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8일 녹음 시작, 지난주까지 총 28시간 들여 급행으로 완료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서 원작을 읽고 싶어 자주 녹음실로 달려갔다.
리뷰는 일차 편집교정하며 한 번 더 읽고 쓸까 싶다.
나의 결론은, 원작이 훨씬 좋더라는 느낌인데 그렇다고 영화가 아주 나쁜 것도 아니었다.
많은 부분 원작의 의미와 상징을 잘 살려냈고 충분히 고심한 흔적도 보였으니까.
나는 보고 또 읽으면서 자연스레 영화와 원작을 비교하게도 되었고
변영주 감독이 고심한 부분은 어떤 것이었을까도 생각하게 되었다.
미야베 미유키가 아주 만족해했다고 하는데, 나로선 영화의 결미가 덜 만족스러웠다.
결미만 말하자면 원작에서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잔함이 영화에선 덜했고 너무 직접적이고 불편했다.
나는 원작의 문학성을 결미가 조금더 살려줬으면 관객에게 주는 여운도 있고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이 남았다.
하지만 다른 부분은 상당히 만족한 작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영화는 원작의 수많은 등장인물을 적당히 잘라냈는데, 혼마 형사의 가족환경을 좀더 비루하게 한 건 더 나은 선택 같다.
혼마의 피폐한 영혼과 현실로부터 도망가고픈 심리가 신조 교코를 좇으면서 어느새 접점이 되니까.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사람은 역시 혼마 형사다.
그가 신조 교코를 추적할수록 그녀를 꼭 만나야겠다고 집착한 까닭도,
죽은 세키네 쇼코의 동창생 다모쓰가 교코를 만나면 자신이 꼭 제일 먼저 말을 걸게 해달라고 부탁한 까닭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것이다. 그에게서 우리의 숨은 자화상을 보게 되니.
너무 커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표식을 막 발견한 것 같은 신선한 경이로움을 느끼며, 혼마는 생각했다.
이쪽에서 뭐라고 묻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당신 혼자 짊어져온 이야기를.
이리저리 도망쳐온 세월에. 숨죽여 살아온 세월에. 당신이 남몰래 쌓아온 이야기를.
시간은 충분하다.
(화차, 483p)
뱀은 다리가 없다. 없어도 불편해하지 않고 불행해하지 않는다.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사람은 다리 없는 뱀이면서 다리를 욕망하고 소유하고 싶어하여 불행을 초래한다.
결국 그 욕망은 뱀의 다리가 달려있는 것처럼, 뱀다리를 보여주는, '착각의 거울'을 구매하게 한다.
온갖 것들을 욕망하고 소비하고 소유하고 그 소유욕이 자신을 잠식하도록 내어주는 셈이다.
보다 크고 멋진 집, 번쩍번쩍하는 자동차, 화려한 옷과 가방, 자신을 돋보여줄 허울좋은 명패들,
다 가질 수 없으니 그런 착각을 부여해주는 거울을 사야하고, 그 거울을 사려고 발버둥치는 셈이다.
백화점 의류매장의 거울앞에 서면 날씬하고 롱다리로 보여 그 옷을 사게 되지만 집에 와 입어보면 다른,
그런 경험이 누구듯 있듯이. 이런 거울을 생각해낸 작가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영화도 원작도 말하듯, 개인의 탓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조장하는 욕망에 우리는 발목 잡혀있다.
우리 사회에도 (비싼 학비 탓에) 대학졸업 앞두고 취업은커녕 신용유의자가 되어있더라는 현실이 문제되고 있는 요즘
신용유의자(구. 신용불량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플라스틱 카드의 어두운 손과 맹점에 대해서
원작은 변호사의 입을 빌어 자세히 긴 설명을 한다. 많은 자료와 전문가들의 조언, 실제 조사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놀라운 정보를 들려주는데, 두꺼운 책의 내용 중 줄긋기 할 부분도 많았다.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되 원작 어느 곳에서도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녹음을 하며 20대에서 60대까지의 젊거나 나이든 남자와 여자, 혼마의 어린 아이 사토루와 그의 친구 갓짱 등
적절한 대사로 읽어야할 부분이 많아 나로선 쉽지 않았는데, 신조 교코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원작 어디에도 신조 교코의 목소리는 없었다. 그녀가 가엾은 건 그래서였다.
주변 인물들의 기억과 증언으로 그녀는 존재하고 있었고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고 있었다.
원작을 읽고나니 신조 교코 역에 김민희는 외모상 적격이었다 싶더라.
영화를 보며 왜 하필 김민희를 선택했을까 의아했는데 역시 변감독의 눈이 맞았다. '밀애'의 김윤진처럼.
영화의 마지막 장면, 화려한 상품들이 진열된 백화점 안을 그녀가 맨발로 정신없이 달리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성공이다.
영화 초반, 깊고 어둡고 조용한 숲이 잠든 장면과 핏빛 가솔린 기름 위에서 퍼덕거리던 나비의 가엾은 날갯짓도.
그래서 나의 결론,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다음 녹음 도서는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어제 시작, 4시간 읽어 1/3 정도 나갔다.
"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엄마였던 홀트아동병원 조병국원장의 50년 의료일기"
1958년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후 서울시립아동병원,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근무하며 50년 동안 버려진 아이들, 입양아들과 함께해 온 조병국 의사의 생생한 글이다.
입양아들, 특히 장애를 가진 입양아들에 대한 이야기 하나 하나가 가슴을 찡하게 한다.
정말이지 드라마같은, 눈시울 붉어지는 감동스러운 이야기들이다.
의사라는 직업으로도 기적을 믿고 기적을 여러차례 본 조병국 할머니의사는
1993년 정년을 맞아 홀트부속의원을 퇴임했으니 후임자가 나서지 않아
전 원장 이라는 직함으로 무려 15년이나 더 아이들을 진료하고 있다.
현재 홀트일산복지타운/요양원에서 아이들과 장애인들을 진료하고 있다.
이 책을 추천하는 글에서 반가운 이름 셋이 보인다.
작가 박완서, 연기자 신애라, 가수 지누션의 션. 포용과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
션의 추천사를 옮긴다.
이 책에는 캔버스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 같은 한 분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그림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멀리서도 한눈에 튀는 그런 독특한 그림도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에 와 닿고
친근하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은 버려진 아이들을 향한 한 분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과 봉사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조병국 원장님의 이야기를 읽고 마음에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축복합니다.
예전에는 해외 입양이 많았지만 요즘은 국내입양이 해외입양보다 더 많다고 하니 다행한 일 같다.
아직도 어떤 이유로 파양을 하는 경우가 있어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에게 몇번씩이나 버림 받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증오와 분노로 자해하는 아이도 있어 마음 아픈 일이다. 갖가지 사연과 고난, 그런 걸 인내로 포용하고 극복한
엄마천사들도 있더라, 우리 사회에. 아이의 자해와 폭력이 더 관심 가져주고 더 사랑해 달라는 말이었으니.
그 아이들이 사무치게 그리워 한 것은 여전히 '엄마'였다니.
요즘 작은딸이 사춘기를 겪는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짜증이 늘었다. 자주 투덜대고 화를 낸다.
아이게게 '엄마'가 필요한 것이구나 싶다. 좀 불성실한 '엄마'가 좀 반성되네. 아이 마음에 좀더 귀기울여야겠다.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는 세상을 살만한 곳이라고 믿고, 믿게하는 사람들의 극적인 이야기다.
저마다의 아픔을 딛고 오늘도 기적처럼 하루를 살아낸 우리, 저마다의 이야기 속에서 기쁨 한 자락 찾을 수 있기를...
기적의 또 다른 이름은 '간절함'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신은 그 기도에 화답한다. 그게 바로 기적이다.
의학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병든 고아들에게 일어난 수많은 기적은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리라.
(2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