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의 편지
파스칼 로즈 지음, 이재룡 옮김 / 마음산책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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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눈빛의 작가 사진에 끌려서 책을 주문해 보는 건 참 오랜만의 일이다.

더구나 이 작가가 38세에 쓴 첫 장편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했고, 바로 그 해 자신이
소설 속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동맥 파열과 관련된 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왔으니.
어린 시절 존경했던 작가 톨스토이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자신의 내면을 기록했다는
책 소개에 이르면  이 책을 외면할 방도가 없었다.

다석 유영모가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이가 바로 톨스토이였다.
몇 달 전 <진리의 사람 다석 유영모>를 재밌게 읽으며 톨스토이의 작품을
모두 챙겨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에게 보내는 파스칼 로즈의 편지를 읽으며
다시 한 번 그 생각을 굳혔다.

왜 하필이면 톨스토이였을까?
톨스토이가 82세 되던 해 어느 아침 서재에서 나는 아내의 기척에 진저리를 치며 집을 떠나
그 며칠 후 어느 역사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데 평소 그가 기차여행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했다는 것도 한 단서가 될 것이다.
자신이 평소 그토록 싫어하던 곳에서 숨을 거둔다는 인생의 아이러니.
인생은 그렇게 사람의 뒤통수를 친다.

톨스토이가 매일 자신의 일기에 다음 날짜를 적고 "만약 내일도 산다면"의 약자  S. J. V를
덧붙였다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를 산 사람.

파스칼 로즈는 톨스토이를 우상이나 영웅으로 높은 곳에 모셔 두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그의 변덕과 단점까지도 모두 끌어안았다. 
세계적인 대문호가 그녀에게는 "티티새처럼 울었기 때문"에
그에게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피티에-살페트리에 병원에서 아프지 않을 때의 삶은 너무 강렬한 쾌락이라
나는 끊임없이 감동을 받습니다.
소시지국수를 세 입 먹으면 그것은 왕의 관능, 비할 데 없는 관능입니다.(30쪽)

밑빠진 독처럼 기억은 모두 달아났지만, 햇살의 청명함과 창문의 투명함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수간호사의 부드러운 음성과 손길의 부드러움에서 성자를 느꼈다니
그녀는 쓰러져 갑자기 실려간 그곳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3년간의 투병생활을 통해.

"산 채로 죽었던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파스칼 로즈의 유일한 다짐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진실, 오로지 진실, 체험의 도장이 찍힌 진리만을 말할 것. 그 외 다른 것을 쓰는 것은
자신에게 허용하지 말 것. 양념을 치지 말 것.(22쪽)

한마디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나는 지금 애초에 재료가 무엇이었는지도 분간이 안 가는  
조미료 범벅의 냄비를 마구 휘젓고 있는 기분이다.
한 번뿐인 인생이랍시고, 뭔가 나만의 요리를 해보겠다고 하다가 뭐가 잘못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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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6-12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이옵니다
제 요리는 무슨 맛일까요....곰곰

플레져 2006-06-12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 보다는 톨스토이가 더 좋아요.
다시 읽어보고 싶은 부활은, 너무 어릴 때 읽었지만
다시 읽는 게 조금 두렵기도 하답니다. 그 사랑 느낌을 받지 못할까봐...ㅎㅎ
여인의 얼굴이 정말 강렬하네요. 피할 방도를 저역시 못찾겠습니다.
일단 보관함...^^

로드무비 2006-06-12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보관함은 무신.^,.~
이번주 책 반납할 때 넣어보낼게요.

mong님, 님의 냄비에서는 아주 담백하고 꼬신 냄새가.^^

건우와 연우 2006-06-12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멋진 리뷰,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nada 2006-06-12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험의 도장이 찍힌 진리만을 말할 것.
정신이 뻐쩍 나는 말이네요. 앨리스 워커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얼굴에 반했었는데, 이 분도 땡겨요~~ 톨스토이가 "티티새처럼 울었"다니... 역시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감수성 같아요.

프레이야 2006-06-12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의 정도.. 양념을 치지 않을 것.. 멋진 리뷰에 멋진 작가의 책이네요.. 난 지금 담백한 요리를 하고 있는걸까..

DJ뽀스 2006-06-1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좀 먹어서 동화같은 톨스토이의 단편들 보고 머리속에서 뭔가가 띵~하고 울렸습니다.
앞으로도 섭렵하고 싶은 대작가님, 언젠가 1220쪽에 달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꼭 완독하고 싶어요 ^^:

반딧불,, 2006-06-1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이 리뷰의 맛이라니!

rainy 2006-06-1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은 절망도, 고민도, 너무 깔끔하고 힘있고 정의로와요^^
속 마음 다 알길 없어도. 그런 믿음이 생겨버렸어요^^

2006-06-1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6-06-13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 J. V. 그런 마음가짐, 몸가짐이 제게도 필요한 것 같군요.

로드무비 2006-06-1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저도요.^^

말의 허망함님, 우와, 아침에 우편함에서 엽서를 한 통 꺼내 읽는 기분이에요.
짐작하시는 것처럼 제게 엽서 주시는 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다들 이상한 짐작 속에서 외로워하고 몸부림친다니까요.ㅎㅎ
깔끔하고 당당한 것도 저와는 거리가 먼 얘기고요.
다만 글 속에서라도 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달까요?
나이가 가끔 의식됩니다.
너 지금 겨우 이러고 살아야겠냐?
하는 음성을 듣지요.
이곳에서 너무 오래 놀고 심하게 마음을 붙이는 듯할 때.
그래도 좋은 책 읽고나면 간단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요.
나중에 성장한 마이 도러가 읽기를 바라며.

님의 이야기는 약간의 그리움을 품고 읽게 됩니다.
좋아요.
앞으로도 들려주시길. 물론 내킬 때!^^

rainy님,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꼭 뭔가를 멋지게
속여넘기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반딧불님, 쪼매 입에 맞으신가요? 다행.^^

DJ뽀스님, 우리 함께 꼭 도전해 보자고요. 불끈=3

배혜경님, 담백하고 화사하시기까지 하세요.^^

꽃양배추님, 또 한 명 이 작가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마르그리트 뒤라스.
직접 교유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뒤라스의 가끔 때로 심통 사나워 보이는 얼굴을 좋아합니다.
인생을 알면 심통스러운 표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제 생각. 히히~

건우와 연우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차분하게......^^

sandcat 2006-06-1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실, 오로지 진실, 체험의 도장이 찍힌 진리만을 말할 것이라니!
그러니 저 눈빛도 가능한 거겠지요.

검둥개 2006-06-1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압니까, 예상치 않게 멋진 부대찌게가 되어 나올지?
다 끓여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라고요. 홍홍 ^.^

DJ뽀스 2006-06-1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라스..ㅋㅋ
불소설시간에 모데라토 칸타빌레 번역숙제하면서
궁시렁거리던 친구들이 젤 먼저 떠오릅니다. ㅋㅋ

2006-06-14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6-14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체크님,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전 몰랐어요. 그런 데가 있는 줄.
꼭 가볼게요. 랄랄라~~

DJ뽀스님, 친구들이 왜 궁시렁거렸을까요? 궁금.^^

검둥개님, 예상치 않게 멋진 부대찌라니, 어디 저도 오늘
그런 행운을 꿈꾸며 김치찌개에 햄이나 몇 조각 넣어볼까요?^^

샌드캣님, 저 눈빛 가지고 싶기도 하고 안 가지고 싶기도 하고.
묘한 마음입니다.^^

딸기 2006-06-16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렬한 눈빛의 작가의 사진에 끌려서 책을 주문해 보는 건 참 오랜만의 일이다."

리뷰의 첫 문장만 보고 추천을 누르게 되는 건 참 오랜만의 일입니다.

DJ뽀스 2006-06-16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궁시렁거렸냐면 -_-;;;;;;;;;;;;;;;;; 당연히 숙제하기 싫어서죠!!!
그 당시에 번역본이 없어서 베낄 수도 없는 처지라 ㅋㅋㅋ

로드무비 2006-06-16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J뽀스님, 하긴, 아무리 모범생도 숙제는 하기 싫은 법.
요즘 같으면 인터넷 통해 후딱 해치울 수 있었을까요?^^

오오, 월컵러버딸기님, 정말 화끈하십니다.
첫 문장만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