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서재와 보관함이 안돼더니 오늘은 책을 주문하려니까 주문이 안된다. 알라딘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영업을 하는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알라딘의 대표 에러 메시지 캡쳐 해둔 것들을 덧붙인다.


1.런타임오류

2.아래와 같은 이유로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3.응용 프로그램에 서버 오류가 있습니다


4.이렇게 사전 공지 없이 서버점검을 하다가 에러를 감당 못하자 공지를 합니다.어제 오전11시45분


4.오늘 장바구니에 담긴 걸 구입하려고 하니 이제는 결제 에러.


이전에 구입한 상품이 있는 것도 아니데(설령 있더라도 구입했던 상품을 지적했는데 여기서 막혀서 주문불가)


5.잘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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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고병려, 바울, 고위공, 하인리히 뵐...

날도 덥고 해서, 내 방을 물리치고 집사람 방에 내려와 노는데 (내 방은 옥탑방, 집사람 방은 구석방) 며칠 전부터 책상 앞에 딱 앉아서 오른쪽을 흘끗 보면 계속 내 눈에 들어와 꽂히는 책이 하나 있는 거다. 제목은 <바울서간>인데, 사실은 그 저자의 이름이 더욱 인상적인 거다. "고병려"라고... 글쎄, 지금 와서 봐도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다 싶다.(문득 오늘 무슨 인터넷 만화에서 본 "연보흠" 기자가 생각나네.) 이 사람... 예전에 집사람 책장에 그 책이 있는 걸 봤어도, 그냥저냥 이런저런 신학자 아니면 목사 아니면 뭐 비스무리한 양반이겠지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그 책이 "뎀비는" 바람에 수고롭게도 책장에서 꺼내 뒤적뒤적해 봤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은 이른바 신약성서의 "바울서간"(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의 번역, 그러니까 사역(私譯)인 거다. 예전에 집사람이 좋아라 하며 헌책방에서 집어들던 무교회 쪽 사람인가 싶어 맨 앞장 저자 약력을 보니 의외로 당시(1987년) "서울대학교 희랍어 강사"라고 나오는 거다.

오호. 얼마 전에 피천득 선생 에세이집에도 희랍어를 통달했던 친구 모 교수의 죽음을 애통해 하던 이야기가 나와 흥미롭더니, 이 양반은 또 누구신가 싶어 인터넷을 뒤적뒤적해 보았더니, 이런, 2006년 4월 23일에 별세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한 가지 얻게 된 또 다른 정보는 그의 아들이 바로 독문학자 "고위공" 선생이라는 것. 어째 집안 내력인지 이름들이 결코 평범하진 않은데(병려, 위공), 하긴 내가 "고위공"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것도 그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주 예전, 그러니까 울 엄마가 <주부생활> 열혈 독자일 때에 하루는 "별책부록"으로 날아온 책 가운데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번역자가 바로 "고위공"이었다. 알고 보니 학원사, 아니, 주부생활사에서 나오던 주우 세계문학 가운데 한 권을 재가공(뭐냐면... 안 팔리는 책을 절단기로 이래저래 "짤라"서 표지갈이 한 책)해서 내놓은 물건 같았다. 생각해 보면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읽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누런 이로 소시지를 베어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표제작보다도 그 뒤에 실린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느냐?>가 무척 인상적이었다.(지금도 그 제목은 외운다니까. Wo warst du, Adam.) 하긴 뒤의 작품이 좀 더 비극인 이유도 없지 않고...

하인리히 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십중팔구는 "귄터 그라스가 받아 마땅한 상을 얍삽하게 뺏은" 인물로 인식되는지 모르겠는데, 글쎄, 그거야 뭐, 나중에 그라스도 일종의 체면치레는 했으니 더 이상은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겠지. 무슨 뜻이냐면 귄터 그라스가 문학성은 더 뛰어난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인의 반성이랄까, 그런 분위기를 좀 더 잘 드러낸 것은 하인리히 뵐이기 때문에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 쪽에서도 그라스 대신 뵐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소문이 없지 않았던 거다.(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이 보통 "한 수 위"로 여겨졌던 다니자키 준이치로 대신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돌아갔을 때의 충격과도 비슷했다고나 할까. 물론 다니자키는 그보다 몇 년 전에 사망했지만, 후보로는 종종 거론되었다고 들은 바 있다.) 그래서인지 하인리히 뵐의 소설은 어딘가 우울한, 그러니까 잿빛의 소설이라고 인식되었는데, 의외로 단편이나 방송극은 재미있었다.(가령 "나의 슬픈 얼굴"이라든가, "어린 왕의 수기" 같은 풍자적인 단편,그리고 <결산>이라는 방송극집에 나온 그의 몇몇 작품이 지금도 기억난다.) 독문학계의 "불독"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조차도 그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기억했다. 폴란드 출신의 라이히-라니츠키 부부가 독일로 망명한 직후, 그를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 중 하나였던 하인리히 뵐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 그의 부인을 즐겁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사로잡힌 영혼>이란 자서전에서 하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라이히-라니츠키의 독설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그래도 수년만에 다시 만났을 때 먼저 그를 끌어안고 "이제 다시 친구가 된 거지?" 하고 유쾌하게 물어본 사람 역시 하인리히 뵐이었다고 한다.(뭐야, 불독 영감. 쪼잔하게시리.)

다시 고병려의 <바울 서간>으로 돌아가자. 성서의 "사역"으로 내가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최민순 신부의 "시편" 번역이다. 이건 손바닥 만한 작은 판형의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는데, 아쉽게도 최 신부는 희랍어를 몰랐기 때문에 (이 양반의 본령은 라틴어였던가, 이탈리아어였던가 그랬지.) 이런저런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서 일종의 "중역"을 시도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뭐, 원래부터 시인인가 그랬고, 이 양반 번역의 <신곡>을 보면 지금 봐도 도대체 뭔 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독특한 우리말 구사가 일품이기 때문에, 나름 중역이라도 "시편"의 뉘앙스에는 오히려 걸맞은 번역자가 아닐까 싶다. 하여간 고병려의 <바울 서간>은 전5권으로 구상된 "약주 신약성서 시리즈" 가운데 4권으로 나오는데, 이 시리즈가 완간된 것은 아닌 모양인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중 <마가복음>, <요한문학>이 더 출간된 듯하지만 5권이 완간되지는 못한 모양이다. 집사람이 갖고 있는 책에는 특이하게도 종종 틀린 부분에 "스티커"를 붙이고 화이트로 지운 부분이 있다. 아마도 그리스어 원본의 직역에 충실하려 한 까닭일까, 기존의 여러 성서에 비하면 약간 뻣뻣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뭔가 새로운 해석이랄까, 이해의 여지를 남겨준다는 점에서는 소중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가령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로마서 13장, 이른바 "세속 권력에 대한 복종" 대목을 보자.

  • 모든 사람은 상부의 직권에 복종하라. 하느님에게서 유래하지 아니한 권위가 없으니, 현존하는 모든 집권자는 하느님에 의하여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고병려 옮김)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바라. (개역개정판)
  •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동개정판)

어디서 읽었더라? 누군가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요즘 신앙이 잘 서지 않는 모양이군" 하고 비아냥 조로 이야길 하는데, 하긴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 예수처럼 살 수만 있다면 신학이나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이름 팔아 먹고 사는 일종의 "사업체", 또는 "관료조직"이 되고 말았으니, 신학이란 것도 이들에게 뭔가 올바른 지침으로서 필요하다고는 본다. 문제는 신학과 신앙, 또는 이론과 실천, 아니면 강단과 현장이 상호침투적이지 못하게 다 제멋대로 따로따로 논다는 것이겠지만. 하긴 기독교 신학만큼이나 그 두 가지가 완전 등을 돌린 분야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강단에서 언급되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만 들어도 그 수많은 "영빨" 두둑한 집사, 권사, 장로들은 야단법석을 떨 텐데... 그렇게 보면 그것 참 문제다. 그런 "영빨" 우선론자들은 그렇다면 과연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알기나 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진리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는 어느 교부의 말, 더 나아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이상야릇한 "궤변"으로 귀결되게 마련인데, 솔직히 사람이 뭔가를 "믿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자신이 이걸 믿으면 뭔가 "이득"이 있을 것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믿고 말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거다. 나 역시 일찍이 기독교란 것을 접하며 "믿음"을 갈구했으나, 그에 앞서 뭔가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결국 기독교란 것도 허상 중의 허상이구나 싶어서 실망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독교, 또는 신학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자뻑"에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뭔가를 "지키기 위해" 또는 "옹호하기 위해" 내놓는 논리란 구차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기독교만큼 그 근거가 되는 문헌 자체가 모순적인 난리뻐거지인 다음에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근거 하나만큼은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에 온갖 무리수를 두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 올바른 비판이나 지적까지도 외면하고 마는 셈이다. 기독교의 문제는 바로 그거다.  물론 세계 모든 종교의 문제가 바로 그것, 박약한 근거를 지키기 위해 내세우는 "권위"이겠지만.

하여간, 정확히 자기가 뭘 믿는지 알고 싶다면 일단은 그놈의 "권위," 그러니까 성서가 도대체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톨스토이가 말년에 가서 웬 변덕으로 열혈 기독교인이 되어 성서를 읽기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거나, 또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어느 일본서적을 전재한 "희랍어 문법"을 연재하면서까지 "원전 강독"을 시도했던 것 역시 그런 맥락일 것이다. 어쩌면 고병려라는 양반, 성서 희랍어뿐만 아니라 고전 희랍어를 읽을 능력이 있는 양반이 굳이 그런 "사역"을 시도한 것도 그런 맥락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믿음"이란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일까? 기껏해야 그들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란 어느 편집, 가공된 고대 문헌의 "번역"에 불과한 것인데 말이다. 그들은 과연 예수의 수많은 비유 가운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가령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울지 않았느니라" 같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어쩌면 이것은 그 당시의 관용적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니 기독교의 믿음이란 것,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홍어를 밟는 것마냥 발밑이 흔들리는 체험일 수밖에 없다. 그런 박약한 근거 위에 나름대로 "신앙"과 "믿음"을 확고히 세워 불신자에 대한 갖가지 파상공세를 펼치다못해 광신적인 수준으로까지 나아가는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정말 좀비들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왜 의심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인 것인데.

뭐, 돌아가신 양반 붙잡고 이런저런 넋두리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 역시 당시로선 희귀했던 원문 해독능력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던 인물이었는지는 몰라도, 결과만 놓고 보면 아주 성공한 쪽은 아닌 듯하다.(일단 완간이 안 되었으니까.) 그 아들인 "고박사"만 해도 특별히 대중적인 연구 성과는 내놓지 않은 듯, 하인리히 뵐의 소설 번역 하나, 파울 첼란의 시집 두어 권, 그리고 게오르크 트라클 연구서 한 권 정도를 내놓았을 뿐이다.(오호, 트라클. 비트겐슈타인이 부친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희사한 세 명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 마야코프스키와 쌍벽을 이룰 만한 "빠박" 시인으로 기억하는.) 어쩌면 그냥저냥 나름 조용히 묻혀 사는 것 역시 이들 "고박사"들의 전통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우연히, 그리고 뜻밖에 생각나고 알게 된 김에 끄적끄적해 본다. 역시나 이곳에 적어두면 훗날 망각은 피할 수 있을 것이기에.

 

 

***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전기를 뒤적이며 트라클에 대한 대목을 찾아본다. 비트겐슈타인은 트라클을 자신의 후원 대상자로 선정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의 시의 어조는 마음에 든다. 물론 무슨 뜻인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말이다." 오호라...

*** 인터넷에서 "고위공"을 치면 "고위공직자" 관련 내용만 주루룩 뜨는 상황이다. 반면 알라딘에서 "고병려"를 치면 무려 2528건의 상품이 떠 버린다. 이게 웬일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병려"라는 저자의 책은 한 권도 없고, 그 각각의 음절, 그러니까 "고", "병", "려"에 해당되는 온갖 물건들이 "윤구병"부터 "박병철"과 "황병하"까지 망라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사오정 검색이지, 뭐.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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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어제밤에는 예찬이가 자정을 넘겨깻다.1시간 가량 찢어질 듯 비명도 지렀다.이웃집에서 뭐라 하진 않을까 신경도 쓰였지만 설마 새벽에 문을 두드리기야 하겠느냐며 생각을 지웠다.거의 1시간 정도 징징거리다가 잠이 들었다.밤이 힘든 건 외로운 사람들만이 아닌가 보다.세상의 많은 아기들에게 밤은 힘드나봐.왜 그런지는 모르겠네..

새벽 1시를 훌쩍 넘겼는데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아마 다음날이 쉬는 날이어서 마음에 여유가 있었던 듯 하다.다 큰 어른이 외갓집 찾아가는 횟수로 방문하는 나의 불면증.어제가 그날이었다.덕분에 책이나 읽자며 <미국의 송어낚시>를 40분쯤 봤다.누워서 보자니 허리도 아프고 해서 책을 덮고 컴퓨터를 켰다.이것 저것 구경하다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다시 누웠지만 잠이 들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대략 4시 가까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7시에 자명종이 울려 깨어 났다.그 이후에도 몇 번 더 깻던 예찬이도 자명종 소리가 귀찮은 듯 깼다.오늘은 휴일인데 시계를 꺼놓지 않다니...불찰이다.

아침에 모차르트를 들었다.사실 이 페이퍼를 쓸때부터  어떤 곡을 가장 먼저 고를까 생각해야만 했다.의외로 쉬웠다.6월 햇살에 담장 넘어 온 붉은 장미처럼 어디서나 만만한게 모차르트다.그리고 협주곡이었으면 했다.클래식을 처음 듣는 경우에 소품을 건너뛴다면 협주곡이 가장 무난하다.오케스트라도 즐길 수 있고 각 악기의 현란함도 즐길 수 있다.또 연주자들의 면면을 느끼기에도 좋다.

지난 해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었고 또한 예찬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나는 기념으로 자동차 뒤에다가 은색 알파벳 스티커로 'MOZART 250'을 붙였다.사실 스티커 부작 부위에 흠집이 생겨서 가리려고 고민하다고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겸사 겸사해서 예찬이와 함께 음악을 들었다.물론 예찬이는 또 스피커 유니트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지만 이제 더이상 망가질 것도 별로 없어보여서 그냥 내버려두었다.조금 장난하더니 부엌 뒤편 다용도실로 기어가서 쓰레기통에 애착을 보였다.무려 6번을 다시 들고 거실로 왔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kv 466을 들었다.

모차르트는 27개의 피아노협주곡을 만들었는데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어린 시절에 쓴 습작 수준의 작품이어서 그렇다.또 당시에는 요즘 처럼 악보관리나 저작권 관리가 철저하지 않아서 몇 몇 섞인 것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하여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대개 후반기 작업들이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d단조곡이다.1785년에 작곡되었다고 한다.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재미있는 것은 이 곡이 모차르트가 처음 단조로 만든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것이다.이어지는 협주곡 24번과 함께 단조 협주곡으로 자주 연주된다.

1악장을 듣다보면 왜 모차르트를 '질주하는 슬픔' 이라고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울음을 자신과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시골 운동장을 달리는 소년의 마음같다.현악기의 당김음과 음울한 저음의 현악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결코 느리지 않다.1주네는 흐린 날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을 생각하게 된다.바닷빛과 하늘 빛이 그리 다르지 않다.회색빛 두 선 사이로 무언가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보인다.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소통하기 시작하는 첫 마디에서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오는 부드럽고 상냥한 햇살이 느껴진다.나는 이 곡을 들으면 바로 그 부분.오케스트라의 메기기에 이어지는 피아노의 후렴의 첫 건반 소리가 늘 기다려진다.여름 날 흙먼지 운동장 바닥으로  떨어지는 첫번재 빗방울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2악장은 예전에 어느 CF에서도 쓰여서 그런지 '아기 로맨스'다.큰 잎에서 분가한 작은 부레옥잠 처럼 피아노 건반이 유영한다.''다 다라라라 라라 라라 다단 ....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들어보면 '아 ..이 곡 알아' 할만큼 유명한 아기자기 예쁜 곡이다.다른 곡이 지겨우면 2악장만 재미있게 들어도 별 상관없다.나는 이곡을 들으면 자꾸 편안하게 잠자고 있는 아기들이 생각난다.아무래도 그CF 때문인지 어디서 본 영상 때문이지 모르겠다.영상이 음악과 만나면 장점도 있지만 이렇게 방해를 하기도 한다.

3악장 론도.빠르기는 알레그로 아사이.많이 빠르다는 뜻이다.1악장 처럼 다시 d단조로 진행되는데 조성은 같지만 1악장처럼 음울한 느낌이 강하지는 않다.1주제부터 힘차게 시작해서 그런 듯 하다.

클래식이 의외로 생활에서 여기 저기 많이 들린다.우리 나라에서는 결혼할때도 멘델스존과 바그너의 축복하에서 식이 진행된다.그 곡들이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과 바그너의 <로엔그린> 중에 나오는 곡인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관심을 가지려면 약간씩 관심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기타를 잘 치기 위해서 플랫위에서 '도' 소리가 나는 자리가 어디인지 다 외워야하고 야구를 즐기기 위해서는 야구 규칙을 어느정도 알아야하는 것 처럼 말이다.한 남자가 야구장에 여자친구 데려갔는데 여자가 그러더란다.'왜 저 사람은 볼 4개 먹으니까 1루로 나가' ..

오늘 아침에 들었던 음반은.

 프리드리히 굴다/클라우디오 아바도/빈필하모닉(DG) 연주였다.내가 처음으로 산 20번 연주여서 다른 연주들보다 특히 애착이 간다.굴다는 아주 괴짜 피아니스트였다.유대인 모자를 쓰고 자주연주했고 재즈 음반도 여러장 냈다.흔히들 '빈 3총사'라고 불렸다.파울 바두라 스코다,외르크 데무스와 함께 빈의 정서를 잘 표현한 피아니스트로 꼽힌다.젊은 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빈 필 특유의 유려한 현악 울림이 곡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다.

클라라 하스킬/이고르마케비치/라무뢰오케스트라(Ph) 녹음 역시 훌륭한 연주로 많이 알려져 있다.클라라 하스킬은 모차르트 연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왔다.하스킬은 18살때 한창 나이에 세포경화증이라는 몸쓸 병에 걸려서 꼽추 할머니같은 모습을 같게 되었다.젊은 시절에는 무척 예쁘고 단아했는데..하지만 그녀의 모차르트 연주는 박음질이 없는 천상의 옷과 같은 느낌을 준다.굴다에 비해 덜 화려한 데 그점 때문에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루돌프 제르킨/클라우디오 아바도/런던심포니(DG) 녹음은 자주 듣진 않지만 가끔 무게감있는 모차르트를 듣고 싶을 때 찾는다.그렇다고 모차르트를 베토벤처럼 연주하지는 않는다.제르킨은 말년에 모차르트 협주곡 녹음을 아바도와 남겼다.음을 곱씹는 듯,조금은 사색적인 음색이 여럿의 취향이 되긴 조금 힘들겠지만 이상하게 듣고 싶어질 때가 많다.커플링면에서는 앞의 두 음반 보다 떨어진다.(굴다-20,21번 협주곡,하스킬-20,24번 협주곡,제르킨-20,12번 협주곡.부에나비스타소셜 클럽도 그랬지만 노장의 연주는 언제나 감동을 준다.아니 그냥 감동하고 싶다.(굴다-20,21번 협주곡,하스킬-20,24번 협주곡,제르킨-20,12번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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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즐거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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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함은 물처럼 존재한다.불행은 해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을 뜯어먹는다.물고기가 물고기를 잡아먹듯이 

 .......    브레히트의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 중에서

<제국>을 읽기 전에 '제국 논쟁'을 접했다.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2차 저작이나 논쟁은 훨씬 다층적이고 복잡하다.딸기를 먹는 것은 쉽지만 딸기 케이크 레서피를 읽는 것은 어려운 것 처럼.<진보평론>을 중심으로 펼쳐진 '제국 논쟁'을 다 따라가는 것은 처음부터 역부족이었다.책이 번역된 후 국내외 세계 체제론자 또는 트로츠키주의를 포함한 범좌파의 '제국' 비판과 자율주의자들의 반비판이 이어졌다.그러나 국내에서 '제국 논쟁'은 정점을 지난 듯 하다.인터넷 한 구석에서는 '제국 논쟁'의 잔불마저 꺼져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글들도 가끔 찾을 수 있다.

일단 <제국>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제국 논쟁>을 먼저 읽지는 말라고 권하고 싶다.<제국> 자체도 결코 만만한 내용이 아니다.거기에 주요 개념들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비판의 전체적 맥락까지 알아야 이해가 되는 <제국 논쟁>은 머리털 밑 신경세포를 괴롭히는 일이다.

선행과정이 좀 지저분해졌지만 <제국>을 읽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물론 내용과 개념을 이 잡듯이 이해하려고 달려든다면 또 다른 편두통의 원인이 될 것이다.조금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이해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적당히 넘겨가면서 보는 유연성도 필요하다.<제국>을 읽는게 무슨 수학 정석의 미적분의 공식을 적어내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구들은 있다.사회과학적 관심과 상상력,그리고 졸음을 이겨낼 정도의 끈기말이다.

<제국>으로 들어가자.도대체 <제국>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 책을 들고 다녔더니 회사차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가 그런다. "어..제국...음..무슨 대하 무협 소설인가 본데 "..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하다.네그리는 제국의 기본 가설을 이렇게 말한다."주권이 단일한 지배 논리하에 통합된 일련의 일국적 기관들과 초국적 기관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를 띠어 왔다는 것.이러한 새로운 전지구적 주권 형태를 제국 이라고 부른다"

네그리는 맑시즘을 주권개념으로 이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어쨋거나 쉽게 생각해서 '제국'은 세계화된 어떤 힘이다.과연 이런게 있을까 하고 싶을때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끌고 가자.전지구적 주권형태가 없다라는 것도 '제국 비판' 의 하나인데 그걸 물고 늘어지면 진도 안나간다.<제국>이란 것이 아주 독특한 것은 안과 밖이 없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세상은 거대한 어항이고 그 어항은 물로 가득차 있다.우리들은 물고기인셈이다.제국의 바깥이 없다는 것은 이 체제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다 <제국>의 범주안에 포섭된다는 것이다.이것도 이해 안된다고 할 사람들이 많다.네그리가 드는 예를 보자면 수많은 국제적인 NGO들도 결국엔 <제국>을 땡실 땡실하게 만들어주는 개량적 제도들일 뿐이다.좀 더 나가면 네그리는 제 1세계와 제 3세계의 구분도 없고 남과 북의 구분도 없다고 말한다.역사적으로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제국적 이행과정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기존 좌파들의 전략에 대한 네그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전지구화에 대한 저항과 국지성 방어라는 이러한 좌파적 전략은 많은 경우에 국지적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율적이거나 자기 결정적이지 않고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 기계의 발전에 연료를 공급하고 그 발전을 지지하기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국지적 저항전략은 적을 잘못확인하고 그래서 적을 감춘다.오히려 적은 우리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전지구적 관계들의 특정한 체계이다.

이미 할 비판하고 싶은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가득차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비판은 수첩 속에 적어 놓고 계속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도를 빼야한다.

아..한편에서는 상식적으로(특히 반미정서가 높은 우리에게 소구력이 있는 것인데) 미국이 제국 아니냐고 말한다.그러나 이들은 단호히 어느 특정 국민국가도 제국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제국으로의 이행은 근대적 주권의 황혼기에 나타난다.제국은 개방적이고 팽창하는 자신의 경계안에 지구적 영역 전체를 점차 통하하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 하는 지배장치이다.제국주의적 세계 지도에서 몇 가지로 구분됐던 국가의 색깔들은 제국적인 전지구적 무지개 속에서 합쳐지고 섞일 것이다.미국은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어떤 국민국가도 오늘날에는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할 수 없다.미국의 연방헌법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예외성은 '제국'적 속성(제국주의적이 아닌)을 지닌다.네그리는 로마제국의 권력체계를 인용한다.미국은 출발선상에서 공화주의적 마키아벨리 전통과 연결된다.특히 폴리비우스의 제국적 로마 모델을 따른다.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3원분립은 팽창성을 특징으로 한다.하지만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제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제국이 땅덩어리가 있는 국민국가적 상상력은 벗어난 일이란 것은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과연 그것의 현실성은 떼어놓고 보면 말이다.)

네그리는 <제국>을 기획하기 위해 선배 철학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스피노자,마키아벨리,맑스,푸코,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주 언급된다.그중 가장 먼저 꼽아야 사람은 스피노자이다.그는 스피노자의 '내재성' 개념을 차용한다.그리고 다음으로 푸코의 '생체정치학'은 인용한다.푸코는 '훈육사회'와 '통제사회'를 구분하였다.<제국>의 이행은 통제사회로의 이행선상에 있다.제국의 지배대상은 사회생활 전체이며 따라서 제국은 전형적인 생체 권력 형태를 나타낸다.개인들에 대한 사회의 통제는 의식이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체속에서 그리고 신체와 함께 이루어지기도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제국>은 닫힌 체계이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물고문같은 것이다.그러나 <제국>기획은 그게 목적이 아니다.탈출구가 있고 전복의 가능성이 훨씬 많이 열려있다.네그리와 하트는 그래서 <제국>을 더 밀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그렇다면 어디에 전복의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정답은 <제국> 그 자체가 스스로를 붕괴시킬 답을 안고 있다.제국은 제국 자신이 지닌 일반법칙에 의거해서만 그리고 제국이 제공하는과정들이 지닌 현재의 한계들을 넘어 그 과정들을 밀어붙일 때에만 효과적으로 논의 될 수 있다.우리는 그러한 도전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전지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전지구화는 틀림없이 대항 전지구화와 만날 것이며 제국은 틀림없이 대항 제국과 만날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열나게 인용하는 연구도 있는 반면 <제국>을 이해하기 위해 배격하는 것도 있으니 흔히 말하는 유럽 형이상학의 족보들이다.데카르트,칸트,헤겔...특히 <제국>을 이해하기 위해 헤겔식의 변증법과는 단절하라고 말한다.천천히 읽어보면 어렵지 않다.근대 권력 자체가 변증법적이라면 탈근대주의적 기획은 비변증법적이어야한다는 논리가 된다.바바(탈식민주의 호미 바바이다)의 일차적 공격대상은 이분법적 분할이다.전체 탈식민주의 계획은 식민주의적 세계관이 근거하고 있는 이분법적 분할에 대한 거부에 의해 규정된다.세계를 둘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고 대립 진영들(중심 대 주변,제 1세계대 제 3세계)로 구분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셀 수 없는 부분적이고 이동적인 차이들에 의해 항상 규정되고 있다.세계를 이분법적 분할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바바는 또한 총체성 이론들과 사회적 주체들의 정체성 동질성 볼질주의에 관한 이론들을 거부하게 된다..바바의 분석을 따라 다니는 그리고 일관되게 이러한 다양한 적대자들을 열결시키는 유령은 헤겔의 변증법이다.즉 서로 대립하는 본질적인 사회적 정체성들을 일관된 총체성 안에 포섭하는 변증법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책 도입부에 <제국>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한다,그리고 <제국>으로의 이행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유럽 근대를 분석한다.(책의 구성이 흥미롭다.) 네그리는 근대성의 두가지 양식이 있다고 말한다.혁명과 반혁명이다.유럽 르네상스기는 신이라는 초월성을 거세한 혁명의 시간이었다.그러나 이내 반혁명이 이루어지고 그들이 승리한다.르네상스가 종교전쟁,사회전쟁으로 마감했던 것처럼.그러나 반혁명이 성공했다고 모든게 끝이 아니다.내전은 근대성 개념속에 흡수되어 끊임없이 내적인 위기를 조성한다.근대성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를 들고 나타난 것이 '계몽주의'이다.계몽주의의 일차적 과제는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수많은 주체들을 훈육시킬 수 있는 선험적 장치를 구축함으로써 중세 문화의 절대적 이원론을 재생산하지 않고 내재성 관념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애국하는 '국민국가'의 화려한 등장하여 질서와 명령을 더 효과적으로 통제한다.19세기-20세기에와서 근대적 주권의 국민 국가들 사이의 갈등은 내전을 가져왔다.국민들은 갈등 상태의 계급 주체들의 신비화로서 혹은 대역으로 제시되었다.기다리고 기다리던 '제국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제국주의와 제국은 완전히 다르다) 국민국가는 계급 투쟁과 계급 투쟁의 전복 효과들을 해소하고 실질적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를 필요로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들어보자.자본주의적 정복의 역사적 새로움을 비자본주의 환경 자체를 자본화하는 것으로 본다.자본주의적 재생산 및 축적의 핵심은 반드시 제국주의적 팽창을 함의하고 있다.자본은 달리 행동할 수 없다.자본주의 자체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제국주의의 해악과 대결할 수 없다.

어찌 어찌하여 식민주의도 제국주의도 마감하고 있는 시점이 중요하다.여기서 한참 기다린 '제국'이 나오는 것이다.

<제국>이 안과 밖이 없는 체제라면 도대체 누가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생산 경제에서 정보경제로의 이행이 가져온 생산양식과 노동 주체의 변화에 촛점을 맞춘다.전통적의미의 프롤레타리아는 더이상 혁명 주체가 될 수 없다.그들이 중요시 하는 것은 '비물질 노동'이다.그리고 '다중'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유출된다.Mutitude는 사전적으로 특정 지배장치에 의해 구조화되지 않고 소통하면서 주체적인 욕망과 주장들을 결집해 나가는 사람들을 말한다.이들의 저항은 근본적으로 도주,탈주,유목주의를 표방한다.<제국> 하에서 다중은  아무런 매게 없이 <제국>과 면하기 때문에 더 폭발력을 갖는다.다중이 갖는 요구는 크게 전지구적 시민권,사회적 임금권 등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의 재전유이다.생산수단의 재전유는 지식,정보,소통,그리고 정서에 대해 자유롭게 접근하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통제하는 것이다.이를 통해 다중은 자기통제 및 자율적인 자기 생산을 가능케한다.궁극적으로 다중은 제국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다르게 움직이는 기계(기계가 공장 기계가 아니다.)를 발명하는 것이다.(짧게 쓰려고 했는데 결국 또 길어졌다.ㅜㅜ 인용이 많다보니 ㅜㅜ)

<제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따로 적지 않아도 될 듯 하다.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보 네트워크(^^) 속에서 쉽게 <제국 비판>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조정환/정성진 논쟁 부터해서 등등등) <제국>의 역자이자 국내 자율주의 전도사인 전남대 윤수종 교수 역시 책 말미에서 네그리와 하트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단다. 그들이 제국으로의 이행을 강조하다보니까 근대적인 성격의 잔존에 대해서 과소평가한 점, 그리고 이행 경향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완전히 다른 사회로 넘어간 것 같이 설명한 점 등을 지적한다.특히 한국적 상황에서는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그러나 네그리와 하트의 책 <제국>이 유럽적 상황에서 쓰여졌다는 저자들의 한계설정,그리고 시대의 추이를 미루어보는 예언적 성격 등을 고려한다면 그 부분만 물고 늘어지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렇다면 변혁 투쟁 역시 그 변화에 따라서 변화해야한다.적들이 대포 쏘고 있는데 돌도끼들고 뛰어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 자본의 입체적 압박에 숨을 못쉬고 패배주의에 빠져들고 있던 시점이어서 이 책<제국>이 더욱 반갑다.물론 세계와 현실에 대한 인식차이,개념의 모호성,실천적 구성력의 부재,과도한 낙관주의 등의 단어들도 머릿 속을 빙빙 돈다.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즐거웠던 것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이러한 '낙관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잠시 즐거운 꿈일지라도 말이다.)

천천히 위리는 전지구적 잔치를 위해 도착하고 있는 아주 맛있는 많은 요리 접시들처럼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오는 기증품들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상이 꽉차고 있다.축제를 준비하자!   

p.s)딱딱한 내용이 많지만 간혹 등장하는 문학적인 표현들이 감칠 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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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즐거운 제국
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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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함은 물처럼 존재한다.불행은 해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을 뜯어먹는다.물고기가 물고기를 잡아먹듯이 

 .......    브레히트의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 중에서

<제국>을 읽기 전에 '제국 논쟁'을 접했다.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2차 저작이나 논쟁은 훨씬 다층적이고 복잡하다.딸기를 먹는 것은 쉽지만 딸기 케이크 레서피를 읽는 것은 어려운 것 처럼.<진보평론>을 중심으로 펼쳐진 '제국 논쟁'을 다 따라가는 것은 처음부터 역부족이었다.책이 번역된 후 국내외 세계 체제론자 또는 트로츠키주의를 포함한 범좌파의 '제국' 비판과 자율주의자들의 반비판이 이어졌다.그러나 국내에서 '제국 논쟁'은 정점을 지난 듯 하다.인터넷 한 구석에서는 '제국 논쟁'의 잔불마저 꺼져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글들도 가끔 찾을 수 있다.

일단 <제국>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제국 논쟁>을 먼저 읽지는 말라고 권하고 싶다.<제국> 자체도 결코 만만한 내용이 아니다.거기에 주요 개념들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비판의 전체적 맥락까지 알아야 이해가 되는 <제국 논쟁>은 머리털 밑 신경세포를 괴롭히는 일이다.

선행과정이 좀 지저분해졌지만 <제국>을 읽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물론 내용과 개념을 이 잡듯이 이해하려고 달려든다면 또 다른 편두통의 원인이 될 것이다.조금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이해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적당히 넘겨가면서 보는 유연성도 필요하다.<제국>을 읽는게 무슨 수학 정석의 미적분의 공식을 적어내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구들은 있다.사회과학적 관심과 상상력,그리고 졸음을 이겨낼 정도의 끈기말이다.

<제국>으로 들어가자.도대체 <제국>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 책을 들고 다녔더니 회사차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가 그런다. "어..제국...음..무슨 대하 무협 소설인가 본데 "..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하다.네그리는 제국의 기본 가설을 이렇게 말한다."주권이 단일한 지배 논리하에 통합된 일련의 일국적 기관들과 초국적 기관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를 띠어 왔다는 것.이러한 새로운 전지구적 주권 형태를 제국 이라고 부른다"

네그리는 맑시즘을 주권개념으로 이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어쨋거나 쉽게 생각해서 '제국'은 세계화된 어떤 힘이다.과연 이런게 있을까 하고 싶을때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끌고 가자.전지구적 주권형태가 없다라는 것도 '제국 비판' 의 하나인데 그걸 물고 늘어지면 진도 안나간다.<제국>이란 것이 아주 독특한 것은 안과 밖이 없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세상은 거대한 어항이고 그 어항은 물로 가득차 있다.우리들은 물고기인셈이다.제국의 바깥이 없다는 것은 이 체제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다 <제국>의 범주안에 포섭된다는 것이다.이것도 이해 안된다고 할 사람들이 많다.네그리가 드는 예를 보자면 수많은 국제적인 NGO들도 결국엔 <제국>을 땡실 땡실하게 만들어주는 개량적 제도들일 뿐이다.좀 더 나가면 네그리는 제 1세계와 제 3세계의 구분도 없고 남과 북의 구분도 없다고 말한다.역사적으로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제국적 이행과정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기존 좌파들의 전략에 대한 네그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전지구화에 대한 저항과 국지성 방어라는 이러한 좌파적 전략은 많은 경우에 국지적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율적이거나 자기 결정적이지 않고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 기계의 발전에 연료를 공급하고 그 발전을 지지하기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국지적 저항전략은 적을 잘못확인하고 그래서 적을 감춘다.오히려 적은 우리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전지구적 관계들의 특정한 체계이다.

이미 할 비판하고 싶은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가득차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비판은 수첩 속에 적어 놓고 계속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도를 빼야한다.

아..한편에서는 상식적으로(특히 반미정서가 높은 우리에게 소구력이 있는 것인데) 미국이 제국 아니냐고 말한다.그러나 이들은 단호히 어느 특정 국민국가도 제국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제국으로의 이행은 근대적 주권의 황혼기에 나타난다.제국은 개방적이고 팽창하는 자신의 경계안에 지구적 영역 전체를 점차 통하하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 하는 지배장치이다.제국주의적 세계 지도에서 몇 가지로 구분됐던 국가의 색깔들은 제국적인 전지구적 무지개 속에서 합쳐지고 섞일 것이다.미국은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어떤 국민국가도 오늘날에는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할 수 없다.미국의 연방헌법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예외성은 '제국'적 속성(제국주의적이 아닌)을 지닌다.네그리는 로마제국의 권력체계를 인용한다.미국은 출발선상에서 공화주의적 마키아벨리 전통과 연결된다.특히 폴리비우스의 제국적 로마 모델을 따른다.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3원분립은 팽창성을 특징으로 한다.하지만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제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제국이 땅덩어리가 있는 국민국가적 상상력은 벗어난 일이란 것은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과연 그것의 현실성은 떼어놓고 보면 말이다.)

네그리는 <제국>을 기획하기 위해 선배 철학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스피노자,마키아벨리,맑스,푸코,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주 언급된다.그중 가장 먼저 꼽아야 사람은 스피노자이다.그는 스피노자의 '내재성' 개념을 차용한다.그리고 다음으로 푸코의 '생체정치학'은 인용한다.푸코는 '훈육사회'와 '통제사회'를 구분하였다.<제국>의 이행은 통제사회로의 이행선상에 있다.제국의 지배대상은 사회생활 전체이며 따라서 제국은 전형적인 생체 권력 형태를 나타낸다.개인들에 대한 사회의 통제는 의식이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체속에서 그리고 신체와 함께 이루어지기도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제국>은 닫힌 체계이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물고문같은 것이다.그러나 <제국>기획은 그게 목적이 아니다.탈출구가 있고 전복의 가능성이 훨씬 많이 열려있다.네그리와 하트는 그래서 <제국>을 더 밀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그렇다면 어디에 전복의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정답은 <제국> 그 자체가 스스로를 붕괴시킬 답을 안고 있다.제국은 제국 자신이 지닌 일반법칙에 의거해서만 그리고 제국이 제공하는과정들이 지닌 현재의 한계들을 넘어 그 과정들을 밀어붙일 때에만 효과적으로 논의 될 수 있다.우리는 그러한 도전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전지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전지구화는 틀림없이 대항 전지구화와 만날 것이며 제국은 틀림없이 대항 제국과 만날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열나게 인용하는 연구도 있는 반면 <제국>을 이해하기 위해 배격하는 것도 있으니 흔히 말하는 유럽 형이상학의 족보들이다.데카르트,칸트,헤겔...특히 <제국>을 이해하기 위해 헤겔식의 변증법과는 단절하라고 말한다.천천히 읽어보면 어렵지 않다.근대 권력 자체가 변증법적이라면 탈근대주의적 기획은 비변증법적이어야한다는 논리가 된다.바바(탈식민주의 호미 바바이다)의 일차적 공격대상은 이분법적 분할이다.전체 탈식민주의 계획은 식민주의적 세계관이 근거하고 있는 이분법적 분할에 대한 거부에 의해 규정된다.세계를 둘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고 대립 진영들(중심 대 주변,제 1세계대 제 3세계)로 구분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셀 수 없는 부분적이고 이동적인 차이들에 의해 항상 규정되고 있다.세계를 이분법적 분할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바바는 또한 총체성 이론들과 사회적 주체들의 정체성 동질성 볼질주의에 관한 이론들을 거부하게 된다..바바의 분석을 따라 다니는 그리고 일관되게 이러한 다양한 적대자들을 열결시키는 유령은 헤겔의 변증법이다.즉 서로 대립하는 본질적인 사회적 정체성들을 일관된 총체성 안에 포섭하는 변증법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책 도입부에 <제국>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한다,그리고 <제국>으로의 이행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유럽 근대를 분석한다.(책의 구성이 흥미롭다.) 네그리는 근대성의 두가지 양식이 있다고 말한다.혁명과 반혁명이다.유럽 르네상스기는 신이라는 초월성을 거세한 혁명의 시간이었다.그러나 이내 반혁명이 이루어지고 그들이 승리한다.르네상스가 종교전쟁,사회전쟁으로 마감했던 것처럼.그러나 반혁명이 성공했다고 모든게 끝이 아니다.내전은 근대성 개념속에 흡수되어 끊임없이 내적인 위기를 조성한다.근대성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를 들고 나타난 것이 '계몽주의'이다.계몽주의의 일차적 과제는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수많은 주체들을 훈육시킬 수 있는 선험적 장치를 구축함으로써 중세 문화의 절대적 이원론을 재생산하지 않고 내재성 관념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애국하는 '국민국가'의 화려한 등장하여 질서와 명령을 더 효과적으로 통제한다.19세기-20세기에와서 근대적 주권의 국민 국가들 사이의 갈등은 내전을 가져왔다.국민들은 갈등 상태의 계급 주체들의 신비화로서 혹은 대역으로 제시되었다.기다리고 기다리던 '제국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제국주의와 제국은 완전히 다르다) 국민국가는 계급 투쟁과 계급 투쟁의 전복 효과들을 해소하고 실질적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를 필요로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들어보자.자본주의적 정복의 역사적 새로움을 비자본주의 환경 자체를 자본화하는 것으로 본다.자본주의적 재생산 및 축적의 핵심은 반드시 제국주의적 팽창을 함의하고 있다.자본은 달리 행동할 수 없다.자본주의 자체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제국주의의 해악과 대결할 수 없다.

어찌 어찌하여 식민주의도 제국주의도 마감하고 있는 시점이 중요하다.여기서 한참 기다린 '제국'이 나오는 것이다.

<제국>이 안과 밖이 없는 체제라면 도대체 누가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생산 경제에서 정보경제로의 이행이 가져온 생산양식과 노동 주체의 변화에 촛점을 맞춘다.전통적의미의 프롤레타리아는 더이상 혁명 주체가 될 수 없다.그들이 중요시 하는 것은 '비물질 노동'이다.그리고 '다중'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유출된다.Mutitude는 사전적으로 특정 지배장치에 의해 구조화되지 않고 소통하면서 주체적인 욕망과 주장들을 결집해 나가는 사람들을 말한다.이들의 저항은 근본적으로 도주,탈주,유목주의를 표방한다.<제국> 하에서 다중은  아무런 매게 없이 <제국>과 면하기 때문에 더 폭발력을 갖는다.다중이 갖는 요구는 크게 전지구적 시민권,사회적 임금권 등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의 재전유이다.생산수단의 재전유는 지식,정보,소통,그리고 정서에 대해 자유롭게 접근하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통제하는 것이다.이를 통해 다중은 자기통제 및 자율적인 자기 생산을 가능케한다.궁극적으로 다중은 제국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다르게 움직이는 기계(기계가 공장 기계가 아니다.)를 발명하는 것이다.(짧게 쓰려고 했는데 결국 또 길어졌다.ㅜㅜ 인용이 많다보니 ㅜㅜ)

<제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따로 적지 않아도 될 듯 하다.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보 네트워크(^^) 속에서 쉽게 <제국 비판>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조정환/정성진 논쟁 부터해서 등등등) <제국>의 역자이자 국내 자율주의 전도사인 전남대 윤수종 교수 역시 책 말미에서 네그리와 하트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단다. 그들이 제국으로의 이행을 강조하다보니까 근대적인 성격의 잔존에 대해서 과소평가한 점, 그리고 이행 경향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완전히 다른 사회로 넘어간 것 같이 설명한 점 등을 지적한다.특히 한국적 상황에서는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그러나 네그리와 하트의 책 <제국>이 유럽적 상황에서 쓰여졌다는 저자들의 한계설정,그리고 시대의 추이를 미루어보는 예언적 성격 등을 고려한다면 그 부분만 물고 늘어지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렇다면 변혁 투쟁 역시 그 변화에 따라서 변화해야한다.적들이 대포 쏘고 있는데 돌도끼들고 뛰어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 자본의 입체적 압박에 숨을 못쉬고 패배주의에 빠져들고 있던 시점이어서 이 책<제국>이 더욱 반갑다.물론 세계와 현실에 대한 인식차이,개념의 모호성,실천적 구성력의 부재,과도한 낙관주의 등의 단어들도 머릿 속을 빙빙 돈다.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즐거웠던 것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이러한 '낙관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잠시 즐거운 꿈일지라도 말이다.)

천천히 위리는 전지구적 잔치를 위해 도착하고 있는 아주 맛있는 많은 요리 접시들처럼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오는 기증품들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상이 꽉차고 있다.축제를 준비하자!   

p.s)딱딱한 내용이 많지만 간혹 등장하는 문학적인 표현들이 감칠 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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