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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
이혜경 지음 / 창비 / 2006년 5월
평점 :
--인생에는 세 가지 길밖에 없대. 달아나든가, 방관하든가, 부딪치는 것.
영화 <씨티 오브 조이>에 나온 대사야. 나는 주로 방관하는 편이었어.
하지만 방관하는 게 더는 허용되지 않을 때가 오지.
그러면 달아나거나 부딪치는 수밖에. (‘문밖에서’ 95쪽)
영국에서 온 친구랑 영화를 한 편 보러 갈 건데 추천해 주고 싶은 게 없냐고
당시 내가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부르던 어른이 근무 중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 전 날 호암아트홀에서 본 영화가 바로 패트릭 스웨이지 주연의 인도 빈민가가 배경인
영화 <씨티 오브 조이>.
처참하리만큼 지독한 현실과 의로운 주인공의 고군분투를 보여주는 영화가 참 좋았으므로
나는 두 말 없이 <씨티 오브 조이>를 권했다.
몇 시간 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떻게 그런 영화를 좋아하고 권할 수 있어? 로드무비 이제 보니 의외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균열은 영화 한 편에 대한 감상의 차이로도 시작된다.
이혜경의 이 책 어느 소설에도 영화관을 나서며 엉뚱한 발언을 늘어놓는 남자를 보며
이 사람이랑은 안 되겠구나, 깨닫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꼭 영화 <씨티 오브 조이> 때문만도 아닌 것이, 오랜 기간 아주 절친했던 그 선생님과의 관계는
어느 날 문득 눈을 뜨니 아주 데면데면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혜경의 단편 ‘문밖에서’에 나오는 “보랏빛 씨스루 블라우스” 는
어찌 보면 영화 <씨티 오브 조이>보다 내게는 더 저릿한 상징으로 느껴진다.
우연히 모임이 이루어져 꽤 오랜 기간 지속이 되고 있는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쿨하고 자유로운 전문직 독신여성 들의 정기적인 모임.
평생 연애 한 번 못 해본, 여성적인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한 멤버가,
어느 날 남자랑 극장에서 나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기억나니? 우리가 돈을 모아 H에게 선물한 보랏빛 씨스루 블라우스.
그 옷을 H가 한 번이라도 입었을까? H가 자기의 연애를 알리고 싶어 했을까?
(...) H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건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었지만,
H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 순 없었던 걸까?(97쪽)
남자들은 예쁜 여자보다 ‘쎅시’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치마 입은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친구를 쎅시하게 보이도록
돈을 모아 야사시한 씨스루 블라우스를 선물하는 친구들.
얼핏 보면 다정다감하고 예쁜 풍경 같지만, 그 씨스루 블라우스를 강제로 선물 받아본 사람의
곤혹스러움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친구나 애인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당한 간섭이나 그 끈끈이주걱 같은
관계가 무섭고 싫어 나 또한 오래도록 세상을 겉돌았다. 지금도......
이 작가는 어쩌면 이렇게 사람 관계에 대해, 무서운 세상에 대해,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을 긁어주는지, 심지어는 가렵다고 느끼지 않은 부분조차
조용히 알려주는 것이다.
단편 '문밖에서'에 나오는 내 기억 속의 영화 <씨티 오브 조이>와
보랏빛 씨스루 블라우스만 가지고 리뷰를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기엔 너무 허전해서, 읽다가 나도 모르게 밑줄을 친
멋진 문장 하나 를 옮겨 적는다.
--흙이 무너지지 말라고 봉분 중간을 빙 둘러가며 끼워넣은 솔가지가,
나와 남 사이에 그토록 선명한 금을 긋고, 그토록 오랜 세월 불안을 견디며
살아낸 한 생애의 이마 위에 얹힌 화관 같다.('피아간(彼我間)' , 1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