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복지국가 - 약탈, 인종 학살, 공범들
괴츠 알리 지음, 최준영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

​

그의 입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철도와 도로를 깔아준 덕분에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내 목구멍에서 좆같음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지만 어쩌랴. 누런 강냉이를 털고 싶었으나 그의 우람한 이두박근을 보며 간신히 참았다. 몸에 남아 있는 근육이라고는 남근밖에 없는 나는 몸을 사려야 했으니까. 크아아아. " 현실 속에서 뉴라이트 열혈 당원을 만나다니, 헐 ! "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칼 든 강도가 남의 집에 침입해서 집수리하고 나왔다는 주장과 다를 것이 없다. 선량한 강도는 없다. 제국의 점령지 정책에 있어서 핵심은 " 수탈 " 이다.

​

<< 히틀러의 복지국가 >> 에서 저자는 히틀러 정권 시절 독일 국민의 정치적 충성심은 사상보다는 사심(이념보다는 이윤)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은 홀로코스트 문제를 인종 이데올로기 문제로만 접근했었지만 저자는 홀로코스트를 국가 재정 문제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유대인 정책의 핵심은 국가가 유대인 재산을 빼앗아 국가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유대인이 소유했던 기업, 주택, 토지, 귀금속은 물론이거니와 가구, 식기, 침대, 옷 같은 생활용품도 경매를 통해 국가 금고로 환원되었다. 그 규모는 150억~ 200억 마르크.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60조다.

​

이 돈은 고스란히 병사 급여와 독일 국민의 사회 복지 재원으로 사용되었다. 역설적이지만 독일 사회 복지의 황금기는 히틀러 정권 때였다(동물 복지도 히틀러가 만든 걸작품이다).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룬 21세기 걸작 영화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도 이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독일 나치 간부였던 회스 가족은 유대인에게서 빼앗은 고급 가구와 보석으로 집과 가족을 꾸민다. 그리고 영화 제목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는 " 금전적 이익 "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금전적 이득에 눈이 먼 독일 국민의 도덕성이다.

​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넉넉한 사회 복지를 위해 유럽 전체를 거대한 은행 ATM 기기로 만들었다. 아이러니한 풍경이지만 독일 국민이 누린, 사치에 가까운 풍요는 히틀러 시대 때 완성되었던 것이다( 낮은 세금, 안정적 물가, 풍족한 급여 ). 당시 독일 병사였던, 나중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하인리히 뵐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 25마르크라는 엄청난 병사 급여 " 를 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썼다. 독일 국민에게는 히틀러 시대야말로 황금시대였던 것이다. 어쩌면 독일 국민은 히틀러의 말빨에 세뇌당한 것이 아니라 복지 정책에 만족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독일 유대인 재산을 약탈해서 사회 복지 재원으로 사용하던 히틀러는 범위를 확대하여 유럽으로 확장한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점령지에 대한 수탈의 양도 많아지고 그만큼 독일 국민은 풍요로웠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홀로코스트와 독일 전쟁을 단순히 인종 혐오만으로 한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히틀러의 죽음으로 모든 죄는 히틀러와 나치에게 돌아갔지만 따지고 보면 독일 국민은 공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히틀러와 나치는 전쟁범죄자였고, 독일 국민은 장물아비였다. 그들은 자신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가 어디에서 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1945년 4월, 패망한 독일에 입성한 한 영국군 장교는 이렇게 회고했다. “...... 사람들은 그 폐허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혈색이 좋았고, 행복해 보였으며, 깔끔하고 옷도 잘 갖춰 입었다.”

​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yamoo 2026-10-06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오브 인터레스트....찾아보겠습니다!
간만에 좋은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
 
폭풍의 언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

​

관객 혹은 독자 입장에서 보면 " 완전한 사랑 " 만큼 따분한 사랑도 없다. 최부잣집 셋째 딸과 부잣집 둘째 훈남의 러브 스토리. 양가의 축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웨딩 스토리. 워뗘 ? 궁금하신가. 관객은 결핍이 없는 사람끼리 만나서 만드는 완전한 사랑 혹은 안전한 사랑에 대해 관심이 1도 없다. 가수 김현식의 노래 가사처럼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을 해본 우리들은 사랑의 승질머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사랑은 치열하지만 치졸하고, 더럽고, 짜증 나고, 죽이고 싶고, 가끔 미친다는 사실. " 이 세상 모든 사랑, 다 족구하라 그래, C ~ " 관객은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드러운 사랑이다.

​

<< 폭풍의 언덕 >> 의 히스클리프는 결핍의 아이콘'이다. 흑인 고아 소년(인도계로 추정 ㅡ )이 백인 남성의 딸을 좋아한다. 눈부시게 흰 캐서린은 검은 히스클리프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다. 요구와 욕구와 욕망이 서로 어긋날수록.... 보다 강렬하다. 캐서린 또한 완전한(성숙한) 인격체는 아니다. 그녀는 진정한 사랑과 물질적 욕망 사이에서 주체 없이 흔들리는 갈대다. 그녀의 허영과 사회의 허용 사이에서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남자냐, 저 남자냐의 문제는 캐서린이 결혼을 한 후에도 계속된다. 이 남자냐, 저 남자냐.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소설은 파국을 맞는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의 진짜 악당은 캐서린이다.

​

이처럼 결핍과 결핍이 만나면 떨어질 줄 모른다. 부침개의 설익은 면과 설익은 면이 붙으면 떨어질 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뜨거운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녹여서 붙어버린, 뒤집기에 실패한 반달 모양의 부침개'다. 이 얼마나 징그럽고 징글징글하며 치열한 사랑인가. 자신의 온몸을 녹여서 붙어버린 육체성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나의 결핍을 상대에게 투사하여 그것을 욕망하는 것은 건강한 사랑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 생각한다. 뜨거운 사랑보다는 미적지근한 사랑이 오래간다는 사실. 시들시들한 사랑이 건강한 사랑이다. 가끔 백년해로하는 부부를 보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켜켜이 쌓인 부침개 같다. 양쪽 모두 노릇노릇 익어서 서로 붙지 않는.

​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고요한 결심 - 내 삶의 언어로 존엄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이화열 지음 / 앤의서재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하루 루틴은 화장실에서 국어사전을 펼쳐 보는 일이다. 이 생활을 6,7년 하다 보니 이제는 단어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게 되었다. < 외롭다 > 와 < 고독하다 > 는 사전적 의미로 같은 말에 가깝지만 내게는 다른 의미다. 전자는 " 끈적이는 액체적 감성 " 에 가깝고 후자는 " 딱딱한 고체적 촉감 " 에 가깝다. 외로움은 듣는 이의 신파적 감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높은 반면에 고독은 차가운 촉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높다. 외로움은 뜨겁고 고독은 차갑다. 외로움은 자기 감정 통제에 실패했(기에 타인에게 기대려는 마음의) 증명이고 고독은 자기 감정을 적절하게 다스린 결과'다. 고독은 독립적이다.

​

천명관이 << 고래 >> 에서 고독을 벽돌에 비유했을 때( 박완서가 << 그 남자네 집 >> 에서 아름다운 시절을 구슬에 비유했을 때와 마찬가지로ㅡ ) 나는 직감적으로 이 작품이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편소설 전체 분량에 비하면 적확한 단어를 사용한 이 문장 하나는 사소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때로는 절대적일 때가 있다. 이화열의 << 고요한 결심 >> 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질문은 왜 " 조용한 결심 " 이 아니라 " 고요한 결심 " 1)인가 _ 라는 의문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찾고 싶었던 것은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언어의 온도였다.

​

작가의 시어머니는 조력사를 희망한다. 작가는 시어머니의 결정에 대하여 " 말기암도 중증질환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결정은 큰 충격이었다. " 고 고백한다. 결심의 주체도, 그 결심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가족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기에 이른다. 늙어간다는 것은 안개에 갇힌 풍경 같은 것. 생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내려놓으면 비로소 보이는 법. 시인 최승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터널은 끝에 가서야 환해진다고 말이다. 그녀의 고요한 결심에는 자기 존엄을 위한, 긴 터널을 통과한 끝에 보이는, 오랜 시간의 경과가 내포되어 있다.

​

살아 있는 자만이 오로지 죽을 수 있기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_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_라는 질문으로 반드시 되돌아온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저마다 자신의 언어를 갖는다고 말하는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면서 고요하다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인간이 자신에게조차 소외되는 이유는, 멈추고 존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데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침묵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답으로 차 있다. 이겨내는 것보다 느긋해지는 것. 나이가 들면서 소리에 둔해지더라도 고요를 들을 줄 아는 것.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고요함 속에 머물러 본 적 있던가. 창문 너머로 펼쳐진 구름바다를 본다. 이 생은 무엇을 남길지가 아니라, 얼마나 가볍게 떠날 수 있는지를 묻는 여정 같다. " ㅡ 197

​

이 문장에 밑줄을 긋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서운할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서운하기보다는 서러워 한다. 문장 하나하나 구슬 같다. 신파조의 간증 서사(2 에 빠지지 않는 것은 이 책의 탁월한 업적이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세상 풍파에 몸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시어머니를 바라본다. 깃털처럼 가벼운 영혼은 흔들리지 않는다.

​


1)

■ < 조용하다 > 는 단어의 풍경은 이렇다 : 학교 수업 종이 땡땡 울렸지만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이때 무섭기로 소문 난 호랑이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온다. 화가 난 선생님이 소리친다. " 조용히 해 ! " 정적에 휩싸인 교실. 이때 교실은 고요한 것이 아니라 조용한 것이다. 이처럼 < 조용하다 > 라는 단어는 인위적이며 청각적이다.

■ < 고요하다 > 는 단어의 풍경은 이렇다 : 투명한 유리컵에 흙탕물을 담으면 온통 흙빛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부유물이 바닥에 가라앉으면서 투명한 물색으로 변한다. 뿌연 시야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투명하고 청명하게 보이는 풍경의 감성이 " 고요 " 다. < 고요하다 > 라는 단어는 자연적이며 시각적이다. 교실은 조용한 것이고 바다는 고요한 것이다.

​

2) 에세이가 실패하는 지점은 사유보다 사연이 앞서기 때문이다. 사유 없는 경험의 나열은 에세이의 품격을 떨어트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









사진의 역사를 다룬 개론서나 영화의 역사를 다룬 개론서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다. 그는 24개의 사진기를 이용하여 달리는 말을 연속적으로 촬영하는데 성공한다. 최초의 연속 사진이다. 이 연속사진을 환등기로 영사하면 최초의 동영상이 된다.

​

말의 이름도 기록에 남아 있다. 이름은 샐리 가드너, 암말이다. 그렇다면 말 위에 올라탄 기수의 이름은 ? ........ 없다.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그 어떤 기록도 없다. 말 이름도 기록된 마당에 기수 이름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질문은 " 알고도 모른 척하는 능청 " 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흑인은 동물(샐리 가드너)보다 가치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조던 필 감독이 연출한 << 놉,2022 >> 은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영화적 도구로 활용하는 조던 필은 무명의 흑인 기수에게 이름을 부여하면서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지워진 흑인 선조의 발자취를 탐험한다. 

​

흑인 기수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흑인에게 개인의 서사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서다. 고유의 이름이 부여되면 캐릭터에 생명력이 만들어지고, 그 캐릭터의 개성과 이미지가 생성된다. 남성 중심의 백인 주류는 그것이 못마땅하다. 이름 없음 ㅡ 전략은 여성에게도 적용된다. 현대의 주류 상업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다(벡텔 테스트를 통과한 현대 영화는 많지 않다). 그들은 다방 아가씨이거나 접대부, 여의사, 여선생, 여류시인, 동네 아줌마 그리고 피해자1,2,3,4,5,6,7,8로 등장한다. 이처럼 비주류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욕망은 주류의 욕망이다. 

​

그들은 최대한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를 지연시킴으로써 비주류의 존재를 투명 인간으로 취급한다. 내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를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뫼르소 재판 과정에서 카뮈는 “ 아랍인 한패가 담배 가게 진열장 앞에 기대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우리를 마치 돌이나 죽은 나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라고 묘사했지만 인격체를 비인격체(돌, 나무)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주체는 사실 뫼르소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시선의 주체가 전이된 것이다. 쉬운 저잣거리 입말로 풀어서 설명하자면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 

​

평소, 뫼르소는 아랍인을 돌이나 나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기 때문에 지레짐작으로 아랍인도 자신을 비인격체로 바라볼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 이방인 >> 에서 죽은 피해자는 " 아랍인 " 이라는 단어로 스물다섯 번이나 등장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이름이 호명되지는 않는다. 카뮈가 애써 아랍인의 이름을 삭제한 이유도 어쩌면 대상을 비인격화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뫼르소의 이유 없는 살인이라는 기존의 가설은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싸움을 말리는 도중에 발생한 우발적 총격이라는 말도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 왜냐하면 우발적 격발 이후에 뫼르소는 " 굳어버린 몸뚱아리 위에 ㅡ " 네 방을 더 쏜다. 

​

뫼르소가 굳어버린 몸뚱아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아랍인의 죽음을 확신한 것 같은 데에도 불구하고 뫼르소는 죽어서 굳어버린 몸뚱아리 위에 네 번의 총격을 더 가한다. 죽이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가 엿보이는 네 발의 총성을 두고 과연 우발적 격발이라 할 수 있을까 ? 그것은 어쩌면 잠재된 무슬림 혐오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 아니었을까 ?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것처럼 제국주의 시대에 집필된 서구 문학 정전들은 반드시 제국주의에 대한 의식적 정당화를 내포하고 있다. << 이방인 >> 을 읽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뫼르소가 아니라 굳어버린 몸뚱아리로 그 어떤 발언권도 얻지 못한 채 죽어간 아랍인이다. 

​

​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초란공 2023-02-13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헛... 그렇군요! 우리가 기존의 프레임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 깨닫기가 또 얼마나 어려운지요... ㅜㅜ

고양이라디오 2023-02-15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2023-03-14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0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4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름 없는 죽음








그 마을과 주변 마을 주민을 모두 합하면 4,000명이었다. 점령군은 이 마을과 주변 마을 주민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학살을 감행한다. 학살자의 눈을 피해 운 좋게 생존한 사람은 단 3명뿐이었다. 늙은 노인 한 명과 젊은 청년 그리고 어린 남자아이가 전부였다( 이 아이는 커서 작가가 된다). 죽은 사람 중에는 갓난이도 많았다. 프랑스 군은 집집마다 일일이 수색하면서 집에 숨어 있는 주민들을 보는 즉시 사살했다. 

​

자비는 없었다. 죽은 사람 중에는 임산부도 있었다. 말 그대로 마을 주민 섬멸 작전인 셈이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 군이 알제리를 점령했을 때 발생한 전쟁 범죄 중 하나'다. 이 사실 하나만 보아도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 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는 결코 나치의 전쟁 범죄에 뒤지지 않는다. 알제리 전투에서 죽은 피에 누아르(알제리에 터를 잡고 살면서 이슬람교를 지배하며 통치자로 군림했던 프랑스인(군인+민간인)을 통틀어 피에 누아르'라고 한다)는 6만 명이지만 알제리인은 150만 명이다(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그 당시 알제리 전체 인구수는 600만 명이었다). 대부분은 학살과 고문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

식민지 독립군의 독립 투쟁을 테러로 규정하는 프랑스와 제국의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알제리 중에서 당신은 누구를 지지해야 할까 ? 자, 이제부터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하자. 피에 누아르를 대표하는 문학 작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알베르 까뮈'다. 그의 대표작 << 이방인 >> 과 << 페스트 >> 가 모두 알제리가 주요 배경이다. 그는 당대의 지식인답게 알제리 문제에 대하여 수많은 질문을 받아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카뮈는 프랑스를 지지하며 알제리의 독립을 적극 반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

이 사실을 알고 나면 : 카뮈의 출세작 << 이방인 >> 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읽을 수 있다. 주인공 뫼르소가 알제리 해변에서 죽인 사람은 아랍 무슬림이다. 살해 이유는 없다. 그저 태양이 눈부셨기 때문이다. 뫼르소가 쏜 총에 죽은 아랍인은 이름도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애써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살인 사건의 가해자에게는 이름을 부여하지만 정작 피해자에게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피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피해자의 서사는 완벽하게 발골 한 채 가해자의 서사만 덧댄 소설인 셈이다. 

​

우리는 이 소설의 주제를 실존적 허무주의라고 배웠지만 어쩌면 뫼릐소가 이유도 없이 충동적으로 아랍인을 죽인 것은 무슬림 혐오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 백인이 이유 없이 흑인을 죽이는 것처럼 말이다. 뫼르소는 아랍인이 자신을 나무 막대기 보듯 바라보았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보는 시선에 가깝다. 그러니까 뫼로소의 범죄 행위는 인종 혐오 범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뫼르소가 피에 누아르라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들은 식민지에서 온갖 특혜를 누리며 이슬람을 억압했으며 식민지 국민을 " 쥐새끼 " 라는 차별 용어로 불렀다.

​

우리가 카뮈의 << 이방인 >> 과 << 페스트 >> 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랍인의 이름이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신의 서재에 << 이방인 >> 과 << 페스트 >> 가 꽂혀 있다면 그 책을 꺼내서 그 소설에 등장하는 아랍인 이름을 정확히 열거한다면 내가 가진 전재산 500원을 당신에게 주겠다. 그들은 이름이 없는 무명으로 어쩌다 등장하거나 아예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한다. 소설 << 페스트 >> 에서 등장인물들이 구하고자 했던 것은 알제리 사람이 아니라 피에 누아르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 제국의 식민 통치로 고통을 받는 알제리 민중 입장에서 보면 뫼뢰소는 식민지의 지배자이자 정복자이며 약탈자이다. 그리고 인종 혐오주의자'다. 그렇기에 카뮈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매우 고약한 경험이자 악몽이다. 한때, 그를 사랑했다. 아무렴.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르. 하지만 이제는 부끄러움만 남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초원 2023-02-12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은 프랑스 파리 방식의 제목이고 <무법자>가 맞다고 한 글을 읽었어요.
곰발님, 잘 지내시나요. 건강하고 만족스러운 주말 보내고 계시길 바래면서 인사 남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3-02-13 18:23   좋아요 1 | URL
그럭저럭 지내지요. ㅎㅎㅎ‘
늘푸른초원 님도 안녕하시기 바랍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2-13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곰발님 이야기를 들으니 느낌표가 떠오르네요!ㅎ


곰곰생각하는발 2023-02-13 18:25   좋아요 1 | URL
전 카뮈가 조금 불편합니다. 이방인도 그렇고 페스트ㅡ도 그렇고...

1905 2023-07-3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고전이 무조건 좋다는 그런 평가는 사라져야 할 것 같아요. 눈이 부셔서 사람을 죽였다는 건 어떤 정당성도 없지요. 어릴 때는 모르고 읽으며 대단한 작품이다라고 퍙가한 저도 우습긴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3-08-16 13:44   좋아요 0 | URL
저도 멋 모르고 읽었을 땐 캬, 눈이 부셔셔 죽였다니 멋저부러.. 뭐, 이런 태도였는데 가만 보니 굉장히 이상한 거예요. 이거 묻지마 살인하고 뭐가 다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