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왜상은 문장의 은유와 같다 :
죽은 자는 산 자 때문에 고통받았다
우리는 미술관에 가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정면에서 그림을 감상한다. 우리가 정면에서 그림을 보는 이유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의 시야각과 동일시하기 위해서이다. 한스 홀바인의 << 대사들 >> 이라는 그림을 보다 보면 사실주의에 감탄하기보다는 그림 하단에 위치한 이상한 " 왜상 " 에 신경이 쓰이게 된다. 보다 보면 점점 기분이 나빠진다. 도대체 저것은 무엇인가 ? 가름할 길이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시야각을 90도(정면)에서 45도로 전환하면 된다. 이 그림을 사선에서 보면 왜상의 정체가 밝혀진다.
바로 해골이다. 정면에서 보면 기괴하고 일그러진 " 왜상(歪像, anamorphosis) " 으로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 실상 " 이자 " 정상 正象 " 이 되는 것이다.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처럼 정면에서 사물을 보는 방식에서 벗어나 때로는 대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라고 충고한다. 그렇다면 화가가 초상화에 해골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 이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메멘토 모리. 부와 명성은 죽음 앞에서 한갓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명심하시오. 내 식대로 설명하자면 : 시바, 함부로 나대지 마라. 한순간에 좆되는 수가 있어 !
해골이라는 오브제가 상징하는 것은 분명하다. 죽음 the dead 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어서 일상의 매우 흔한 풍경이지만 그것은 공포와 혼란의 대상이기도 해서 정상 국가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을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조처한다. 그렇기에 시체는 국가의 엄격한 통제 아래 관리된다. 죽음의 소유권은 국가다. 그것은 세상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되는 오브제'다. 그래서 예술 작품은 해골을 은유의 방식으로 호명한다.
한스 홀바인이 보이면 안 되는 오브제를 왜상이라는 방식으로 해골을 세상 밖으로 드러냈다면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 물텀벙텀벙 >> 에서 해골의 왜상 역할을 하는 것은 하얀 물보라이다. 그림 대부분이 단색으로 매끄럽게 처리된 반면에 물보라는 거친 붓질로 처리되었다. 그림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흰색 붓질이 이질적이고 기괴한 왜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선 이 그림은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우측 상당에 우뚝 솟은 나무 두 그루는 그림의 배경이 되는 곳이 매우 더운 날씨라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좌측 중앙에 위치한 야외 비치 의자는 이곳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영장이란 사실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이 장소는 모두 직선으로 구성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정보는 주체의 부재'다. 빈 의자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 우리는 쉽게 우측 하단에 불쑥 돌출된 직사각형 판이 다이빙대'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하면 이 그림은 의자의 주인이 다이빙을 해서 물속으로 사라지는 찰나를 포착한 그림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순식간에 존재에서 부재로 전환하는 찰나를 그린 것이다.
삐딱하고 다크하며 언캐니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그림이 존재에서 부재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실종을 떠올리게 만든다. 홀바인의 그림이 땅속에 은폐되어야 할 것이 지상으로 돌출된 해골 왜상을 다룬다면 호크니의 그림은 의자 주인이 수면 아래 잠겼다는 점에서 두 그림은 서로 상반된 왜상을 선보이고 있다.
영화 << 기생충 >> 에서 다송이 그린 그림은 한스 홀바인이 왜곡의 방식으로 그린 해골의 왜상'이다. 영화에서 이 그림을 어느 누구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은 모두 다 정면에서만 이 그림을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실에서는 해골을 실상과 정상의 방식으로 재현하면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기에 왜곡된 왜상으로 나타난 것이 다송의 그림이다. 이미지의 왜상은 곧 문장의 은유와 같다. 그림 속 얼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부분은 얼굴 전체에서 2/3를 차지하는 눈과 코이다. 눈과 코는 채색이 되지 않아서 서로 유기적으로 통일된 상태를 유지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채색되지 않은 부분은 남근을 닮았다.
채색화에서 색이 채워지지 않은 채 공백으로 남는다는 것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남근이 채색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그것은 지하실 남자가 남근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지하실 남자는 거세된 남자다. 정신분석학에서 남근이 권력을 상징한다면 지하실 남자는 가부장 세계에서 추방된, 남자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거세된 남자'다. 보이면 안 되는 해골이 지상으로 튀어나와 노출된 순간, 정상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지하실 남자가 야외 파티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는 썩은내가 진동하는 산송장이나 다름없다. 배제와 추방의 방식으로 그들을 제거하는 방식은 결국 언데드의 출몰을 불러온다. 산 자는 죽은 자 때문에 고통받는다. 칼 마르크스의 말이다. 자본론 서문에 쓰인 이 문장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죽은 자는 산 자 때문에 고통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