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다리 부러지는 대접을 받다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冊을 읽다 보면 << 포틀래치 문화 >> 를 소개하는 부분이 나온다.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경조사가 있을 때 손님을 초대해서 대접을 하는 풍습이다. " 포틀래치 " 라는 말은 " 식사를 제공한다 " , " 소비한다 " 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말로 하자면 "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즐겁게 놀다 가셔 ~ " 다. 그런데 잔치 규모가 사뭇 다르다. < 상다리 부러지는 대접 > 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과시욕인데, 포틀래치'는 상다리 규모를 넘어서 개인 파산에 가까운 소비 규모다. 아이구야, 잔치 다음날은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다. 귀중품을 쌓아놓고 나눠주는가 하면 귀중품을 파괴하기도 하고, 자신의 노예를 죽이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부의 분배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돈 지랄'이었다. 그렇다면 남의 집 잔치에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대접을 받은 손님은 이득을 보았을까 ?

그렇지는 않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손님은 더 큰 규모로 잔치를 열어 부를 분배해야 하고 돈 지랄을 해야 한다. 만약에 잔칫상이 부실하면 부족 구성원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메리카 인디언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나 다름없다. 내가 " 포틀래치 문화 " 에서 깨달은 것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다. < 준다 > 는 것은 < 받는다 > 는 것을 전제로 한 시혜'다. 신경숙 표절 사태로 본 < 침묵의 카르텔 > 도 " 주는 쪽 " 과 " 받는 쪽 " 이 서로 이득을 취하기 위해 공생하는 관계에서 발생한 권력 지형이라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가 욕심을 내는 자리는 문예지 편집위원이나 기획위원 혹은 문학상 심사위원 자리'다.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출판사( 대형출판사는 모두 자체적으로 문예지를 발간한다. 문학상도 출판사와 관련이 있다) 에게 잘 보여야 한다.

 

" give " 가 있어야 " take " 가 있는 법. 주례사 비평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신인 작가도 이 카르텔에 동참한다. 젊은 작가 입장에서 보면 독자가 좋아할 작품보다는 문학평론가가 좋아할 작품을 쓰는 게 유리하다. 그러다 보니 작품은 점점 어려워진다.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단어는 현대인의 불알(불안)과 고독, 소외, 상실 따위다. 먹을 만큼 먹은 먹물 집단이다 보니 그들 구미에 맞는 미끼를 던져야 한다. 사실,  문학평론가 입장에서 박상륭 소설에 대한 평론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귀여니 소설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이다. 그놈은 멋있었다, 라고 말하는데 무슨 놈의 랑시에르이고 호모 사케르인가 !  문학평론가는 귀여니 소설 앞에서는 합죽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젊은 작가는 평론 쓰기 좋은 떡밥만 양산하는 것이다. 

젊은 작가들이 노리는 최종 목표는 문학상이니 문학평론가의 관심과 지지가 없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젊은 작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불알친구 장례싲장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문학상 뒷풀이에는 꼬박꼬박 참석한다. 나, 와떠염 ~  기염 기염.   마지막으로 출판사는 유능한 작가'를 단골 손님으로 모셔야 한다. 무명작가 시절에 연탄 백 장이라도 넣어줘야지 대형 작가로 성장하면 찾아온다. 출판사가 마련한 " 기브 " 는 문예지'다. 가난한 젊은 작가에게 문예지는 사막의 오아시스'다. 작품을 선보이는 장이기도 하고 원고료를 챙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란 아이들이 성공하면 쌀 지게미 먹고 자란 시절을 회상하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한다. 결국 출판사 - 문학평론가 - 젊은 작가'는 서로 " 기브 " 도 하면서 " 테이크 " 도 한다.

여기서 파생하는 것이 < 그들만의 리그 > 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온실이다. 온실 밖 권력의 독점과 횡포에 대해서는 입이 찢어지도록 비판을 하면서도 정작 문단 내 권력의 독점과 횡포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그들은 티끌은 볼 줄 알면서 들보는 못 보는, 근시도 아니면서 난시도 아닌, 그렇다고 사시도 아닌 요상한 안목을 가졌다. 시국 선언 따위에 이름을 걸며 침몰하는 대한민국을 걱정하기에 앞서 당신들의 달달한 혈맹으로 인하여 썩어가는 발목을 근심해야 할 때'다. 신경숙, 창비, 신형철이라고 따로따로 불러본다. 그리고 한통속이라고 뭉뚱그려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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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22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한통속이 좋다고 여긴 독자들은 이번 신경숙 사태에 크게 실망했을 겁니다. 몇 달 전에 한국소설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사라졌다는 뉴스를 봤는데 이 때 몇 몇 출판사들이 한국소설이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는 현실에 걱정 코스프레를 했다는 사실에 소름 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21:02   좋아요 0 | URL
독자 입장에서는 김애란 << 두근두근 >> 이 좋은 소설일 수 있지만 평론가 입장에서 보면 이 소설은 어설픈 장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을 비판하는 평론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 이명인 만 빼고..) 이 소설이 걸작이라면 귀여니 소설도 걸작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김애란 단편집 2개가 기똥찬 작품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두근두근은 확실히 실패작처럼 보였습니다. 출판사가 밀어주는 작가의 작품을 평론가는 무조건 성찬하는 버릇이 있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2 21:28   좋아요 1 | URL
한국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는 대중의 지적 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질려버렸기 때문입니다. 프랭코 모레티 평론집 < 공포의 변증법 > 을 읽고 있는데 확실히 한국 평론집과 차이가 있네요. 드라큘라를 자본론과 연결하는 대목의 신의 한수입니다. 반면 한국 평론은 소설도 재미없고 평론도 재미없고....

만화애니비평 2015-06-2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흐름이 필요하고, 그건 오덕!
일본은 그렇게 가고 있는데 말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3 06:55   좋아요 0 | URL
이제 오덕의 세계로 가야 하나요 ?

수다맨 2015-06-2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신경숙이 표절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했다는데, 거칠게 말하면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르겠습니다. 우국을 읽은 기억은 없지만 자기도 이제 자기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하네요 ㅎㅎㅎ 무슨 유체 이탈 화법도 아니고, 끝까지 자기의 의도적 잘못은 아니라고 우기는 게 어딘지 보기 그렇네요. 그리고 남진우와 백낙청은ㅡ대외적 활동도 활발한 사람들인데ㅡ여전히 침묵 모드 중이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3 11:28   좋아요 0 | URL
박근혜 어투를 닮았어요.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죠.
나는 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자가 보기에는 표절로 볼 수 있다.
이게 막걸리`죠. 더 짜증이 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