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두기 - 영국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 여성 편집자의 자서전
다이애나 애실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훌륭한 출판업자는 작가를 발굴하는 것이 임무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어쩌다 보니 연결이 되었다.(175쪽)

소설가 김승옥의 원고를 받기 위해 문학사상 편집부 직원들이 사무실 근처
여관에 그를 감금(?)해 놓고 옆방에 진을 치며 감시하여
몇 날 며칠 만에 원고를 받아냈다는 이야기는 편집자들에게 전설처럼 다가온다.
더구나 그 당시의 편집부 직원들이 지금 이름만 들어도 입이 벌어지는 우리 문단의
중진들이었으니.(이어령, 서영은 등)

1990년대 초, 춘천 모 소설가의 집에 육필원고를 받으러 갔더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상자같은 조그만 다락이 하나 달려 있는데
ㄷ출판사의 편집부 여직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주말에만 서울에 올라가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한다고 했다.
아무리 작가의 집필을 독려하기 위해서라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이든 산문집이든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는 작가의 주변에 다른 출판사의 접근을 차단하는
의미도 있었다.
나는 그이가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소설가와 가족같이 지낸다고 해서 그도 덩달아 소설가의 가족인 것은 아니다.
내 눈에 그는 쓸모없는 일에 자신의 자유를 저당잡힌 다락방의 베키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의 친구) 정도로 보였다.

"영국 출판 편집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우는  다이애나 애실의 출판 인생 자서전
<그대로 두기>를  단숨에 읽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다른 훌륭한 출판업자들과 달리 어쩌다 보니 작가들과 연결되었다"는 말과는 달리,
'노먼 메일러, 존 업다이크, 잭 케루악 등 20세기의 비중 있는 전후 영미권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다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그이다.
우리가 몰랐던 작가들의 극적인 삶이나 숨은 이야기보다, 너무나 담담하고 솔직한 어조로 회상하는
그의 50년 출판 인생의 하루하루가 내게는 더 박진감이 넘쳤다.

80년대 중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연쇄살인사건 범인들과의 옥중 인터뷰를 통해
인간과 죄악의 어두운 심연을 파헤치는 책을 내겠다는 야심찬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교도소를 방문, 범인 중 한 명인 마이러 힌들러를 만나보고 나서 그는
책을 출간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녀가 멀쩡한 성인의 입장에서 저지른 살인사건의 기억들과 함께 계속 살아야 한다면
'나는 죽어야 된다'고 인정하거나 정신분열을 일으킨들 이 사회가 얻는 수확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녀를 도와 원고를 완성하고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간한다면 우리는 저질 포르노를 싣는 쓰레기 신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신문이 될 수는 없었다.(88쪽)

그날 대화를 통해 연쇄살인범 여성의 현재 상황과 그녀의 성격을 이해한 후
책을 내는 것이 당사자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야심찬 기획을 접는 순간
그의 통찰력과 용기와 결단은 눈부실 정도였다.

또한 어느 날은  진 리스라는 소설가의 새 원고('임페리얼 대로')  출간을 반대하는데
이유는 사랑하는 작가가 그 작품을 펴냄으로써 인종차별주의자로
세상에 낙인 찍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흑인이 되고 싶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작가였지만 평소 대화에서
마음에 드는 흑인이 있으면 "충직하다"고 표현하는 등 그의 뼛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차별을 본 것이다. 그것이 새 작품에 은연중 나타난 것이고.
진 리스라는 작가는 멋진 편집자를 만나 정말이지 적절한 보호를 받았다.

함께 일한 사람들이나 친하게 지냈던 작가들에 대한 묘사도 얼마나 구체적이고 생생한지 
바로 옆에서 차를 한잔 마시며 직접 이야기를 전해듣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감탄한 건 그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유머.
'책'이나 '출판'에 대한 그의 사유도 어찌나 공감이 가는지 나도 모르게 밑줄을
북북
그어가며 읽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

--내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위대한 문장에 희열을 느껴서라기보다
내 좁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 복잡한 인생에 대한 감각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잡아먹을 듯한 인생의 어둠과 고맙게도 그 속을 애써 뚫고 나오는 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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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와 연우 2006-07-0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만 꾸욱..

DJ뽀스 2006-07-03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권에 도전하느라 느무 가벼운 책을 많이 읽었더니 머리속이 허합니다. 대출대기목록 0순위로 올려놨습니다. ㅋㅋ

sandcat 2006-07-03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대로 두기>가 말이예요. 왜 교정볼 때, 고치지 말고 원래 그대로 가라는 뜻에서 '生'이라고 쓰잖아요. 그런 건가요? 아무래도 이 책을 살 때가 된 것 같아요.

瑚璉 2006-07-0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 기회가 되시면 이번에 나온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중 서문만 읽어보세요. 편집자의 애환이 뚝뚝 묻어나오는 재밌는 글이더군요. 본문은 재미없었지만...(-.-;).
아, 그리고 이 책은 보관함으로 보냈습니다.

로드무비 2006-07-03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질님, 수첩에 적어놨다 서점에 가게 되면 읽어보겠습니다.
본문은 재미없다니 안 사도 되겠군요.^^

샌드캣님, 맞아요. 그대로 두라는 의미. 生!!
웃으며 감탄하며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DJ뽀스님, 도서관의 책이 모두 뽀스님 것 같아요.
부럽습니다.^^

건우와 연우님, 을매나 감사헌지. 꾸벅.^^*

날개 2006-07-03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이거.. 리뷰가 너무 재밌군요....^^

로드무비 2006-07-04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호호~ 책이 재밌으니 리뷰도 덩달아.^^

따우님, 生, 그대로 두자고요.^^

瑚璉 2006-07-04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시기 벌린의 자유론 본문이 재미없는 건 제 이해력이 떨어져서 그런거지 벌린의 잘못이 아니거든요, 구입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요(휙).

로드무비 2006-07-0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질님, 호호~ 서문 읽어보고 결정할게요.^^

nada 2006-07-05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500cc 잔에 쓰인 生 자가 떠오르던디...=3=3=3

로드무비 2006-07-05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3=3=3

맑음 2006-11-26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편집 사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땡스2 누릅니다.^ㅅ^
 
팥죽 할멈과 호랑이 네버랜드 우리 옛이야기 1
박윤규 지음, 백희나 그림 / 시공주니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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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 할멈 신간 소식이 알라딘 메인에 떴을 때
조그만 표지 그림에 홀딱 마음을 빼앗겼다.
개다리 소반을 손에 든 할머니,
김영희의 닥종이 인형과는 또 다른 분위기.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지난 겨울 우리 모녀를
열광케 한 <구름빵>의 백희나 작가의 그림.

(부록으로 나온 캘린더가 탐이 나 같은 책을 두 권 샀다.)

--옛날 옛날 깊고 깊은 산골에
팥죽 할멈이 살았어.
맛난 팥죽을 팔팔팔 잘도 끓여서 팥죽 할멈이야.

'맛난 팥죽을 팔팔팔 잘도 끓여서'.
그림책의 맛과 흥을 잘 살린 글이로구나 했는데,
역시나, 오래 전 세계일보에 시로 등단한 박윤규 시인이 썼다.

어느 봄날 팥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호랑이에게 할멈은 말한다.

"눈 내린 겨울날 먹을 것 없을 때 맛난 팥죽
실컷 먹고 나서 나를 잡아먹으면 안 되겠니?"

봄날이므로 할머니는 당연히 홑저고리 바람이다.

--팥죽 할멈은 커다란 가마솥에 팥죽을 팔팔팔 끓이면서
꺼이꺼이 울었어.(본문)

한겨울이 되어 솜저고리를 입고 목도리로
머리를 싸맨 할멈,
호랑이가 지금이라도 어흥 나타날 것 같은데,
아무튼 저 표정, 기가 막히다.


할멈의 울음 소리에 맨 처음 나타난 알밤.
사연을 듣고 나서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해 다 먹고 아궁이 속에 숨었다.
두 번째로 나타난 자라.
자라에게 줄 팥죽을 그릇 가득 퍼담는 할멈의
저 흐뭇한 표정 좀 보소.
환하게 타오르는 아궁이 불, 부엌을 가득 채운
하얀 김......

--어라, 이번엔 멍석이 데굴데굴 척척 굴러왔어.
"할멈, 할멈, 팥죽 할멈, 뭣 땜에 우는 거유?"(본문)

벌써 몇 명의 손님이 나타나 팥죽을 먹고 할멈의 부엌
여기저기에 몸을 숨겼는지 모른다.
처마밑 고드름에 쌓인 눈까지,
부엌 안이고 바깥이고 간에
바야흐로 겨울의 절정이다.

외모상으로는 무섭지 않고 왠지 호감이 가는 호랑이.
그래도 할멈의 합리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줄도 알고
나름대로 약속도 칼같이 지키는 호랑이인데......

자, 이제 할멈의 집 부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팥죽이 설설 끓고 있는 가마솥을 안 보여드리면
섭섭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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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6-2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팥죽 할매 팥죽 한그릇만 주면 안잡아 먹~지
(뻔뻔한 몽 호랑이)
정말 정이 가는 그림이에요~

로드무비 2006-06-2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 츠녀, 옛쑤, 한 그릇, 곱배기!ㅎㅎ
그림이 마음에 쏙 들어요.^^

Mephistopheles 2006-06-2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점심 방금 먹었는데 팥죽 먹고 싶어지잖아요..!!

로드무비 2006-06-2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귀찮아서 포토리뷰 안 올렸는데 얼마나 재밌는지......
메피스토님, 밭죽이 뭔데요?=3=3=3
(요즘 신경을 좀 못 썼더니 영......)
팥죽은 시장통 좌판에서 사먹는 게 최고로 맛난 것 같아요.
아현시장 참 좋은데......

해리포터7 2006-06-2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가마솥에 진짜루 팥죽이 보여요!.로드무비님.저두 이호랑이 모습보곤 참 웃겨서...

로드무비 2006-06-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7 님, 정말 정겨운 모습이죠?
호랑이가 당하는 모습은 마음이 아파서 안 찍었습니다.ㅎㅎ

건우와 연우 2006-06-29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팥죽할멈과 호랑이의 그림은 어느출판사든지 그림이 참 좋더군요^^
너무 좋아요, 저 할머니...

조선인 2006-06-29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현시장 팥죽!!! 아, 저도 그리워져요.

반딧불,, 2006-06-29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헤. 넘 좋죠?

nada 2006-06-29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런 세계.. 볼 때마다 흠칫흠칫..

sudan 2006-06-29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할멈의 집 부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저는 알지요. ^^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민담전집 한국편에 실린걸 읽었었거든요.)

waits 2006-06-29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름빵', 누가 한 권 줬는데 들춰보지도 않고 책장에 직행. 함 봐야겠군요.
이렇게 정겨운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괜히 심술..;;

로드무비 2006-06-2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 님, 어느 출판사인지는 신경도 안 썼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구름빵 무지 예쁜 책인데......^^

수단님, 워낙 이 제목으로 나온 그림책이 많아서.
오히려 관심을 끌지 못할 수도 있겠어요.
그 무슨 일은 언제 어떤 책으로 읽어도 재밌는데
이 호랑이가 당하는 건 좀 거시기하더군요.^^

꽃양배추님, 호호~ 저도 마이 도러가 아니었으면
관심을 안 가졌을 텐데.....
지금은 저를 위해 그림책을 가끔 살 정도이니!^^

반딧불님, 딱 생각했던 대로의 책이네요.^^

조선인님, 빈대떡과 김치전도 맛나게 굽던 할머니가 생각나요.^^

건우와 연우님, 처음엔 입체감이 좀 심하게 있다 생각했는데
볼수록 정이 가는 얼굴이에요.^^


ceylontea 2006-06-2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너무 예뻐요... 지현이도 보여줘야 겠어요.. 흐...

로드무비 2006-06-29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 지현이도 무지 좋아하지 않을까요?^^

플레져 2006-06-2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정말 팥줄 넘넘 좋아해요.
알라딘 메인에서 보고는 요거 사, 말어 이러구 있었는데...
일단 제가 본 다음에 조카에게 넘겨야겠어요. 귀여운 건 같이 봐야하니까 ^^

야클 2006-06-30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난 그냥 팥죽 말고 단팥죽이 먹고 싶어라. ^^ 그런데 요즘 꼬맹이들도 저런 풍경이 상상이 될려나 몰라요.

로드무비 2006-07-02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꼬맹이들도 그림책의 세계는 아니까요.
아이들 눈에는 저 부엌이 어떻게 비칠지 궁금합니다.^^
(단팥죽 좋아하시나봐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별로 안 좋아하던데...)

올리브님, 책꽂이에 꽂아놓고 가끔 꺼내봐도 좋을 듯.
그러다 이쁜 아이 만나 선물하게 되면 더 좋고요.^^

플레져님, 님의 조카는 정말 복 받았지 뭐예요.
님같은 이모 혹은 고모를 만나서.^^

그로밋 2006-07-0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조카들 보여주려고 샀는데, 제가 더 재미있게 봤다니까요^^ 어쩜 이리도 실감나게 만들어 놨는지 할머니의 표정 보느라 몇번을 더 넘겨봤네요. 글구 님, 건강하시죠???
 
처음부터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한경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고독에 몸부림치던(나는 이 유치한 표현을 좋아한다)  어느 날, 
어떤 생각이 불현듯 깨달음처럼, 빗물처럼, 나의 들창문을 두들겼다.
'사람마다 사랑의 모습도 제각각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는 첫눈에 반하고 생각하면 가슴 설레고 환장하고 그런 게 아니고,
함께 오래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 그가 거슬리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닐까?'

1991년에 나온 크리스토프 하인의 <낯선 연인>은 그렇게 싸늘하게 사랑의 개념을 정리하도록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설이다.

--독일의 민족 대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 나오는 무적의 왕자 지그프리트는
용의 피를 뒤집어 씀으로써 불사신이 되었다.
그때 보리수 이파리 하나가 양쪽 어깻죽지 사이에 떨어지면서 그 부분에는 피가 묻지 않아,
이 영웅은 나중 그 부분을 창에 찔려 죽게 된다.
이 전설의 모티프를 빌려온 <낯선 연인>은 상처받지 않으려고 도사리다가
두터운 껍질을 지니게 된 한 인간의 삭막한 삶을 묘사한 작품이다.

독일에서는 <용의 피>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소설에 대한 역자 전영애의 해설 부분이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살아가는(나름대로는 이유가 있는) 주인공에게 정말 마음 편한
남자친구이자 연인이 생겼는데 그에게조차 절대 열지 않는 방이 하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좋은 연인은 어느 카페에서 남의 싸움을 말리다 죽는다. 어이없이......

크리스토프 하인의 자전적 성장소설 <처음부터>가  생각의 나무에서 2001년에 번역되어
나와 있다는 정보를 며칠 전에야 접했다.
이 출판사의 책들이 지금 큰 폭으로 세일중이고, 야시장 쿠폰을 이용하면
2천 원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해서 자다가 깬 밤, 목록을 뒤적이다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안 보이던 것이 시시하고 사소한(?) 우연으로 찾아들기도 한다.
어쩌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사랑은 찾아오고, 또 어이없이 떠나간다.

이 책의 역자는 구 동독의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의 책이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거라고
책머리에 밝히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낯선 연인> 1991년, 현대소설사 간, 전영애 역)
이 소설에 열광한 사람이 내가 알기론 꽤 되구만.
아무튼 <처음부터>는 어색한 문장이 가끔 눈에 띄기도 하지만 비교적 잘 읽히는 편.

줄거리 소개도 감상도 다 생략하고 <낯선 연인>과 어딘지 맞닿아 있는 한 구절을 소개할까 한다.

--나는 결정을 잘 내리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모든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쪽으로 가게 만들었다. 내가 아니라 우연이 결정하도록 했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운명이 나보다 더 신중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이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해 스스로 불러들인 운명 속에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쉬웠다.
나는 아빠가 자주 말하는 어떤 섭리가 --목사인 아빠는 그걸 신의 섭리라고 했는데--
내 인생을 결정하고, 나 대신 내 실존의 모든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을 믿었다.(263쪽)

1956년, 동독의 소도시에 거주하는 열세 살 주인공 소년이 앞으로 가족을 떠나
형이 이미 가 있는 서독의 김나지움에 가서 공부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이는 대목이다.
운명적인 걸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나의 생각도 일정 부분 소년의 그것에 닿아 있다.

 모처럼 제대로 빨려들어 읽은 본격정통 성장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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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06-27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리뷰에도 흡입기가 있는지 확 빨려들어가 읽었어요...

twoshot 2006-06-27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로드무비님의 리뷰만 읽으면 자동으로 '추천하기'버튼을 누르게 되네요. 헌데 책은 품절,땡스투 불가네요. 그런데 <낯선여인>이 출판된지 저리 오래 되었습니까?세월도 참....

로드무비 2006-06-27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쿠스님, <낯선 연인>을 읽으셨군요.
반가워라.
전 님의 서재 이미지가 왠지 끌려요.^^

플레져님, 10분 만에 쓴 리뷰예요.
빨려들어가서.....
(냉정하게 쓰려고 노력했다우.)

mong 2006-06-27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후하신 작가와 만나보고 싶었으나
품절....털썩~

로드무비 2006-06-2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방법이 없진 않지요.
아시면서.^,.~
책 바꿔봐요.

mong 2006-06-2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맞아요~ ^^

건우와 연우 2006-06-2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큼 책도 재미있나 읽어봐야지...하고 마음먹었어요^^
아니 근데 그옆의 품절은 뭔가요@@

로드무비 2006-06-29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나중에도 못 구하면 말씀하세요.
빌려드릴게요. 두 권 다.^^

mong님, 어느 날 시간 정하여 살짝 소장함 공개하는 걸로.
오케이?^^
 
김점선 스타일 - 전2권 세트
김점선 외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나, 김점선>을 처음 읽었던 십몇 년 전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말보다 거위를  즐겨 그렸던 것 같고, 아이가 쓱쓱 그린 것 같은
천진난만한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의 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잘해 보겠다고 애쓰지 않는데, 연필만 잡으면 자기도 모르게 완성되어 나오는
글이요, 그림이라고 할까.
무엇보다 바람처럼 거침없는데 한편으로 섬세한 영혼의 결이 느껴져 좋았다.

4월 말,  '김점선 스타일'이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이 세트로 나왔다.
'회갑' 기념이라고 전면에 들이대거나 촌스럽게 떠들진 않았지만
받아보니 그 잔치상이다.
세상의 온갖 이름의 잔치상이 으레 그런 것처럼  메뉴는 화려하고 다양한 듯 보이지만,
젓가락질을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1권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제목으로,
"이 세상에 하나뿐인 김점선이 오직 하나뿐인 당신을 만난다"고 하여,
박완서, 장영희, 김방옥, 조영남 같은 절친한 친구나 지인, 그리고 그가
매체를 통해 만난 유명인사들의 인터뷰를 모았다.

2권은 <둘이면 곤란한>이라는 제목으로,
"이 세상에 하나는 있어도 좋지만 둘이면 곤란한 사람 김점선!"이라고 하여,
이해인, 신수정, 장영희 등 역시 절친한 벗들과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의
가까이서 본 화가에 대한 기록이다.

제목으로 친절(?)하게 뽑은 것처럼 '김점선 스타일'을 아주 고착화시킨다고 하나?
두 권의 책을 앉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읽었는데 질리는 느낌이었다.
발간 일자 맞춰놓고 다소 형식적으로 일을 진행시킨 것 같은.

화가의 이름을 막 부른다는 이웃의 한 초등하고 1학년 소년과, '건방진 대학생'이라고
간단하게 소개된 청년의 글이 그런 의미에서 조금 산뜻했달까.

그가 얼마나  독특하거나 괴팍한 사람인가 하는 구체적인 사례들 중 어떤 건 재밌다.
하지만 아무리 듣기 좋은 노래라도 한두 번이지 계속 읽으니 좀 지겹구나.
화가의 스타일에 걸맞은 새로운 형식이 없었을까?

화가가 직접 만나고 썼다는 유명인들의 인터뷰도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기대했는데
기대에 못 미쳤다.
다음과 같은 말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고.

--성공한 사람들은 나이를 초월해서 밝고 깨끗하다. 열정적이고 순수하다.
인간 최초의 순수 같은 맑은 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꾸밈없이 말하고, 환하게 웃고, 예의 바르고 따뜻하다.(163쪽)

글쎄,  
이런 식의 통찰과 정리도 가능하구나.
그렇다면 이 책은 밝고 깨끗하고 열정적이고 순수하고 어쩌구 저쩌구한 사람들만의 잔치?

세상의 모든 잔치가 그런 식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김점선의 그것은 좀 다를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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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2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한 사람들은 나이를 초월해서 밝고 깨끗하다. 열정적이고 순수하다.-
이건 좀 아닌것 같은데요..???

waits 2006-06-2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김점선의 그것이 별다르지 않다니 좀 실망이네요. ㅎㅎ
한편 안 사도 되겠다~ 안심도...^^;;;

에로이카 2006-06-2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께서 쓰신 리뷰 치고 좀 가혹하네요... ^^

로드무비 2006-06-2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저 구절만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네요.
가수 이승철을 만나고 필을 받아 인터뷰를 중단한다 선언하고
돌아와 내갈겨 썼다는 글 중 일부예요.(저 친절하죠? 헤헤~~)

로드무비 2006-06-2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을 때, 이 글을 쓸 때 심사가 사나웠던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보고.
이상 없음!
에로이카님, 너무 가혹한 댓글 아닌가요?=3=3

나어릴때님, 마음산책 책답게 책은 예뻐요.
그림도 많고.
그런데 읽는데 도무지 흥이 안 나더군요.
김점선의 책이라면 그걸 기대하고 골라드는 건데.
이상한 흥 있잖아요.

2006-06-26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6-06-26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로드무비님.. 그것이 아니오라... 책이 얼마나 한심하면 이런 글을 다 쓰셨나... 그런 뜻에서.... 아.. 왜.. 그러니까.. 시간들여서 읽은 책이 저 모양이면 참 열받잖아요.. 기대도 갖고 있었는데.. 그 기대까지 무너졌다면.. (아... 참.. 말 줏어담기 힘드네요..) 깨갱...

반딧불,, 2006-06-26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컵받침은 이쁘던가요?(그게 더 궁금^^)

로드무비 2006-06-2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컵받침 예뻐요.
그런데 그래봤자 코팅한 종이인데요, 뭐.ㅎㅎ
읽고 마음에 안 드는 책은 리뷰 안 쓰는데 이건 쓰고 싶더라고요.^^;;
(요즘 왜 이렇게 오타가 많을까요?)

에로이카님, 아니 뭘 그리 정색을 하시고.
잘못 말씀하신 것 하나도 없는데.
크게 기대를 했던 책은 아니에요.
회갑 기념 책은 대부분 이런 모양새거든요.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가혹'이란 단어를 보니 제가 뜨끔해서 말입니다.^^

혜덕화 2006-06-2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김점선>을 읽으면서 저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영혼의 깨끗함을 읽을 수 있는 단순한 글과 그림에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구나, 부부싸움에 밀리지 않기 위해 선 자리에서 오줌을 줄줄 싸던 그녀와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해, 그가 감내하고 살아야 했던 세월이 암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하는 그야말로 가혹한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아주 예전에 오정희님의 글을 읽다가
"그는 나를 어떻게 견디며 사는가?"라는 문장을 만났을 때 감전된 듯 온 몸에 충격적으로 전해오던 메세지를 보면서, 그동안 나는 한 번도 상대가 나를 견딘다는 생각을 못해 본 것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언제나 내가 참고 내가 견디며 산다는 <나>만 알았지 진정으로 상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녀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까요?
사회적으로 성공했겠지만은, 과연 진심으로 자신이 성공했다고 느낄 지 그것은 의문입니다. 이런 책을 또 낸 것을 보면 아마 그렇게 자신을 보고 있겠지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정도 책 한 권 내는 에피소드쯤이야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도 해 본 책입니다.
댓글이 너무 길죠?
사실은 리뷰를 쓰나 마나 고민하다가 결국 안쓰기로 했는데, 로드무비님 글을 보니 예전에 했던 생각이 줄줄이 엮어져 나오네요.
_()_

로드무비 2006-06-2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저는 당시 그 에고이스트적인 면모에 반했는 걸요.
자신에게 무섭게 집중하고 도취되는.
그리고 파격적인 말과 행동.
거름망이 필요 없는 자유분방함에 반했습니다.
남편 입장은 생각도 못해봤고요.
그저 화가의 글을 통해서 이 부부는 최고의 '소울메이트'가 아니었을까
짐작만 했답니다.
이번 책은 구성도 그렇지만 '성공'과 '성공한 사람'에 대한
그의 견해가 너무 빤해서 좀 놀랐던 거고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런지도 모르고요.
다만 저의 구미와 견해에는 좀 맞지 않는다는 것뿐.

아무튼 비판적으로 쓴 글을 올리고 나니 찜찜하네요.
역시 좋았던 책 리뷰만 올릴까 봐요.
너무 길긴요, 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진지한 댓글 고맙습니다.^^

mong 2006-06-2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점선의 그것은 좀 다를 줄 알았다.
어머 정말요?
=3=3=3

로드무비 2006-06-2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제가 좀 변질됐나 봅니다.^,.~
예전엔 미리 웃을 준비 하고 그의 책을 사고 읽었는데......

2006-06-26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국경을넘어 2006-06-2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화가로서 한참 주가가 올라가 있는 그녀.
화랑에 가보면 그녀의 판화가 쫘~악 깔려 있죠.

집에 판화 작품이 몇 개 있는데
너무 많이 깔려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은 별로 집에 놓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삶이 그래서 그런 지 글도 상당히 신선하고 도발적이었는데
문제는 글을 너무 많이 쓰는 건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kleinsusun 2006-06-2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 받는 중에도 쉬는 시간에 추천하고 가요.^^
한 작가가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책을 낼 때에는 일단 조심해야 해요!!!

sandcat 2006-06-26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상하지만, 님 리뷰 때문에 후련한 마음으로 포기했습니다.
제목이 영 꺼림칙했지요, 저는.

로드무비 2006-06-26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교육중에 읽어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호호~
이 화가에 대한 내 눈높이가 너무 높아서 그런 건지도 몰라요.
글들도 힘이 많이 빠진 것 같고.

사라진님, 책은 역시나 화려하고 예뻐요.
그걸로 만족이 된다면 뭐.
옆에 살면 빌려드릴 텐데.^^

새벽별님, 컵받침 도톰하고 예뻐요.
특히 예쁜 말들, 컬러풀한 놈들로 골랐네요.^^

폐인촌님, 아무데서고 쓱쓱 그림 그려 주고
자신의 그림이라고 바들바들 떨지 않고 그런 부분은
참 좋았어요.
이 책에만 해도 넘칠 정도로 많은 말 그림이 있는 걸요.^^

초밥님, 별 말씀을.
중요한 일을 치르셨구만요.^^


로드무비 2006-06-27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캣님, 책 나오자마자 사놓고 엊그제서야 겨우 읽었어요.
책 두 권을 박스에 꽁꽁 묶어놨는데 안 빠져가지고.
저의 무능이 즐겁지 않으세요? ㅎㅎ

플레져 2006-06-2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갑잔치를 당신들끼리 하잖구서...^^
저는 단 한권의 김점선을 읽었는데요, 그걸로 족해요.

로드무비 2006-06-2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그래도 저는 미련이 남는군요.
요즘 왜 그렇게 모습을 안 보이십니까?

로드무비 2006-06-29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그 학교 졸업생으로 알고 있는데.
글 무지 잘 쓰는, 말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호기심이 있으면 한 번 검색해 보세요.^^
(그리고 모를 수도 있죠. 너무 당연한 걸.....)

로드무비 2006-06-29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그랬구만요. 소곤소곤.^^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 이가서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 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詩  '파안'  고재종 (27쪽)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에 수록된
48편의 시를 읽었다.
골목길
의 사진작가 김기찬 씨의 오래 전 흑백사진들이 중간중간 적절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김사인 시인의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남자가 되어'라는 시 뒤의
갑자기 비가 쏟아진 거리로 비닐우산을 팔러 나선 긴머리 소녀들의 사진은
푸르고 비린 빗물 냄새가 확 달려드는 듯이, 그 자체가  한 편의 시다.

김선우의 '봄날 오후', 정끝별의 '밀물',  최승자의 '이런 시', 김혜순의 '환한 걸레' 등
여성 시인들의 시가 특히 좋았다.
나도 이제야 여성이 되려는 것인가.

그러나 단연 최고는 고재종 시인의 '파안'.
군더더기 하나 없는 시에 내 마음이 그만 볼그족족해진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로 등단한 안도현 시인.
내 고향 우체국에 근무하던, 시를 쓰는 내 친구는 오래 전 그의 시집을 구할 수 없어
시인에게 편지를 부쳤다고 했다.
시인이 보내준 편지(엽서?)와 시집을 그렇게도 자랑스러워 하던 친구.

그때도 난 애가 발랑 까져 가지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시인의 주소를 알아낼 정성이면 시집을 열 권은 구하겠다.'

미안하다, 친구야.
난 아직도 마음이고 지붕이고 옹색한 그 꼴로 산다.

오천 원에 소주 세 병과 두부 찌개 한 냄비면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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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6-2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볼그족족... 마음에 베껴갑니다.. ^^

검둥개 2006-06-2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로드무비님과 발랑 까지시는 것은 왠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멋진 어울림입니다. ^^ 안도현 시인은 선생님이니까 주소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거 같아요. ㅎㅎㅎ

로드무비 2006-06-2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멋진 어울림이라니, ㅎㅎ
근데 제가 곽재구 시인이랑 안도현 시인을 무지 헷갈려 했거든요.
어쩌면 시인을 바꿔치기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침에 읽어보니.^^

따우님, 캬, 그 메뉴 환상이네요.
저도 환상적인 메뉴 많은데, 시 코빼기도 볼 수 없어서
섭섭합니다. 우리한테도 좀 와주면 좋을 텐데...^^

에로이카님, 마음에 베낀다니, 시가 따로 없군요.^^

nada 2006-06-2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웃분들도 시인이셔....저도 마음에 슬쩍 베껴 봅니다... 근디 워낙 악필이라 나중에 읽어 보면 항상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로드무비 2006-06-26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체국 친구는 제 페이퍼에 세 번쯤 등장했답니다.
전 예전에 술 마시고 영감 받아 수첩에 뭐라고 뭐라고 적어놓으면
다음날 해독이 불가능하더군요.
그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ㅎㅎ

2006-06-26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6-2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온 뒤 아침아,
아이고 힘빠져!
누구는 뭐 아주 신나는 것처럼 보이나?
저녁에 통화 좀 하자. 힘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