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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두기 - 영국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 여성 편집자의 자서전
다이애나 애실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훌륭한 출판업자는 작가를 발굴하는 것이 임무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어쩌다 보니 연결이 되었다.(175쪽)
소설가 김승옥의 원고를 받기 위해 문학사상 편집부 직원들이 사무실 근처
여관에 그를 감금(?)해 놓고 옆방에 진을 치며 감시하여
몇 날 며칠 만에 원고를 받아냈다는 이야기는 편집자들에게 전설처럼 다가온다.
더구나 그 당시의 편집부 직원들이 지금 이름만 들어도 입이 벌어지는 우리 문단의
중진들이었으니.(이어령, 서영은 등)
1990년대 초, 춘천 모 소설가의 집에 육필원고를 받으러 갔더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상자같은 조그만 다락이 하나 달려 있는데
ㄷ출판사의 편집부 여직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주말에만 서울에 올라가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한다고 했다.
아무리 작가의 집필을 독려하기 위해서라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이든 산문집이든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는 작가의 주변에 다른 출판사의 접근을 차단하는
의미도 있었다.
나는 그이가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소설가와 가족같이 지낸다고 해서 그도 덩달아 소설가의 가족인 것은 아니다.
내 눈에 그는 쓸모없는 일에 자신의 자유를 저당잡힌 다락방의 베키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의 친구) 정도로 보였다.
"영국 출판 편집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우는 다이애나 애실의 출판 인생 자서전
<그대로 두기>를 단숨에 읽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다른 훌륭한 출판업자들과 달리 어쩌다 보니 작가들과 연결되었다"는 말과는 달리,
'노먼 메일러, 존 업다이크, 잭 케루악 등 20세기의 비중 있는 전후 영미권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다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그이다.
우리가 몰랐던 작가들의 극적인 삶이나 숨은 이야기보다, 너무나 담담하고 솔직한 어조로 회상하는
그의 50년 출판 인생의 하루하루가 내게는 더 박진감이 넘쳤다.
80년대 중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연쇄살인사건 범인들과의 옥중 인터뷰를 통해
인간과 죄악의 어두운 심연을 파헤치는 책을 내겠다는 야심찬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교도소를 방문, 범인 중 한 명인 마이러 힌들러를 만나보고 나서 그는
책을 출간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녀가 멀쩡한 성인의 입장에서 저지른 살인사건의 기억들과 함께 계속 살아야 한다면
'나는 죽어야 된다'고 인정하거나 정신분열을 일으킨들 이 사회가 얻는 수확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녀를 도와 원고를 완성하고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간한다면 우리는 저질 포르노를 싣는 쓰레기 신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신문이 될 수는 없었다.(88쪽)
그날 대화를 통해 연쇄살인범 여성의 현재 상황과 그녀의 성격을 이해한 후
책을 내는 것이 당사자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야심찬 기획을 접는 순간
그의 통찰력과 용기와 결단은 눈부실 정도였다.
또한 어느 날은 진 리스라는 소설가의 새 원고('임페리얼 대로') 출간을 반대하는데
이유는 사랑하는 작가가 그 작품을 펴냄으로써 인종차별주의자로
세상에 낙인 찍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흑인이 되고 싶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작가였지만 평소 대화에서
마음에 드는 흑인이 있으면 "충직하다"고 표현하는 등 그의 뼛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차별을 본 것이다. 그것이 새 작품에 은연중 나타난 것이고.
진 리스라는 작가는 멋진 편집자를 만나 정말이지 적절한 보호를 받았다.
함께 일한 사람들이나 친하게 지냈던 작가들에 대한 묘사도 얼마나 구체적이고 생생한지
바로 옆에서 차를 한잔 마시며 직접 이야기를 전해듣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감탄한 건 그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유머.
'책'이나 '출판'에 대한 그의 사유도 어찌나 공감이 가는지 나도 모르게 밑줄을
북북 그어가며 읽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
--내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위대한 문장에 희열을 느껴서라기보다
내 좁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 복잡한 인생에 대한 감각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잡아먹을 듯한 인생의 어둠과 고맙게도 그 속을 애써 뚫고 나오는 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