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판 한겨레를 오늘 봤다. 신간소개란부터 펼쳤는데,

어린이 청소년 새 책란에 '박수근이 그린 동화, 박수근을 그린 동화'라는 표제어가 눈에 든다.

<박수근의 바보온달>과 <꿈꾸는 징검돌>

 

 

가난 탓에 아이들 그림책을 직접 그리고 부인 김복순이 글을 써서 주었던 화가 박수근.

이렇게 완성된 책에는 고구려 이야기 일곱편이 실렸다. 아이들에게 이만한 유산이 더 있을까

싶게 대단한 일화다.  <박수근의 바보온달>은 사계절 출판사에서 일곱편 중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아버지를 찾는 유리 소년',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세편을 골라 한권으로 엮은 책이다.

그림은 원본을 살리고 글은 딸 박인숙씨가 다시 썼다고 한다. 박인숙은 현재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이다. '아버지가 머리맡에서 조곤조곤 읽어주던 그때의 느낌이 책에

그대로 담겼을 것이'라고 기사는 전한다.

표지그림만 봐도 우리가 기존 보아온 박수근의 그림과는 다른 느낌이다.

 

 

 

 

사계절출판사에서 함께 펴낸, 화가의 어린시절을 동화로 재구성한 그림책.

작가 김용철은 화가의 고향 양구에서 40여년 뒤 태어난 그림책작가다.

올해는 박수근미술관을 개관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란다.

미술관은 사계절출판사와 함께 7월 15일까지 고구려 이야기 원화 등을 전시하는

'동화로 보는 박수근'전 을 연다고 한다. 조금만 가까우면 가보고 싶은 전시회다.

 

 

 

 

나무숲 출판사 어린이미술관 시리즈의 <나무가 되고 싶은 화가 박수근>도 참 좋다.

꽂아둔 책을 다시 꺼내보았다.  먼지가 좀 앉아있다.

속표지에 2002년 5월 11일자 신문기사도 오려서 붙여놓았네. 딱 10년 전이다.

 

 

기사는 소설가 박완서님이 쓴 글인데, 당시 박수근이 5월 '문화인물'고 선정된 것을 기념해

그의 기일인 6일 100여명의 미술인과 애호가들이 강원도 양구, 그의 고향을 답사하고 와서

적은 글이다.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는 사람들, 짐을 이거나 아이를 업고 어디론지 총총히

가는 아낙들, 젖 먹이는 엄마, 이런 사람들의 극도로 단순화됐으면서도 속마음까지 비칠 것 같은 섬세한 선이 마치 어느 무욕한 마음이 화강암에 정성껏 경건하게 새겨놓은 부처님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 박완서의 기사내용 중

 

 

당시에도 '박수근의 달을 기념해 서울 갤러리현대에선 19일까지 '한국의 화가 박수근' 전이 열리고 있다고 적혀있다.

2002년 3월 29일자 신문기사도 오려 붙여뒀는데,

박수근 유화 '초가집'이 4억 7500만원에 낙찰되었다든 내용이다. 한국 현대 미술품 중 최고가.

 

살아생전 화가는 몹시 가난했고 제대로 평가 받지도 못했다. 

덩치는 컸지만 겁많고 여린 성품의 화가는 착하고 부지런하게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돌의 느낌을 빌어 표현했다.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 쉰한 살의 삶을 마감하며 남긴 말이다.

 

박수근의 자신의 예술관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하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다채롭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립니다."

                                                                               - [나무가 되고 싶은 화가, 박수근] 41쪽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2-05-07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수근의 그림에 대한 박완서 작가의 말씀이 콕 와닿네요.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보고 싶은 책들이에요. 전시회도 직접 가보면 좋을텐데 가깝지 않으니 원 ㅠ ㅠ... 저 사람 그림은 왜 저렇게 볼품없고 투박할까 싶었는데, 그런 깊은 뜻이 었었군요. 선한 사람, 돌 같은 형상...

프레이야 2012-05-08 19:13   좋아요 0 | URL
조금만 가까워도 가보고 싶은 전시회죠.^^
수다님, 돌처럼 묵묵히 서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어요.

2012-05-07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8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2-05-08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가 되고 싶은 화가 박수근만 있어요, 사계절에서 나온 책 사고 싶어 나도 광고에 올렸는데... ^^
막내 이모가 양구에 사는데 한번도 못 가봤어요.ㅜㅜ

프레이야 2012-05-08 19:15   좋아요 0 | URL
양구에 친척이 사시니 언젠가는 가보실 수 있겠네요.
나무숲, 어린이미술관 시리즈 중 박수근 것이 참 마음에 들어요.^^

水巖 2012-05-0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책도 나왔군요. '나무가 되고 싶은 화가, 박수근' 은 예전에 사주었는데 손주의 책 목록이 늘어나게 되겠네요.

프레이야 2012-05-08 19:17   좋아요 0 | URL
진석이는 정말 복이 많아요. 수암님같은 분이 할아버지니까요.^^
오늘 꽃은 다셨어요? 진석이가 가만 있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저 신간 둘 참 탐나는 책이에요. 전 이제 아이들이 다 자라서 덥석 사게 되진 않을 것 같지만요.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신간평가단, 오랜만이다. 언제였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5월부터 11기 신간평가단 에세이 부문에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다. 즐기자!

 

첫번째 미션, 신간 에세이로 주목되는 책 소개.

 

 

1.

 이건 뭐 대박!! 요즘 아니 오래전부터 바라기만 바라고 시도해보지 못했던 춤이야기다.

요즘 티비에 '댄싱 위드 더 스타' 시즌 2가 시작했던데, 시즌1 때 아주 재미나게 보았다.

춤, 하면 나는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젊은 여성과 추던 탱고를 떠올린다.

얼마나 멋지던가. 눈 먼 퇴역 장교는 이렇게 말한다.

"탱고는 인생처럼 복잡하지 않아.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라고."

 

소설가 방현희의 춤 에세이 '나는 춤추러 간다'의 목차와 책장을 들춰보니 쿠바 룸바로 시작해

자이브, 삼바, 탱고, 파소 도블레 등등  실제 스포츠댄스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의 육성과 사진을

실어 자신의 에세이로 녹여낸 글이다. 인생의 위안과 용기를 춤에서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목차의 마지막에는 '댄싱 위드 더 스타'도 있네. 우리는 왜 춤을 잘 못 출까.

춤을 추듯 인생을 살고 싶은 나는 대리만족의 길로 이 책이 당긴다.

Shall we dance?

 

 

 

 

 

2

How to live, how to love

 

고 장영희 교수의 인생강의, 문학강의록이라 할 수 있다.

표지도 그녀의 삶처럼 맑고 깨끗하다. 목차를 보면 애학을 가려는, 특히 문학을 공부하려는

청춘에게도 실제적인 멘토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학이 그녀의 삶이었듯,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로 통한다.

 

늘 김경주 시인의 추천사도 끌린다.

- 언젠가 대학 강의실 뒤편에 앉아 장영희 선생님의 강의를 청강한 적이 있다. 시에 대해 따뜻한 질감의 편에서 연정을 품고 계시는 선생님의 물기어린 말들이 오래 귀에 남았다. 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던 그녀의 내면엔 어떤 따뜻한 소란들이 살고 있었을까? 그 후로도 나는 몰래 선생님의 강의를 가끔 훔쳐듣곤 하는 나쁜 학생이었지만 한 번도 그녀는 나를 문밖으로 내보내시지 않았다. 문학에 대한 그녀의 강의는 언제나 도망가는 뒷문이 없었을 테니까.

 

 

 

 

 

 

3.

70년대 각광받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수많은 작품을 쓰고 문제작가로 오래 인기를 누렸던

박범신의 작품을 나는 읽지 않았었다. 93년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3년간을 고독을 힘으로

키우다 다시 문학동네 가을호에 중편 '흰 소를 끄는 수레'로 새로운 작가탄생을 신고한 해가

1996년. 나로선 처음 그의 소설을 접한 건 작년 '은교'였고 그외 그의 짧은 글이나 에세이

 '산다는 것은'을 읽은 정도. 하지만 그는 식지 않는 청년을 내면에 키우고 사는 작가라는 걸

알아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더라.

신작 에세이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에서 그가 사랑하는 대상은 문학이다.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랑함으로 얻게 되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 읽고 싶어진다.

책 속 사진도 근사하다.  책 소개를 하는 이런 구절!

"고요한 호수를 마주 보는 논산 조정리집
저 홀로 가득 차고, 수시로 따뜻이 비어 있는 그곳에서 써내려간

작가 박범신 첫 겨울의 기록"

 

 

 

 

4.

5년여 만에 재출간된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이다.

푸근한 인상을 주는 방송인 이금희의 추천사도 함민복 시인의 따뜻한 밥 같은 시와

잘 어울린다 싶은데, 그의 시처럼 산문도 그럴 것 같다.

 

함민복 시인에게 밥은 특별합니다. 가난한 어머니가 설렁탕집에서 고깃국을 더 먹이려 했던 『눈물은 왜 짠가』 이후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그의 눈에 밥벌이를 위해 바다로 향하고 갯벌을 뒤지는 강화 사람들의 일상이 허투루 보일 리 없었겠지요. 이번에도 그는 밥을 이야기합니다. 징검다리가 되는 밥, 차고 따뜻하고 아늑한 밥을 말합니다. 그의 글은 밥 끓는 냄새 같이 평온합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목소리도 밥 짓는 연기처럼 구수했습니다. 밥처럼 따뜻하고 감사한 그의 글을 많은 분들이 뱃속 든든하게 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금희

 

 

 

 

 

 

 

5.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를 이은 책.

몇 해 전 김제동 환경 토크 콘서트에 간 적이 있다. 여름이라 편안한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가끔 무릎을 꿇기도 하며 재미있기만 하지 않는 솔직하고 진지해 보이는 입담이었다.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도 한 곡 불렀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고 노래는 평범한 정도.^^

이 책에 실린 인터뷰이들도 대체로 다들 끌리는 사람들이다.

김제동의 소망 한 자락에 웃음이 묻어난다.

" 빨리 가야 한다고 재촉하는 소리들만 많은 날들입니다.
이 책이, 이 책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배개처럼, 이불처럼 여러분에게 위안이 되고 휴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쉬었다 가세요.
p.s 이 책의 수익금은 1권과 달리 저의 결혼 자금으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누구와 결혼할지 모르니 잠시 행복해져 봅시다. - 김제동 "

 

그때 토크콘서트에서, 짱짱한 누나가 위로 주루룩 있는 종가 외아들인 자기에게 시집 올 여자가 어디 있겠느냐고,

비가 오면 술을 어떻게 안 먹고 넘어갈 수 있냐고 너스레 떨던 말이 생각나네. ^^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5-0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장영희 샘 책이랑 함민복 시인의 책을 전 왜 못 봤을까요?! 페이퍼 수정의 유혹을 느끼며... --; / 같은 분야 신간서평단이네요. 반가워요~.^^*

프레이야 2012-05-04 07:38   좋아요 0 | URL
섬님 반가워요. 같이 활동하게 되어 더 반가워요.^^
장영희샘 책은 표지도 참 깔끔하고 단정해요.

이진 2012-05-0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 굉장히 부러워요. 굉부네요... (학교에서 유행하는 농담이었구요 ㅎㅎㅎ)
저는 이번에 신간평가단 홀라당 떨어져버렸네요. 10기 에세이 평가단원이었는데 활동을 너무 안했어요 ㅠ
벌 제대로 받고있죠 ㅎㅎㅎ

프레이야 2012-05-04 07:39   좋아요 0 | URL
아하 굉부! ㅎㅎㅎ
한 번 쉬는 것도 좋아요. 다음 번에 다시 해보아요.
학교공부하면서 이런 거까지 하니 대단해요. 굉부~

2012-05-04 08:10   좋아요 0 | URL
이번에 이진군과 함께 에세이 서평단 했으면 좋았을걸.. 아깝네요.^^

맥거핀 2012-05-04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저도 서평단 신간추천글 썼는데, 이 글이 올라와 있어서 반갑네요. 저는 인문 쪽이라 분야는 다르지만, 그래도 이번에 같이 활동하게 되었군요.^^

프레이야 2012-05-04 07:41   좋아요 0 | URL
저도 인문 쪽 지원하려다 부담될 것 같아 조금은 편한 쪽으로 택했어요.
같은 기수, 반갑습니다.^^

순오기 2012-05-04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기로 활동하는군요. 나는 10기로 활동하고 신청하지 않았어요. 요즘 너무 피곤해서 무리겠다 싶어서~ ㅜㅜ
담은 책 다섯 권 중에 함민복 시인 책만 있네요. 다 탐나는 에세이~~~ ^^

프레이야 2012-05-04 07:42   좋아요 0 | URL
언니 잘 하셨어요. 이것까지 하시면 정말 병나시죠. 너무 바쁜 일정에 그만큼 소화해내시는 것도
대단한데요. 함시인 산문집 갖고 계시군요. ^^ 저도 저 위에 다섯 권 다 탐나요.
읽어야할 건 많고 시간은 부족하고.ㅠㅠ 이게 다 정신집중이 안 돼 이래요. 흑..

hnine 2012-05-0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번에 신청했는데 떨어졌어요 ㅠㅠ
대신 다른 어떤 분께서 좋은 기회를 누리시겠지 생각하니 괜찮아지더라고요 ^^

프레이야 2012-05-04 18:25   좋아요 0 | URL
어머낫, 나인님처럼 성실한 평가단을요.ㅠㅠ 이해 안 되는 걸요.
연이어서보다 한 번 쉬시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해요^^

마녀고양이 2012-05-06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프야 언니두 신간평가단 하시는구나.... 우아.
저는 게을러서 못 하는뎅.. 호홋. 좋아보이셔염.

언니언니언니언니..... 요즘 정신없어서, 언니에게 어리광부릴 시간도 별로 없네요, 아쉽당~

프레이야 2012-05-07 16:34   좋아요 0 | URL
에고, 마고님은 그렇게나 바쁜데 무슨 신간평가단까지요.ㅠ
저도 거의 2년만인 것 같아요.^^
저질체력에 수원 친척집 다녀와서 오늘 하루종일 맥 못추고 누워있다 일어나 실컷 먹고
이제 앉았어요. ㅎㅎ
 

 2012년 3월 28일 녹음 시작, 지난주까지 총 28시간 들여 급행으로 완료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서 원작을 읽고 싶어 자주 녹음실로 달려갔다.

리뷰는 일차 편집교정하며 한 번 더 읽고 쓸까 싶다.

 

나의 결론은, 원작이 훨씬 좋더라는 느낌인데 그렇다고 영화가 아주 나쁜 것도 아니었다.

많은 부분 원작의 의미와 상징을 잘 살려냈고 충분히 고심한 흔적도 보였으니까.

나는 보고 또 읽으면서 자연스레 영화와 원작을 비교하게도 되었고

변영주 감독이 고심한 부분은 어떤 것이었을까도 생각하게 되었다.

 

 

 

 

 

 

미야베 미유키가 아주 만족해했다고 하는데, 나로선 영화의 결미가 덜 만족스러웠다.

결미만 말하자면 원작에서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잔함이 영화에선 덜했고 너무 직접적이고 불편했다.

나는 원작의 문학성을 결미가 조금더 살려줬으면 관객에게 주는 여운도 있고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이 남았다. 

하지만 다른 부분은 상당히 만족한 작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영화는 원작의 수많은 등장인물을 적당히 잘라냈는데, 혼마 형사의 가족환경을 좀더 비루하게 한 건 더 나은 선택 같다.

혼마의 피폐한 영혼과 현실로부터 도망가고픈 심리가 신조 교코를 좇으면서 어느새 접점이 되니까.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사람은 역시 혼마 형사다.

그가 신조 교코를 추적할수록 그녀를 꼭 만나야겠다고 집착한 까닭도,

죽은 세키네 쇼코의 동창생 다모쓰가 교코를 만나면 자신이 꼭 제일 먼저 말을 걸게 해달라고 부탁한 까닭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것이다. 그에게서 우리의 숨은 자화상을 보게 되니.

 

너무 커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표식을 막 발견한 것 같은 신선한 경이로움을 느끼며, 혼마는 생각했다.

이쪽에서 뭐라고 묻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당신 혼자 짊어져온 이야기를.

이리저리 도망쳐온 세월에. 숨죽여 살아온 세월에. 당신이 남몰래 쌓아온 이야기를.

시간은 충분하다.

(화차, 483p)

 

뱀은 다리가 없다. 없어도 불편해하지 않고 불행해하지 않는다.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사람은 다리 없는 뱀이면서 다리를 욕망하고 소유하고 싶어하여 불행을 초래한다.

결국 그 욕망은 뱀의 다리가 달려있는 것처럼, 뱀다리를 보여주는, '착각의 거울'을 구매하게 한다.

온갖 것들을 욕망하고 소비하고 소유하고 그 소유욕이 자신을 잠식하도록 내어주는 셈이다.

보다 크고 멋진 집, 번쩍번쩍하는 자동차, 화려한 옷과 가방, 자신을 돋보여줄 허울좋은 명패들,

다 가질 수 없으니 그런 착각을 부여해주는 거울을 사야하고, 그 거울을 사려고 발버둥치는 셈이다.

백화점 의류매장의 거울앞에 서면 날씬하고 롱다리로 보여 그 옷을 사게 되지만 집에 와 입어보면 다른,

그런 경험이 누구듯 있듯이. 이런 거울을 생각해낸 작가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영화도 원작도 말하듯, 개인의 탓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조장하는 욕망에 우리는 발목 잡혀있다.

우리 사회에도 (비싼 학비 탓에) 대학졸업 앞두고 취업은커녕 신용유의자가 되어있더라는 현실이 문제되고 있는 요즘

신용유의자(구. 신용불량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플라스틱 카드의 어두운 손과 맹점에 대해서

원작은 변호사의 입을 빌어 자세히 긴 설명을 한다. 많은 자료와 전문가들의 조언, 실제 조사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놀라운 정보를 들려주는데, 두꺼운 책의 내용 중 줄긋기 할 부분도 많았다.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되 원작 어느 곳에서도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녹음을 하며 20대에서 60대까지의 젊거나 나이든 남자와 여자, 혼마의 어린 아이 사토루와 그의 친구 갓짱 등

적절한 대사로 읽어야할 부분이 많아 나로선 쉽지 않았는데, 신조 교코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원작 어디에도 신조 교코의 목소리는 없었다. 그녀가 가엾은 건 그래서였다.

주변 인물들의 기억과 증언으로 그녀는 존재하고 있었고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고 있었다.

원작을 읽고나니 신조 교코 역에 김민희는 외모상 적격이었다 싶더라.

영화를 보며 왜 하필 김민희를 선택했을까 의아했는데 역시 변감독의 눈이 맞았다. '밀애'의 김윤진처럼.

영화의 마지막 장면, 화려한 상품들이 진열된 백화점 안을 그녀가 맨발로 정신없이 달리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성공이다.

영화 초반, 깊고 어둡고 조용한 숲이 잠든 장면과 핏빛 가솔린 기름 위에서 퍼덕거리던 나비의 가엾은 날갯짓도.

그래서 나의 결론,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다음 녹음 도서는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어제 시작, 4시간 읽어 1/3 정도 나갔다.

"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엄마였던 홀트아동병원 조병국원장의 50년 의료일기"

 

  1958년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후 서울시립아동병원,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근무하며 50년 동안 버려진 아이들, 입양아들과 함께해 온 조병국 의사의 생생한 글이다.

입양아들, 특히 장애를 가진 입양아들에 대한 이야기 하나 하나가 가슴을 찡하게 한다.

정말이지 드라마같은, 눈시울 붉어지는 감동스러운 이야기들이다.

의사라는 직업으로도 기적을 믿고 기적을 여러차례 본 조병국 할머니의사는

1993년 정년을 맞아 홀트부속의원을 퇴임했으니 후임자가 나서지 않아

전 원장 이라는 직함으로 무려 15년이나 더 아이들을 진료하고 있다.

현재 홀트일산복지타운/요양원에서 아이들과 장애인들을 진료하고 있다.

 

이 책을 추천하는 글에서 반가운 이름 셋이 보인다.

작가 박완서, 연기자 신애라, 가수 지누션의 션. 포용과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

 

 

션의 추천사를 옮긴다.

 

이 책에는 캔버스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 같은 한 분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그림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멀리서도 한눈에 튀는 그런 독특한 그림도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에 와 닿고

친근하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은 버려진 아이들을 향한 한 분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과 봉사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조병국 원장님의 이야기를 읽고 마음에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축복합니다.

 

 

예전에는 해외 입양이 많았지만 요즘은 국내입양이 해외입양보다 더 많다고 하니 다행한 일 같다.

아직도 어떤 이유로 파양을 하는 경우가 있어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에게 몇번씩이나 버림 받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증오와 분노로 자해하는 아이도 있어 마음 아픈 일이다. 갖가지 사연과 고난, 그런 걸 인내로 포용하고 극복한

엄마천사들도 있더라, 우리 사회에.  아이의 자해와 폭력이 더 관심 가져주고 더 사랑해 달라는 말이었으니.

그 아이들이 사무치게 그리워 한 것은 여전히 '엄마'였다니.

요즘 작은딸이 사춘기를 겪는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짜증이 늘었다. 자주 투덜대고 화를 낸다.

아이게게 '엄마'가 필요한 것이구나 싶다. 좀 불성실한 '엄마'가 좀 반성되네. 아이 마음에 좀더 귀기울여야겠다.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는 세상을 살만한 곳이라고 믿고, 믿게하는 사람들의 극적인 이야기다.

저마다의 아픔을 딛고 오늘도 기적처럼 하루를 살아낸 우리, 저마다의 이야기 속에서 기쁨 한 자락 찾을 수 있기를...

 

 

기적의 또 다른 이름은 '간절함'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신은 그 기도에 화답한다. 그게 바로 기적이다.

의학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병든 고아들에게 일어난 수많은 기적은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리라.

(26p)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12-04-2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참 영화적이었죠 :) 저도 원작 쪽을 훨씬 좋아했어요!

프레이야 2012-04-27 09:18   좋아요 0 | URL
네, 웬디양님, 저도 원작이 좀 더 좋았어요.
근데 영화의 몇몇 장면이 참 기억에 남아요. ^^

마노아 2012-04-27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의 결말이 원작의 결말에 많이 못 미친 게 아쉬웠고, 조성하 씨 캐릭터 설정은 원작보다 낫다고 여겼어요. 변영주 감독님은 백상영화제 수상 소감도 뭉클했어요. 멋진 분이에요.^^

프레이야 2012-04-27 09:32   좋아요 0 | URL
앗, 마노아님 실시간 ㅎㅎ
저도 변감독 참 좋더라구요. 씩씩하고 멋지고. 원작의 긴 글을 영화는 어떤 한 장면으로도 함축하여
은유할 수 있다는 것, 작품을 참 잘 이해하고 작업에 임했구나 싶었어요. 결말 아쉬운 건 동감^^
미미여사 작품 처음 읽었는데 몇 가지 읽어보고 싶게 된 작품이에요.

페크pek0501 2012-04-2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저는 기적을 믿어요.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믿고요.
2. 사춘기의 딸은 그냥 두고 지켜보는 게 좋다는, 제 친구들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2~3년 지나면 괜찮아진대요. 괜히 잘못 건드리면 싸우게 되어 모녀 간 사이만 나빠진다고 하네요. 우리 둘째도 중학생 때 그랬는데, 고1 되더니 나아졌어요. ㅋ
3.<화차>, 워낙 화제작이라, 영화를 볼까 원작을 읽을까 고민 중이에요. 제가 이렇게 한 박자 늦습니다. 아니 몇 박자 늦나요?ㅋ 어떤 게 나을까요? 둘 다 보면 좋겠지만...

4. 신문 보니깐 어릴 때 받은 스트레스가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하네요. 왕따를 경험한 아이들이 성인된 후에 보니 건강이 안 좋더라는 통계가 있어요. 마찬가지로 파양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몸 건강에 안 좋겠지요. 아이가 상처 받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요. 자신으로 인해 한 생명이 정신과 몸을 다 망칠 수 있음을 마음에 새겨 둬야 할 것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

프레이야 2012-04-27 23:29   좋아요 0 | URL
사춘기.. 맞아요. 큰애도 그랬어요.ㅎㅎ 때가 지나가야 되는 일이 많은 것 같아요.
화차는 둘 다 보시라고 부추기고 싶어요.^^
어릴 때 받은 스트레스, 그걸 상처라고 말해도 될까요. 그게 오래도록 미치는 영향,
작지 않은 것 같아요. 상처를 대물림 하지 않아야하는데 말에요.ㅠ
페크님, 편안한 봄날밤 보내세요~~
 

 

 

      

       우리 큰딸~

       일년 하고도 두달 전 모습이구나.

       고3을 앞두고 아빠와 둘이서, 기숙사에서 돌아온 주말 잠시 바람쐬러 간 해운대 바다.

       불안하고 힘들었을 텐데 잘해줘서 고맙다.

       눈이 그렇게 아팠던 것도 몰랐다. 그렇게 불안했던 것도.

       이번 주말 대학 첫 기말고사 후, 체육대회 하고나서 온다고 하니 기다릴게.

       그렇게 집에 오고 싶다고 하더니...

       하숙집 반찬 참 사소하다며 히죽 웃던 너

       첫 시험 '진보와 보수' 망쳤다며 걱정하던 너

       대학교양시험이란 게 그렇단다. 달달 외우는 거 싫어하는 너로선 황당했겠다.

       그래, 그동안 먹고 싶어도 못 먹은 맛난 것 같이 먹고 쉬다 가렴.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2-04-25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뻐요! 눈이 부신 나이~~~~~^^
아마도 저 모습은 엄마의 저 나이때쯤의 모습이 담겨 있겠죠.
모녀의 행복한 만남 응원해요~~~~

울 아들도 오늘 내일 시험쳐요.
오늘 시험은 잘 친 거 같대서 "문제가 뭐였는데?" 물었더니
그렇게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말래요.ㅋㅋ
우리딸은 7월 첫주 친정엄마 생신때나 볼 수 있으려나.

프레이야 2012-04-26 08:24   좋아요 0 | URL
얼마전 단발머리했다고 사진찍어 보내주더군요. 일년 전보다 좀 성숙해보였어요.
아들도 첫 시험 잘 보고 있겠지요.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말라니, 비슷하네요.ㅎㅎ
언니 큰딸은 어떻게 잘 지내고 있겠지요?

hnine 2012-04-26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보고 싶으셨으면...
저에게도 언젠가 올 날이니 오늘을 맘껏 누려야겠습니다.

저 사진 참 좋아요. 싱그러움이 사진 밖으로 막 뚫고 나오는듯 하네요 ^^

프레이야 2012-04-26 08:34   좋아요 0 | URL
굿모닝~ 나인님^^ 다린이랑 지금 시간 맘껏 누리시길요. 금방이에요.^^
작은애보다 큰아이랑은 어릴 적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나도 첫경험이라 서툴고 서로
힘든 점도 있었어요. 돌아보면 그 시간들이 소중하네요.

blanca 2012-04-2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부시네요. 예뻐요.

프레이야 2012-04-26 10:30   좋아요 0 | URL
호호~ 분홍공주도 금방 어여쁜 아가씨로 자랄 거에요^^

다락방 2012-04-2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번 사진으로 뵀던 프레이야님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어요!!

프레이야 2012-04-26 10:32   좋아요 0 | URL
그래요? 헤헤~ 지금은 좀 더 아가씨티가 나요~

세실 2012-04-26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프레이야님이랑 참 많이 닮은 모습^*^ 이뻐라.....볼수록 기품있네요.
그렇게 떠나 보내고 나면 많이 그립겠죠.

프레이야 2012-04-26 19:38   좋아요 0 | URL
세실님 보림이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보면 또 투닥거리는데 떠나면 애잔하고요.ㅠ

마노아 2012-04-2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아, 프레이야님의 얼굴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이 분위기! 여자라도 반할 지경이에요.^^

프레이야 2012-04-26 19:38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우잉~~ ^^

진주 2012-04-26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아주 좋아요~~~

프레이야 2012-04-26 19:39   좋아요 0 | URL
진주님, 그동안 많이 바빴어요? 별일 없죠?
오랜만 반가워요 좋아 아주 좋아요.^^

2012-04-27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7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8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8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비 2012-04-30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이뻐욤 ^^
엄마를 닮아서 이쁜거죠? ^^

프레이야 2012-05-01 00:28   좋아요 0 | URL
실비님^^ 절 닮은 구석도 있지만 저보다 이뻐요^^
 

이틀 화창한 얼굴을 보이던 하늘이 봄비를 다시 내려주시고, 나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늘아침, 창비시선 신간알리미로 마음에 확 들어오는 시집이 선물처럼 내게 왔다.

신간알리미가 와도 곧바로 잘 담지 않는데 이건 장바구니로~

 

김중일 시인의 [아무튼 씨 미안해요]

 

   김경주 시인의 추천사도 못지 않게 유혹한다.

 

 

 : 김중일의 시는 허수와 같은 호명으로 가득하다. 그의 호명부에는 “낯선 자의 인기척”이 순열을 잃고 배회한다. 그의 언어들은 어느 나라의 동화인지 알 수 없는 세계로 열기구를 타고 날아간다. 그가 만든 이 열기구의 마법에서 “고양이는 새의 그림자”로 호명되기고 하고 “단 한번도 슬픔이 지나간 적 없는 새의 얼굴”이나 자신의 “무릎에 물을 주는 아이”나 “달의 주요성분” 같은 망중한의 이름을 얻기도 한다. 그의 마법에 걸려 ‘세계’로 들어온 화자들은 한번도 잠들지 못한다. 아무도 모르는 시간 속으로 불쑥 우리를 불러들일 줄 아는 이 호명술을 가진 시인은 자신에게 지금까지 들려준 적 없는 이야기의 주형을 지어놓고 그들이 스스로 꿈틀거리기를 기다린다.

(알라딘, 김경주 시인 추천사에서 일부 가져옴)

 

 

 

 

 

지난 주 도서관에서 빌려온 시집 3권, 이것들 야곰야곰 맛보고 있다. (각각 문학과지성, 창비시선, 문학동네)

 

 

 

 

 

 

 

 

 

 

 

 

 

 

 

 

 

 

 

지난 토요일 하루종일 몹시도 내리던 봄비, 그 탓만은 아니지만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아팠는데

그 시간에 고의로 내 마음을 후벼파고 내 마음을 우롱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더라.

어리석게도 믿으려 무던히 애썼던 수많은 시간이 일순간 하찮은 것이 되고

용서하지 않아야할 일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서 내치는 것으로.

홀가분하다. 충분하다. 나를 온전히 믿고 오래 바라보며 지켜준 대상들에 계절처럼 화답할 일만 남았다. 

버려서 빈 공간에 시(詩)를 좀 채워야겠다. 

언젠간 주검(屍)이 될 시(時)를. 있어도 없었던 많은 '시'를.

 

[내 생의 중력]은 좋은 시 엮음시집이다. 홍정선, 강계숙, 엮은 이 두사람의 취향이 작용했겠지만

엄선한 것이라 대체로 어긋나지 않는 것 같다. 익히 아는 시와 시인도 있고 아닌 것도 있더라.

이렇게 통속미 당당한 뜨끈한 시도 있다. 류근의 '반가사유'. 

좋다. 이 시 담긴 류근의 시집 [상처적 체질]도 장바구니로.^^

 

     

                                             

 

 

 

 

 

 

 

 

 

 

 

 

 

 

반가사유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 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 류근, [상처적 체질](375)에서                                         

 

 

 

[내 생의 중력] 중, 100-101p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2-04-25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프레이야님. 올리신 [반가사유] 시 너무 좋아요! 특히나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이 부분과 또 이 부분요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아, 이 시 정말 좋으네요! [내 생의 중력]을 살까 싶은데 엮음시집이라 [상처적 체질]을 살까 어쩔까 싶네요. 이 시 정말 좋아요. 오늘 비가 와서 더 그런가봐요. ㅠㅠ


2012-04-25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6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6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6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6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5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5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04-28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 너무 좋아요.
류 근 시의 통속적인 배경도 좋고.. 사실은 이런 여자가 너무 좋아요 ㅎㅎ 둔탁하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 영화 보러 가는 여자,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 그런 여자와 알고 지내고파요.

프레이야 2012-04-29 17:46   좋아요 0 | URL
히히~ 만치님 제가 그런 여자 되어드릴게요.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