, 당장 누구라도 누구에게든 해줄 수 있는 이야기이다. 행갈이 없이 연이어 적으면 그냥 격언일 뿐인 이야기를 행갈이 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이 문장의 진의를 알았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서, 마지막 문장만 있을 때 내 마음속에 펼쳐졌던 의미의 넓은 길이, 다른 문장들이 드러나는 순간 내 마음밖에(시인의 마음속이겠지) 존재하는 좁은 길이 되고 만 것이다. , 이 시는, 그야말로 살신성인의 시였다. 동시에 마지막 두 문장만 떨어져 나와 독자에게 먼저 읽힌 후에 전문을 읽었을 때, 그 의미를 몸소 체험하게 해주는 넓으면서도 좁아터진 시…….

 

 

  

6교시 내일부터 영역

 

최근 엿이며 초콜릿 같은 것들을 배부르게 먹다 보니 살이 좀 쪘는데, , 그건 최대한 빠르게 복구할지어다. 시험은 잘 봤으나 기대한 만큼 잘 본 건 또 아니다 보니(준비 과정에서 기대가 점점 커진 탓도 있고), 2024년의 syo겉보기엔 교수지만 내면은 누구보다 학생캐릭터로 캠퍼스를 누비게 될지, 아니면 N수생의 모질고 거친 삶을 살게 될지는 추세를 조금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모양. 그와 무관하게 어쨌든 한동안은 하루 한두 시간이라도 꾸준히 읽거나 써 볼 생각입니다. 손끝이 너무 굳어서 이러다 멸망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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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11-17 11: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능 치셨을줄은 몰랐습니다...!! 고시 치신거 아니었나요...

syo 2023-11-17 12:26   좋아요 1 | URL
으하하하 추풍님 기준에서 생각하셨나본데, 고시같이 어려운 시험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페넬로페 2023-11-17 1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님, 반가워요.
반가운데 이렇게 엉뚱한 소식을 들려 주시는군요 ㅎㅎ
어제 수능은 킬러 없는 불수능이었다고 하던데, 어쨌든 좀 잘 보신 거 같네요.
본래 기대한 만큼은 안 나오거든요.
내년에 대학생이 되는 상큼한 syo가 되시길 기원합니당^^

syo 2023-11-17 12:27   좋아요 2 | URL
킬러가 있더라구요. 절 죽이던데요? ㅎㅎㅎㅎㅎ 오랜만이고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공쟝쟝 2023-11-17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돌아오기 전에 서양철학 많이 읽어놨어야 했는 데 ㅜㅜㅜ 이제 물 건너갔다...)
머리카락에 눈이 덮였으나 빗자루로 쓸지 않는 가장 넓은 길 가실 대학생!쇼님 응원합니다.ㅋㅋㅋ
내년에 대학 가요제에 나오시나요? 고생 많았구, 푹쉬 쇼!

syo 2023-11-17 12:28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나 이제 서양철학에 관심없어요. 나는 이제 문학syo야. 엣헴.

수이 2023-11-17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멸망이 그대 길에 가당키나 할까. 와락 수고했어. 밥 먹자.

syo 2023-11-17 12:29   좋아요 2 | URL
내가 좀 수고했지 ㅎㅎㅎㅎㅎ 밥 좋아요 😆

꼬마요정 2023-11-17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어요. 가장 넓은 길은 청소하기 힘들어요…(엥?) 길이 좁든 넓든 syo 님 원하는 길이기만 하면 되죠 머 ㅎㅎ 푹 쉬시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내년엔 대학생 쇼님이길!!!!

syo 2023-11-18 12:55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감사합니다 ㅎㅎㅎ
대학생이라니, 엄청나죠? 좋은 시절인 것 같아요. 남들 교수할 나이에 대학생도 할 수 있는 호시절....

blanca 2023-11-17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syo님 돌아오셨다, 그런데 이런 고퀄의 수능 분석을 가지고 오시다니요! 스윽 읽으려다 너무 좋아 학부모인 저로서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재독, 삼독해보려 합니다. ^^;;; 헉 30번 답....소오름...저 수리 주관식 찍어 맞춘 여자예요. ㅋㅋㅋ 이제 대학 새내기 syo님 일기 읽을 수 있는 겁니까?

syo 2023-11-18 12:56   좋아요 1 | URL
와 정겨운 단어 ‘수리‘ ㅎㅎㅎㅎㅎㅎ
마흔 줄에 대학 일기 되게 독보적인 컨텐츠가 될 것 같네요 ㅎ 제가 다 기대가 되네요. 대학 꼭 가라 나야....

페크pek0501 2023-11-17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출현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당~~ 잘 지내셨는지요?

syo 2023-11-18 12:57   좋아요 2 | URL
페크님 오랜만이네요! 저는 언제나 무탈한 syo입니다!

단발머리 2023-11-17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교시 수학영역에서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학 잘하는 문학syo님! 수고 많았어요! 이제 자주 오는거죠? ㅋㅋㅋㅋㅋㅋ

syo 2023-11-18 12:58   좋아요 1 | URL
수학으로 감동을 드리고 받다니..... 우리 둘 중 누가 대단한 걸까요? ㅎㅎ
매일 매일 오려고 노력중입니다!

yamoo 2023-11-17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오랜만에 출현하셔서 보니, 수능을 보셨군요!
예전에 뭔가 합격통지서를 받은 페이퍼를 봤는데,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시기 위한 셤을 치셨나봅니다.
앞으로의 길에 건투를 빌어요! 쇼님^^

참고로...국어영역에서 문학은 대체로 쉬운데, 올핸 매우 헷갈리는 선지가 많았나봅니다. 문학에서 저렇게 선지를 구성하면 답이 없고 걍 찍어야 됩니다. 문학은 주관적인 해석이 다분한데...출제위원들이 매력적인 오답이라고 저렇게 구성할 시 충분히 그렇게 볼 개연성이 높아 출제 오류가 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물론 매력적인 오답을 유도하여 문제없게 선지를 구성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이번 출제위원들이 이 어려운 걸 해냈나봅니다. 그럼에도 국어는 수학처럼 급간 차이가 심하게 나지 않으니 좀 기다려보시면 좋은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어요~~~ㅎㅎ

syo 2023-11-18 12:58   좋아요 1 | URL
야무님 반갑고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업계분이셨던가요...... 댓글 읽다가 갑자기 두 손이 공손하게 모아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11-17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고, 덕분에 아침에 pn다이오드 문제풀이까지 마친 초보 물리러는…60퍼센트 수강한 물리 강의 조용히 드랍하기로 합니다 ㅋㅋㅋ 공대 출신 20년 물리 인생이 어렵다면 머리털 나고 처음 물리하는 나는 생명과학으로 돌아가는 게 맞겠어ㅋㅋㅋ저를 물리로부터 구하셨습니다!!!! (이렇게syo 핑계로 물포자로 돌아간다 ㅋㅋㅋㅋㅋ)

syo 2023-11-18 13:00   좋아요 2 | URL
제가 물리 녀석과 쌓은 역사가 몇십 년인데, 저도 다른 애들한테 뒷통수 다 맞아도 얘한테 맞을 줄은 몰랐습니다. 수능 결심할 때도, 그래 물리는 워낙 오래 했으니까 든든하다- 하는 점이 파지티브 포인트였었는데요....

생지러 화이팅입니다. 탐구는 생지죠.

stella.K 2023-11-17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오래 전부터 생각한 건데 학교는 나이 먹고 다니면 좋겠단 생각이 들거군요.
전 학교 때 학교 다니기가 넘 힘들했거든요.
이 나이쯤 다니면 정말 잘 다닐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ㅋ
근데 스요님 안 보이시더니 수능 보셨군요. 멋지네요. 좋은 결과 있기를!^^

syo 2023-11-18 13:02   좋아요 1 | URL
이 나이에 수능 보는 게 또 어찌보면 노욕 같기도 하구요....

젊은 친구들 전부 와, 나이에 상관없이 도전하는 모습 멋지세요! 라고 말은 하지만 알고 보면 와, 그냥 살던 대로 살지 괜히 공부해서 젊은애들 자리나 뺏어가려고.... 라고 생각하고 있을듯합니다 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11-18 0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syo님 오랜만입니다! 깜놀 수능소식도 멋지구리하게 들려주시는!!! 반가워요!

syo 2023-11-18 13:03   좋아요 1 | URL
난티나무님 오랜만입니다 ㅎㅎㅎㅎ 이제 좀 자주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독서괭 2023-11-18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syo님 수능 치셨군여!! 수험생 생활이 팍팍했을 텐데 그럼에도 여전한 입담이 참 반갑습니다^^ 그래도 잘 봤다고 평하시는 거 보니 내년을 기대해봐도 좋겠군요!!

syo 2023-11-20 20:19   좋아요 2 | URL
수험생 라이프는 생활이 팍팍한 것도 그거지만, 인성이 팍팍해지더라구요..... 죽기 전에 숨 쉬러 나타났습니다.
내년의 일은 내년에게 맡기기루 하구요 ㅎㅎ

bookholic 2023-11-18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수능 공부하시느라 뜸하셨군요...^^ 수능 공부하시고 수능 보느라 고생 많았어요.. 찍은 문제는 다 맞추시고, 푼 문제는 실수하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syo 2023-11-20 20:20   좋아요 1 | URL
매긴 대로 성적이 나오는 게 일단의 바람이긴 합니다 ㅎㅎㅎ
응원 감사합니다 북홀릭님!

또 봄. 2023-11-20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능시험만으로도 존경스러운데, 물리가 버팀목이었다니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좋은 소식 들려주세요!!

syo 2023-11-20 20:21   좋아요 1 | URL
수능도 물리도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ㅎㅎㅎ 하지만 좋은 소식이 온다면 저도 그 소식 녀석을 존경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23-11-20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수능 보셨어요?
의대? 치대? 법대? ^^
하여튼 넘 반갑습니다. ^^

syo 2023-11-20 20:22   좋아요 2 | URL
북다님 오랜만이지요! ㅎㅎㅎㅎ
저는 수능을 보고 수능은 저를 봤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훈훈한 결말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만.....
 


여전합니다

 

 

옥상에서 밤 덮인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내 발끝이 차갑습니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이면 가로등 빛도 한층 더 야위지요. 배회하는 고양이, 구름에 흔들리는 달빛, 교회당의 붉은 십자가, 산 아래 도로를 달리는 광원들. 겨울이면 모든 풍경이 조금 더 퍽퍽해서 무엇이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생겨납니다. 안기고 싶은 마음이라고 고쳐 써도 다르지 않겠군요. 감각에 기대 떠올리는 이런 마음은 외로움이랄지 고독이랄지 하는 높고 윤곽 흐린 감정들보다 침투력이 훨씬 커서, 제멋대로 어떤 추억이나 이름을 꺼내 그 곁에 모여들곤 합니다. 겨우내 안아주고 싶은 이름 하나가 있었는데, 그 생각이 지극하여 그대로 이 계절에 붙박였습니다. 그리하여 겨울이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은 안아주고 싶은 동안은 온통 겨울인 마음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나의 사계절을 하나의 계절로 수렴합니다. 맞아요. 그해 겨울에 그런 마음이 시작되었고, 그 마음이 끝나기 전까지 이제 겨울은 끝나지 않습니다.

 

syo는 여전합니다.

 

책머리에 앉은 먼지가 굳어 이제 여간한 입바람으로는 날리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 읽지 않았습니다. 읽지 않는 삶이란 곧 쓰지 않는 삶일 것이라 짐작만 하던 적이 있었는데, 짐작은 현실이 되었고 이런 현실이 뜻밖에 또 나쁘지 않아서, 읽고 쓰면서 그럭저럭 살던 syo는 읽지 않으므로 쓰지 않으면서도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해가 바뀌었고 아무래도 올해 역시 syo는 읽지 않겠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읽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읽기를 멈추는 데 특별한 계기가 필요했던 시기가 힘겹게 저물었고, 이제는 읽는 데에 계기가 필요한 범상하고 범속한 궤도에 올라탄 모양입니다. 서재 이마에 읽지 않고 쓰겠다고 써 붙여 놓았지만 읽지 않으니 써지지 않아서 결국 읽지도 쓰지도 않는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영위하고야 말았네요. “보통 사람이 되었어요. , 이제야 내가, 드디어 내가, 마늘과 쑥도 없이 내가.

 

syo는 여전히 백수입니다. 달라진 것을 꼽자면 그저 진간장과 국간장을 구별해서 사용할 줄 알게 되었고, 피클에 취나물을 넣어 담그면 별미라는 사실을 배운 것 정도입니다.

 

활자는 악기고 쓰기는 연주입니다. 기예라는 것은 꽤나 가혹해서 연습한 딱 그만큼만 주어지는 반면 하루를 멈추면 사흘을 거슬러 갑니다. 일 년을 쉬었으니 삼 년을 거슬러 syo의 글은 이제 다시 삼십 대 중반쯤이겠습니다. 이참에 몇 년 더 쉬어 이십 대까지 회춘하는 것도 방법일까 싶다가도, 그 시절은 아름다웠으나 아름다운 만큼 어리석었으므로 오늘의 내가 그날의 어리고 어리석은 나를 끝내 견뎌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이렇게 뭐라도 끄적댑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이 겨울이 꽤나 마음에 차기 때문입니다.

 

귤껍질로 차를 만들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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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1-08 23: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허... 아니 무슨 글을 이렇게 쓰시는 분이 있나요? 정말 여전하시네요. 얼마 전에 우연히 여기 왔다가 무슨 글을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어? 하고 놀랐는데 말입니다.

얄라알라 2023-02-15 12:56   좋아요 1 | URL
은오님,
매서운 감식안이 있으신 은오님의 칭찬세례를 받으신 syo님

반갑습니다. 오랫만에 뵈어요!!

scott 2023-01-09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 웰컴 백 북플🤗

책읽는나무 2023-01-09 06: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더 젊어져서 오시다니?
비법 좀?...
잘 쉬다 오셨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셨죠?

반유행열반인 2023-01-09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은 우리 사는 나라에서는 원래 추운 거지만…가끔가끔 따뜻하시길 기원합니다. ㅎㅎ저는 늘 봄을 기다려요.

라로 2023-01-09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진간장과 국간장 구별 못 해서 진간장만 사용해요. ㅎㅎㅎ 귤껍질로 차도 만드시고!!
저도 알라딘을 떠났다가 다시 올까봐요.^^;;
암튼, 웰컴 백 앤드 해피 뉴 이어~~!!^^

2023-01-09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귤껍질로 향긋한 차 만드시면 글 또 올려주실 거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레이스 2023-01-12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전하기가 어렵죠.
그 어려운 일을 해내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수이 2023-02-20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 저기 은오님이 댓글 달았네 ㅋㅋㅋ 은오님 댓글 보다가 글 보다 우리 쇼 뭐 하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죠. 빨리 공부 끝내고 놀자. 심심해.

수이 2023-02-20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제가 알라딘에 한동안 안 왔다가 다시 요즘 오고 있어요. 쇼님 글 언제 올라오나 그럴 때가 있었잖아. 그땐 쇼 글 읽는 맛에 알라딘 할 맛이 났었는데. 에잇.

수이 2023-02-20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대 없는 알라딘에서 놀면서 버티다가 그대 컴백하는 날 미친듯 난리 부르스를 추겠소. 쇼 없는 알라딘이 이런 건지 내가 왜 진작에 몰랐을까. 아아아악.
 

  

성묘 가다 30분만에 락킹 고수 된 썰 푼다

 

야트막한 산도 산은 산일진대 반바지를 입고서 그 산을 오르겠다고 깝치는 멍청한 오라비를 위해 내 동생이 다이소에서 구매한 모기 기피제를 고소할 수 있을까. 겉면에 이 제품으로 기피되는 벌레는 모기진드기라고 명백하고 한정적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실제로 모기와 진드기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으니 제품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영문 모를 달콤한 향을 첨가하여 그 향기에 대취한 모기진드기이외의 칠만 육천 가지 날벌레들이 syo와 동생의 주변에서 광란의 연회를 벌였다는 것이 문제다. 여름날 밤 가로등 아래 서서 고개를 쳐들면 수백 마리 날벌레들이 전구 주변을 배회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는데, 그 전구 대신 소켓에 내 머리를 끼워 놓고 산에 올라가는 기분이라고 하면 적당하겠다. 산어귀부터 묘소까지 가는 20분 거리는 체감상 20년쯤 되는 대방랑의 여정이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무슨 꿀벌 아저씨처럼 벌레로 만든 옷을 입고 엄마 안녕 나 왔어 내 새 옷 좀 볼래/벌레? 하게 생겼으므로 급한대로 언 발에 오줌 눠야 할 판이었던거라, syo는 손수건을 꺼내 휘두르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벌레에 시달리느라 비명을 지르며 뒤따라오던 동생이 syo의 현란한 동작에 감탄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으아아아바아아벌레새끼들아아으아으아아근데오빠야락킹잘추네으아아아벌레우으이우와우!

 

락킹이 뭐 이런 것인 모양

 

 

다소 침체된 성묫길에 분위기를 화려한 롹킹 퍼포먼스로 불지르고 싶은 분들께, 다이소 모기 기피제, 아 강력 추천합니다!

 

 

 

--- 읽은 ---

 


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 /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

 

 

표지에 떡하니 박혀 있듯, 원제는 “Why Fish Don’t Exist”이다. 거칠게 풀면 왜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가식의 의문형으로 풀 수 있는데, 번역본 제목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큰 차이가 있을까? 내가 읽기에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진짜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아직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명제처럼 공지의 사실이 되지 못했다.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사람들의 인식에 어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꼬리, 저 지느러미, 저 비늘, 저게 물고기인데,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데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러나 하늘을 올려다보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실 도는 것은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즉각적 인식과 다른 과학적 사실에 대한 사람들의 확고한 믿음. 지동설에는 그런 것이 있고 물고기 부존재설에는 아직 그런 것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지동설만큼의 과학적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보다, 오직 지금에만, 물고기 부존재설이 아직 지동설만큼의 위치를 획득하지 않은 지금에서만 우리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혹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들. 더 나중에는 이런 질문이 의미가 없어진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시대에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세상에 산다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질문은 개인의 삶과 세계의 질서를 흔들 만큼 거대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듯이. 따라서 바로 지금, 우리는 이 질문에 천착해야만 한다. 때를 놓친 질문은 질문의 모습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젠가 윤리나 정치로 모습을 바꾸고 돌아와 우리의 지난 무책임과 무관심을 비난한다.

 

질문에 대한 저마다의 대답이 저마다의 인생을 반영한다. 그래서 질문의 형식이 조금 더 걸맞다. 왜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나요? 하는 질문의 과학적 답변은 과학자들이 만들 일이고, 우리의 답변은 우리가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죄다 뭔 놈의 물고기 폐병 걸려 기침하는 소리인가 싶으시겠지만, 읽어보시면 뭔 소리인지 알 수 있으십니다…….

 

  

 

--- 읽는 ---

교양 노트 / 요네하라 마리

미식가를 위한 식물 사전 / 스쥔

필로소피 랩 / 조니 톰슨

저도 의학은 어렵습니다만 / 예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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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7-25 1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 태워 먹는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모기 진드기 기피하느라 온갖 잡다한 벌레들은 다 불러들이고. 그 회사 참 어쩌라는 건지. 애처롭네요. ㅋㅋ 제목이 참!

근데 동영상 나름 환호하는 것 같은데 운동화를 던져 식겁했습니다.
너무 격한데요?ㅋ

반유행열반인 2022-07-24 2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속도라면…저의 올해 독서 7권은 금세 따라 잡으시겠네요…뒤쳐지는 자의 슬픔…
즈이 집에는 뽀로로가 그려진 스프레이랑 롤링? 물파스 같은 모기 기피제가 두 종이나 있는데 몇 년 전 동남아 방문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아서 그걸 빌려드릴 걸 그랬죠…냄새는 그냥 상큼한 모기약(읭) 수준이고 벌레가 꾀는 건 못봤는데…이래서 저는 다이소 싫어해요.(집의 어른들은 죄다 다이소 매니아라 맨날 뭘 번갈아 사오셔서 늘 난감합니다…저거 딱 가격만큼인 것을 하고…) syo님의 락킹ㅋㅋㅋㅋ 왜 어떤 광경인지 알 것 같지ㅋㅋㅋㅋㅋ

얄라알라 2022-07-24 2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님

지난번 페이퍼에서,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못 드렸는데(실은 어떻게 잘 인사드릴 수 있는지 어색하고 뻘쭘해서 안 드렸는데)
다녀오셨군요.
그런데, 세상에나 날벌레의 광란의 춤, syo님과 동생분 역시 비자발적 락킹을 피하실 수 없었군요.

그나저나 올려주신 동영상 넋 놓고 보았습니다. 스우파에서 립제이가 잘 추는 장르가 랑킹이라 해서 한 때 열심히 유투브 찾아다녔는데 syo님 올려주신 영상 딱 제 취향입니다!

페크pek0501 2022-07-24 23: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춤 홀딱 반하게 되네요. 올려 주신 영상 잘 봤어요. 마치 필름을 빨리 돌리는 듯한 동작들.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했으면 저런 경지에 가게 되는 걸까요? 존경스럽네요.

언젠가 티브이에서 본 것, 바다 속에 쓰레기들이 많아 그 쓰레기에 걸려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장면이었어요.
그 피해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올 터인데 생태계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연을 아름답게 지키는 게
인간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어요. 그런데 <물고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은 제가 말한 것과 관련성이
있는지요?
<교양 노트>는 제가 완독한 책이어요.^^

mini74 2022-07-25 1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왜 자꾸 웃음이 나지요. ㅎㅎ 저도 얼마전에 아버지 뵙고 왔는데 청바지를 뚫더군요. 온통 다리가 울퉁불퉁합니다. 무서운 존재들. 저는 락킹은 못하고 고스란히 내어주고 왔습니다 ~ 물고기 폐병 걸려 기침하는 소리 ㅎㅎㅎ 역시 넘 재미있으세요 👍

2022-10-06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25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