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성석제 지음, 김경호 그림 / 창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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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맛있는 음식이라면 환장을 하는 나는 어젯밤 도서전시회 준비 때문에
코엑스에 가 있다는 남편의 말에 반색을 하며  1층에 오므라이스를 그렇게 잘하는 집이 있다는데 
알아보고 1인분 사오라고 부탁했다.
여직원들에게 물어보고 가게 이름(오므토 토마토)을 알아낸 남편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종류가 많다는데 뭘로 사갈까?

--새우와 해산물 들어간 종류!

어제 저녁 우리 집 메뉴는 전날 먹고 남은 감자탕 국물이었다.
선거일에 주소지가 서울로 돼 있어 연남동에 간다는 동생 부부에게 거기 살 때
단골로 가던 '송가네 감자탕'을 사오라고 시켰던 것.
투표를 마친 동생네 가족이 감자탕을 사와서 실컷 먹고 남은 국물을 어제 저녁
주요리(!)로 떠억하니 내놓았으니, 나의 뻔뻔함도 정말 극에 달한다.

밤 열 시경에 남편이 오므라이스를 사들고 돌아왔다.
새우와 홍합, 주꾸미 등이 제법 풍성하게 든 크림소스는 따로,
깔끔한 도시락 속의 오므라이스는 노란 달걀지단이 찢어지지도 않고 봉긋하니 볶은 밥을
잘 감싸고 있었다.

--절반은 남겨놨다가 아침에 아이들 먹여야지.

나는 인심 쓰듯 반을 덜어내고 접시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잠깐 돌렸다.
흰우유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되고 치즈나 버터라면 잘색인 내 입에는
그 서양식 소스를 덮어쓴 오므토 토마토의 해산물 오므라이스가 썩 맛있는 편이 아니었다.
대학 앞 분식집의 오므라이스가 내 입에는 훨씬 맛있게 느껴지니......
아무튼, 유명한 맛집의 오므라이스를 마침내 맛봤다는 만족감으로
어제는 달디단 잠을 잤다.

오므라이스와 감자탕에 필 받아, 오늘 아침 마침 눈에 띈  성석제의 음식 산문집 <소풍>을 읽었다.
제주도 남쪽의 표선면 면사무소 앞 버스정류장 근처 한 블록집,
그 흔한 간판도 하나 없이 가정집에서 국수를 말아내는데, 주인장 이름이 '춘자'여서
단골들 사이에는 '춘자싸롱'으로 통한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는 춘자국수의 국물에 관한 '쎄미나'가 열려 제주도에서만 나는 어떤 물고기 새끼를
국물 내는 데 사용한다는 비밀을 밝혀냈다고 한다.

두부니 묵밥이니 냉면이니 하는 가지가지 음식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도라무깡을 엎어놓은 시장통의 허름한 식당이나 선술집을 미치게 사랑하는  나에게는,
그 식당들의 시금털털하고 구수한 냄새와 담배연기와 잡담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해
이 책의 장면장면들이 너무나 정겨웠다.
직접 만든 두부를 한 모에 3500원에 판다는 경기도의 한 원조 묵밥집의 주인장의 얼굴이
궁금하질 않나.

'그 얼굴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138쪽)

한사코 소주병을 달라고 하더니 마침내 낚아채 간  생태찌개집 노파의 말은 또
얼마나 당당하고 흥겨운가!

"술이란 지집이 따러야 맛이제. 자,  받어, 이 잔."(79쪽)

각설하고, 춘자싸롱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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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6-06-02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오늘 점심은 국수로 할까요?

waits 2006-06-0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이웃으로 살면서 친한 척 하면 가끔 얻어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나마 식탐(?)은 별로 없는 걸 다행이라 여깁니다...^^(야식배달 남편님과 반 떼놓는 모정에 추천을~)

Mephistopheles 2006-06-0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봐도 로드무비님은 알라딘의 `런치의 여왕'이라니까요~~!!
여왕만세..!!

blowup 2006-06-0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은데도, 별로 당기지 않는 책이에요. 성석제의 그 놀라운 이야기들이 제겐 대충 그래요.
-춘자살롱이라는 프렌치 레스토랑도 있다는데요.^-^(그런대로 먹히는 키치인 모양입니다.)
-저도 그랬어요. 오므라이스 전문점들의 맛이 의외로 패스트푸드 같았어요.

mong 2006-06-0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맛집도 맛집이지만
만들어 주시는 주인 아주머니 얼굴이 궁금해 지는군요~

2006-06-02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6-0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식당 주인 얼굴이 궁금하게 만드는 것도 이 작가의 역량이죠.^^

namu님,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읽었어요.
춘자살롱은 언젠가 또 어느 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성석제 씨의 글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 책과 그는
궁합이 잘 맞더군요.
오므라이스도 그렇고 전 역시나 오래되고 꾀죄죄한 식당 음식이 좋아요.
찌그러진 양푼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전생이 의심스러울 정도랍니다.^^

메피스토님, 책장수님이 어디에 있다 하는 전화를 받으면
그 부근에서 사오라고 할 음식 뭐 없을까 짱구를 굴립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귀여워요. 호호~~

나어릴때님, 식탐이 없으시다니 부럽사옵니다.
전 싸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합니다.
가격 면에서 그나마 다행이죠.
직접 사들고 나르는 책장수님은 좀 괴로울 거예요.^^;;

진주님, 아직 점심을 안 드셨어요?
국수, 너무 좋아요.
맛나게 드세요.^^

sandcat 2006-06-0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 근처 롯데슈퍼에서 멸치국수를 천 원에 팝니다. 국수 사리에 양념장, 김가루, 김치만 얹어, 자리도 없이 서서 먹어야 하는 덴데 맛은 그럭저럭 괜찮더라구요. 근데 기분이 이상하데요. 대형할인마트에서 먹는 양은냄비 멸치국수라니.. 로드무비 님이라면 아무리 국수 맛이 그럴 듯해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을지도.

2006-06-02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6-06-0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랑 가정을 꾸리셨네요.
그 분을 코엑스에서 오늘부터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면 뵐 수 있겠군요.^^

로드무비 2006-06-02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호호,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사옵니다.
게으르다는 면에서 죽이 맞는 바람에!
이상한 결합도 다 있지요?^^

추천만 하고 님, 그러시면 섭하죠.
가끔 모습 좀 보여주세요.^^

샌드캣님, 양은냄비 멸치국수 사정없이 땡기는데요?
단돈 천 원이라니, 일부러라도 한 번 가봐야겠는 걸요.^^

야클 2006-06-02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춘자싸롱에서 커피도 아니고 국수라니요. 아참, '국수'하니까 또 부담되네. -_-+

nada 2006-06-0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허름한 식당과 선술집 미치게 사랑합니다...ㅋㅋ 닭발과 순대국두요. 양푼이를 좋아하셔서 전생이 의심스러우시다구요? 전 하도 입맛이 촌스러워 해방둥이가 아닌가 착각할 때도 있답니다..ㅎㅎ

에로이카 2006-06-0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연남동 일대가 쏠솔하게 맛있는 집들이 많은 것 같아요. 순대국집들도 그렇고, 무슨 산채비빔밥집도 그렇고...
- "도라무깡을 엎어놓은 시장통의 허름한 식당이나 선술집"... 아.... 정밀 미치도록 그립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여름이니 좀 덜하네요...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코로는 맛있는 냄새가, 안경으로는 김이 덥석 서리던...

로드무비 2006-06-03 0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잘 아시는군요. 연남동 기사식당 골목 분위기.
그런데 제가 아주 오래 전 떠듬떠듬 옮겨 쓴 적 있는 전영경 시인의 시들
('오래된 수첩' 카테고리) 아세요?
그놈의 도라무깡이 어쩌구 하는 시도 있었는데.
안 읽으셨다면 보여드릴게요.
문을 열면 냄새와 훈김이 확 달려드는 그 분위기를 잘 아시는 것 같아서.^^

꽃양배추님, ㅋㅋ 전 순대국은 순대만 넣어달라고 해서 먹어요.
그 이상하게 뻐등뻐등하고 흐물흐물한 것들이 싫더라고요.
내장탕 이런 것도 못 먹고.
미식가는 못됩니다.
꽃양배추님이 해방둥이라면 전 이미 이 세상에 없겠군요.
우스워 죽겠습니다요.^^

야클님, 사방에 매복하고 있는 국수 그릇들입니까?=3=3=3


에로이카 2006-06-0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드무비님. 보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지요? '오래된 수첩' 카테고리가 지금은 안 보이네요..

로드무비 2006-06-04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마음에 드셨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춘자 사랑 2010-07-13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춘자국수를 먹어본 일 인입니다. 죽여주는 맛입니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가게에 탁자라고는 2개밖에 없는..그야말로 구멍 가게지요. 가게 안은 멸치 우려내는 냄새로 가득차서 한 치의 틈도 없어요. 가면 방 안에서 춘자 아줌마가 느릿느릿 나오셔서 국수를 삶기 시작하십니다. (아, 멸치 육수는 휴대용 가스렌지에서 계속 우러나고 있고요.) 고명이니 이런 거? 없습니다. 그냥 고춧가루에 깨소금. 채썬 당근 정도? 그게 제주도 국수이지요. 하지만 그 맛은 고급 호텔의 어느 우동과도 견줄 수 없는 맛입니다. 여기는 꽤 유명한 곳이라 손님이 많아요. 그래서 자리가 모자랄 때가 많아요. 그럴 때는 먹고 있던 사람들도 기다란 테이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주죠. 다른 사람들이 합석을 할 수 있게요. 그러면 두 팀, 세 팀이 한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이건 아줌마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 정말 멋진 곳이죠? 제주도 오게 되면 일부로라도 한 번 꼭 오셔서 드셔보세요. 아! 원래 2000원이었는데 얼마 전 올라서 2500원 입니다~^^ 곱배기는 3000원이고요. 콩국수도 있어요.

로드무비 2010-07-13 14:1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입에 침이 막 고이네요.
제주도 가면 머무는 동안 매일 곱배기로 먹어야겠습니다.
비빔국수는 없나 몰라요.^^

춘자 아줌마가 방안에서 느릿느릿 나오셔서 국수를 삶기 시작하신다니
생생한 묘사!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네요.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지음 / 황금나침반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를 보러 가는 차 안에서 읽을 책으로 급히 가방에 쓸어넣은 게 공지영의 이 책과
<애욕전선 이상없다>라는  웃기는 제목의 메가쇼킹 만화책이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가볍게 읽겠다는 그런 심리였겠지.

가볍게 읽겠다 생각하고 망설이다 인심쓰듯 산 이 책에서
선글래스를 벗어버린 작가를 만났다.
아주 오래 전, 영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주인공인 세 여배우들과
야외 로케이션 현장에서 선글래스를 끼고 앉아 미모든 뭐든 하나도 꿀리지 않는다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텔레비전 연예정보 프로그램에서 보고
왠지 그녀를 경원하게 되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자신이 인상깊게 읽은 시나 어떤 구절을 왼쪽 페이지에 소개하고 나서
한 편 한 편 자신의 글을 실은 이 책의 방식이 참 마음에 들었다.
마야코프스키와 네루다와 호세 곤잘로스 하우스와 이백과 문태준 등의 시와 글이
J에게로 시작하는 서간문 형식의 글들과 잘 어울렸다.
겉만 번지르르한 구절들이 아니라, 이 작가가 마음으로 만난 글들이었다.
 
우체국 창구에서
나는 고향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까마귀처럼 영락해서
구두도 운명도 닳아 떨어졌다.
매연은 하늘에 자욱하고
오늘도 아직 일자리는 찾지 못했다.
                            --하기가와 사쿠타로 詩

언젠가 황인숙 씨의 산문집을 읽고 <미스 론리하트>  등 책을 7,8권 소개받았는데,
이 책에서도 산도르 마라이니 하기가와 사쿠타로니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좋은 작가들과 책을 무더기로 소개받았다.

그동안의 삶은 "한 신에서 다음 신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무대의상을 벗어버렸다"는 작가.
"어떻게 살겠다고 다시는 결심하고 싶어지지 않게" 되기까지 그간의 마음의 여정이 잡히는 듯했다.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어영부영 넘겼던, 혹은 얼렁뚱땅 넘어갔던 모욕과 상처들이
뜬금없이 불시에 들이닥친다.
이 책을 읽는 중 스르르 두어 개의 꼬인 실이 풀어졌다.

오늘 아침처럼 어느 날은 신문지에 손을 베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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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05-31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뭐랄까, 이 리뷰도 로드무비님 노트 한 페이지로 쑥 들어가버린 느낌...
촉촉하고,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한가한 오후의 맑은 국화차 같은 느낌...

반딧불,, 2006-05-3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향기 듬뿍입니다.
잔잔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그 솜씨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듯 합니다..

치니 2006-05-3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히 공지영 책이 안 땡기는데, 그 괜히 밑에는 뭔가가 있을거라 스스로 짐작도 하면서 이 책을 보관함에 넣기를 미루고 있어요. 그런데 이거 보니까 그냥 넣어지네요.
^-^

nada 2006-05-3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방울은 전혀 혼자 같지 않거든? 흥!
..했더랬어요. 괜히 미워했던 학급 친구와 화해시키는 듯한 리뷰네요. 너무 좋아요.

sudan 2006-06-01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 그래도 전 공지영 소설이 싫어요.

sudan 2006-06-0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런 코멘트는 왜 달았을까요. -_-
지울까 했지만 어차피 메일로 간건 보실테니까 그냥 둘께요. 헤헤.

건우와 연우 2006-06-0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보다는 로드무비님의 리뷰에 추천입니다. 저도 공지영에 대해선 읽으면서도
왠지 개운찮은 것이 있었는데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로드무비 2006-06-0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단숨에 읽었습니다.
담백하게 쓴 글들이라 와 닿던데요?

수단님, 뭘 잘못 눌러서 메일로는 안 와요.ㅎㅎ
몇 달 됐는데.
싫은 건 싫은 거죠, 뭐.
그런데 <수도원 기행>보다 이 책이 더 좋더군요.

꽃양배추님, 제목이 너무 감상적이라고 생각했어요.ㅎㅎ
어느 詩句더군요.
'미워 했던 학급친구'라는 표현이 절묘합니다.

치니님, 그러니까요. 좀 이상한 심리가 있었는데.
어색하게 헤어졌다 순한 얼굴로 다시 만난 듯합니다요.^-^

반딧불님, 책 속의 구체적인 얘기들을 꺼내지 않으면서
뭔가 가볍게 전달하고 싶었는데 그게 님께는 먹힌 듯하여 기쁘옵니다.^^

플레져님, 이왕이면 국화주라고 해주시옵소서.ㅎㅎ
국화차는 플레져님이죠.
 
착한 사람 문성현 - 창비소설집
윤영수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윤영수라는 소설가 하면, 내게는 무조건 <사랑하라, 희망 없이>라는 첫 창작집 제목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달포 전 잠실의 교보문고를 구경하러 갔다가 그 부근이 직장인 남동생의 안내로
마포소금구이 식당에 들렀을 때 사방 벽이 낙서판인 걸 보고 주인에게 펜을 달라고 부탁,
한 줄 갈긴 것이 "사랑하라, 희망 없이" 였다.
나잇살이나 먹은 여자의 유치찬란함에 남동생과 내 남편은 혀를 끌끌 찼지만,
어쩌란 말인가, 펜을 잡는 순간 그 말이 떠오르는 것을.

그의 첫 창작집은 한 편 한 편 단편들의, 드라이한 듯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느낌들이 참 좋았다.
두 번째 단편집 <착한 사람 문성현>은 10년 전 막 나왔을 때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잽싸게 빌려 읽었는데, 눈물을 철철 흘리며 읽었던 표제작과 함께,
시립도서관의 하릴없는 군상에 대한 얘기인 '기사와 건달의 섬'을  다시 읽고 싶어 주문했다.
오래 전 부산 초읍의 한 기사와 건달의 섬에  초췌한 몰골로
무수히 드나들었던 기억 때문인가.

10년 만에 어떤 책을 다시 집어들어 읽게 되면 묘한 감상이 스쳐 지나간다.
사실 10년 세월이라봤자 그 꼴이 그 꼴이고, 별 신통방통할 것도 없는 자신의 과거를
고양이 죽사발 핥듯이 안고 뒹구는 버릇이 있는 게 인간인 것인데,
신기한 건 내가 읽으며 웃었던 부분, 눈물이 핑 돌았던 부분, 혹은 대성통곡하는 부분이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직 때가 아니어서 그랬나, 미처 모르고 놓쳤던 주옥같은 문장과 의미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다.(맨 앞의 연작 형식의 세 작품과 '콩켸팥켸'가 그랬다.)
그 재미란......

 사실을 말하면, 윤영수 작가의 두 번째 창작집은 처음 읽었을 때 표제작 '착한 사람 문성현'과
'삼가 조의를 표함', 그리고 '기사와 건달의 섬'  세 편만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천하의 독하고 악한 x"으로 예산댁이 머릿속에 입력되었고,
문성현이 사는 동네의 "양품점을 운영하는 과수댁 김입분"은
그 반대의 의미로 내게 각인되었다.
주인공 문성현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비중있는 인물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준 두 사람이었다.
선인과 악인으로.

'삼가 조의를 표함'을 다시 읽고 나니, 인생과 인간에 대한 씁쓸함과 혐오가
엄청난 파고로 나를 다시 덮친다.
아무래도 나는 이런 통렬한 순간이 좋아서 책을 읽는 것 같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며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그 깨달음.
그럼에도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떼야 한다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덤덤한 얼굴로 사노라면
예기치 않은 즐거운 순간도  주어지더란 말이지.
이 작가의 싸늘한 체념과  퍼붓는 듯한 독설 속의 그 미미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좋다.
다시 한 번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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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5-1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로드무비님은 저와는 많이 틀리시군요..
저는 고기집에 가서 낙서를 한다면 기껏해봤자..`
고기는 미디움이 진정한 맛이다..!!
정도로만 찌끄렸을 텐데요..

icaru 2006-05-16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싸늘한 체념과 퍼붓는 듯한 독설 속의 그 미미하게 느껴지는 온기"라... 음~ 딱 맞는 표현입니다..
저두..표제작 읽음서 눈물 질질 흘린 사람 중에 하난디 ^^

로드무비 2006-05-1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읽고 나면 정신이 번쩍 나는 느낌이랄까요?
엄살 부리지 말아라,
폼 잡지 말아라.^^

메피스토님, 가끔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유치한 면이 제게 있습니다.
환장하겠어요.
뭐 그렇다고 님이 쓰신 말이 멋지다는 건 아니고요. 헤헤=3=3=3

mong 2006-05-16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덤덤한 얼굴로 사노라면
예기치 않은 즐거운 순간도 주어지더란 말이지.
....캬~느무 철학적인데요?

Mephistopheles 2006-05-1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쥐어 박고 싶을 정도의 유치하다고 말하시면
저는 고기대신 불판에 올라가야겠군요..

urblue 2006-05-1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처음 들어보는 작가가 왜 이리 많은 거에요? 에휴.

반딧불,, 2006-05-1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리도 악마고기를 구경하는 건가요?(==333)

반딧불,, 2006-05-1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저런 멋진 단어는 어데서 다 가져오시는지 ..미미한 온기라;;

nada 2006-05-1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말이요. 모르는 작가가 넘 많잖아요.. 도서관에 대해서라면 저도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기사와 건달의 섬>부터 읽어야겠어요~

치니 2006-05-16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라, 희망없이 - 가슴이 펄떡 거릴정도로 정곡을 찌른 말 같은데, 왜 동생분과 남편분은 유치하다고 하실까요...^-^;;
저도 땡스 투 눌렀습니다, 읽고 싶은 맘이 불끈.

로드무비 2006-05-1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그 말을 그 날 고기 먹으러 가서
식당 벽의 낙서판에 쓰는 건 좀 거시기했습니다.
일기장이나 수첩이라면 몰라도.
누구누구가 다녀갔다거나, 그 집 고기 맛나다고 칭찬하는 낙서들 속에
쌩뚱맞다는 느낌. 상상을 좀 해보셔유.ㅎㅎ

반딧불님, '미미한 온기' 몇 번 써먹었던 것 같은디유.
그나저나 악마고기는 질겨서, 과연 맛이 있을까요?=3=3=3

꽃양배추님, 몇 년을 죽친 곳이라 그런지 저도 관심이 많아요.
특히 매점의 우동과 라면이 왜 그리 맛났던지...^^

블루님, 최근에 작품집을 새로 냈더군요.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지......^^
(님이 너무 젊어서 그런게죠, 뭐.)

메피스토님, 아니되옵니다. 그런 참상만은......
(아, 글고, 유치하다면 유치한 줄 아시라니께유.^^)

mong님, 철학적이긴커녕 저런 말에 눈살 찌푸리는 분도
계셔서 무서워요.^^;



sudan 2006-05-16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모르는 작가랑 책이 많은 건 내가 너무 젊어서 그런거구낭. ^^

니르바나 2006-05-1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는 아주 착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성실함이란 덕목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령기라고 할 만한 나이가 한참 지났는데도 배우자를 못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여자친구에게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좀 하라고 했더니 그니가 하는말이
이랬습니다.
얘, 요즘은 착한 사람은 별로야. 그게 단점이라고
제가 도덕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하는 순간이었답니다.
다행히 제 친구는 지금 착한 여자 만나서 잘 살고 있습니다.^^

2006-05-16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瑚璉 2006-05-1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미약한 온기라는 말을 넣어서 리뷰를 써봐야겠군).

2006-05-17 0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ndcat 2006-05-17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온이가 말이지요.
요즘 박수를 친단 말이지요.
짝짝짝.
박수와 함께 추천.

waits 2006-05-1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사람 '문성현'>은 경상남도에서 널리 읽혀졌음 싶은 제목이네요...^^

로드무비 2006-05-18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님, 이름이 눈에 익다 했더니...어느 의로운 형제가 생각나는군요.^^

샌드캣님, 가온이 그 작은 손으로?
감동입니다.^^

잔치국수님, 제가 요 며칠 바쁜 일이 있어서
서재에 못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가운 댓글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제가 마실 못 다니더라도 서운해 하지 마세요.
님의 댓글이야말로 제겐 잔치국수 곱배기 같은걸요.^^

호질님, 미세한 온기는 어때요?=3=3=3

에디터님, 알라딘에 뱉어놓으라고 항의할까요?^^

니르바나님,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 만나서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또다른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건가요?
성실함이라는 덕목이 아주 우스꽝스러운 취급을 받는 세상.
단단히 잘못됐어요.
그런데 그 아주 착한 친구 이야기 나중에 좀 해주세요.^^

수단님, 흥=3 젊다고 자랑하시긴.^^

2006-05-22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22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5-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댁의 술장 콜렉션님, 반갑습니다.
멋진 시간 보내셨군요.
어쩌다 한 번, 님처럼 그리해야 하는데, 저의 음주는 너무 잦습니다.
하던 일 미뤄두고 서재 한 번 들어왔다 하면 나갈 줄을 모르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뭐 대단한 걸 올렸다고 댓글 보러 들락날락.
인간의 가여운 몰골이 따로 없어요.
제가 가끔 독하고 냉정하게 굴면 다 자기자신에 대한
짜증이 폭발한 것이려니 짐작해 주세요.
빨간색 그 책은 제게 마침 없는 것이네요.
고맙게 받아 일독하겠습니다.
편안하고 좋은 밤 되시길 바라며......

2006-05-24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25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owup 2006-05-26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잇살이나 먹어서 로드무비 님만큼 유치해요!!
고깃집 벽에 써놓지는 않았지만, 저 말을 아주 조그맣게 어딘가에 써놓은 기억이 있습니다. 봐주기를, 그리고 힘겹게 공감해주기를 바라마지 않으면서 말이죠.
로드무비 님이 어떤 마음으로 저 책을 다시 펴게 되었는지 궁금한데, 저도 다시 읽고 싶은 맘이 들었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지난 10년이. 저 책이.

2006-05-31 0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 꽃이 불편하다 창비시선 221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봄비 속에서 하루 종일 시인의 음성을 듣는다.
마음은 '쓰레빠'를 끌고  아파트 단지 앞의 조그만  '점방'으로 나가 
냉장고 문을 몇 번이고 벌컥 열었다.
그 마음을 억누르고 집 냉장고 속의 김빠진 맥주 한 병으로
간신히 입술을 축이고 있다.

시인의 부음을 듣고 하루종일 황망하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들을 검색한다.
시 한 편 한 편이 절창인 걸 알면서, 그토록 끌렸으면서, 왜 절판이 되도록?
머리통을 쿵쿵 쥐어박는다. 맞아도 싸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가?
짜증이 확 인다.
쓸데없이 노닥거리기나 하고.
누군가 나를 죽도록  패줬으면 좋겠다.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 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레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70쪽~71쪽,   詩  '봄비'  全文)

하릴없이 그의 시집을 꺼내어 한 편 한 편 다시 읽는다.
단언하건대,  단 한 줄도  버릴 것이 없다.

사는 일과 죽음 사이
뜨거운 밥이 있고
시가 있고
한낮 미쳐가는 꽃들의 꼿꼿한 가시가 있고
그 너머로 걸어오는 몇 마디 인간의 말 (54쪽, 詩 '그마저 스러진 뒤' 중에서)

보탤 말이 없구나.....




**지나치게 감상적인 태도도 그렇고, 페이퍼로 올릴 걸 기세좋게 리뷰로 올리다니,
그 뻔뻔함에 눈살 찌푸리면서도  기왕 올린 것 그냥 두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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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5-1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인들 중에 유독 시인들이 요절을 하는 경우가 많던데...
시를 잘 모르는 저입니다만....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로드무비 2006-05-13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종일 짠합니다.

에로이카 2006-05-1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과 불화한 시인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시인다운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빌어먹을 세상의 일부인 나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

nada 2006-05-13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분인 줄 알았는데 솔아 푸른 솔아를 쓰신 분이라니 저에게도 개인적인 슬픔이 느껴지네요. 소극적인 자살이라는 동료 시인의 말씀도 마음에 깊이 남구요. 명복을 빕니다.

비로그인 2006-05-14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 뭘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만 그 분이시군요.. 참 많은 분이 안타까워 하겠네요.

로드무비 2006-05-14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캐서린님, 묘한 분이셔요.

꽃양배추님, 님의 댓글이 얼마나 반가운지......

에로이카님, 이 시인의 시를 한 편 소개하고 싶었어요.

플레져 2006-05-17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
로드무비님의 리뷰 제목이 시집 제목인 줄 알았어요...

릴케 현상 2006-05-1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았을 때 샀어야했남 -_- 하여간 샀어요

로드무비 2006-05-1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반가워라.
아무려면 어때요. 지금이라도...^^

플레져님, 저 삐졌어요.
이렇게 유치하고 감상적인 리뷰에 댓글 안 달아주셔서.
(무신 말이댜?!)
배시시~~ 좋아서.^^
 
도전자 - 전5권 한국만화걸작선
박기정 지음 / 바다출판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 만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는 법이 없으니 너무나  궁금해서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박기정의 복간 만화 <도전자>를  지난 며칠 동안 완독했다.
1964년에서 이듬해까지 장장 15개월 동안 45권의 대본소 만화로 출판된 것을
바다출판사에서 '한국만화걸작선'이라는 이름하에,  다섯 권의 두툼한 책으로
묶은 것이다. (각 550여 쪽.)

관동대지진 때 홀로 살아남아 일본인 양어머니와 함께 일본이라는 타국에서 살아가는
17세 소년 백훈.  그 나라에,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호의적일 리가 없다.
속마음과는 달리 사사건건 양어머니에게 반항하고 그나마 한 명 친구로 여기던 오동추가
일본에 귀화하자 원수로 대한다.
두 소년은 너무나 가난한 나머지 우연한 기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 펑크난 시합 땜빵용 권투선수에서
진짜 권투선수가 되어 일생일대의 대전을 펼치게 되는데......

40년 전의 만화가 독자에게 주는 재미와 감동이 이렇게 생생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오래 전 다락에서 아버지의 영화 스크랩을 본 적이 있다.
청년 시절 영화를 보고 나서 색연필로 직접 그린 한 컷의 영화장면과 함께
감상을 기록한 낡디낡은 16절지 묶음이었다.
그때 나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였는데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와서 그렇게
감상 기록을 남긴 청년 시절의 아버지가 너무 신기하고 애틋하게 여겨졌다.
호랑이 같기만 한 내 아버지도 한때는 소년이고 청년이었구나!
이 만화의 주인공 백훈과 오동추는 바로 우리 아버지 세대의 초상이 아닐 수 없다.

한 권 한 권 만화 뒤에는 1945년 언저리에 출생한 소년소녀들이 작가에게 보낸 독자편지들을
싣고 있는데 그것을 읽는 재미가 무엇보다 쏠쏠했다.
마당 손질을 하다가 잊고 있던 김치독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몇십 년 된 묵은지가
가득 담겨 있는 기분이랄까.
더구나 그것들은 먹을 만할 뿐만 아니라 제법 맛있고 고소하기까지 했다.

--선생님, 하늘의 달은 시오야의 달 못지않게 밝군요. 누구를 그리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시로써 써봅니다. 또 책도 읽습니다. 만일 시가 없고 책이 없었다면 어쨌을까요?
강열한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해야 했다는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생각합니다.
(1965년 10월 10일  훈이의 친구 부산시 초량동 3동 669번지 정해원, 제5권  424쪽, 독자편지 앞부분)


반항기 가득한, 어두운 시절을 헤쳐 나가는 소년이 주인공인 액션만화의 효시라는 이 만화.
일본이라는 나라가 배경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 소녀들이 꽤나 왈가닥이고
마음에 드는 소년에게도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여차하면 귀뺨을 올려붙이는
장면들이 신선했다.

주인공 소년 백훈이 아르바이트로 접시닦이를 하는 레스토랑의 오트밀이니 하이라이스니 하는 
메뉴도 구미가 당겼고, 귀화를 하지 않으면 수입의 절반이  차이가 난다는
한국인 레스토랑 주인들의 대화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재일 한국인들의 생활상도 짐작할 수 있었다.

등장하면서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발가락 사이를 판 자신의 손가락 냄새를 맡는
주변부의 한 소년 등장인물(인형이)의 행위에서  나는, 작가가 은밀히 도달하고자 했던 
사실주의의 고린내를 맡는 기분이었다.
그 냄새도 뭐 맡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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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2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12 2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터라겐 2006-05-12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이 혹시 텔런트 박원숙씨 아버지 아니셨던가요? 인물이 예전 이우정아저씨 (?) 이상무아저씬가.. 암튼 어려서 많이 보던 만화속 인물같이 느껴져요..

반딧불,, 2006-05-1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인터라겐님 제가 질문하고 싶었는데^^

반딧불,, 2006-05-1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2679666

 


에로이카 2006-05-12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로드무비님 스크랩은 집안 내력? 나중에 주하도? ^^

hanicare 2006-05-13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수산의 산문을 읽다가 이런 귀절을 봤어요. 여자친구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 박기정의 도전자이며 넌 아직 그것도 안 보고 왜 사냐는 식의 취급을 당해서 과외알바도 잠시 미루고 만화방에서 도전자를 읽고....그 여자는 결국 한수산의 부인이 됩니다... 그 귀절을 읽고 한수산은 좋은데 박범신은 통 좋아지지 않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지요.
클래식음악에 철학책에 지적인 척 하는 위인들보다 젊은 한수산과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그 유명한 도전자를 나도 맘만 먹으면 읽을 수 있는 거군요,가끔 세월 좋아졌다~란 생각도 듭니다.

2006-05-13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5-13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디서 읽은 것 같기도 하고.
한수산과 박범신은 서로를 인정하고 좋아할까요?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전 둘 다 안 좋아했는데 한수산의 산문은 좀 끌리는 데가 있었어요.
하니케어님과는 이상한 데서 만나는 부분이 있어요. ^ ,. ~
(어느 분께 빌려드리기로 했는데 하니케어님도 나중에 보실래요?)

에로이카님, 스크랩은 딱 두 해만 했어요.
생각하시는 것만큼 저 꼼꼼한 인간이 아닙니다.
주하는 덜렁입니다.
나중에라도 스크랩을 할 것 같진 않은데요? 헤헤~

반딧불님, 우와, 투데이 숫자가!
요즘은 방문객 숫자의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너무 뻥튀겨져서.
아무튼 재밌는 숫자 잡아주셨네요.

그리고 박원숙 씨 아버지는 아닌 게 확실해요.
이 작가는 지금도 중앙일보 캐리커쳐 담당이라고 들었거든요.
이상무 화백도 물론 이분의 세례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만화를 보니 그게 느껴지던데요?ㅎㅎ

인터라겐님, 대답 들으셨죠?
이우정 씨도 아시고, 새침한 얼굴로 만화방 꽤나 들락거리셨구만요.^^

소년기님, 왜 안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그나저나 오랜만이어요. 반가워라!^^

다락방에서님, 그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니.
아무튼 엊저녁에 고기는 많이 뜯으셨어요?^^*




hanicare 2006-05-13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모처럼 부지런을 떨었더니.. 이런 횡재가
싸악(잠 깨는 소리입니다.)
히힛...나중에 로드무비님 빼도 박도 못하게 요기다 공증 받아야지.
꼭 빌려주세요~~~~~~~```

로드무비 2006-05-1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언제 흰소리하는 것 보셨수? 흥=3
(일찍 일어난 새가...그 말 맞아요.^^)

2006-05-14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개 2006-05-1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줄거리 적어놓은 글씨체를 보니 절로 미소가 나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