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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평점 :
'경성'이나 '트로이카' 하면 왠지 눈빛이 게슴츠레해지면서,
앞머리라도 좀 지져서 침 발라 붙이고, 입술이라도 빨갛게 칠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트로이카, 즉 삼두마차는 옛날옛날 문희, 윤정희, 남정임, 혹은
장미희, 유지인, 정윤희라는 아름다운 세 여배우와 함께 엮여 떠오르는 단어.
그런데 일제 강점기 무렵의 우리나라 수도 '경성'과 결합하니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지지직 잡음 가득한 유행가와 함께
누렇게 바랜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마음속에 처연하게 자리잡는다.
이현수의 <신기생뎐>처럼 <경성 트로이카>도 기막힌 인연으로
작가 안재성을 찾아왔다.
어느 날 우연히 모르는 화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인사동 화랑에 들른 작가,
그날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심상찮은 분위기의 작품들은 바로 1930년대
'경성 트로이카'의 주역들과 동지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이효정의 아들이
제작한 것이었다. 그날, 안내원의 책상 위에 쌓인 시집은 화가의 어머니 이효정이
여든이 넘은 나이에 펴냈던 것.
25년 전 노동자로 소설가로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있을 때 풍문처럼 얼핏 접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적인 사회주의 단체가 '경성 트로이카'이다.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이 주도했는데 구체적인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해서
혁명을 꿈꾸었으며,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조직에서부터 활동까지
그렇게 주도면밀할 수가 없었다.
그 옛날 만주에서 장바구니에 육혈포를 숨겨 나르던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코민테른의 팸플릿을 가슴 속에 품고 나르던 동덕여고 학생 이효정의 책상머리엔
'내 작은 이름을 혁명에 바치리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그 소녀가 아흔 살이 넘은 파파할머니의 모습으로,
운동과 문학을 접고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작가의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것이다.
이효정 할머니의 생생한 육성을 발판으로 일반인들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경성 트로이카'가 복원되었으니,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설레었다.
나름대로는 혜택받은 자들이었던 꿈많은 여고생들이 참혹한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며
학내에서 백지동맹을 주도하고 독서모임을 결성하고 사상적으로 무장해 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여쁘고 미더운지.
'경성 트로이카'의 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덕여고의 그 여학생들과 함께였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여성이라고 해서 미미하고 소극적인 활동에 그친 것이 아니다.
하루 열여섯 시간 노동의 참혹한 공장 생활은 물론,
투옥과 끔찍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가열차게 투쟁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의 생활은 오로지 노동운동과 결합되었다.
1930년대 식민지 노동자의 참혹한 삶에 대해서는 소설 등을 통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전 존재를 던져 일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몰랐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자기희생과 불굴의 의지를 통한 실천 속에 완성됩니다."
'경성 트로이카'를 이끌었던 이재유의 말처럼, 비료공장에서, 방직공장에서
또 어디어디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경성 거리에서 순사에게 쫓기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투쟁했던 그들.
이재유, 김삼룡, 이관술,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이현상....
그 이름들을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