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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콥스키, 기도하는 영혼 - 대본집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지음, 이다혜 옮김 / 알마 / 2023년 12월
평점 :
모든 씨네필이 타르콥스키를 말하던 시대가 있었다. 어떤 씨네필도 타르콥스키를 말하지 않는 시대도 있었다. 지금은 타르콥스키를 기억하지 않는 시대다. 타르콥스키의 예술에 대한 헌신과 희생은 요즘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한 믿음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망각을 선택했다. 하지만 타르콥스키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시간은 물리 법칙 바깥에 있다. 그의 영화가 그런 것처럼, 그의 영화 속 장소들처럼, 거울에 비친 장면들처럼, 그곳에선 시간이 걸음을 멈추고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리하여 타르콥스키의 믿음은 스크린의 강을 건너 회귀한다. 오로지 불가능한 믿음만이 돌아올 잠재력을 지니므로. 실현되지 않은 요구만이 지속될 수 있으므로. 타르콥스키는 영원히 반복되는 시대의 이름이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 이다혜, [타르콥스키, 기도하는 영혼](2023), 소설가 정지돈의 추천사 -
0. 국내 개봉명에선 '타르콥스키'를 택했으나 여기선 지난 35년간 통용돼온 '티르코프스키'로 표기한다.
1. [타르코프스키, 기도하는 영혼](Andrey Tarkovsky, A Cinema Prayer)은 1986년 작고한 안드레이 아르세니예비치 타르코프스키의 작품 세계와 영화 활동을 그의 아들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타르코프스키가 필름에 옮긴 영상 회고록이자 잠언집이다. 이하 각자 타르코프스키 감독, 타르코프스키 주니어라 칭한다.
2. 에필로그 포함 총 9장의 챕터로 구성돼있다. 이 정도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바이오그래피가 적절히 균형을 이뤄 녹여진 편이다.
① 제1장. 밝고 밝은 날(Bright, Bright Day)
② 제2장. 시작(The Debute)
③ 제3장. 안드레이의 수난(Andrey's Passion)
④ 제4장. 귀향(Homecoming)
⑤ 제5장. 시간의 거울을 통해(Through the Mirror of Time)
⑥ 제6장. 그 구역의 미로 속으로(Into the Maze of the Zone)
⑦ 제7장. 노스탤지아의 기원(At the Source of Nostalghia)
⑧ 제8장. 묵시록의 경계에서(At the Verge of Apocalypse)
⑨ 에필로그: 영원회귀(Eternal Return)
3. 타르코프스키 감독 스스로 생전 대표작으로 꼽은 자전적 영화 [거울](1974)이 중요한 만큼 프롤로그 격인 1장 그리고 독립된 5장, 두 챕터에 걸쳐 소개된다. 2장은 졸업 작품 [증기롤러와 바이올린](1960) 그리고 장편 데뷔작 [이반의 어린 시절](1962)이 연이어 다뤄지며, 3장은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4장은 [솔라리스](1972), 6장은 [잠입자](1979), 7장은 [노스텔지아](1983), 8장은 유작 [희생](1986) 순이다.
4. 리뷰 참고. 초기작 [증기롤러와 바이올린], [이반의 어린 시절]은 따로 작성한 포스트가 없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1966)
https://blog.naver.com/new2all/40052345207
솔라리스 (1972)
https://blog.naver.com/new2all/220178314149
거울 (1974)
https://blog.naver.com/new2all/40055743145
잠입자 (1979)
https://blog.naver.com/new2all/40058861588
노스텔지아 (1983)
https://blog.naver.com/new2all/220940495807
희생 (1986)
https://blog.naver.com/new2all/40192794945
5. 타르코프스키 감독 본인 스스로 자서전 [봉인된 시간]을 통해 시인이었던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했던 바, 타르코프스키 주니어도 본작에서 자신의 조부에 대해 상당한 비중을 두면서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상호 작용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본작에 인용된 수많은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시 중에 내게 와 닿은 시 두 수 옮겨둔다. 시 제목은 영화 중에 따로 밝히지 않고 있다.
우주 속에서
우리의 즐거운 마음은
불확실하고
모호한 안식처를 만들고
인간과 별들,
천사는 살아 숨쉰다
둥근 원의 장력 안에서
아직 아이는 생기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발 아래,
얇고 투명한 막이
원형의 궤도를 따라
바깥으로 굽어져 있으니
우리의 피가
고향을 질투하지 않고,
갈라진 틈새가
미래를 열기를
지상에서 지상으로 가기엔
이 땅에는 한계가 있나니
미치광이 어머니가 꿈을 꾼다
이륜 전차를 끄는
네 마리 말의 울음소리
파에톤과 그의 전차
그리고 진홍색 돌 조각
6. 영화에 바탕을 둔 이다혜 평론가의 서적이 출판돼있다. 시 제목들을 알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어야겠다.
7.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자세전 겸 미학 에세이 [봉인된 시간] 내용들과 상당 부분 겹친다. 다만 베니스영화제 중 벌어진 [이반의 어린 시절](1962) 철학 논쟁에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라며 감독 편을 들어준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해 타르코프스키 자신은 별로 탐탁치 않아 했다는 언급이 새롭다. 미학이 아닌 정치적 차원에서의 옹호였기 때문이라 한다. 나 자신도 타르코프스키의 초기 두 작품 [증기롤러와 바이올린], [이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선형적이고 선명한 정치적 메시지 때문에 그의 본격적인 영화 행보에서 살짝 열외로 밀어두는 경향이 있다. 허나 돌이키면 이미 졸업 작품부터 그가 주창한 '시적 서정성의 논리'가 깃들어 있었다.
8. 한마디로 잘 만들어진 다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원본들이 미적으로 워낙에 탁월하니 그 스틸들의 연결이라 할 본작도 감상 내내 시청각적 황홀경을 전한다. 젊어 한때 타르코프스키 감독을 열렬히 앓던 나로선 행복한 100분이었으나 타르코프스키 주니어 입장에선 이제 그만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작품을 할 때가 아닌가도 싶다. 마지막으로 이 얘길 빼면 이 포스트는 매우 무책임한 리뷰가 될 것이다. 적어도 타르코프스키 감독 연출작의 절반은 보고, 이왕이면 그가 남긴 에세이집도 한 권 정도는 읽고 나서 본작을 감상하는 경로를 추천한다. 선행 없이는 자칫 무의미한 100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자체 완결성 측면에선 높이 평가할 수 없는 영화라는 뜻이다. 별점 넷 만점에 별 셋.
원글: https://blog.naver.com/new2all/223576411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