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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국민국가 진보 개인, 반양장
권혁범 지음 / 삼인 / 2004년 2월
평점 :
몇 년 전 모 인터넷 신문에 한 시민기자가 쓴 기사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톱기사로 떠올랐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과 내용으로, 변두리 동네 사진관에 근무하던
한 젊은 여성이 정식으로 시험을 쳐 스튜어디스로 뽑힌 것을 칭송하는 글이었다.
그런데 처음엔 장하다, 멋지다 등 찬사 일변도의 댓글들이 달리더니 나중엔
동네 사진관은 개천이고 스튜어디스는 용이란 말이냐, 하는 식의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글을 읽으며 나도 찜찜한 부분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나 비판하는 댓글들이
많이 달릴 줄은 몰랐다.
아무리 부담 없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올린다고 한들,
글을 어디에 발표할 때는 균형감각의 관문을 슬쩍 통과하는 것이 예의이고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스튜어디스가 될 생각이 꿈에도 없는, 사진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신성한 직장을
'개천'으로 비하한 건 명백한 실수가 아닌가.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재밌게 읽었다.
솔직히 말해 대한민국 국민 안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해 본 사람이 있을까?
물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국가' '진보' '개인'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해본 사람들이나, 그리고 지난 2002년의
월드컵 삼매경이 더 열광적인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 요즈음 읽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반세기의 분단체제하에서 우리도 모르게 내면화되고 강화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안보와 국익이 그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우리 사회의 의식에 대한 강력한 의문 제기로부터,
우리 국민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 분석, 병역 의무의 정치학,
'국가 안보 담론'의 허구성까지 저자는 객관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제일 흥미로웠던 건 '세계화'에 대한 비판 일변도의 사회 분위기에 대해,
"민족과 국가에 묶여 있던 우리 국민이 진정으로 해방된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주체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과, 다른 국민국가의 개인이나 집단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넓힌다"(117쪽)는 저자의 견해였다.
"세계화를 통해 미키 마우스나 코카콜라도 생기지만 동시에 제임스 조이스나
이사벨라 아옌데도 퍼져 나간다"는 월든 벨로의 그럴듯한 말을 인용하며,
미국에 대한 적대와 무조건적으로 비판적인 자세에 대해 꼭 그럴 일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9.11 이전 혹은 이후의 세계'라는 제목의 글도 흥미로웠다.
사건이 일어난 직접적인 동기와 상관없이 9.11 테러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과
이를 아우르는 저자의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 일부의 폭력주의가 사실은 "서구의 비열한 분열주의와 이중 정책의 결과"(124쪽)라는
이희수, 장석만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나, "테러리스트는 인위적 관념에 자신을 함몰시킨
이데올로기의 광적 실천자일 뿐"(125쪽)이라는 저자의 규정은 고개를 갸웃하게 하고
마음으로 수긍하기가 좀 어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솔깃한 구절이었다.
엊그제 지하련 전집을 읽으며 한 개인, 특히 감수성 예민한 시인이나 소설가에게는
사상도 생활의 연장선에서 심사숙고하여 받아들이고 선택한 것일진대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에 완전히 휘둘려 개인의 삶이 참혹하게 끝장난 임화, 지하련 부부의 현실이 가슴 아팠다.
온국민이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 같은 월드컵 응원열기나, 촛불시위, 또 환경문제와
연관지어본 민족주의, 우리 나라 진보 남성 일반이 갖고 있는 젠더에 대한 태도까지
냉철한 저자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더구나 균형감각을 앞세운 그의 섬세한 레이다에는, 시든 논설이든 지식인답지 않게
흥분하여 그만 모자라거나 넘치는 글을 발표한 사람들이 여럿 걸려들었는데,
그 면면이 자못 흥미롭다.(특히 2002년 월드컵 당시 오오, 아아, 하는 시와 논설들)
--아니 이 사람이 이때 이런 글을 썼단 말이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 부분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리뷰의 맨 앞에 내가 구체적인 사례로 들은 글쓰기의 어려움과
연결된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편향적인 시각 혹은 일시적인 흥분과
도취 상태 속에서의 글쓰기도 독자들 앞에 던져진 순간 책임이 따른다는 엄정한 사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많은 부분 수긍하고 몰랐던 사실도 깨닫고 단숨에 읽었는데, 왠지 통쾌한 것과는 거리가 있으니,
새로운 숙제만 잔뜩 떠안은 기분이 이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