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성석제 지음, 김경호 그림 / 창비 / 200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소 맛있는 음식이라면 환장을 하는 나는 어젯밤 도서전시회 준비 때문에
코엑스에 가 있다는 남편의 말에 반색을 하며  1층에 오므라이스를 그렇게 잘하는 집이 있다는데 
알아보고 1인분 사오라고 부탁했다.
여직원들에게 물어보고 가게 이름(오므토 토마토)을 알아낸 남편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종류가 많다는데 뭘로 사갈까?

--새우와 해산물 들어간 종류!

어제 저녁 우리 집 메뉴는 전날 먹고 남은 감자탕 국물이었다.
선거일에 주소지가 서울로 돼 있어 연남동에 간다는 동생 부부에게 거기 살 때
단골로 가던 '송가네 감자탕'을 사오라고 시켰던 것.
투표를 마친 동생네 가족이 감자탕을 사와서 실컷 먹고 남은 국물을 어제 저녁
주요리(!)로 떠억하니 내놓았으니, 나의 뻔뻔함도 정말 극에 달한다.

밤 열 시경에 남편이 오므라이스를 사들고 돌아왔다.
새우와 홍합, 주꾸미 등이 제법 풍성하게 든 크림소스는 따로,
깔끔한 도시락 속의 오므라이스는 노란 달걀지단이 찢어지지도 않고 봉긋하니 볶은 밥을
잘 감싸고 있었다.

--절반은 남겨놨다가 아침에 아이들 먹여야지.

나는 인심 쓰듯 반을 덜어내고 접시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잠깐 돌렸다.
흰우유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되고 치즈나 버터라면 잘색인 내 입에는
그 서양식 소스를 덮어쓴 오므토 토마토의 해산물 오므라이스가 썩 맛있는 편이 아니었다.
대학 앞 분식집의 오므라이스가 내 입에는 훨씬 맛있게 느껴지니......
아무튼, 유명한 맛집의 오므라이스를 마침내 맛봤다는 만족감으로
어제는 달디단 잠을 잤다.

오므라이스와 감자탕에 필 받아, 오늘 아침 마침 눈에 띈  성석제의 음식 산문집 <소풍>을 읽었다.
제주도 남쪽의 표선면 면사무소 앞 버스정류장 근처 한 블록집,
그 흔한 간판도 하나 없이 가정집에서 국수를 말아내는데, 주인장 이름이 '춘자'여서
단골들 사이에는 '춘자싸롱'으로 통한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는 춘자국수의 국물에 관한 '쎄미나'가 열려 제주도에서만 나는 어떤 물고기 새끼를
국물 내는 데 사용한다는 비밀을 밝혀냈다고 한다.

두부니 묵밥이니 냉면이니 하는 가지가지 음식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도라무깡을 엎어놓은 시장통의 허름한 식당이나 선술집을 미치게 사랑하는  나에게는,
그 식당들의 시금털털하고 구수한 냄새와 담배연기와 잡담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해
이 책의 장면장면들이 너무나 정겨웠다.
직접 만든 두부를 한 모에 3500원에 판다는 경기도의 한 원조 묵밥집의 주인장의 얼굴이
궁금하질 않나.

'그 얼굴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138쪽)

한사코 소주병을 달라고 하더니 마침내 낚아채 간  생태찌개집 노파의 말은 또
얼마나 당당하고 흥겨운가!

"술이란 지집이 따러야 맛이제. 자,  받어, 이 잔."(79쪽)

각설하고, 춘자싸롱 국수가 먹고 싶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주 2006-06-02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오늘 점심은 국수로 할까요?

waits 2006-06-0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이웃으로 살면서 친한 척 하면 가끔 얻어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나마 식탐(?)은 별로 없는 걸 다행이라 여깁니다...^^(야식배달 남편님과 반 떼놓는 모정에 추천을~)

Mephistopheles 2006-06-0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봐도 로드무비님은 알라딘의 `런치의 여왕'이라니까요~~!!
여왕만세..!!

blowup 2006-06-0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은데도, 별로 당기지 않는 책이에요. 성석제의 그 놀라운 이야기들이 제겐 대충 그래요.
-춘자살롱이라는 프렌치 레스토랑도 있다는데요.^-^(그런대로 먹히는 키치인 모양입니다.)
-저도 그랬어요. 오므라이스 전문점들의 맛이 의외로 패스트푸드 같았어요.

mong 2006-06-0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맛집도 맛집이지만
만들어 주시는 주인 아주머니 얼굴이 궁금해 지는군요~

2006-06-02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6-0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식당 주인 얼굴이 궁금하게 만드는 것도 이 작가의 역량이죠.^^

namu님,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읽었어요.
춘자살롱은 언젠가 또 어느 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성석제 씨의 글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 책과 그는
궁합이 잘 맞더군요.
오므라이스도 그렇고 전 역시나 오래되고 꾀죄죄한 식당 음식이 좋아요.
찌그러진 양푼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전생이 의심스러울 정도랍니다.^^

메피스토님, 책장수님이 어디에 있다 하는 전화를 받으면
그 부근에서 사오라고 할 음식 뭐 없을까 짱구를 굴립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귀여워요. 호호~~

나어릴때님, 식탐이 없으시다니 부럽사옵니다.
전 싸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합니다.
가격 면에서 그나마 다행이죠.
직접 사들고 나르는 책장수님은 좀 괴로울 거예요.^^;;

진주님, 아직 점심을 안 드셨어요?
국수, 너무 좋아요.
맛나게 드세요.^^

sandcat 2006-06-0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 근처 롯데슈퍼에서 멸치국수를 천 원에 팝니다. 국수 사리에 양념장, 김가루, 김치만 얹어, 자리도 없이 서서 먹어야 하는 덴데 맛은 그럭저럭 괜찮더라구요. 근데 기분이 이상하데요. 대형할인마트에서 먹는 양은냄비 멸치국수라니.. 로드무비 님이라면 아무리 국수 맛이 그럴 듯해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을지도.

2006-06-02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6-06-0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랑 가정을 꾸리셨네요.
그 분을 코엑스에서 오늘부터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면 뵐 수 있겠군요.^^

로드무비 2006-06-02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호호,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사옵니다.
게으르다는 면에서 죽이 맞는 바람에!
이상한 결합도 다 있지요?^^

추천만 하고 님, 그러시면 섭하죠.
가끔 모습 좀 보여주세요.^^

샌드캣님, 양은냄비 멸치국수 사정없이 땡기는데요?
단돈 천 원이라니, 일부러라도 한 번 가봐야겠는 걸요.^^

야클 2006-06-02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춘자싸롱에서 커피도 아니고 국수라니요. 아참, '국수'하니까 또 부담되네. -_-+

nada 2006-06-0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허름한 식당과 선술집 미치게 사랑합니다...ㅋㅋ 닭발과 순대국두요. 양푼이를 좋아하셔서 전생이 의심스러우시다구요? 전 하도 입맛이 촌스러워 해방둥이가 아닌가 착각할 때도 있답니다..ㅎㅎ

에로이카 2006-06-0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연남동 일대가 쏠솔하게 맛있는 집들이 많은 것 같아요. 순대국집들도 그렇고, 무슨 산채비빔밥집도 그렇고...
- "도라무깡을 엎어놓은 시장통의 허름한 식당이나 선술집"... 아.... 정밀 미치도록 그립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여름이니 좀 덜하네요...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코로는 맛있는 냄새가, 안경으로는 김이 덥석 서리던...

로드무비 2006-06-03 0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잘 아시는군요. 연남동 기사식당 골목 분위기.
그런데 제가 아주 오래 전 떠듬떠듬 옮겨 쓴 적 있는 전영경 시인의 시들
('오래된 수첩' 카테고리) 아세요?
그놈의 도라무깡이 어쩌구 하는 시도 있었는데.
안 읽으셨다면 보여드릴게요.
문을 열면 냄새와 훈김이 확 달려드는 그 분위기를 잘 아시는 것 같아서.^^

꽃양배추님, ㅋㅋ 전 순대국은 순대만 넣어달라고 해서 먹어요.
그 이상하게 뻐등뻐등하고 흐물흐물한 것들이 싫더라고요.
내장탕 이런 것도 못 먹고.
미식가는 못됩니다.
꽃양배추님이 해방둥이라면 전 이미 이 세상에 없겠군요.
우스워 죽겠습니다요.^^

야클님, 사방에 매복하고 있는 국수 그릇들입니까?=3=3=3


에로이카 2006-06-0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드무비님. 보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지요? '오래된 수첩' 카테고리가 지금은 안 보이네요..

로드무비 2006-06-04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마음에 드셨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춘자 사랑 2010-07-13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춘자국수를 먹어본 일 인입니다. 죽여주는 맛입니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가게에 탁자라고는 2개밖에 없는..그야말로 구멍 가게지요. 가게 안은 멸치 우려내는 냄새로 가득차서 한 치의 틈도 없어요. 가면 방 안에서 춘자 아줌마가 느릿느릿 나오셔서 국수를 삶기 시작하십니다. (아, 멸치 육수는 휴대용 가스렌지에서 계속 우러나고 있고요.) 고명이니 이런 거? 없습니다. 그냥 고춧가루에 깨소금. 채썬 당근 정도? 그게 제주도 국수이지요. 하지만 그 맛은 고급 호텔의 어느 우동과도 견줄 수 없는 맛입니다. 여기는 꽤 유명한 곳이라 손님이 많아요. 그래서 자리가 모자랄 때가 많아요. 그럴 때는 먹고 있던 사람들도 기다란 테이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주죠. 다른 사람들이 합석을 할 수 있게요. 그러면 두 팀, 세 팀이 한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이건 아줌마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 정말 멋진 곳이죠? 제주도 오게 되면 일부로라도 한 번 꼭 오셔서 드셔보세요. 아! 원래 2000원이었는데 얼마 전 올라서 2500원 입니다~^^ 곱배기는 3000원이고요. 콩국수도 있어요.

로드무비 2010-07-13 14:1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입에 침이 막 고이네요.
제주도 가면 머무는 동안 매일 곱배기로 먹어야겠습니다.
비빔국수는 없나 몰라요.^^

춘자 아줌마가 방안에서 느릿느릿 나오셔서 국수를 삶기 시작하신다니
생생한 묘사!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