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추운 아침이고 눈이 내릴 것만 같은데 돌이켜 보면 어제는 수능 날이었다.
1교시 국어 영역
국어는 독서/문학/선택의 삼색 구성인데, 통상적으로 선택은 선지식으로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하고 문학은 난도가 낮다 보니, 승패는 독서에서 갈리는 편이다. 하여 일단 선택과 문학을 먼저 최대한 빠른 속도로 풀어제낀 다음 확보된 시간을 모두 독서에 투여하는 것이 안전한 전략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 남의 말이면 덮어놓고 안 듣고 보는 syo는 그냥 1번부터 순서대로 풀기 때문에 독서-문학-선택 순서대로 문제를 맞닥뜨렸는데, 독서가 너무 쉬운 거라, 어, 이거 이럼 나가린데- 하며 고개를 갸웃대다가 문학에서 깜놀. 뭐지 이 근본 없는 참신함은? 선지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거칠게 흔들리는 샤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미래의 N+1수생 syo…… 그러면서 이제 막 지난 1년간의 주마등이 깜빡깜빡 켜지-는 순간 무조건 망하는데-려는 찰나에 문득, 와, 이럼 문학부터 풀었던 애들은 아주 나락 갔겠는데? 싶어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니 아이들의 눈빛에는 이미 영혼이 간데없고, 츄리링 입고 쓰레빠 신은 사시나무 서른 개쯤이 바삭바삭 쓸리는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떨리는 꼴을 보니, 아, 저거 벌써 만났네, 주마등. 늦었네, 못 살려. 그 순간 모든 떨림이 썰물처럼 사라지며 갑자기 든든해지는 내 마음. 와하하 망해도 혼자 망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1만큼 망할 때 10만큼 망해 주는 이들이 있는 이 훈훈한 세상.
그렇게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문학에서 실컷 얻어터졌지만.
2교시 수학 영역
킬러 문항이라는 것은 15번(가끔 14번), 22번, 30번 자리에 놓이는 미친 세 문항을 말하는 것으로 일단 개 어렵고, 특히 22와 30은 주관식이며 보통 세 자리 숫자가 답이 되도록 문제가 구성되다 보니 찍기가 거진 불가능하여 정답률이 10%대를 스치는 편. 최상위권을 변별하기 위해 존재했던 놈들인데, 이 녀석들이 정부의 집중포화를 맞은 자리에 어떤 새로운 전기의자가 설치되어 수험생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게 될 것인지가 초유의 관심사였다. 상위권 학생들의 입장에서 정부놈들이 어쩌자고 이러냐 싶었던 부분은, 아니 킬러를 빼면 잘하는 놈과 겁나 잘하는 놈과 거어어어어어업나 잘하는 놈들은 어떻게 구별할 거냐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9월 평가원 시험에서 수학 만점자가 2500명 가까이 나오는 바람에(2500명이면 상위권 애들이 노리는 메디컬 학과들의 전체 인원수에 육박한다), 이건 뭐 수학 하나 실수로 틀리면 즉시 의치한약수 포기하라는 뜻이냐는 볼멘소리도 소소하게 있었던지라 평가원 요놈시끼들 과연 수능은 어떻게 내나 보자 했던 것. 뚜껑을 열어보니 22번(인강 사이트 채점서비스 기준 정답률 5%), 미적분 30번(정답률 8%)은 사실상 킬러.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나는 수학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수학이 나를 포기한 바로 그런 남자 syo에게, 어차피 킬러라는 것은 하늘의 뜻이 있으면 운 좋게 풀 수도 있으니 진정으로 이 문제를 풀고 싶다면 수학 공부할 시간에 봉사 및 기부활동을 통해 선업을 쌓는 쪽이 더 효율적인 뭐 그런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22는 보자마자 우회하여 23으로 진출했고, 아예 29가 마지막 문제인 것처럼 30을 회피하여 1로 돌아가 재점검에 들어갔다. 그 덕에 운 좋게 계산 실수 두 개를 발견하여 이득을 좀 봤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 22, 30과 면담 시간을 가져 보았지만 역시 우리는 운명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합의 하에 시원한 마음으로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돌아설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이별이 후회로 남듯 이번에도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던 것. 22번은 나의 수험번호를 그럴싸하게 조합하여 125라고 찍었고, 30번은 샤머니즘을 동원, 마지막 문제니까 기분 좋게 100이라고 찍었는데, 집에 와서 정답표를 확인하니 22번 정답은 483이라 당연하게도 나가리였으나 하필 30번 정답이 125…….
2.5교시 점심 영역
수능을 이틀 앞둔 11월 14일 저녁, syo는 대패삼겹살 쌈장 볶음밥을 만들고 있었고, 등 뒤로는 우리의 친구 三이 디아블로2를 하고 있었다. 통통통 마늘을 썰다가 갑자기 빡이 쳐서, 마늘을 썰던 칼을 三의 목덜미에 들이대며, 야이 개만도 못하고 개보다 더한 개같은 놈아(멍뭉 미안), 더하기 빼기 하나 없이 말 그대로 내일 모레가 수능인데 나는 니 처먹을 저녁을 만들고 있고 ㅅㅂ 니는 디아블로를 쳐잡고 앉았네? 수험생 둔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이것은 가정폭력이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500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라고 협박한 결과, 수능 날 먹을 점심거리를 三이 책임지기로 했다. 15일 퇴근길에 그는 빠리바게트를 들러서 샌드위치 한 팩과 단팥빵 하나, 그리고 비싸지만 두세 모금밖에 되지 않는 오렌지 주스 하나를 사서 돌아왔다. 그래서 16일 점심, syo는 보온도시락을 꺼내는 아이들 사이에서 비니루봉지를 꺼냈으며, 숟가락질을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손가락질을 해야 했지만 부끄러울지언정(三놈과 관련된 모든 상황은 syo에게 항상 부끄러움이다) 불행하지는 않았다. 좋겠다, 니들은 엄마 아빠 있어서 도시락 싸온 모양이네, 나는 엄마도 아빠도 없지만 씩씩한 syo다! 이러면서 제로 콜라 뚜껑을 힘차게 돌렸는데 콜라도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시원한 축포를 터뜨려 주었다. 제길, 나는 엄마도 아빠도 조심성도 없었다……. 아참, 휴지도 없었다. 저기 죄송한데 티슈 몇 장만……. 내 앞에 앉은 친구는 엄마도 아빠도 측은지심도 있었다. 파이팅, 너어는 너는 잘될 거야, 잘되라.
3교시 영어 영역
내 옆에 앉아서 다리 떨던 너어는 너는 잘되지 마라. 진짜. 너 때문에 듣기 하나 말리는 바람에 겁나서 듣기 시간에 듣기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시간 부족으로 문제 하나 통으로 날렸다 이 시끼야.
4교시 탐구 영역
여기가 문제 지점이었다. 앞 과목들이야 다들 망한 분위기라 나 정도 망한 건 티도 안 나는데, 여기서 나 혼자 망하는 바람에 인생 행로가 애매해진 것. 언제나 syo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물리의 역습. 초반에 계산 두 개 연속으로 말리는 바람에 멘붕 세게 왔고, 결국 들뜬 마음이 이어지는 지구과학에까지 영향을 미쳐 안 해도 될 실수를 낳은 모양. 물리 이 새끼 난 그동안 니가 너무 효자여서 양자로 삼고 재산까지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넌 그렇게 항시 웃는 낯으로 나를 대하더니 등 뒤로는 이렇게 칼을 갈고 있었구나, 아, 물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었던가…….
5교시 귀가 및 휴식 영역
시험 보는 사이에 내린 비로 젖은 길을 한참 걸어 지하철을 잡아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두고 간 핸드폰에 사람들의 흔적이 잔뜩이었다. 외투 벗다가 전화 받고, 바지 지퍼 내리다가 톡 대답하고, 윗도리 벗었는데 또 전화받고, 실내복 바지에 한 다리 꿰었는데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돈 보내주신 이모께 압도적 감사를 표하고……. 어쨌든 일 년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는 감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은 오랜만이어서 어색하다.
필적확인 문구라는 게 있다. 문제지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문구를 OMR카드에 자필로 써넣어 수험생의 필적을 확보하는 건데, 올해의 문구는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였다. 나는 1교시부터 총 다섯 장의 OMR카드에 이 문장을 꼬박꼬박 다섯 번 적어 넣으면서, 좋은 문장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크지는 않지만 없지도 않아서 완전히 닫혀 있지 않은 문장. 문장의 주인이 전달하려는 뜻이 선명할수록 읽는 이에게 주어진 여백은 좁아진다. syo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문장이란 그 선명함과 여백 사이의 어느 지점에 아슬아슬하지만 향기롭게 설 줄 아는 글이어서, 이 문장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고, 수험생들이 매 교시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에 괜찮은 한 줄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이 문장은 양광모 시인의 「가장 넓은 길」이라는 시의 마지막 두 행이었다. 전문은 이렇다.
살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원망하지 말고 기다려라
눈이 덮였다고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요
어둠에 묻혔다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
_ 양광모 「가장 넓은 길」
이 전문을 확인하는 순간, 나의 모든 감동은 즉시 사라졌다. 마지막 두 문장만 있을 때 품었던 미미한 여백까지 모조리 사라지며 이 시는 오직 한 가지 길을 간다. 뜻깊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너무도 많이 듣던 이야기이며, 당장 누구라도 누구에게든 해줄 수 있는 이야기이다. 행갈이 없이 연이어 적으면 그냥 격언일 뿐인 이야기를 행갈이 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이 문장의 진의를 알았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서, 마지막 문장만 있을 때 내 마음속에 펼쳐졌던 의미의 넓은 길이, 다른 문장들이 드러나는 순간 내 마음밖에(시인의 마음속이겠지) 존재하는 좁은 길이 되고 만 것이다. 아, 이 시는, 그야말로 살신성인의 시였다. 동시에 마지막 두 문장만 떨어져 나와 독자에게 먼저 읽힌 후에 전문을 읽었을 때, 그 의미를 몸소 체험하게 해주는 넓으면서도 좁아터진 시…….
6교시 내일부터 영역
최근 엿이며 초콜릿 같은 것들을 배부르게 먹다 보니 살이 좀 쪘는데, 아, 그건 최대한 빠르게 복구할지어다. 시험은 잘 봤으나 기대한 만큼 잘 본 건 또 아니다 보니(준비 과정에서 기대가 점점 커진 탓도 있고), 2024년의 syo가 ‘겉보기엔 교수지만 내면은 누구보다 학생’ 캐릭터로 캠퍼스를 누비게 될지, 아니면 N수생의 모질고 거친 삶을 살게 될지는 추세를 조금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모양. 그와 무관하게 어쨌든 한동안은 하루 한두 시간이라도 꾸준히 읽거나 써 볼 생각입니다. 손끝이 너무 굳어서 이러다 멸망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