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꽃이 불편하다 창비시선 221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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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속에서 하루 종일 시인의 음성을 듣는다.
마음은 '쓰레빠'를 끌고  아파트 단지 앞의 조그만  '점방'으로 나가 
냉장고 문을 몇 번이고 벌컥 열었다.
그 마음을 억누르고 집 냉장고 속의 김빠진 맥주 한 병으로
간신히 입술을 축이고 있다.

시인의 부음을 듣고 하루종일 황망하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들을 검색한다.
시 한 편 한 편이 절창인 걸 알면서, 그토록 끌렸으면서, 왜 절판이 되도록?
머리통을 쿵쿵 쥐어박는다. 맞아도 싸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가?
짜증이 확 인다.
쓸데없이 노닥거리기나 하고.
누군가 나를 죽도록  패줬으면 좋겠다.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 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레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70쪽~71쪽,   詩  '봄비'  全文)

하릴없이 그의 시집을 꺼내어 한 편 한 편 다시 읽는다.
단언하건대,  단 한 줄도  버릴 것이 없다.

사는 일과 죽음 사이
뜨거운 밥이 있고
시가 있고
한낮 미쳐가는 꽃들의 꼿꼿한 가시가 있고
그 너머로 걸어오는 몇 마디 인간의 말 (54쪽, 詩 '그마저 스러진 뒤' 중에서)

보탤 말이 없구나.....




**지나치게 감상적인 태도도 그렇고, 페이퍼로 올릴 걸 기세좋게 리뷰로 올리다니,
그 뻔뻔함에 눈살 찌푸리면서도  기왕 올린 것 그냥 두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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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5-1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인들 중에 유독 시인들이 요절을 하는 경우가 많던데...
시를 잘 모르는 저입니다만....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로드무비 2006-05-13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종일 짠합니다.

에로이카 2006-05-1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과 불화한 시인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시인다운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빌어먹을 세상의 일부인 나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

nada 2006-05-13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분인 줄 알았는데 솔아 푸른 솔아를 쓰신 분이라니 저에게도 개인적인 슬픔이 느껴지네요. 소극적인 자살이라는 동료 시인의 말씀도 마음에 깊이 남구요. 명복을 빕니다.

비로그인 2006-05-14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 뭘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만 그 분이시군요.. 참 많은 분이 안타까워 하겠네요.

로드무비 2006-05-14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캐서린님, 묘한 분이셔요.

꽃양배추님, 님의 댓글이 얼마나 반가운지......

에로이카님, 이 시인의 시를 한 편 소개하고 싶었어요.

플레져 2006-05-17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
로드무비님의 리뷰 제목이 시집 제목인 줄 알았어요...

릴케 현상 2006-05-1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았을 때 샀어야했남 -_- 하여간 샀어요

로드무비 2006-05-1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반가워라.
아무려면 어때요. 지금이라도...^^

플레져님, 저 삐졌어요.
이렇게 유치하고 감상적인 리뷰에 댓글 안 달아주셔서.
(무신 말이댜?!)
배시시~~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