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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 이가서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 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詩 '파안' 고재종 (27쪽)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에 수록된
48편의 시를 읽었다.
골목길의 사진작가 김기찬 씨의 오래 전 흑백사진들이 중간중간 적절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김사인 시인의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남자가 되어'라는 시 뒤의
갑자기 비가 쏟아진 거리로 비닐우산을 팔러 나선 긴머리 소녀들의 사진은
푸르고 비린 빗물 냄새가 확 달려드는 듯이, 그 자체가 한 편의 시다.
김선우의 '봄날 오후', 정끝별의 '밀물', 최승자의 '이런 시', 김혜순의 '환한 걸레' 등
여성 시인들의 시가 특히 좋았다.
나도 이제야 여성이 되려는 것인가.
그러나 단연 최고는 고재종 시인의 '파안'.
군더더기 하나 없는 시에 내 마음이 그만 볼그족족해진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로 등단한 안도현 시인.
내 고향 우체국에 근무하던, 시를 쓰는 내 친구는 오래 전 그의 시집을 구할 수 없어
시인에게 편지를 부쳤다고 했다.
시인이 보내준 편지(엽서?)와 시집을 그렇게도 자랑스러워 하던 친구.
그때도 난 애가 발랑 까져 가지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시인의 주소를 알아낼 정성이면 시집을 열 권은 구하겠다.'
미안하다, 친구야.
난 아직도 마음이고 지붕이고 옹색한 그 꼴로 산다.
오천 원에 소주 세 병과 두부 찌개 한 냄비면 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