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화 잡지 << 키노 >> 는 전설이었다. 다른 잡지들이 알맹이 없는 문장으로 설렁설렁 페이지를 채웠다면 < 키노 > 는 깨알 같은 글씨로 철학적 사유를 넘나들었다. 한국판 < 까이예 뒤 시네마 > 나 < 사이트 앤 사운드 > 를 표방한 잡지 한 권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족히 열흘은 걸렸다. 글 속에 사유가 난무한 만큼 철학도 난무했다. 글의 행간을 읽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철학의 계보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이해하는데 왜 철학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은 그 당시 편집장이었던 정성일에게 묻기 바란다. 영화 잡지 키노는 내가 유일하게 정기 구독한 잡지였으며 1호부터 폐간 99호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는 잡지이기도 하다.
매월 15일 즈음에 우체국 배송으로 배달되는 종이 잡지는 마치 사랑하는 애인에게서 온 러브레터만큼 두근거리게 만들었고, 글자 하나하나 밑줄 그어가며 정독했던 잡지였다. 99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을 때 슬프다기보다는 서글프다는 이유로 옛 애인과 낮술을 마시며 죽은 잡지를 애도했다. 21세기는 키노를 간절히 원하지 않는구나. 슬프도다, 슬프도다, 졸라 슬프도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허진호는 << 봄날은 간다 >> 에서 유지태의 말을 빌려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 라고 청승맞게 말했지만 나는 유지태의 천진난만한 순정이 촌스럽다고 느껴졌다. 사랑은 불변이라기보다는 가변의 속성을 가진 것이란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내가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키노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정성일 문체를 교주의 정언 명령처럼 받들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의 화려한 만연체에서 느껴지는 느끼함과 허세는 못 봐줄 만큼 형편이 없다. 정성일은 그 당시 유행하는 사상의 언어를 직수입하여 예쁘게 포장한 지식 소매업자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허세는 작렬했고 유치는 뽕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잡지 << 키노 >> 에 대한 애정은 버릴 수가 없다. 나의 로테였으며, 나의 캐서린이었고, 나의 데이지였다. 이번에 키노 시네필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판이 제작되었다. 복간은 아니고 말 그대로 특별판인 모양이다. 잡지 표지에는 그 유명한,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한 편이라 할 수 있는 << 화양연화 >> 의 장면이 박혀 있다.
인사말은 정성일의 느끼한 허세로 채워져 있다. 오랜 만에 맛보는 마블링 맛이다. 가끔, 이런 맛도 추억이 되곤 한다. 시대가 변했다. 종이 잡지는 사망 선고를 한 지 오래이고 정성일은 펜으로 작성한 기술 대신 마이크를 잡고 극장에서 구술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탓할 생각은 없다. 시대가 변하면 환경이 변하기 마련이고 환경이 바뀌면 그 환경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하니 말이다. 한때 영화 평론을 종횡무진했던 정성일은 가고 이동진은 종편에서 생중계하는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자로 등장하여 열을 올리고 있다. 타짜가 진짜처럼 보이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래저래 씁쓸한 뒷맛을 남기지만 어째튼 키노 만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