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다리 부러지는 대접을 받다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冊을 읽다 보면 << 포틀래치 문화 >> 를 소개하는 부분이 나온다.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경조사가 있을 때 손님을 초대해서 대접을 하는 풍습이다. " 포틀래치 " 라는 말은 " 식사를 제공한다 " , " 소비한다 " 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말로 하자면 "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즐겁게 놀다 가셔 ~ " 다. 그런데 잔치 규모가 사뭇 다르다. < 상다리 부러지는 대접 > 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과시욕인데, 포틀래치'는 상다리 규모를 넘어서 개인 파산에 가까운 소비 규모다. 아이구야, 잔치 다음날은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다. 귀중품을 쌓아놓고 나눠주는가 하면 귀중품을 파괴하기도 하고, 자신의 노예를 죽이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부의 분배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돈 지랄'이었다. 그렇다면 남의 집 잔치에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대접을 받은 손님은 이득을 보았을까 ?

그렇지는 않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손님은 더 큰 규모로 잔치를 열어 부를 분배해야 하고 돈 지랄을 해야 한다. 만약에 잔칫상이 부실하면 부족 구성원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메리카 인디언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나 다름없다. 내가 " 포틀래치 문화 " 에서 깨달은 것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다. < 준다 > 는 것은 < 받는다 > 는 것을 전제로 한 시혜'다. 신경숙 표절 사태로 본 < 침묵의 카르텔 > 도 " 주는 쪽 " 과 " 받는 쪽 " 이 서로 이득을 취하기 위해 공생하는 관계에서 발생한 권력 지형이라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가 욕심을 내는 자리는 문예지 편집위원이나 기획위원 혹은 문학상 심사위원 자리'다.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출판사( 대형출판사는 모두 자체적으로 문예지를 발간한다. 문학상도 출판사와 관련이 있다) 에게 잘 보여야 한다.

 

" give " 가 있어야 " take " 가 있는 법. 주례사 비평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신인 작가도 이 카르텔에 동참한다. 젊은 작가 입장에서 보면 독자가 좋아할 작품보다는 문학평론가가 좋아할 작품을 쓰는 게 유리하다. 그러다 보니 작품은 점점 어려워진다.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단어는 현대인의 불알(불안)과 고독, 소외, 상실 따위다. 먹을 만큼 먹은 먹물 집단이다 보니 그들 구미에 맞는 미끼를 던져야 한다. 사실,  문학평론가 입장에서 박상륭 소설에 대한 평론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귀여니 소설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이다. 그놈은 멋있었다, 라고 말하는데 무슨 놈의 랑시에르이고 호모 사케르인가 !  문학평론가는 귀여니 소설 앞에서는 합죽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젊은 작가는 평론 쓰기 좋은 떡밥만 양산하는 것이다. 

젊은 작가들이 노리는 최종 목표는 문학상이니 문학평론가의 관심과 지지가 없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젊은 작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불알친구 장례싲장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문학상 뒷풀이에는 꼬박꼬박 참석한다. 나, 와떠염 ~  기염 기염.   마지막으로 출판사는 유능한 작가'를 단골 손님으로 모셔야 한다. 무명작가 시절에 연탄 백 장이라도 넣어줘야지 대형 작가로 성장하면 찾아온다. 출판사가 마련한 " 기브 " 는 문예지'다. 가난한 젊은 작가에게 문예지는 사막의 오아시스'다. 작품을 선보이는 장이기도 하고 원고료를 챙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란 아이들이 성공하면 쌀 지게미 먹고 자란 시절을 회상하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한다. 결국 출판사 - 문학평론가 - 젊은 작가'는 서로 " 기브 " 도 하면서 " 테이크 " 도 한다.

여기서 파생하는 것이 < 그들만의 리그 > 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온실이다. 온실 밖 권력의 독점과 횡포에 대해서는 입이 찢어지도록 비판을 하면서도 정작 문단 내 권력의 독점과 횡포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그들은 티끌은 볼 줄 알면서 들보는 못 보는, 근시도 아니면서 난시도 아닌, 그렇다고 사시도 아닌 요상한 안목을 가졌다. 시국 선언 따위에 이름을 걸며 침몰하는 대한민국을 걱정하기에 앞서 당신들의 달달한 혈맹으로 인하여 썩어가는 발목을 근심해야 할 때'다. 신경숙, 창비, 신형철이라고 따로따로 불러본다. 그리고 한통속이라고 뭉뚱그려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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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22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한통속이 좋다고 여긴 독자들은 이번 신경숙 사태에 크게 실망했을 겁니다. 몇 달 전에 한국소설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사라졌다는 뉴스를 봤는데 이 때 몇 몇 출판사들이 한국소설이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는 현실에 걱정 코스프레를 했다는 사실에 소름 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21:02   좋아요 0 | URL
독자 입장에서는 김애란 << 두근두근 >> 이 좋은 소설일 수 있지만 평론가 입장에서 보면 이 소설은 어설픈 장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을 비판하는 평론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 이명인 만 빼고..) 이 소설이 걸작이라면 귀여니 소설도 걸작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김애란 단편집 2개가 기똥찬 작품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두근두근은 확실히 실패작처럼 보였습니다. 출판사가 밀어주는 작가의 작품을 평론가는 무조건 성찬하는 버릇이 있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21:28   좋아요 1 | URL
한국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는 대중의 지적 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질려버렸기 때문입니다. 프랭코 모레티 평론집 < 공포의 변증법 > 을 읽고 있는데 확실히 한국 평론집과 차이가 있네요. 드라큘라를 자본론과 연결하는 대목의 신의 한수입니다. 반면 한국 평론은 소설도 재미없고 평론도 재미없고....

만화애니비평 2015-06-2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흐름이 필요하고, 그건 오덕!
일본은 그렇게 가고 있는데 말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3 06:55   좋아요 0 | URL
이제 오덕의 세계로 가야 하나요 ?

수다맨 2015-06-2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신경숙이 표절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했다는데, 거칠게 말하면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르겠습니다. 우국을 읽은 기억은 없지만 자기도 이제 자기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하네요 ㅎㅎㅎ 무슨 유체 이탈 화법도 아니고, 끝까지 자기의 의도적 잘못은 아니라고 우기는 게 어딘지 보기 그렇네요. 그리고 남진우와 백낙청은ㅡ대외적 활동도 활발한 사람들인데ㅡ여전히 침묵 모드 중이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3 11:28   좋아요 0 | URL
박근혜 어투를 닮았어요.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죠.
나는 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자가 보기에는 표절로 볼 수 있다.
이게 막걸리`죠. 더 짜증이 날 뿐입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1




                                        신경숙 표절 논란이 발생'했을 때 문학 권력이 재빠르게 대응할 전략'을 크게 두 가지로 예상했었다. 첫째는 신경숙은 출판사 뒤에 숨고 출판 권력( 출판사, 문예지 편집위원 )  이 나서서 작가를 옹호할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조선일보2가 신경숙을 옹호할 것이라는 점이다. 조선일보를 콕 짚은 이유는 신경숙이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이라는 데 있다( 남진우는 " 안티 조선 문인 킬러 " 다). 일단, 창비는 버릇대로 " 표절이라 볼 수 없다 " 는 입장을 내놓았다가 후폭풍이 일자 신속하게 입장을 철회했다. 일단 찔러보고 반응을 살피려는 전략이었는데 예상 밖으로 리액션이 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중을 못 먹는 감 정도로 생각하는 그들은 대중의 분노를 " 들끓는 냄비 근성 " 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문학평론가'에게 입장을 묻는 전화벨이 울리자 스타 평론가들은 진퇴양란에 빠졌다. 버릇대로 출판 권력을 옹호하자니 여론이 두렵고, 강한 스매싱을 날리자니 보스(출판권력)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하지만 이미 여론은 겉잡을 수 없이 흘렀고 표절의 증거는 매우 선명해서 부정을 할 수는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신형철이 내놓은 입장 표명에는 " 표절 " 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 표절이 확실하다 " 라고 말하는 대신 " 같은 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 는 말로 에둘러 인정한다. 만약에 여론이 지금처럼 들끓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 다음은 조선일보가 신경숙을 에둘러 지지하는 글이다.

 

 

 

 

"신경숙씨가 '옛날에 책에서 읽고 수첩에 메모해 둔 문장을 나중에 열어보곤 내가 쓴 글로 착각했다'라고 해명했으면, 진작에 이 논란은 잠잠해졌을 텐데…"

문학 평론가 A씨가 '신경숙 표절 논란'을 지켜보며 내뱉은 탄식이다. 신경숙씨의 단편 소설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문장 일부를 표절했다는 논란이 작가의 어설픈 해명과 창비 출판사의 무책임한 대응으로 더 확산되고 있다. 신씨가 언론과의 접촉을 끊은 채 침묵하고 있기에 비난 여론이 더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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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응준씨가 지난 16일 표절 논란을 제기했을 때 문단에선 "명백한 표절"이라는 반응 못지않게 "표절로 낙인 찍는 것은 지나치다"는 신중론도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은 한때 문학 청년들의 필독서였다. 신씨가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의 영향을 받아 무심코 글을 썼을 수도 있다. "작품 전체가 다르므로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는 동정론도 나왔다. 소설 '전설'과 '우국'은 주제와 소재 , 줄거리를 따져 보면 네모와 세모처럼 다른 작품이다. '우국'은 현실에 맞서 자기 의지를 표명하려고 동반자살하는 남녀의 이야기다. '전설'은 현실(6·25)에 눌려 이별하게 된 남녀의 이야기다. 한쪽은 운명에 저항하려고 삶을 포기하는 것이고, 한쪽은 운명에 의해 삶이 훼손된 것을 다뤘다.

그러나 신씨가 17일 단편 '전설'이 실린 책 '감자 먹는 사람들'을 낸 창비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내 "해당 작품 '우국'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자 순식간에 문단에서도 옹호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평론가 B씨는 "신씨와 연락이 닿은 동료 문인들이 논란 초기에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좋다'고 권했지만, 신씨가 이런 동료들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창비에 이메일을 보냈다"며 "모두 당황했고, 이제 문단에서 신씨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신씨로서는 억울하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문인들은 창비 출판사도 질타하고 있다. 창비가 "몇몇 문장의 유사성을 근거로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신씨를 옹호해놓고선 하루 만에 "표절을 제기할 만하다"고 입장을 번복했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평론가 C씨는 "창비가 논쟁의 불을 질러놓곤 불길이 커지자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다"고 힐난했다.

문인들은 "이제 신경숙씨가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신씨를 설득하려 했다는 어느 문인은 "독자들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라며 "작가로서 독자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씨와 연락이 닿는 문인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신씨가 침묵과 고립을 고수할수록 신씨를 공격하는 목소리만 더 커진다. '우국'과 '전설'이 상황 설정에서도 유사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표절 논란으로 한국 문학 전체가 조롱거리가 됐다. '옥에 티'가 쌓여 실뭉치가 되더니 어느덧 눈덩이처럼 커졌다. 신씨가 침묵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러면 동료 문인들도 도울 것이다. 이번 논란은 문단이 함께 치유해야 할 상처가 됐기 때문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기자는 메모광인 신경숙이 메모장 속에 있는 문장을 자신이 쓴 글로 착각하고 소설 속에 삽입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 신경숙 표절 사건 >> 은 < 고의 > 가 아니라 < 착각 > 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수일 뿐이니 비난보다는 동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 정도면 노골적인 " 신경숙 편들기 " 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일기예보는 미래학이 아니라 통계학'이다.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다. 내 예상도 미래 예측이 아니라 지난 것들의 통계값을 통해 조선일보의 입장을 예측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녀는 현재 윤희상 시인의 시 제목을 표절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신경숙 단편 제목인 << 무거운 새의 발자국 >> 과 << 멀리, 끝없는 길 위에 >> 는

윤희상 시인의 시 << 무거운 새의 발자국 >> 과 << 멀리, 끝없는 길 위에 >> 를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 했다( 맙소사, 이 시들은 모두 시집 <<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 에 수록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고의가 아니라 착각이란다. 미래를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악습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앞날을 예측하기란 누워서 떡 먹기'다. 이명박의 미래는 이명박의 도래이고, 박근혜의 미래는 박근혜의 도래'일 뿐이다. 이응준은 문단의 자정 능력을 믿는다고 신소리를 하지만 나는 문단이 자정 능력을 갖췄다고 믿지 않는다. 노무현은 권력은 자본에게 넘어갔다고 뼈아픈 후회를 했었다. 마찬가지다. 이제 문학은 자본에게 넘어갔다 ■ 











 

  1. 줄리안 반스 소설 제목
  2. 나는 동인문학상 주체가 동아일보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문학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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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6-22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요. 곰발님도 제목을 줄리안 반스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쓰셨지만
그렇게 기존에 있는 책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쓰는 경우가 있잖아요.
고 김소진 작가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그대로 가져왔구요.
제목 정도야 그냥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문학계의 표절 수위가 어느 정돈지 이번 계기를 통해 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정`해야죠. 아무리 자본주의 제단 앞에 바쳐졌다고 해도. 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13:56   좋아요 1 | URL
다른 문제죠. 박현욱의 << 동정 없는 세상 >> 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이 제목은 프랑스 영화 << 동정 없는 세상 >> 고 같죠. 하지만 이걸 두고 표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잘 알려진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는 출처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 나보기가 역겨워 > 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면 그건 표절일까요 ? 그럴 리 없죠. 누구나 알고 있기에 굳이 김소월의 시에서 따왔습니다, 라고는 말하지 않으니 말이죠.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죠.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일 뿐더러, 최소한 문장을 카피할 때 원저자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풀무 2015-06-2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사태로 생뚱맞게 (? 혹은 당연히?) 떠오른 영화가.. 예전에 김한민 감독 [최종병기 활]이 멜 깁슨 감독작 [아포칼립스]를 거의 대놓고 구성과 여러 장면들 베꼈다는 논란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도 표절 논란이 굉장했었는데 공식적으로 표절이다 아니다 아무런 결론도 없이 유야무야 되더니 몇 년 후 김한민 감독은 문제의 [명량]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전 신경숙 작품 중에 제대로 일독했다할 책은 [엄마를 부탁해] 딱 한 권인데.. 평소 한국문학에 별 관심도 없던 제가 다 심란해집니다. 뭐 어찌 보면 그간 곰발님이 여러 차례 포스팅으로 지적해온 곯은 이면들이 터진 것 같아 새삼스럽지도 않지만서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14:42   좋아요 0 | URL
이 말 들으면 뚜껑 열리겠지만 문단 돌아가는 꼴을 보면 ˝ 딸딸이 집단 ˝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찌나 칭찬이신지.... 다 걸작이에요. 문단의 성찬에 의하면 노벨문학상 400명은 배출되어야합니다.
 

 

 

 




신경숙이 신형철에게



                                     스릴러 영화와 신파 영화는 서로 닮았다. 스릴러 영화에서 서스펜스'는 " 간발의 차이 " 로 발생한다. 목격자는 대상(의 죽음, 사건 따위)보다 항상 늦게 도착한다. 살인자가 앉아 있던 쇼파에는 아직도 살인자가 남기고 간 체온이 전해진다. 황급히 창문을 열어 밖을 보면 그림자 하나가 도둑 고양이처럼 획 골목 안으로 사라진다.  모,        든 것이 다 간발의 차이'다. 슬픈 멜로 영화도 " 늦었다는 것에 대한 회한 " 을 담은 장르'다.  김영하가 지적한 것처럼 멜로란 엇갈림의 미학인 것이다. 오고가다 다 만나면 텔레토비지 멜로가 아니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서로 마주치지 못한다. 슬픈 멜로를 이끌고 가는 클리쉐는 모두 " 너무 늦었다 " 는 정서를 깔고 있다.

편지, 도착, 깨달음, 후회'라는 단어 앞에는 " 뒤늦은 - " 이라는 형용사가 자리를 잡는다. 시간은 항상 목격자보다 빠르고 살인자보다 느리며, 이별은 빠르고 기다림은 느리다. 이처럼 스릴러와 눈물은 << 만시지탄 >> 을 담고 있다. 두려움과 슬픔은 동일하다. 생각해 보면 : 이별은 죽음의 상징적 서정'이 아니었던가. 신경숙 작품 가운데 내가 처음 읽은 소설은 << 풍금이 있던 자리 >> 라는 단편이었다. 그때 느꼈던 흥분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핏발 선 눈동자와 불끈 쥔 주먹이 주류 문학이었던 당대를 감안하면 << 풍금이 있던 자리 >> 는 신세계'였다. 신경숙은 개인의 욕망이 죄가 되는 시대에        민중문학의 대의적 명분을 생각해 보라       개인의 욕망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와, 와와 했다.

맛으로 표현하자면 신경숙 소설은  오신채를 넣지 않고도 오감을 자극하는 맛을 내는 요리였으며 콩으로 고기 맛을 내는 채식 요리였다. 신경숙 소설 속 화자는 늘 " 뒤늦게 도착한 목소리 " 여서 지상에 떠도는 유령의 슬픈 후회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이 비애'에 호감을 가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깊은 슬픔'에 지치기 시작했다.  통속의 비애는 갖췄으나 불온의 미덕은 느낄 수 없었다. 과장을 섞어 거칠게 말하자면 할리퀸 로맨스 문고판에서 eros 가 빠지고 sorrow 가 강화된 느낌. 신경숙 소설은 통속소설, 나아가 대중문학에 속했지만 평단은 신경숙 소설을 순문학'이라고 우겼다. 의아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 근대 문학의 종언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도 문학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말하는 이가 고립을 각오하고 해나가고 있는 소수의 작가라면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은 건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 존재가 문학이 죽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에 불과한 무리들이 그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아직 문예잡지가 있고, 매일 신문에 커다란 광고가 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팔리고 있지 않습니다. 참담할 정도의 부수입니다. 그리고 소설이 팔릴 때는 `문학`과는 상관없는 화제에 의한 것인데, 이러쿵저러쿵 문학은 아직 번영하고 있다는 허위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됩니다(65~66쪽) " 내가 신경숙을 지지하는 문단에게 말하고 싶은 말도 똑같다. "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한국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된다. " 하지만 평단의 지지는 뭐랄까.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평단은 그녀의 통속이 대중에게 먹힌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간파했고 신속하게 < 통속소설 > 을 < 고급소설 > 로 포장했다. " 선택과 집중 " 은 통했다. 그녀는 어느새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 엄마를 부탁해 >> 로 잭팟'을 터트렸다. 신경숙의 통속과 문단의 전략이 시너지 효과를 낳은 것이다. 문단이 그녀를 지지한 이유는 문단이 독립적으로 자생하지 못하고 대형출판사에 종속되었다는 데 있었다. 출판사 빅 3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 문학동네)는 간행할 때마다 적자를 보는 문예지를 꾸준히 발행하면서 문단의 밥벌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문단 입장에서 보면 문예지'가 곧 밥벌이 장소'였던 셈이다. 특히, 문학평론가에게 출판사 문예지 편집위원과 기획위원 자리'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어느덧 권력 사슬은 이상한 구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출판사 아래 평단이 자리를 잡고 그 아래 작가'가 깔렸다. 작가는 문학평론가에게 눈도장을 찍히기 위하여 노력하고, 평단은 출판사 눈치를 살폈다. 주례사 비평'은 이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 파생된 덕담 문화'였다. 그러다 보니 특정 출판사가 출간한 소설 뒷편에 부록처럼 딸린 평론은 그 특정 출판사 소속 문학평론가가 담당하게 되었다. 말이 좋아 < 평론 > 이지 나쁘게 말하면 < 홍보용 보도자료 > 였다. 출판사 편집인이 해야 될 작업을 문학평론가가 대신하는 경우'였다. 칼칼한 비판은 사라지고 달달한 덕담만 넘쳐났다. 문학평론가라면 < 달 > 보다는 < 칼 > 을 잡아야 하나, 그들은 < 달 > 을 선택했다. 말(言)은 넘쳐났지만 건질 만한 말(言)은 없었다. 평론 評論'에서 言 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平이 남았다.

결과적으로 < 評論 > 이 아니라 < 平論 > 이 되었다. 촉이 무뎌지니 말이야 마리아야 ?  대체, 뭐야 ?! 만약에 신경숙 소설이 흥행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출판사와 문단이 발벗고 신경숙을 밀어줬을까 ? 다시 말해서 신경숙이 박상륭이었다면 ?!  내가 " 신경숙 표절 논란 " 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이응준이 " 허핑턴 포스트 " 라는 비주류 언론에 글을 기고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주류 문예지나 주류 언론이 이응준의 글을 거부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신경숙 표절의 핵심은 신경숙이 아니라 문예지를 끼고 도는 문단이다. 서정주는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다. 신경숙의 표절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문단'이다. 그때 문단이 제대로 자정 능력을 발휘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경숙은 억울하다. 어쩌면 그녀는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쇼파에 남아 있는 온기를 깨닫고 황급히 창문을 열어 밖을 볼 것이다. 명예와 인기'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훅, 사라진다.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심각한 것은 출판사와 문단의 종속 관계를 부끄러워하는 이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신형철은 << 몰락의 에티카 >>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한다. " 4년 전에 첫 글을 발표한 지면이 문학동네다. 편집위원 여섯 분 선생님의 가르침과 격려 덕분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써왔다. 마지막 글을 발표하는 지면도 문학동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 마치 문단이 출판사에게 띄우는 러브레터 같다. 보다 거칠게 말하자면 보스를 향한 충성 서약처럼 읽힌다. 나는 이 서문이 굉장히 불쾌했으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가 우국을 본 적도 없다고 당당히 말한 속내에는 평단이 그동안 자신에게 보냈던 지지를 믿었기 때문이다.

신경숙이 신형철에게 묻는다. " 그때 왜 그랬나요, 네에 ? "  







※ 이 글은 신형철을 콕 집어서 비판한 것은 아니다. 문단 전체를 대표해서 신형철을 호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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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5-06-2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 권만 읽고도(후기 작품) 신경숙의 상투, 진부에 질려서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신경숙의 비애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청승으로 읽힐 것이라 치부하구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는 것이지만. 초기작품은 그래도 좋았다고 하여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도무지 구미가 당기지 않네요. 제가 좋아하는 3대 출판사가 그런다는게 참 속 쓰리네요.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글쟁이에게 점점 더 불리한 세계가 되어가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1 13:03   좋아요 0 | URL
초기작은 신선해고 좋았씁니다. 이게 반복되니까 슬슬 재미가 없어지더라고요. 풍금, 왼쪽 방 ㅎㅎㅎ 이런 거 좋았거든요. 2000년 이후 작품이 망가진 듯한 느낌이 개인적으로 들었습니다.

수다맨 2015-06-2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나네요.

˝지금도 문학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말하는 이가 고립을 각오하고 해나가고 있는 소수의 작가라면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은 건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 존재가 문학이 죽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에 불과한 무리들이 그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아직 문예잡지가 있고, 매일 신문에 커다란 광고가 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팔리고 있지 않습니다. 참담할 정도의 부수입니다. 그리고 소설이 팔릴 때는 `문학`과는 상관없는 화제에 의한 것인데, 이러쿵저러쿵 문학은 아직 번영하고 있다는 허위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됩니다(65~66쪽)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1 14:34   좋아요 0 | URL
이미 문학의 사회적 기능은 사망 선고를 했죠. 이제는 상품으로 팔리는 상품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비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죠. 더군다나 누가 요즘 소설 책 읽습니다. 수다맨 님 빼고..ㅎㅎㅎㅎㅎㅎ고진의 지적처럼 저는 신경숙 소설이 ˝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한국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된다고 ˝ 생각힙니다. 확실히 수다맨 님은 내 글의 본문에 첨가할 글을 예리하고 뽑아서 주시네요... ㅎㅎㅎㅎ 이것도 본문에 삽입하다록 하겠습니다.
 

 



불알후드'에는 좌우가 없다




                                         어떻게 하다 보니 << 새빨간 활 : 시즌 2 >> 를 맞이하게 되었다. 글을 쓸 공간만 있으면 되니 딱히 전에 사용하던 블로그 공간이 그립지는 않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블로그 시즌 1'은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구멍가게 단골 이웃들은 이 사실을 아시리라. 대한민국에서 악전고투하며 살아가면서 깨달은 것은 그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정의로운 사람은 소수라는 점이다. 진보 진영'이라고 해서, 시민 단체'라고 해서, 문단'이라고 해서 다른 보수 꼴통 진영보다 정의로운 사람이 많으리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문인의 팔 할은 개새끼였고, 인권활동가의 팔 할 또한 개새끼였다.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을 향해 " 꼴통 " 이라며 진저리를 쳤지만, 사실 진보 진영은 마우스(mouth) 진보와 캐비어 좌파'가 팔 할이었다. 둘 다...... 꼴통이었다.

나는 보수 꼴통과 진보 꼴통'을 싸잡아서 << 불알후드 >> 라는 철학 용어'를 맹가노니, 다음날 보기에 알흠다웠어라.  불알후드는 " brotherhood " 를 토종 한국어로 축약할 때 발생하게 되는 아찔한 비속어인데, 사상은 서로 다르지만 좆대가리 근성은 똑같은 부류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용어'였다.  좆대가리 근성 앞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한통속으로 묶기 위해 불알에 hood를 달았다. 영화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에 등장하는 전투 트럭 끝에 둥근 유류 탱크를 달았듯이 말이다. 신이여, 이 비뇨기적 불경을 용서하소서 !  지금 소개하는 몇몇은 진보인 척하지만 좆대가리 근성을 버리지 못한 불알후드(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청소년 인권활동가'라는 명함을 가진 스무 살 청년이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청소년 때부터 각종 집회에 참석하여 자유와 인권에 대해 핏대를 세우는 청년이었다. 여성 인권에도 관심이 많아서 시간 날 때마다 평등 사회를 주장하고는 했다. 그랬던 그의 정체'가 들통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자유, 인권, 평등'을 주장한 올곧은 대나무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좆대가리 근성에 사로잡힌 울트라 하드 바디'였다. 그에게 여성은 섹스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표적이 되는 순간, 그는 집요하게 여성에게 만남을 요구했다. 거부하면 욕을 하고 협박했다. 그는 새벽에도 전화를 걸어 음담패설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당시 피해 여성이 공포를 느꼈을 정도였다고 술회한 것을 보면 그 수위는 내가 이 자리에서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는 인권활동가라는 명함을 이용해 여성에게 접근하여 인권을 유린한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폭로하고 사과를 요구하자 그가 내세운 논리는 < 자신의 인권 > 이었다. 진보를 가장한 꼴통이 보여준 추태 앞에서 할 말을 잊었다.  젊은 진보 논객으로 인기가 높은 한윤형 사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경우'다. 그의 전 여자친구가 폭로한 글에 따르면 그녀는 한윤형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응원하는 야구팀이 졌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고.  아,  불알후드의 좆대가리 근성은 좌우가 없는 모양이다. << 일베의 사상 >> 이라는 책을 쓴 박가분의 전 여자친구도 용기를 내 박가분의 데이트 폭력을 고발했다. 이들 모두는 진보라는 그럴듯한 밍크 코트'가 탐이 나서 진보 코스프레를 할 뿐 진보는 아니었다.

말로는 양성 평등과 여성 인권을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였던 셈이다. 이들 모두가 잘못된 여성관을 가지고 있는 원인은 여성에 대한 이해를 싱크대에서 배우지 않고 페미니즘 이론 서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여성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여성과 동등한 권력을 나누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싱크대에서 배우는 것이다. 좆대가리 체면은 잠시 접고, 쩨쩨한 남성이라는 비아냥을 두려워하지 않고,  싱크대를 배움터로 이해하면 된다. 기름 잔뜩 묻은 그릇을 다른 그릇과 함께 물에 담그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면 여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 끼 끼니를 위해 싱크대 앞에서 요리를 한다는 것의 고단함을 이해하면 함부로 여자를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 아들을 둔 내 이웃은 다른 학부모와는 달리 설거지를 시켰다. 대한민국 교육 열풍을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자식 교육에 뜻이 없는 엄마라고 손가락질했으나 내 이웃은 단호했다. 그녀가 말했다. " 내 아들이 날마다 설거지를 해서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고, 그 시간만큼 공부를 못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 해도,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룰 때 오래 전부터 해온 습관대로 아내와 가사를 분담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 그 말에 나는 무릎 탁, 치고 아, 했다. 이 단순한 진리. 양성평등은 싱크대에서 나온다는 이 단순하지만 촉촉한 진리. 이 자리에서 고백하지만 나 또한 좆대가리 근성을 버리지 못한  불알후드'였으며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였다.

종종 꿈속에서 헤어진 옛 애인에게 용서를 빌고는 한다. 이제는 불알후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책상 앞에서 책만 읽지 말고, 싱크대 앞에서 밥그릇은 닦으련다. 내가 먹은 밥그릇은 내가 닦아야 한다. 가난한 노동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창한 말이 아니라 노동을 나누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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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6-20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지금 이 글보고 한윤형 데이트 폭력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이게 무슨말인가 싶어 검색해봤다가 지금 개충격 먹었습니다. 말과 글, 그건 아무것도 아니네요, 곰발님. 아, 너무 충격먹어서 제가 지금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0 19:03   좋아요 0 | URL
신기하게도 한윤형과 박가분의 글을 까는 글을 남긴 적이 있는데 둘 다 문제가 되었네요.
깔 때는 몰랐는데 아무래도 두 양반에게서 마초 기질을 느낀 것 같습니다.

가넷 2015-06-20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억... 할말이 없네요 ㅡㅡ;;;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0 19:0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저도 오늘 알고서는 정말 동서남북 다 막장이구나 싶습ㄴ디ㅏ.
이래서 진보에 대한 반동으로 일베가 생긴거임...

비로그인 2015-06-2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저자분 책 다 재밌게 읽고 심지어 서가에 꼽혀있는데...ㅡㅡ 씁쓸하네요 책이 왠만큼 밉지않고는 절대 되팔지 않는 주의인데말이죠...
그건 그렇고
마지막 문장이 너무 좋네요. 모든 남성들이 이 한문장을 읽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으면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1 10:38   좋아요 1 | URL
사랑을 나누는 것은 아름답죠. 그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노동을 나누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것과 노동을 나누는 것은 동일한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samadhi(眞我) 2015-06-21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사람을 잠깐 만난 적이 있었죠. 지 스스로 사회주의자라 떠벌리고 다녔던 놈인데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하더라구요. 정말 충격이었지요. 사상과 인성은 동의어 또는 유의어가 아니더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1 10:39   좋아요 0 | URL
사상과 인성은 별개인 것 같습니다. 운동권이 보면 오히려 더 권위주의적이에요.
여자 패는 쪽은 오히려 좌파가 더 많은 듯...

지금행복하자 2015-06-21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그다지 충격이지 않습니다. 예전 소위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보여준 모습들도 만만치 않았기에.. 자신의 사회운동을 위해 여자들이 돈 벌어오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었고..
다만 그 세대는 그렇다고 해도 젊은 세대들이... 달라진것이 없다는 점이 충격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1 10:40   좋아요 0 | URL
운동권이 보면 수평 사회를 주장하지만
자기네 조직은 철저하게 수직 구조잖아요.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게 통진당 사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상명하복.. 이 얼마나 수직 구조입니까.

오쌩 2015-06-2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발님 글보고 찾아봤어요.
그들이 말하는 양성평등과 여성인권존중이 실은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동정적으로 베푸는 시혜성 관용표현이었구나...얼마든지 힘과 권력으로 철회가능한.
둘다 약간의 자아분열이 있는듯 해요.
글을 쓰는 자아와 실생활의 자아.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1 16:19   좋아요 0 | URL
저런 사례는 숱하게 보아온 터라... 가끔은 일베의 심정을 이해하고는 합니다.
진보가 더 지랄할 때가 많거든요. 거기에 대한 반동이 일베 아니겠습니까...

저는 도저히 이해 못하는 말 중 하나가 한윤형과 박가분의 글이 좋다는 소리입니다.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 잘쓴 글인가 ?! 하는 의문이.. 뭐,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니
타인의 취향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stella.K 2015-06-2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지난 겨울 곰발님을 알게될 즈음이 그 문제였었죠?
그때 곰발님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많이 걱정했었는데
지금은 또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그 불알후드는 그 후 곰발님께 어떤 위해를 가하진 않았죠?
우리나라 양성평등은 글쎄요...우리 세대에선 좀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04:33   좋아요 0 | URL
저야 뭐 만날 이런 일의 연속이니 크게 겁나지는 않습니다.
협박은 많이 받았으나 위해를 입은 적은 없네요.
그런 놈은 입만 살아서 입만 거칠죠..ㅎㅎ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립간 2015-06-22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곰곰발 님을 어떠할까요? 아, 또 긴 글을 쓰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10:12   좋아요 0 | URL
긴 글 기대합니다. 방긋..

마립간 2015-06-22 11:45   좋아요 0 | URL
`남자란` 제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읽어버린 감자'를 찾아서

 

 

                                         우스갯소리로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사소한 것은 하찮은 것이니 사소한 것을 두고 싸워서 이득을 취한다 해도 별로 얻을 게 없다는 소리. 그런데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한국 사회는 사소한 것을 너무 사소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서 사소한(시시한) 사회가 되었다. 사소한 것이 모여서 중요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경향이 있다, 쩨쩨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 지금 이사 온 곳은 ○○()에서 나름 중산층이 모여 사는 곳에 해당된다. 으로는 백화점이 있고, 西로는 대형마트가 있고, 으로는 구청이 있으며 으로는 국립보건원이 있다. 모두 10분 거리 안에 위치해 있다. 반면 이사 오기 전에 살던 곳은 달동네였다.


주말이면 여행객들이 가난한 마을을 구경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고는 했다. “ 포즈 좀 취해 주실래요 ? 스마일.... 아뇨, 아뇨... 좀 빈티지스럽게 웃어주세요. 달동네잖아요. 호호. ” 나는 이 달동네 초입에 살았다. 그래도 이 마을에서는 부잣집(비록 전세였지만)에 사는 사람으로 통했다. 마당 있고, 텃밭 있고, 30년 된 라일락 하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상황이 역전이 되었다. 가난한 동네에서 나름 번듯한 집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넉넉한 동네에서 가장 후진 집에 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시바, 쪽팔리네 ! 뱀 머리로 사느니 용 꼬리로 사는 게 나은 것일까, 아니면 용 꼬리로 살다가 뱀 머리로 사는 게 나은 것일까 ?

그래도 좋은 점이 있다면 넓은 평지에 온갖 위락시설을 누릴 수 있는 편리성을 갖춘 곳이어서 밤이면 가끔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한다. 영화관 또한 걸어서 10분 거리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일요일 새벽 557분경)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날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책을 읽고, 개 산책을 시키고 돌아오니 잠시 후 어머니가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셨다. 대뜸 집 앞에 감자 박스를 두었으니 가져오라는 명령이었다(어머니는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어서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한다). 냉큼 밖으로 나와 살펴보았으나, 웬걸 !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다 둔 거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문득 잠시 마주쳤던 할머니가 생각났다(말이 할머니이지 환갑이 갓 넘은 사람이었다). 박스를 들고 어딘가 급히 가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니 골목 끝에 그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종종걸음으로 걷다가 왼쪽으로 꺾었다. 나는 따라잡기 위해서 뛰어갔으나 할머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할머니가 사라진 곳에는 거성 빌라 입구가 있었다. 그곳이 막다른 곳이니 하늘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그곳으로 들어간 것이 확실했다. 감자를, 잃어버렸다 ! 16,000원짜리 감자 상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별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사실, 가난한 달동네 초입에 살 때에도 어머니는 집에 짐꾼()이 있을 때에는 늘 온갖 것들을 거리에 두고 오셨다(30계단을 올라야 집이 있기에 어머니는 늘 장바구니를 첫 번째 계단 아래 두고는 했다). 그것을 들고 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어느 때는 밥을 먹고 있을 때도 있었고,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있어서 종종 한 시간 늦게 찾으러 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달동네에서 8년을 살면서 어머니가 두고 온 물건을 도난 맞은 적은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달동네였으나 어느 누구도 남의 것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거리에 놓아둔 장바구니를 말이다. 하지만 넉넉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동네는 원,,,킬이었다. 단 한 번, 집 앞 거리에 두고 온 감자 박스는 몇 초 만에 누군가가 훔쳐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거성빌라를 찾았다. 얼추 살펴보니 좋은 빌라였다. 8가구가 사는데 주차장은 차를 15대 넘게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주차장이 넓다는 것은 비싼 빌라라는 것을 의미했다. 밖에서 살펴보아도 빌라 규모는 가구당 50평은 넘어 보였다.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50평짜리 빌라에 사는, 차를 최소한 2대 주차할 수 있는 주차권을 가진 사람이 16,000원짜리 감자를 훔쳐?

집에 돌아온 나는 박스를 뜯어 유성 매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모월 모일 새벽 557, 감자 박스 가지고 거성빌라 속으로 사라지신 분. 제자리에 갖다 놓으십시오 ! 농담이 아니라 팻말을 만들어서 1시간 동안 그 빌라 앞에서 시위를 했다. 생각보다 쪽팔렸으나 이 모습을 베란다 같은 곳에서 보고 있을 그 할머니가 더 쪽팔릴 것이란 생각을 하며 버텼다. , 나오면 쳐들어갑니다. 허허허허. 물론 바늘 도둑이 자수를 할 리는 없었다. 집에 돌아오다가 문득 cctv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확인하니, 맙소사 ! 바로 그 거리에 cctv가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길로 경찰서를 찾아 도난 신고를 했다. 16,000원짜리 감자를 도둑맞았습니다. 눈물이 앞,               을 가립니다. 절차는 나름 신속했다.

​감자 도난 사건은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어갔다. 형사가 와서 현장 검증을 마쳤다.   잃어버린 감자를 찾기 위해 꽤 애를 쓴 하루였다. 누군가는 쩨쩨하게 감자 몇 알 가지고 뭔 짓이냐고 말하는 이도 있겠으나 그런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자고 말이다. 좆대가리 같은 한국 사회는 사소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소도둑보다 바늘 도둑이 더 얄밉다. 사소한 성적 농담이나 사소한 접촉이나 사소한 외면이나 사소한, 사소한, 사소한 기타 등등이 어쩌면 이명박과 박근혜가 탄생하게 된 동력이 되었을 거라고 말이다. 며칠 전, 감자 도둑이 잡혔다. 예상대로 거성 빌라 주민이었다. 바늘 도둑은 훔친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분실물을 취득한 것이라고 우겨서 벌금을 내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잘 다듬은 머리 모양으로 보아 넉넉하게 사는 집 부인이었다. 나는 그 사람 들으라고 혼잣말을 했다. 시바, 지랄도 풍년이네. 들었을까 들었을 것이다. 귓볼이 붉어진 모습을 봤으니까. 감자 값을 돌려받았다. 이 만원 주길래 사 천원을 건냈더니 선심 쓰듯 됐다는 손사래를 하길래 말했다. " 장난하세요 ? " 이 동네, ...... 지랄도 풍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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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5-06-20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그러나 쫌 슬픈 글이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0 12:37   좋아요 0 | URL
기승전애`인가요 ? ㅎㅎㅎㅎㅎ

보빠 2015-06-20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랜덤 애에요

stella.K 2015-06-20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발님 글의 뜻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데 꼭 1인 시위 하신 게
뭐해서 쓰신 것 같아 귀엽기도 하네요.ㅋㅋㅋㅋㅋ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다니... 요즘 웬만해서 남의 물건 잘 안 가져가는데.
그래도 다행이어요. 얼굴 붉힐 줄 알고. 그러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 아니어요?
왜 습관적으로 그러고 입맛 다시는 사람도 있잖아요.

근데 이사 하신다더니 하셨군요.
어느 동넨지 꽤 부럽습니다. 어디든 10분이라니...
있는 동네 살면 물가가 좀 비싸더군요. 그렇지 않나요?ㅎ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0 15:16   좋아요 0 | URL
큰 시장도 있습니다. 습관성 도둑질이죠.... 동네가 지랄같아서 어느 미장원 앞에는 주인이 코팅을 해서 내걸었는데 내용을 읽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화분 훔쳐간 사람 천벌을 받을 것이다. 잡히기만 해라

이거 내가 웃길려고 자작한 게 아니라 실제로 이게 걸려 있더군요. 가게 앞에 말입니다. 누가 화분을 훔쳐간 모양....

아마 감자 훔쳐간 사람이 가져간 것 가틈..

Joule 2015-06-2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승전승! 축하합니다. 감자도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서 기뻤을 거예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1 15:3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감자 대신 돈으로 받아서 개에게 줄 순대 사줬습니다.

Joule 2015-06-21 15:5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건성으로 읽었어요. 마지막 문단을. 해야 할 일 안 하고 놀고 있으려니 괜히 마음이 찔릴 때는 잘 집중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1 16:10   좋아요 0 | URL
원래 제 글은 건성으로 읽어야 제맛이 나지 정색하고 읽으면 재미없습니다...ㅎㅎ 건성 읽기를 권합니다.

뽈쥐의 독서일기 2015-06-2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잉 사천원 돌려주신거 넘 멋져요.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부잣집 아들하고 사귀는 가난한 주인공이 돈봉투 주는 부잣집 마나님 엿먹이는 통쾌한 드라마 장면이 떠오르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5 06:06   좋아요 0 | URL
가끔 거리에서 마주치는데 이 여자 어찌나 동네 사람 험담을 그리하는지..... 웃긴 분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