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한경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고독에 몸부림치던(나는 이 유치한 표현을 좋아한다)  어느 날, 
어떤 생각이 불현듯 깨달음처럼, 빗물처럼, 나의 들창문을 두들겼다.
'사람마다 사랑의 모습도 제각각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는 첫눈에 반하고 생각하면 가슴 설레고 환장하고 그런 게 아니고,
함께 오래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 그가 거슬리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닐까?'

1991년에 나온 크리스토프 하인의 <낯선 연인>은 그렇게 싸늘하게 사랑의 개념을 정리하도록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설이다.

--독일의 민족 대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 나오는 무적의 왕자 지그프리트는
용의 피를 뒤집어 씀으로써 불사신이 되었다.
그때 보리수 이파리 하나가 양쪽 어깻죽지 사이에 떨어지면서 그 부분에는 피가 묻지 않아,
이 영웅은 나중 그 부분을 창에 찔려 죽게 된다.
이 전설의 모티프를 빌려온 <낯선 연인>은 상처받지 않으려고 도사리다가
두터운 껍질을 지니게 된 한 인간의 삭막한 삶을 묘사한 작품이다.

독일에서는 <용의 피>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소설에 대한 역자 전영애의 해설 부분이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살아가는(나름대로는 이유가 있는) 주인공에게 정말 마음 편한
남자친구이자 연인이 생겼는데 그에게조차 절대 열지 않는 방이 하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좋은 연인은 어느 카페에서 남의 싸움을 말리다 죽는다. 어이없이......

크리스토프 하인의 자전적 성장소설 <처음부터>가  생각의 나무에서 2001년에 번역되어
나와 있다는 정보를 며칠 전에야 접했다.
이 출판사의 책들이 지금 큰 폭으로 세일중이고, 야시장 쿠폰을 이용하면
2천 원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해서 자다가 깬 밤, 목록을 뒤적이다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안 보이던 것이 시시하고 사소한(?) 우연으로 찾아들기도 한다.
어쩌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사랑은 찾아오고, 또 어이없이 떠나간다.

이 책의 역자는 구 동독의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의 책이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거라고
책머리에 밝히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낯선 연인> 1991년, 현대소설사 간, 전영애 역)
이 소설에 열광한 사람이 내가 알기론 꽤 되구만.
아무튼 <처음부터>는 어색한 문장이 가끔 눈에 띄기도 하지만 비교적 잘 읽히는 편.

줄거리 소개도 감상도 다 생략하고 <낯선 연인>과 어딘지 맞닿아 있는 한 구절을 소개할까 한다.

--나는 결정을 잘 내리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모든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쪽으로 가게 만들었다. 내가 아니라 우연이 결정하도록 했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운명이 나보다 더 신중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이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해 스스로 불러들인 운명 속에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쉬웠다.
나는 아빠가 자주 말하는 어떤 섭리가 --목사인 아빠는 그걸 신의 섭리라고 했는데--
내 인생을 결정하고, 나 대신 내 실존의 모든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을 믿었다.(263쪽)

1956년, 동독의 소도시에 거주하는 열세 살 주인공 소년이 앞으로 가족을 떠나
형이 이미 가 있는 서독의 김나지움에 가서 공부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이는 대목이다.
운명적인 걸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나의 생각도 일정 부분 소년의 그것에 닿아 있다.

 모처럼 제대로 빨려들어 읽은 본격정통 성장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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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06-27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리뷰에도 흡입기가 있는지 확 빨려들어가 읽었어요...

twoshot 2006-06-27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로드무비님의 리뷰만 읽으면 자동으로 '추천하기'버튼을 누르게 되네요. 헌데 책은 품절,땡스투 불가네요. 그런데 <낯선여인>이 출판된지 저리 오래 되었습니까?세월도 참....

로드무비 2006-06-27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쿠스님, <낯선 연인>을 읽으셨군요.
반가워라.
전 님의 서재 이미지가 왠지 끌려요.^^

플레져님, 10분 만에 쓴 리뷰예요.
빨려들어가서.....
(냉정하게 쓰려고 노력했다우.)

mong 2006-06-27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후하신 작가와 만나보고 싶었으나
품절....털썩~

로드무비 2006-06-2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방법이 없진 않지요.
아시면서.^,.~
책 바꿔봐요.

mong 2006-06-2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맞아요~ ^^

건우와 연우 2006-06-2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큼 책도 재미있나 읽어봐야지...하고 마음먹었어요^^
아니 근데 그옆의 품절은 뭔가요@@

로드무비 2006-06-29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나중에도 못 구하면 말씀하세요.
빌려드릴게요. 두 권 다.^^

mong님, 어느 날 시간 정하여 살짝 소장함 공개하는 걸로.
오케이?^^
 
김점선 스타일 - 전2권 세트
김점선 외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나, 김점선>을 처음 읽었던 십몇 년 전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말보다 거위를  즐겨 그렸던 것 같고, 아이가 쓱쓱 그린 것 같은
천진난만한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의 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잘해 보겠다고 애쓰지 않는데, 연필만 잡으면 자기도 모르게 완성되어 나오는
글이요, 그림이라고 할까.
무엇보다 바람처럼 거침없는데 한편으로 섬세한 영혼의 결이 느껴져 좋았다.

4월 말,  '김점선 스타일'이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이 세트로 나왔다.
'회갑' 기념이라고 전면에 들이대거나 촌스럽게 떠들진 않았지만
받아보니 그 잔치상이다.
세상의 온갖 이름의 잔치상이 으레 그런 것처럼  메뉴는 화려하고 다양한 듯 보이지만,
젓가락질을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1권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제목으로,
"이 세상에 하나뿐인 김점선이 오직 하나뿐인 당신을 만난다"고 하여,
박완서, 장영희, 김방옥, 조영남 같은 절친한 친구나 지인, 그리고 그가
매체를 통해 만난 유명인사들의 인터뷰를 모았다.

2권은 <둘이면 곤란한>이라는 제목으로,
"이 세상에 하나는 있어도 좋지만 둘이면 곤란한 사람 김점선!"이라고 하여,
이해인, 신수정, 장영희 등 역시 절친한 벗들과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의
가까이서 본 화가에 대한 기록이다.

제목으로 친절(?)하게 뽑은 것처럼 '김점선 스타일'을 아주 고착화시킨다고 하나?
두 권의 책을 앉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읽었는데 질리는 느낌이었다.
발간 일자 맞춰놓고 다소 형식적으로 일을 진행시킨 것 같은.

화가의 이름을 막 부른다는 이웃의 한 초등하고 1학년 소년과, '건방진 대학생'이라고
간단하게 소개된 청년의 글이 그런 의미에서 조금 산뜻했달까.

그가 얼마나  독특하거나 괴팍한 사람인가 하는 구체적인 사례들 중 어떤 건 재밌다.
하지만 아무리 듣기 좋은 노래라도 한두 번이지 계속 읽으니 좀 지겹구나.
화가의 스타일에 걸맞은 새로운 형식이 없었을까?

화가가 직접 만나고 썼다는 유명인들의 인터뷰도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기대했는데
기대에 못 미쳤다.
다음과 같은 말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고.

--성공한 사람들은 나이를 초월해서 밝고 깨끗하다. 열정적이고 순수하다.
인간 최초의 순수 같은 맑은 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꾸밈없이 말하고, 환하게 웃고, 예의 바르고 따뜻하다.(163쪽)

글쎄,  
이런 식의 통찰과 정리도 가능하구나.
그렇다면 이 책은 밝고 깨끗하고 열정적이고 순수하고 어쩌구 저쩌구한 사람들만의 잔치?

세상의 모든 잔치가 그런 식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김점선의 그것은 좀 다를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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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2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한 사람들은 나이를 초월해서 밝고 깨끗하다. 열정적이고 순수하다.-
이건 좀 아닌것 같은데요..???

waits 2006-06-2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김점선의 그것이 별다르지 않다니 좀 실망이네요. ㅎㅎ
한편 안 사도 되겠다~ 안심도...^^;;;

에로이카 2006-06-2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께서 쓰신 리뷰 치고 좀 가혹하네요... ^^

로드무비 2006-06-2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저 구절만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네요.
가수 이승철을 만나고 필을 받아 인터뷰를 중단한다 선언하고
돌아와 내갈겨 썼다는 글 중 일부예요.(저 친절하죠? 헤헤~~)

로드무비 2006-06-2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을 때, 이 글을 쓸 때 심사가 사나웠던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보고.
이상 없음!
에로이카님, 너무 가혹한 댓글 아닌가요?=3=3

나어릴때님, 마음산책 책답게 책은 예뻐요.
그림도 많고.
그런데 읽는데 도무지 흥이 안 나더군요.
김점선의 책이라면 그걸 기대하고 골라드는 건데.
이상한 흥 있잖아요.

2006-06-26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6-06-26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로드무비님.. 그것이 아니오라... 책이 얼마나 한심하면 이런 글을 다 쓰셨나... 그런 뜻에서.... 아.. 왜.. 그러니까.. 시간들여서 읽은 책이 저 모양이면 참 열받잖아요.. 기대도 갖고 있었는데.. 그 기대까지 무너졌다면.. (아... 참.. 말 줏어담기 힘드네요..) 깨갱...

반딧불,, 2006-06-26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컵받침은 이쁘던가요?(그게 더 궁금^^)

로드무비 2006-06-2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컵받침 예뻐요.
그런데 그래봤자 코팅한 종이인데요, 뭐.ㅎㅎ
읽고 마음에 안 드는 책은 리뷰 안 쓰는데 이건 쓰고 싶더라고요.^^;;
(요즘 왜 이렇게 오타가 많을까요?)

에로이카님, 아니 뭘 그리 정색을 하시고.
잘못 말씀하신 것 하나도 없는데.
크게 기대를 했던 책은 아니에요.
회갑 기념 책은 대부분 이런 모양새거든요.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가혹'이란 단어를 보니 제가 뜨끔해서 말입니다.^^

혜덕화 2006-06-2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김점선>을 읽으면서 저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영혼의 깨끗함을 읽을 수 있는 단순한 글과 그림에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구나, 부부싸움에 밀리지 않기 위해 선 자리에서 오줌을 줄줄 싸던 그녀와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해, 그가 감내하고 살아야 했던 세월이 암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하는 그야말로 가혹한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아주 예전에 오정희님의 글을 읽다가
"그는 나를 어떻게 견디며 사는가?"라는 문장을 만났을 때 감전된 듯 온 몸에 충격적으로 전해오던 메세지를 보면서, 그동안 나는 한 번도 상대가 나를 견딘다는 생각을 못해 본 것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언제나 내가 참고 내가 견디며 산다는 <나>만 알았지 진정으로 상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녀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까요?
사회적으로 성공했겠지만은, 과연 진심으로 자신이 성공했다고 느낄 지 그것은 의문입니다. 이런 책을 또 낸 것을 보면 아마 그렇게 자신을 보고 있겠지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정도 책 한 권 내는 에피소드쯤이야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도 해 본 책입니다.
댓글이 너무 길죠?
사실은 리뷰를 쓰나 마나 고민하다가 결국 안쓰기로 했는데, 로드무비님 글을 보니 예전에 했던 생각이 줄줄이 엮어져 나오네요.
_()_

로드무비 2006-06-2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저는 당시 그 에고이스트적인 면모에 반했는 걸요.
자신에게 무섭게 집중하고 도취되는.
그리고 파격적인 말과 행동.
거름망이 필요 없는 자유분방함에 반했습니다.
남편 입장은 생각도 못해봤고요.
그저 화가의 글을 통해서 이 부부는 최고의 '소울메이트'가 아니었을까
짐작만 했답니다.
이번 책은 구성도 그렇지만 '성공'과 '성공한 사람'에 대한
그의 견해가 너무 빤해서 좀 놀랐던 거고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런지도 모르고요.
다만 저의 구미와 견해에는 좀 맞지 않는다는 것뿐.

아무튼 비판적으로 쓴 글을 올리고 나니 찜찜하네요.
역시 좋았던 책 리뷰만 올릴까 봐요.
너무 길긴요, 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진지한 댓글 고맙습니다.^^

mong 2006-06-2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점선의 그것은 좀 다를 줄 알았다.
어머 정말요?
=3=3=3

로드무비 2006-06-2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제가 좀 변질됐나 봅니다.^,.~
예전엔 미리 웃을 준비 하고 그의 책을 사고 읽었는데......

2006-06-26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국경을넘어 2006-06-2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화가로서 한참 주가가 올라가 있는 그녀.
화랑에 가보면 그녀의 판화가 쫘~악 깔려 있죠.

집에 판화 작품이 몇 개 있는데
너무 많이 깔려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은 별로 집에 놓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삶이 그래서 그런 지 글도 상당히 신선하고 도발적이었는데
문제는 글을 너무 많이 쓰는 건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kleinsusun 2006-06-2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 받는 중에도 쉬는 시간에 추천하고 가요.^^
한 작가가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책을 낼 때에는 일단 조심해야 해요!!!

sandcat 2006-06-26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상하지만, 님 리뷰 때문에 후련한 마음으로 포기했습니다.
제목이 영 꺼림칙했지요, 저는.

로드무비 2006-06-26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교육중에 읽어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호호~
이 화가에 대한 내 눈높이가 너무 높아서 그런 건지도 몰라요.
글들도 힘이 많이 빠진 것 같고.

사라진님, 책은 역시나 화려하고 예뻐요.
그걸로 만족이 된다면 뭐.
옆에 살면 빌려드릴 텐데.^^

새벽별님, 컵받침 도톰하고 예뻐요.
특히 예쁜 말들, 컬러풀한 놈들로 골랐네요.^^

폐인촌님, 아무데서고 쓱쓱 그림 그려 주고
자신의 그림이라고 바들바들 떨지 않고 그런 부분은
참 좋았어요.
이 책에만 해도 넘칠 정도로 많은 말 그림이 있는 걸요.^^

초밥님, 별 말씀을.
중요한 일을 치르셨구만요.^^


로드무비 2006-06-27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캣님, 책 나오자마자 사놓고 엊그제서야 겨우 읽었어요.
책 두 권을 박스에 꽁꽁 묶어놨는데 안 빠져가지고.
저의 무능이 즐겁지 않으세요? ㅎㅎ

플레져 2006-06-2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갑잔치를 당신들끼리 하잖구서...^^
저는 단 한권의 김점선을 읽었는데요, 그걸로 족해요.

로드무비 2006-06-2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그래도 저는 미련이 남는군요.
요즘 왜 그렇게 모습을 안 보이십니까?

로드무비 2006-06-29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그 학교 졸업생으로 알고 있는데.
글 무지 잘 쓰는, 말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호기심이 있으면 한 번 검색해 보세요.^^
(그리고 모를 수도 있죠. 너무 당연한 걸.....)

로드무비 2006-06-29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그랬구만요. 소곤소곤.^^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 이가서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 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詩  '파안'  고재종 (27쪽)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에 수록된
48편의 시를 읽었다.
골목길
의 사진작가 김기찬 씨의 오래 전 흑백사진들이 중간중간 적절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김사인 시인의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남자가 되어'라는 시 뒤의
갑자기 비가 쏟아진 거리로 비닐우산을 팔러 나선 긴머리 소녀들의 사진은
푸르고 비린 빗물 냄새가 확 달려드는 듯이, 그 자체가  한 편의 시다.

김선우의 '봄날 오후', 정끝별의 '밀물',  최승자의 '이런 시', 김혜순의 '환한 걸레' 등
여성 시인들의 시가 특히 좋았다.
나도 이제야 여성이 되려는 것인가.

그러나 단연 최고는 고재종 시인의 '파안'.
군더더기 하나 없는 시에 내 마음이 그만 볼그족족해진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로 등단한 안도현 시인.
내 고향 우체국에 근무하던, 시를 쓰는 내 친구는 오래 전 그의 시집을 구할 수 없어
시인에게 편지를 부쳤다고 했다.
시인이 보내준 편지(엽서?)와 시집을 그렇게도 자랑스러워 하던 친구.

그때도 난 애가 발랑 까져 가지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시인의 주소를 알아낼 정성이면 시집을 열 권은 구하겠다.'

미안하다, 친구야.
난 아직도 마음이고 지붕이고 옹색한 그 꼴로 산다.

오천 원에 소주 세 병과 두부 찌개 한 냄비면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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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6-2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볼그족족... 마음에 베껴갑니다.. ^^

검둥개 2006-06-2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로드무비님과 발랑 까지시는 것은 왠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멋진 어울림입니다. ^^ 안도현 시인은 선생님이니까 주소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거 같아요. ㅎㅎㅎ

로드무비 2006-06-2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멋진 어울림이라니, ㅎㅎ
근데 제가 곽재구 시인이랑 안도현 시인을 무지 헷갈려 했거든요.
어쩌면 시인을 바꿔치기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침에 읽어보니.^^

따우님, 캬, 그 메뉴 환상이네요.
저도 환상적인 메뉴 많은데, 시 코빼기도 볼 수 없어서
섭섭합니다. 우리한테도 좀 와주면 좋을 텐데...^^

에로이카님, 마음에 베낀다니, 시가 따로 없군요.^^

nada 2006-06-2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웃분들도 시인이셔....저도 마음에 슬쩍 베껴 봅니다... 근디 워낙 악필이라 나중에 읽어 보면 항상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로드무비 2006-06-26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체국 친구는 제 페이퍼에 세 번쯤 등장했답니다.
전 예전에 술 마시고 영감 받아 수첩에 뭐라고 뭐라고 적어놓으면
다음날 해독이 불가능하더군요.
그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ㅎㅎ

2006-06-26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6-2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온 뒤 아침아,
아이고 힘빠져!
누구는 뭐 아주 신나는 것처럼 보이나?
저녁에 통화 좀 하자. 힘내고!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국민국가 진보 개인, 반양장
권혁범 지음 / 삼인 / 200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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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모 인터넷 신문에 한 시민기자가 쓴 기사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톱기사로 떠올랐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과 내용으로, 변두리 동네 사진관에 근무하던
한 젊은 여성이 정식으로 시험을 쳐 스튜어디스로 뽑힌 것을 칭송하는 글이었다.

그런데 처음엔 장하다, 멋지다 등 찬사 일변도의 댓글들이 달리더니 나중엔
동네 사진관은 개천이고 스튜어디스는 용이란 말이냐, 하는 식의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글을 읽으며 나도 찜찜한 부분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나 비판하는 댓글들이 
많이 달릴 줄은 몰랐다.
아무리 부담 없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올린다고 한들, 
글을 어디에 발표할 때는 균형감각의 관문을 슬쩍 통과하는 것이 예의이고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스튜어디스가 될 생각이 꿈에도 없는, 사진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신성한 직장을
'개천'으로 비하한 건 명백한 실수가 아닌가.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재밌게 읽었다.
솔직히 말해 대한민국 국민 안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해 본 사람이 있을까?
물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국가' '진보' '개인'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해본 사람들이나, 그리고 지난 2002년의
월드컵 삼매경이 더 열광적인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 요즈음 읽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반세기의 분단체제하에서 우리도 모르게 내면화되고 강화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안보와 국익이 그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우리 사회의 의식에 대한 강력한 의문 제기로부터,
우리 국민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 분석, 병역 의무의 정치학,
'국가 안보 담론'의 허구성까지 저자는 객관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제일 흥미로웠던 건 '세계화'에 대한 비판 일변도의 사회 분위기에 대해
,
"민족과 국가에 묶여 있던 우리 국민이 진정으로 해방된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주체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과, 다른 국민국가의 개인이나 집단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넓힌다"(117쪽)
는 저자의 견해였다.

"세계화를 통해 미키 마우스나 코카콜라도 생기지만 동시에 제임스 조이스나
이사벨라 아옌데도 퍼져 나간다"
는 월든 벨로의 그럴듯한 말을 인용하며,
미국에 대한 적대와 무조건적으로 비판적인 자세에 대해 꼭 그럴 일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9.11 이전 혹은 이후의 세계'라는 제목의 글도 흥미로웠다.
사건이 일어난 직접적인 동기와 상관없이 9.11 테러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과
이를 아우르는 저자의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 일부의 폭력주의가 사실은 "서구의 비열한 분열주의와 이중 정책의 결과"(124쪽)라는
이희수, 장석만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나, "테러리스트는 인위적 관념에 자신을 함몰시킨
이데올로기의 광적 실천자일 뿐"(125쪽)
이라는 저자의 규정은 고개를 갸웃하게 하고
마음으로 수긍하기가 좀  어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솔깃한 구절이었다.

엊그제 지하련 전집을 읽으며 한 개인, 특히 감수성 예민한 시인이나 소설가에게는
사상도 생활의 연장선에서 심사숙고하여 받아들이고 선택한 것일진대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에 완전히 휘둘려 개인의 삶이 참혹하게 끝장난  임화, 지하련 부부의 현실이 가슴 아팠다.

온국민이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 같은 월드컵 응원열기나, 촛불시위, 또 환경문제와
연관지어본 민족주의, 우리 나라 진보 남성 일반이 갖고 있는 젠더에 대한 태도까지
냉철한 저자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더구나 균형감각을 앞세운 그의 섬세한 레이다에는, 시든 논설이든 지식인답지 않게
흥분하여 그만 모자라거나 넘치는 글을 발표한 사람들이 여럿 걸려들었는데,
그 면면이 자못 흥미롭다.(특히 2002년 월드컵 당시 오오, 아아, 하는 시와 논설들)

--아니 이 사람이 이때 이런 글을 썼단 말이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 부분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리뷰의 맨 앞에 내가 구체적인 사례로 들은 글쓰기의 어려움과 
연결된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편향적인 시각 혹은 일시적인 흥분과
도취 상태 속에서의 글쓰기도 독자들 앞에 던져진 순간 책임이 따른다는 엄정한 사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많은 부분 수긍하고 몰랐던 사실도 깨닫고 단숨에 읽었는데, 왠지 통쾌한 것과는 거리가 있으니,
새로운 숙제만 잔뜩 떠안은 기분이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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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6-22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권혁범 선생이 실생활은 어떻게 할까가 궁금하더라구요.

urblue 2006-06-22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1등. ^^

로드무비 2006-06-2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블루님, 그러니까요.
너무 많이 알아도 피곤할 텐데. 일일이 실천하려면.....

로드무비 2006-06-2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3 1등은커녕 꼴찌로라도 댓글 좀 달아주오.^,.~

건우와 연우 2006-06-2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책과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로드무비 2006-06-2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재미없는 책인 줄 알고 계속 미뤘는데
막상 손에 잡으니 금방 읽히네요.^^

2006-06-22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22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dan 2006-06-22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말인데요. 콧구멍이 예뻐요. (보통은 ^_~ 로 예쁘게 쓰던데. 헤헤.)

에로이카 2006-06-22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겠네요.. 문제는 그런 것 아닐까요? 국가를 선택할 권리 자체도 경제적 부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또 관광객들이나 높은 보수를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외국인들 (주로 백인들)은 손님(guests)으로 대접하지만,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은 여전히 이방인(aliens) 취급을 하는 이중잣대... 바깥에서 나를 규정하는 국가도 문제지만, 그 국가 안에서 '국민'으로 행동하며, 이 영토 내부의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보내는 것... 시원함이 없는 것은 아마도 국민의 한 사람인 나 자신이 국가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자성이란 늘 시원하기보다는 익숙한 행동양식에 대해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보통 이는 자신에 대한 찜찜함을 동반하니까요... 로드무비님 리뷰만 보고도, 여러가지 생각들이 줄줄이 떠올라 댓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죄송.. ^^ 그나저나 리뷰 제목 참 잘 지으셨습니다..

로드무비 2006-06-23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바로 그겁니다.
외국인들에 대한 이중잣대도 빠트릴 수 없네요.
저자도 수시로 언급하고 있는데 전부 다룰 수는 없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통쾌함'이라는 단어를 '시원함'으로 바꿔줄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넘어갔는데, 샤프하십니다.ㅎㅎ
'자성'이 개인을 좀더 좋은 곳으로 데려갔으면 좋겠어요.
자조로 비틀어지는 것이 아니라.
댓글 고맙습니다.
죄송하긴요, 별 말씀을 다.
이런 댓글 저야 너무 반갑고 좋은 걸요.
그나저나 이 책 정말 재밌더군요.^^

수단님, 오래 전 노파라는 분이 쓴 걸 보고 좋아서 저도
쓰기 시작했어요.
(아이고, 갑자기 떠오르는 두 얼굴. 그리워라.)
^_~보다는 ^,.~가 더 예쁘지 않아요? 헤헤~

뻥일 테지만 님, 말은 정말 신중하게 해야겠어요.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아무튼 저의 사랑을 확인하셨죠?
믿거라 해서 그랬다는 것도.
님이 말씀하신 그 반발심 저도 이해합니다.
싸잡아 한 보따리로 묶여서 가는 것 재미없는 일입니다.
님이나 저나, 이렇게 소중한 자신인데 말입니다.^^
(평소에는 구박덩어리지만 여차하면 나타나는 희미한 자부심!ㅎㅎ)

치니 2006-06-23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이 시네요 ^-^

로드무비 2006-06-23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헤헤, 제가 하는 짓이 그렇지만,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어요.
최인호 원작이었나?
갑자기 생각나서.^-^;;

플레져 2006-06-23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상하죠, 아주 잠깐 맛보기만 보고 온 이국의 바람이
여기보다는 더 낫더란 말이죠. 자연풍의 바람에 그나라의 정서가 물들어있나봐요.
잠깐이나마 조퇴 하고 싶어요. 좀 답답해요.
 
지하련 전집
지하련 지음, 서정자 엮음 / 푸른사상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부터 왠지 내가 인생에서 제일 경계했던 것이 '허위의식'과 '허영심'이었다.
세상에는 하고많은 악덕들이 있을 텐데 하필이면 왜 그런 걸 골라들었는지.
덕분에 나는 남 눈치뿐만 아니라 자신의 스쳐지나가는 마음까지 감시하느라
인생을 아주 건전하고 재미없이 살았다.

사소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2년 정도 꽤 마음을 붙이고 글을 올렸던 모 인터넷 신문 때문에
기자시사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도 메일로 엄청나게 받았지만
맨 처음 딱 한 번('질투는 나의 힘') 가보고는 그만이었다.
잔뜩 부푼 그 시사회장의 분위기가 어색했고, 도무지 영화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개봉된 화제작을 두고 경쟁적으로 빨리 기사를 올리는 그곳 시민기자들의 분위기도
영 마뜩찮았다.
어쩌면 이 또한  또다른 종류의 허위의식과 허영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얼핏했다.
하지만 '내 입맛대로'를 고수하는 것까지 구박하고 의심한다면
도대체 어떤 얼굴로 살아야 할까.

십몇 년 전 회사 서고에서 지하련의 어떤 글을 자료정리 중에 읽고 마음을 빼앗겼다.
 허위의식에 직격탄을 날리는 구절이라고 생각했다.

--정예는 제 말대로 흉악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거지는 아니다.
허다한 여자가 한껏 비굴함으로 겨우 흉악한 것을 면하는 거라면
여자란 영원히 아름답지 말란 법일까?(<지하련 전집> '가을' 중 62쪽)

정예라는 여자는 아내의 제일 친한 친구로 소설 속 주인공에게 추파를 던져오는 여인이다.
아내는 그녀와 달리 너무 현숙해서 이혼을 하고 연애 소문이 많은 친구임에도
자신의 남편을 소개하고 둘이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말을 듣고도 친구를 믿어준다.

그의 소설에서 내가 빨려들었던 건 그렇고 저런 스토리의 전개가 아니라
멋을 부리지 않고 불쑥 던지는데 무엇인가를 관통하는 표현이었다.

사람 사는 일이 얼마나 지랄맞은지 나름대로 온갖 자구책을 강구하고 폼을 잡고 살아도
스스로를 "거지같다"고 여기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비굴함"으로 간신히 자신이 두려워하는 "흉악"을 면하는 정도의 삶을 산다는 기분.

다음과 같은 아무렇지 않은 구절도 왠지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안해(아내)란 훨씬 늙고 파렴치한 겁니다.('산길' 102쪽)

지하련의  단편소설은 소설로서의 형식적인 완성도를 떠나서
인간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비틀고 통렬하게 자조한다는 점에서
일찌기 보지 못했던 아주 독자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지하련이라는 자신의 필명보다는 '임화의 부인 이현욱'으로 원고를 청탁받고
수필이니 편지니 쪼가리 글을 발표하다가, 여섯 편의 단편을 <도정>이라는 창작집에 묶고,
임화의 뒤를 따라 1년 뒤 월북하여 자신의 문학세계를 펼치기는커녕
남편의 몰락과 죽음을 겪어야 했던 그의 신산한 삶.

절친한 친구로  알려졌던 최정희의 소설 <인맥>은 지하련이 등단하지 않았을 때
찾아와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이야기를 듣고 밤새 써내려간 것이라고 한다.
<인맥>으로 지하련과 최정희는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고, 전혀 다른 시점에서 전개되는
세 편의 단편 '가을' '결별'  그리고  '산길'을 완성한다.
오래 전 <인맥>을 읽고 뭔가 편치 않은 기분을 느꼈는데, 이렇게 해서 의문이  풀어지고...

총명하고 예민한데 어딘지 불안정해 세상 살아가기가 영 어색한 지하련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조하듯 내뱉는 말이나 일촉즉발의 날이 선 대화는 이상하게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었다.

첫 작품 '도정道程'에는 사상범으로 6년을 살고 나와 헤매이는 중 친구들의 종용으로
마지못해 공산당 사무실을 찾았다가 '동무'라는 호칭에 멀미를 느끼면서도
마지못해 입당 수속을 밟는 청년이 나온다.
"계급"란에 자신을 비웃듯 "소뿌르조아"라고 쓰고 도망치듯 나오는데......

인간의 허위와 기만을,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까발렸던  이 예민한 작가에게,
사랑과 사상은 과연  일생을 통해 어떤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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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20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는 허영심과 허위의식이 넘쳐나는데.....
내입맛대로 사는 것은 결코 위의 것들과는 상관이 없을 듯 한데요.? ^^

로드무비 2006-06-2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래봤자 교만한 구석도 있고 시건방지고.
어디 가겠습니까?
아무튼 어릴 때 생각이었다는 거죠.^^

국경을넘어 2006-06-20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임화의 부인이군요. 한번 읽어봐야 겠군요.

sandcat 2006-06-2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지금의 제 상태야말로 늙고 파렴치한 허영덩어리에요.


건우와 연우 2006-06-20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누구의 무엇이라는 것은 때로 예민하고 영민한 사람들에겐 족쇄처럼 느껴졌을지도...

waits 2006-06-2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가 읽는다고 로드무비님처럼 잘 알아듣지 못하겠죠?
어, 어, 어, 하며 읽었어요. 결국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의 인간일 뿐이야...
갑자기 남의 면죄부를 내 품에 안은 느낌이예요. 좋은 글에 감사..^^

2006-06-21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6-2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쓰다 마신 게 아닌지 님, 으윽.
이 리뷰 쓰기 무지 힘들었어요.
임화의 아내로서의 삶을 써야 이야기가 풍성해지는데
왠지 제가 그 삶이 편치 않게 느껴져 피해갔고,
사상 문제도 마찬가지거든요.
이 작가 또한 저런 식으로 암시만 하고 소설 속에서 그 문제와
정면대결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 만났던 인상적인 한 구절을 붙들고
옹색한 리뷰를 쓰게 된 것인데.
그러려니 하세요.
명쾌하게 대답해 드릴 부분이 없네요.
궁금하시면 책을 한 번 읽어보시든가.ㅎㅎ
(그리고 님과는 정반대 상황이네요. 뭐.)

나어릴때님, 알아듣고 말고는 오로지 관심이 닿았느냐 아니냐
하는 부분에 의해서.
그게 뭔지는 자기자신만이 알겠지요.
좋은 글이라고 해주셔서 감사.^^

건우와 연우님, 지하련이란 작가를 더 알고 싶어졌어요.

샌드캣님, '늙고 파렴치한'만 할래요. 저는!=3=3=3
(님도 하나는 빼세요.ㅎㅎ)

폐인촌님, 모르긴 몰라도 그로서는 임화의 아내라는 소리가 지겨울 거예요.
이상하게 끌리는 소설가.^^

buru 2019-08-0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리뷰 감사합니다 여쭤볼 것이 있어 댓글 남겨요
최정희가 지하련과의 대화를 토대로 인맥을 썼다는 이야기나 그 후 관계가 틀어졌다는 등등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디서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을까요?

로드무비 2019-08-04 23:3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뒷이야기에 저도 관심이 꽤 많았는데 지하련과 최정희의 모든 글을
읽은 것도 아니고...저도 아는 게 없어요.
소문은 듣고 있다가 지하련의 저 책에서 알게 된 것 같은데...
(지하련을 읽고 최정희의 <인맥>은 다시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