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라이크
조쉬 야노위즈 감독, 스티븐 스트레이트 외 출연 / 노바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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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기계야. 그럼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 환상을 품도록 뇌가 프로그래밍 돼 있기 때문이야. 땅콩 자판기와 당신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뿐이야."  - 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무 1], '1. 내겐 너무 좋은 세상' - 


제목을 번역하면 '유사(類似) 인생' 쯤 될까. [라이프 라이크]처럼 시작과 끝의 낙차가 큰 영화도 참 오랜만에 만나 본다. 인간과 인공지능 장착 로봇을 대비하는 중반까지는 작품 곳곳에 존재론 및 인식론적인 고민들이 녹아 있었다. 화면 세공력이 떨어짐에도 불구, 이 정도면 [블레이드 러너] 가족극 버전 내지는 [A.I.] 성인 버전이라 할 만하지 않나 싶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각상 같은 두 남성 주인공의 육체를 집요하게 탐미하는 카메라와 더불어(본작은 인간 탐구 미래물을 빙자한 BL물이기도 하다.) 입주 도우미 로봇 헨리(스티븐 스트레이트 扮)의 정체가 사실 용도에 맞춰져 사육된 인간이었으며, 그 배후는 로봇 센터장 줄리안(제임스 다시 扮)의 사기극이었다는 반전 결말이 패착이다. 유산 상속으로 소속 계급 및 생활상에 급격한 변화를 맞은 몽상가 부부 제임스(드류 벤 에커 扮)와 소피(애디슨 팀린 扮)의 내밀한 심리 묘사 그리고 미시적인 위기 상황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텍스트 삼아 조건 유무에 따라 논해지던 사랑(love)과 정욕(lust) 간 감정 차이에 관한 고찰들. 이 모두를 껍데기로 밀어내버린 셈이다. 


주로 기계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파고들던 기존 명작들과 달리 인간이 과연 기계처럼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역방향으로 접근한 기획을 일종의 사고 전환이라며 마냥 쳐주기엔 필연적으로 폐색되어 닫힐 수밖애 없는 단조로운 세계관에 연출된 극의 풍미마저 얕다. 구태의연하지만 풍부한 사유를 품고 있는 소재이고 테마인데 미욱한 뒤집기로 그르치니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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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여름날
멀리까지 가서 자두를 한 상자 사왔다
자두 사러 나선 길은 아니었지만
겸해 돌아오는 길에
자두 한 상자를 손에 넣고 두둑해진 날

수줍은 듯 시설도 하얗게 낀 붉은 자두를
오천원 만원 하면서 골라 담지 않고 상자째 사서 왔다
제 주먹만한 자두를 보고 침은 이미 한 컵씩 삼킨 아이들이
당장이라도 먹고 싶어 매달려 찔러보는 걸
집에 가서 먹자고 매운 말로 다그치며 돌아왔는데

다음날 씻어 먹이려 열어 본 자두는
반 이상은 썩고 그나마도 다 물러있었다

살면서 누구든 이런 날이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썩은 과일을 정성스레 모셔오는 날이
죽은 사람을 산사람인양 업고 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썩은 자두의 그 한없는 단내를 맡으며
집은 과일마다 썩은 과일이었는데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타박을 받던 마음 생각이 났다 


- 이현승, [모든 시] 2018년 가을호, '김종삼 생각' -


평과나무 소독이 있어
모기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어느 날이 되었다

며칠 만에 한 번만이라도 어진
말솜씨였던 그인데
오늘은 몇 년째나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는 길을 기어이 가리켜주고야 마는 것이다

아직 이쪽에는 열리지 않은 과수밭
사이인
수무나무 가시 울타리
길줄기를 벗어나
그이가 말한 대로 얼만가를 더 갔다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식물이 풍기어오는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 쪽을 향하여 갔다

안쪽과 주위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무변하였다
안쪽 흙 바닥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깔의 과실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째를 집어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당신 아닌 사람이 잡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 김종삼, [북 치는 소년], '원정'(園丁) - 


낭독회 자리에서 이현승 시인이
김종삼 시인의 '원정'을 읽을 때
그렇게 목이 메었다고 한다.
원정(園丁)은 정원이나 과수원을 관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호(號)이기도 했다.


싱그러운 거목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 김종삼, [북 치는 소년], '풍경' -


몇 그루의 소나무가
얕이한 언덕엔
배가 다니지 않는 바다
구름 바다가 언제나 내다보였다

나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줄여야만 하는 생각들이 다가오는 대낮이 되었다.
어제의 나를 만나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골짜구니 대학 건물은
귀가 먼 늙은 석전은
언제 보아도 말이 없었다

어느 위치엔
누가 그린지 모를
풍경의 배음이 있으므로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 김종삼, [북 치는 소년] '배음'(背音) -


그러고 보면 북 치는 소년이 곧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
김종삼 시인이 참으로 아끼던 시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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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
이수성 감독, 고진수 외 출연 / 미디어포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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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도 군 전역한지 한참, 예비군에서 민방위 넘어가는 서른 줄 배우들에게 교복 입혀 놓고 뭐하자는 짓인지? [말죽거리 잔혹사]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40대 중반 감독 본인의 쌈마이 향수를 변해도 한참 변한 세태에 우겨 넣은 꼴이다. 요즘 IPTV 플랫폼 기반의 미개봉작들 훑다 보면 그 외피만 학원폭력물이되, 사춘기 남학생들 즐겨 보는 대물판타지 만화책 대타로서 불온한 욕구 대리만족 용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 '도깨비'라는 부제를 달고 시즌 2까지 나왔다. 시즌 2에 비하면 시즌 1 [일진]은 그나마 현실성이 있었달까. 일진들의 난립 및 서열 정리라는 시리즈 기존 설정에 히어로 장르 교접 시도 완전 실패다. '죽음의 세대'라 불리운다는 일진들의 춘추전국 콘셉트만 그럴싸하게 잡았을 뿐 모든 영화적 요소가 수준 미달이다. 특히 '도깨비'라는 소문 속 절대고수의 정체에 설득력 제로. [일진]보다도 못한 XY 캐스팅은 논외로 치고 이번 편엔 XX 캐스팅이 유독 눈에 밟혔다. IPTV 전용 성애물에나 나올 법한 진한 화장의 그녀들이 교복 입고 담배 빨며 교태를 부리거나 혀짧은 욕설을 해대는데 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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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가이 리치 감독, 메나 마수드 외 출연 / 월트디즈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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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디즈니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관람한 세대로서, 나는 거의 비슷하지만 비교 열위인 실사판을 최초의 [알라딘]으로 극장에서 만나는 어린 관객이 조금 불운하다고 생각한다.'는 어느 식자의 평에 절반만 동의한다. 즉슨, 아무리 지니 역 윌 스미스가 희대의 배우 겸 랩퍼로서 열 일 했다한들 환상적인 뮤지컬 로망 · 모험 활극으로서 애니메이션 [알라딘](1993)보다는 못하다는 데에 공감. 그러나 농담이든 역설(力說)이든 간에 그 비교 대상 자체가 무슨 아이들 행불행을 논할 정도로 수작은 아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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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
케네스 브래너 감독, 조니 뎁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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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라는 저울이 기울어질 때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 불균형을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피해자들이 고통을 벗어나 안식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 참된 정의일 것이다.' 

- 극 중 에르큘 포와로의 독백 -


개인적으로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 최고작은 [회상 속의 살인]과 [끝없는 밤]이라 생각하지만 대외적으로 그녀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함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에 핵심적인 모티프를 제공했다며 누군가 떼써도 별반 할 말이 없는 소설이다. 1985년 1학기 중간고사 끝날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붉은 문고판을 사다가 밤새 읽었고 그 이듬해인가 KBS1 명화극장에서 방영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74년작 영화를 봤으니 근 30년만에 케이블로 새로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만난 셈이다. 


서스펜스의 밀도랄까, 추리물로서 쾌감은 원작에 비해 떨어진다. 당연한 것이, 한때 정통 셰익스피어극의 계승자로서 명성을 얻은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20세기 중엽 출간된 이 한 편의 추리 명작을 슈퍼히어로가 주인공인 고전 비극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이성과 법의 잣대로만 심판할 수 없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잔인한 진실 앞에 햄릿처럼 고뇌하는 회색 뇌세포의 영웅 에르큘 포와로 탐정. 그리고 미스터리 참극의 한가운데 놓여진 또 다른 구심점 허바드 부인. 멜로드라마틱한 패트릭 도일의 음악이 깔리면서 그 두 인물을 연기한 케네스 브래너와 미셸 파이퍼의 맹기(猛氣)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뚫고 나오기 직전의 클라이맥스에선 감상 내내 불만스럽던 나조차도 기묘한 감동에 사로잡혀 눈물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도입부의 성물(聖物) 도난사건은 그 정확한 원전이 떠오르질 않지만, 사건을 마무리하고 런던으로 향하려는 포와로를 다시 나일강으로 호출하는 에필로그에서 [나일 살인사건]을 후속편으로 예고하며 본작은 두 시간에 걸친 대장정을 매조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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