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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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화가와 사진작가를 대동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날아간
요시모토 바나나의 남미 기행과 일곱 편의 단편이 잘 어우러진 소설집을 단숨에 읽었다.

"투명하고 묵직한 아르헨티나의 공기를 멋지게 그려준" 하라 마스미의 유니크한 그림,
왠지 허영이 없을 것 같은 사진작가 야마구치 마사히로의 남미 사진과 바나나의 글은
삼박자가 너무 잘 맞아서,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아르헨티나 혹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하면 머리에 자동점화장치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에바 페론과 피아졸라의 탱고 곡, 이과수폭포가 떠오른다.
노출이 심한 원색의 드레스를 입은 화장이 화려한 남미의 여인들도 빠트릴 수 없다.
그런데 무슨 사정으로인가 남미를 여행하고 있는 일곱 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격렬하고 비장한  멜로디의 탱고나 선 굵은 미인들의 열정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도시의 번잡함이 싫어 '멘도사'라는 도시의 오래된 호텔에 머무는 젊은 여인은
평소 청년들의  활기와 박력에 멀미를 느껴 아버지 뻘의 노인과 결혼하고
낯선 도시를 여행중 적막한 풍경을 남편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일곱 편 중에서도 이 '플라타너스'라는 작품이 나는 제일 마음에 들었다.
돈이 꽤 많은 노인네인 듯 결혼할 당시 살던 아파트 외에는 재산을 상속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던 노인의 누나.
그런데 어느 날 시누이와 둘이 산책을 하고 포장마차에서 다코야키(문어구이빵)를 사서 먹은 후
불현듯 그녀의 탐욕을 이해하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날부터 누나는 반대를 접고 심심하면 내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
그 순간을 제대로 포착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마음속의 어둠을 드러낸 흔치 않은 순간이었다.
눈을 돌려버리기는 쉽지만, 더욱 깊은 곳에는
갓난아기처럼 사랑스러운 것이 숨어 있다.(101쪽)

갯수가 많은  다코야키 도시락을 탐하는 남편 누나의 모습에서, 그리고 너무나 맛나게
그걸 먹는 모습에서 젊은 주인공은 결혼 당시 이해할 수 없었던 시누이의 탐욕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남동생의 재산도 그에게는 다코야키 도시락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날 산책 끝에 다코야키 도시락을 사서 함께 먹지 않았으면 영원히 모르고 지나쳤을 
늙은 여인의 사랑스러움이었다.

한편 일 때문에 만나 어쩌다 사귀게 되고 남미를 함께 여행하게 된 덤덤한 중년의 커플은
이과수폭포를 여행하고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점원이 권하는 대로 함께 파란색 운동화를 사 신는다.

"돌아가면 같이 살까?"('창밖' 174쪽)

저녁에 뭐 먹을까 하는 질문과 별 다를 바 없는 남자의 프로포즈 장면이다.
남자의 손에 낀  반지가 부담스러워서 쭉 외면하면서 한 번도 그의 아내에 대해 묻지 않았던 여인은
그제서야 남자의 손에 반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래 전 <키친> 이후 처음 읽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 소설집이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편의점 파라솔 밑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읽는 것같은 엽서 한 장 정도의  다음 문장도.

--그냥 한가하니까 바깥구경이나 하자  싶어 나온 사람들의 표정에는
사람을  푸근하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파리의 해거름,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과도 비슷하다.
희미한 햇살이 비치고, 오늘의 첫 알코올을 주문하고,
하루의 피로가 서쪽으로 기우는 반짝임 속에 녹아드는 느낌이다.('창밖' 171쪽)

파리의 해거름이 어쩌고 하는 장면을 읽는데 엉뚱하게도 나는 운주사로 가기 위해
십몇 년전 엉덩이를 잠시 걸쳤던 화순의 한 시내버스 정류장 긴 의자가 생각났다.

한 할머니가 내 옆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다가 차가 너무 오래 오지 않자
낡아빠진 가방에서 부스럭 부스럭 뭔가를 꺼내는데 봤더니 막걸리병이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술냄새가 난다 했더니.......
그런데 뚜껑은 어디로 갔는지 신문지를 함부로 구긴 것이
막걸리병 주둥이를 틀어막고 있었다.
혼자 드시기가 미안했는지 할머니는 우물쭈물 나에게 한 모금 할라느냐고 물었는데 
얼떨결의 질문이라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때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그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벌컥벌컥 막걸리를 들이켜시더니 할머니는 아주 소중한 것인양 그 플라스틱 병에
다시 신문지 구긴 엉성한 뚜껑을 틀어막고 가방 한쪽에 조심조심 세우는 것이었다.

이런 해거름이면 꾀죄죄하기 짝이 없던 할머니의 그 가방과 막걸리병이 가끔 생각난다.
무슨 조화속인지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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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와 연우 2006-06-1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거름이면 쇠락해가는 것들이 가끔 번쩍거리며 슬프게 아름답기도 하지요.
저는 해거름에 빨래를 거둬들일때면 기차에 태워져 낯선곳에 끌려와있는것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로드무비 2006-06-14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해거름, 쇠락, 한 편의 시 같은 문장이어요.^^

플레져 2006-06-1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만 여운이 긴 소설과 로드무비님의 여행길이 잘 어울리는데요 ^^
문득 생각나는 소설들인데 죄다 느낌이 일몰의 느낌이어요.
막 일몰이 질 때의 느낌.
어. 리뷰 제목을 염두에 둔 글은 아니었는데... 자연스레 나와버렸네요^^
핵심도 잘 잡으셔라~

로드무비 2006-06-14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딴청 부리다가 오늘 오후에야 단숨에 읽었어요.^,.~
비도 오고 책 내용도 그렇고 술이 땡길 시간인데 말임돠.
핵심을 잘 잡았다니 기분이 좋은데요? 호호~~

새벽별님, 역시 풍류를 아시는 분이랑게요.^^

nada 2006-06-1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은 종류를 막론하고 존경합니다. 그것이 선사하는 취기와 풍류와 약간의 광기를요. 로드무비님과 바나나는 또 새로운 조합입니다.^^

비로그인 2006-06-1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제목보다 리뷰 제목이 더 멋들어져요..;;;

치니 2006-06-1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조화속이긴요, 뛰어난 감수성이시죠 ^-^

Mephistopheles 2006-06-1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리뷰는 말머리(최종수비)부터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오는군요.

sandcat 2006-06-15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이미지와 제목은 원래의 남미 이미지가 팍팍 풍기는데 소설은 다르군요. 뛰어난 화가와 사진작가를 대동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날아간 바나나라니, 부러워요. =.=
(서울막걸리엔 동의를 표하셨는데, 마이타이주가 그렇게 맛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맛보셨는지 궁금해요)

로드무비 2006-06-1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캣님, 너무 부럽죠?@,.@
마오타이주는 두세 번 먹어봤습니다.
입에 짝짝 달라붙는 맛이었어요.
죽엽청주도 맛있었고.
고량주 좋아합니다. 자주 먹지는 않지만.....^^

메피스토님,
뛰어난 화가와 사진작가를 대동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날아간
요시모토 바나나.
이 부분 말씀하시는 건가유?
전 자비로 타달타달 배낭여행이라도 가봤으면 좋겠는디.
기력이 쇠하여 될까 모르겠네유.;;

치니님, 호호, 감수성씩이나요?
제가 사실 메마른 듯하면서도 감수성이 촉촉한 인간이랍니다.=3=3

비숍님, 제가 본래 제목을 좀 잘 뽑잖아요. 호호~~

꽃양배추님, 요시모토 바나나와 저, 잘 안 어울리죠? 헤헤.
별로 호감이 없는 작가였는데 이 책은 꽤 괜찮았어요.
다코야키 도시락 장면 하나로도 건졌다는 생각이 드는 책.^^

2006-06-16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6-1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주도 좋지만님, 오늘 같은 날, 심정 이해합니다.
바닷가 횟집이나 파라솔 밑에서 흐린 바다 보며
홀짝홀짝 마시고 싶군요.
그리고 오마나, 반가운 소식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