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한경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고독에 몸부림치던(나는 이 유치한 표현을 좋아한다)  어느 날, 
어떤 생각이 불현듯 깨달음처럼, 빗물처럼, 나의 들창문을 두들겼다.
'사람마다 사랑의 모습도 제각각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는 첫눈에 반하고 생각하면 가슴 설레고 환장하고 그런 게 아니고,
함께 오래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 그가 거슬리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닐까?'

1991년에 나온 크리스토프 하인의 <낯선 연인>은 그렇게 싸늘하게 사랑의 개념을 정리하도록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설이다.

--독일의 민족 대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 나오는 무적의 왕자 지그프리트는
용의 피를 뒤집어 씀으로써 불사신이 되었다.
그때 보리수 이파리 하나가 양쪽 어깻죽지 사이에 떨어지면서 그 부분에는 피가 묻지 않아,
이 영웅은 나중 그 부분을 창에 찔려 죽게 된다.
이 전설의 모티프를 빌려온 <낯선 연인>은 상처받지 않으려고 도사리다가
두터운 껍질을 지니게 된 한 인간의 삭막한 삶을 묘사한 작품이다.

독일에서는 <용의 피>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소설에 대한 역자 전영애의 해설 부분이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살아가는(나름대로는 이유가 있는) 주인공에게 정말 마음 편한
남자친구이자 연인이 생겼는데 그에게조차 절대 열지 않는 방이 하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좋은 연인은 어느 카페에서 남의 싸움을 말리다 죽는다. 어이없이......

크리스토프 하인의 자전적 성장소설 <처음부터>가  생각의 나무에서 2001년에 번역되어
나와 있다는 정보를 며칠 전에야 접했다.
이 출판사의 책들이 지금 큰 폭으로 세일중이고, 야시장 쿠폰을 이용하면
2천 원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해서 자다가 깬 밤, 목록을 뒤적이다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안 보이던 것이 시시하고 사소한(?) 우연으로 찾아들기도 한다.
어쩌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사랑은 찾아오고, 또 어이없이 떠나간다.

이 책의 역자는 구 동독의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의 책이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거라고
책머리에 밝히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낯선 연인> 1991년, 현대소설사 간, 전영애 역)
이 소설에 열광한 사람이 내가 알기론 꽤 되구만.
아무튼 <처음부터>는 어색한 문장이 가끔 눈에 띄기도 하지만 비교적 잘 읽히는 편.

줄거리 소개도 감상도 다 생략하고 <낯선 연인>과 어딘지 맞닿아 있는 한 구절을 소개할까 한다.

--나는 결정을 잘 내리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모든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쪽으로 가게 만들었다. 내가 아니라 우연이 결정하도록 했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운명이 나보다 더 신중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이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해 스스로 불러들인 운명 속에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쉬웠다.
나는 아빠가 자주 말하는 어떤 섭리가 --목사인 아빠는 그걸 신의 섭리라고 했는데--
내 인생을 결정하고, 나 대신 내 실존의 모든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을 믿었다.(263쪽)

1956년, 동독의 소도시에 거주하는 열세 살 주인공 소년이 앞으로 가족을 떠나
형이 이미 가 있는 서독의 김나지움에 가서 공부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이는 대목이다.
운명적인 걸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나의 생각도 일정 부분 소년의 그것에 닿아 있다.

 모처럼 제대로 빨려들어 읽은 본격정통 성장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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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06-27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리뷰에도 흡입기가 있는지 확 빨려들어가 읽었어요...

twoshot 2006-06-27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로드무비님의 리뷰만 읽으면 자동으로 '추천하기'버튼을 누르게 되네요. 헌데 책은 품절,땡스투 불가네요. 그런데 <낯선여인>이 출판된지 저리 오래 되었습니까?세월도 참....

로드무비 2006-06-27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쿠스님, <낯선 연인>을 읽으셨군요.
반가워라.
전 님의 서재 이미지가 왠지 끌려요.^^

플레져님, 10분 만에 쓴 리뷰예요.
빨려들어가서.....
(냉정하게 쓰려고 노력했다우.)

mong 2006-06-27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후하신 작가와 만나보고 싶었으나
품절....털썩~

로드무비 2006-06-2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방법이 없진 않지요.
아시면서.^,.~
책 바꿔봐요.

mong 2006-06-2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맞아요~ ^^

건우와 연우 2006-06-2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큼 책도 재미있나 읽어봐야지...하고 마음먹었어요^^
아니 근데 그옆의 품절은 뭔가요@@

로드무비 2006-06-29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나중에도 못 구하면 말씀하세요.
빌려드릴게요. 두 권 다.^^

mong님, 어느 날 시간 정하여 살짝 소장함 공개하는 걸로.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