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다. 장애인의 성공 서사는 곧바로 관람객의 자기 반성으로 이어진다. 장애를 가진 저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우리는...... 관찰의 대상이 되어버린 장애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과연 장애는 극복의 대상인가 ? 어쩌면 비장애인은 자기 계발을 위한 소재로 장애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 그때부터 나는 장애를 다룬 영화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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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형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 소영의 노력 >> 은 뇌병변(?) 장애를 가진 소영의 무용담(舞踊談)이다. 소영은 무용극의 무용수다. 카메라는 소영이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한다. 영화 전반부는 소영에 대한 인물 정보와 무용극에 대한 소개가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무대 장면도 거의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감독의 단단한 다짐처럼 보였다. 장애인의 극복 서사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다짐 말이다. 영화 전반부의 카메라가 장애를 가진 소영을 관찰하는 시점이라면, 무대가 끝나고 난 후의 일상을 다룬 영화 후반부에서 카메라는 소영의 손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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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자의 시선으로 관찰당하던 그녀는 이제 자기 자신을 자기 손으로 직접 보여준다. 그 어떤 시선의 간섭도 없다. 이때부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을 고백하는 말보다 감동적인 것은 얼굴이다. 영화에서 멋진 대사보다 오래 남는 것은 정직한 얼굴이다. 거리 조절에 실패해 촛점이 흐려진, 해상도 낮은 몇몇 얼굴에서는 칼 테어도르 드레이어의 잔다르크를 떠올렸다. 소영의 어머니는 방구석에서 아무거나 찍는다고 영화가 되냐며 타박을 늘어놓았지만 관객은 어머니의 핀잔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소영은 훌륭한 무용가이자 연출가이며 좋은 시민이다. 이 영화는 내가 올해 본 가장 아름다운 독립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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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배우 한 명이 영화 전체를 씹어먹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그녀는 전동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은 채 홀로 서서 걷는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도 한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다리의 힘을 길러야 하고, 다리의 힘을 얻으려서 흔들리며 걸어야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춤이야말로 흔들리면서 걷는 예술이 아닐까. 도종환의 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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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시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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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지 않고 걷는 사람 어디 있을까.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다 흔들리면서 걷고 있다. 당신도, 그리고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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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
왕가위 감독, 송혜교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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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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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단추 / 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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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

ㅡ 손택수 시집 < 나무의 수사학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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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경험하셨으리라. 애인과의 첫날밤, 떨리는 손끝으로 애인의 실크 블라우스에 달린 단추를 풀 때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것. 들뜬 마음에 조금이라도 빨리 풀어헤치고 싶으나 그럴수록 쉽게 풀어지지 않던 그 하얀 단추. 아직도 생각난다. 명주실로 짠 실크의 감촉이 아이스크림보다 부드러웠다는 사실도. 손택수 시인의 < 꽃단추 > 를 읽을 때마다 몇몇 장면들이 생각나곤 한다. 생각해 보면 : 참을성이 부족해서 /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민망한 구석이 있다. 옷이 가지고 있는 질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지퍼는 열고 닫는 개패(開閉) 기능만 있을 뿐 채움과 비움(풀어헤치는)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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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목수는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의 결대로 가구를 만들듯이 좋은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쇠 지퍼가 있을 자리에 단추가 있는 옷을 만든다. 날마다 단추를 끄르고(풀고) 맺는(채우고) 행위는 마치 인생과 같아서 인연을 끊고 맺고를 반복한다. 그런 점에서 단추는 조금 불편하고 조금 더 느리지만, 그래서 인간적이다. < 生 > 이 채워 놓는 단추의 기능이라면, < 死 > 는 풀어놓는 단추의 기능이다. 시인은 무덤가에 핀 노란 민들레를 단추에 비유한다. 시인의 상상력이 빛을 내는 순간이다. 지상과 지하, 묘와 관, 생과 사의 틈 사이로 찬바람 분다. 찬바람 든다고 옷을 여미듯이 시인은 무덤가에 핀 민들레 노란 꽃단추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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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단추 하나가 영화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무협 영화 << 일대종사, 2013 >> 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 단추 " 장면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확신한 것은 왕가위 영화라는 문화 상품은 철저하게 유물론적 세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철저한 유물론자다 . 아내가 있는 엽문(양조위 분)과 가문의 무예를 전승하기 위하여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궁이(장쯔이 분)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 간직하고 있다. 다만, 그 마음을 말하지 않을 뿐이다. 세월이 흘러흘러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남자는 가족과 재산을 잃는다. 여자는 가족과 건강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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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남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맹세이고, 여자에게 남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다짐이다. 남자의 맹세와 여자의 다짐은 어쩔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후회에 닿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단추 하나를 내민다. 오래 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장만했던 새 외투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다. " 그곳에 가기 위하여(당신을 만나기 위해) 외투 하나를 장만했었소. 하지만 전쟁통에 가지 못했소. 살림이 궁하여 외투는 팔았소. 남은 것은 외투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 하나요. 당신에게 주고 싶소. " 여기서 우리는 단추라는 물질(물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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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마른 선비에게 내민 조롱박(에 담긴 물) 위에 뜬 버들잎이 우물가 처녀의 고운 마음이 반영된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 남자가 내민 단추는 자본주의적 시선으로 보자면 교환 가치 없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비가시적인 마음의 가시적 현현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표다. 이처럼 왕가위 영화를 관통하는 멜랑꼴리한 정서는 사랑한다는 고백(말)보다는 사물을 통해 전달된다. 관객은 단추를 통해서 모노노 아와레(物ものの哀あわれ : 보고 듣고 만지는 사물에 의해 촉발되는 정서와 애수, 일상과 유리된 사물 및 사상과 접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적막하고 쓸쓸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정을 말한다 )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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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때 만났더라면 눈에 익었을 그 남자의 외투에 달린 단추. 여자는 처음 보는 단추를 지긋이 바라본다. 여자와 남자가 연을 맺지 못했듯이 옷의 왼편과 오른편을 맺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단추를 보면서 여자는 깊은 슬픔에 잠긴다. 남자가 뒤늦게 연을 맺자고 준 단추를 여자는 돌려준다. 마음만 간직할 뿐이다. 왕가위의 고백은 늘 이렇다. 일본의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끼는 외국 문학 작품 중에서 i love you 라는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까를 두고 고민하는 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의역하라고 했다. " 달이 참 밝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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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달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미야자와 리에 외 출연 / 올라잇픽쳐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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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여자







가끔 배우 한 명이 관객 멱살을 하드캐리해서 끌고 가는 영화가 있다. 배우 전도연이 이 진상 짓을 잘한다. 감독 필요 없어요, 연출 필요 없어요, 조연 필요 없어요. 내가 멱살 잡고 끌고 갈게요. 난, 소중하니까. 히힝. 이런 경우는 답 없다. 감독은 괄약근 풀고 배우가 하는 짓을 너그럽게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다 된 밥에 숟가락 얹는. << 종이달 >> 의 미야자와 리에도 그런 경우다.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혼신의 힘을 발휘한 필생의 연기라고나 할까. " 간바레, 미야자와 리에 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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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주인공 리카(미야자와 리에 분)는 10년 차 전업주부로 생활하다가 은행에서 경단녀 우대라는 구인 광고를 보고 입사한 계약직 직원이다. 그녀는 주로 노년층 고객 편의를 위해 가정 방문하여 은행 업무를 보는 일을 담당이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자신이 맡은 업무에 충실할 뿐이다. 직업에 대한 성취욕은 없다. 그녀는 20년이 넘는 업무 경력을 가지고 있는 직장 선배(고바야시 사토미 분)의 별 볼 일 없는 직장 생활을 보면 자신의 미래를 본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능력이 좋아도 여자에게는 승진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나이가 들면 한직으로 밀려나 퇴사 압박을 받는다는 사실. 이때 리카 앞에 나타난 것은 잘생긴 20대 대학생 청년이다. 모든 욕망을 거세한 채 살았던 그녀 앞에 나타는 청년과 보낸 뜨밤은 상상하지도 못한 결말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무한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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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의 티라면 무미건조한 삶에 딱성냥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불싸지르는 청년 역을 담당한 배우가 매력이 없기는 하나( : 내가 보기에는 매력이 1도 없다) 그 모든 것은 미야자와 리에가 커버한다. 그녀는 애인과의 호화스러운 데이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은행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불행은 시작한다. 최고급 호텔에서 3박 4일 휴가를 보내는가 하면, 애인에게 명품 시계 필립파텍을 선물하기도 한다. 함께 살 집도 장만한다. 이 모든 돈은 고객의 돈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 젊은 청년과 바람난 유부녀가 벌인 은행 공금 횡령 사건 "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간단한 한 줄 요약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오묘한 지점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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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증식한다. 자신의 욕망이 불온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통을 끊고 싶지만 욕망이란 아메바 몸통과 같아서 끊겨진다기보다는 새로운 개체로 증식한다. 남편에게서는 채울 수 없는 육체적 욕망은 젊은 애인과의 불륜으로 채우는 것에 만족하다가 이내 금전적 욕망으로 채우게 된다. 하지만 훔친 돈으로 재현한 욕망들은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미야자와 리에는 리카의 열성적이며 극성적인 불온을 연기하지만 우아하며 단호하다. 막나가는 여자 캐릭터이지만 우아하다. 다시 말해서 리카라는 캐릭터는 우아하지만 막나간다. 관객은 이 지점에서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이 재수없는 여자를 응원하게 된다. 그녀각 은행 통유리를 깨고 도망칠 때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외쳤다. " 리카, 뛰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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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치, 치치치치치명적인 매력이다. 뜨거울 때 공허한 표정으로 열기를 식힐 줄 아는 배우와 불성실하고 불쾌할 수 있는 캐릭터를 관객이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연출한 감독의 힘이다. 욕망과 생활이 충돌할 때 발생하게 되는 좌절을 감독은 탁월한 연출력으로 재현하고 있다. 무기력한 진짜 생활을 가짜 욕망이 집어삼킨다고 해서 무기력한 삶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욕망이란 아메바의 몸뚱이와 같아서 버려진 잘린 몸뚱이에서 머리가 자라고 꼬리가 자라서 되돌아온다. 진짜는 가짜를 이길 수 있지만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다. 욕망은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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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 " 종이 달 " 은 가족이나 연인들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을 때 가짜 달이 그려진 배경 앞에서 찍었다 하여 생겨난 표현으로 행복했던 한 때를 의미한다고 한다.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종이 화폐로 대표되는 가짜 욕망과 사진관에 걸린 종이 달로 대표되는 진짜 행복. 가짜 욕망으로는 진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 진짜 달과 종이 달의 차이는 빛의 유무일 것이다. 빛이 없는 허영(가짜)은 음영(그림자)조차 만들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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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이처럼 사소한 것들 : 풀슬립 700장 넘버링 한정판 - 엽서(5종)
팀 밀란츠 감독, 킬리언 머피 외 출연 / 노바미디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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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mall, Good Thing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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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아일랜드, 어느 작은 마을에서 석탄 보급소를 운영하는 빌 펄롱(킬리언 머피 분)은 아내와 다섯 딸을 둔 중년 남성이다. 80년대는 유럽에서 가장 빈국이었던 아일랜드에 설상가상 경제 위기가 닥치는 바람에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아일랜드 국민들은 빵이 없어 기아에 허덕이고 석탄과 땔감이 없는 이들은 추위에 몸을 떨었다. 빌 펄롱은 누구보다도 성실했기에 그나마 굶주림과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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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색이 깊고 말이 없는 조용한 남자라는 점에서 스토너1)를 닮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난한 이웃에게 연민을 보낼 줄 아는 따스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세면대에서 석탄 배달 일로 더러워진 검은 손을 씻으면서도 가정의 평온과 안온이 신의 은총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선의와 신의를 시험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수녀원에 강제로 감금된 소녀의 간절한 " 외침 " 을 듣고 그 호소에 응답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소녀의 외침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도움의 손길을 뻗어야 할 것인가 ? 여기에는 수녀원과 지역 마을을 둘러싼 복잡한 지정학적 관계가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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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수녀원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아일랜드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는데 이 수녀원은 매춘 여성, 미혼모, 고아 소녀를 강제로 입감 시켜서 노동력 착취와 인권 유린을 했던 곳이다. 강제 노역은 물론이거니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미혼모의 아이들은 입양을 원하는 가정에 팔렸으며, 성폭행과 살인이 수시로 발생하곤 했다. 영화에서는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지만 몇몇 장면으로 그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수녀원에서 불법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지역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수녀원과 지역 주민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사람들은 침묵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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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 배달을 하는 빌 펄롱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미혼모 아들로 태어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던 그는 집주인의 보살핌과 일꾼 네드로부터 조건 없는 타자의 환대를 받으며 성장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들의 친절과 관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평온과 안온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1) 되는 자신의 결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지만 양심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바로 그 결심을 시작하는 데에서 끝이 난다. 다소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품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펄롱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고뇌하는 얼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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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화 속 캐릭터를 연기한다기보다는 펄롱이라는 인물에 대한 존중을 닮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 연기 " 를 하는 것이 아니라 " 실천 " 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어떤 숭고함을 닮았다. 펄롱이 선을 대표한다면 악을 대표하는 수녀원장 역을 연기한 에밀리 왓슨의 절제된 현현도 탁월하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악에도 품격이 있다면 에밀리 왓슨이 연기한 수녀원장에게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골적이지 않지만 교묘하고 적나라하다. 이 모든 것은 배우의 힘이다. 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 스토너 >> 와 레이몬드 카버 단편소설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 을 좋아한다면 놓칠 수 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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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 스토너 > 주인공 이름

2) 레이몬드 카버 단편 소설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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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앤씨
엘렘 클리모프 감독, 알렉세이 크라브첸코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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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들어기가에 앞서

이 글은 허세 가득한 동네 형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는 컨셉으로 쓴 글이다. 약간의 독자 모독과 약간의 독설과 약간의 쿨병이 섞인 지랄병맛체 영화 리뷰'다. 비록 쿨병 작렬하는 지랄병맛체로 쓴 고약한 리뷰이나 영화만큼은 최고 수준의 전쟁 영화라는 점은 명백하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에서 밥을 먹는 심정으로 눈치 보면서 읽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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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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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이 연출한 << 지옥의 묵시록 >> 봤나1) ? 영화 좀 본다는 새끼들이 항상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영화지. 그런데 난 말이야. 이 영화가 상당히 역겹단 말이지. 몇 번을 봤는 데도 정말 볼 때마다 짜증이 솟구쳐.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잖아. 내용이 굉장히 철학적이지. 철학적이라는 게 뭐냐 ? 에휴. 내가 너희들 수준을 너무 높게 봤구나. 닥쳐 이 새끼들아. 궁시렁거리지 말고. 형아가 설명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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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의 묵시록 >> 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본성이란 무엇인가, 악이란 무엇인가를 찾지. 영화 보다 보면 굉장히 사유적이잖아. 그런데 이 형아는 이 꼬라지가 굉장히 역겹다는 거야. 미국 새끼들, 솔까말 얘기해 보자. 전쟁 범죄자들이잖아.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고서는 고뇌하는 지식인 흉내를 낸단 말이야. 그 누구냐. 커트 대령. 이 새끼. 말론 브란도가 뚱뙈지로 나오잖아.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어. 영화에서 보면 말론 브란드는 절대 악이자 순수 악으로 등장하잖아. 그런데 말론 브란드는 너무 뚱뚱해서 그냥 초고도 비만으로 인한 성인병 환자처럼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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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도 엉망이야. 호러, 호러, 호러 _ 이 지랄하는데, 아니 이게 대사야 ? 잤니, 잤어, 잤냐구 !! 영화는 엉터리인데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 원작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음, 저 인물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군. 음, 저 인간은 전쟁의 야만적 폭력성을 의미해. 앗, 저 고장난 시계는 이성적 세계가 멈추고 야만의 시간이 돌아왔다는 은유가 아닐까 ? 하. 이런 개지랄. 에라이 ~ 얼핏 보기에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반성을 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그냥 베트남 전쟁은 그럴싸한 배경일 뿐, 사실은 허세를 부리고 싶은 거야.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공포는 진짜 공포가 아니라 멋진 공포야. 지적 공포, 쿨한 공포. 재수없는 공갈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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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진짜 전쟁 영화 한 편 소개할게. 영화 << 컴 앤 씨 >> 추천한다. 꼭 봐라. 이 영화의 특징이 뭔 줄 아냐 ? 이 영화는 << 지옥의 묵시록 >> 과는 달리 깊은 사유를 하면서 이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왜냐하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거든. 이 영화 보면서 이 캐릭터는 무엇은 상징하고 저 장면은 무엇을 은유한다는 식의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어. 진짜 공포는 생각을 마비시키거든. 정말 이 영화를 보면 숨이 막힐 정도로 전쟁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진행이 돼. 생각은 사치야. 바로 내 눈 앞에서 죽음과 살육이 진행되는데 그곳에서 무슨 사유를 한다는 거야. 이 영화는 마치 소년이 셀카봉 들고 학살을 라이브로 송출하는 유튜브 채널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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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화(??)여서 생각 없이 끝까지 압도적 공포 속에서 영화를 지켜보다가 영화가 끝나면 그때서야 비로소 생각을 하게 돼. 마치 방학이 끝나는 날 하루 전에 방학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학생처럼 말이야. 이 영화 속 공포는 멋지지 않아. 사람을 질리게 만들거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 전쟁을 볼거리로 만든 자극적인 작품이라거나 전형적인 러시아 프로파간다 영화라고 욕을 하지만...... 하, 시부랄놈들. 알고 좀 시부러. 이 영화가 단순히 러시아를 옹호하는 프로파간다 영화였다면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8년 내내 소련 당국의 검열과 싸우지는 않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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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독일군에 대해서 자비 없이 잔혹하게 묘사했지만 그렇다고 소련군을 영웅으로 묘사하지도 않아. 오히려 잔인할 정도로 냉소적이지. 나중에는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분간이 안 가. 이 영화를 끝으로 감독은 더 이상 영화를 찍지 못하게 돼. 이래도 국가 선동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욕을 할래 ? 내가 본 전쟁 영화 가운데 << 컴 앤 씨 >> 는 라리사 세피트코 감독이 연출한 << 고양, 1977 >> 과 함께 최고의 걸작 전쟁 영화라고 자부할 수 있어. 재미있는 사실은 두 감독이 부부라는 사실이야. 이 영화에 비하면 지옥의 묵시록, 플레툰, 쉰들러 리스트 같은 영화는 개 같은 영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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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국주의 할리우드 영화 속 공포는 예뻐. 존나 예뻐. 뭔가 근사해. 영화 보고 나면 관객인 내가 꽤 근사하고 선량한 도덕주의자가 된 것 같잖아. 뭐, 쉰들러 리스트가 너의 인생 영화라고 ? 그러니 개인의 취향은 존중해 달라고 ?? 조까라마이싱이닷. 됐고. 이 영화 한번 봐봐봐봐, 꼭 !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거야.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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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면서 내린 결론은 " 무지의 폭력 " 이었습니다. 전쟁 범죄자 아이히만은 도덕성이 결여되었다기보다는 무지無知,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무지막지(無知莫知)한 괴물이 되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내린 최종 결론은 " 가장 질이 나쁜 악은 무지에서 태어난다 " 였습니다. 제가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이 연출한 << 지옥의 묵시록 >> 을 비판하는 이유는 악을 탐구한다는 미명 아래 악을 영웅시한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는 커츠 대령이라는 절대 악을 찾아, 그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맡은 윌러드 대위의 모험담을 담은 영화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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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영웅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오디세이 식의 모험극에 불과합니다. 전쟁의 화신인 커츠 대령은 어둠 속에서 사유의 감옥에 갇힙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군인보다는 철학자에 가깝습니다. 그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는 점에서 아이히만과는 정반대인 캐릭터입니다. 감독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악의 본성을 탐구하겠다고 말하지만 그가 싸질러놓은 것은 악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미치광이 커츠 대령은 좆같지만 왠지 멋있어 ! _ 영화는 줄곧 그런 태도를 유지합니다. 전범 국가의 자기 반성은커녕 자아 성찰에 가깝습니다. 제국주의자 특유의 뻔뻔한 태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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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은 사유의 늪에 빠진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이 의미심장한 어조로 내뱉는 대사에서 영화의 주제를 찾으려 애를 쓰지만, 말론 브란도의 대사는 아무 의미 없는 횡설수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걸을 때마다 숨 쉬기 어려울 정도로 뚱뚱한 몸으로 촬영장에 나타난 그는 작품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습니다. 대사 한 줄 외우지도 못했고, 결국 감독은 아무 의미 없이 내뱉는 그의 즉흥적 혼잣말을 화면에 담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이성을 상실한 광기와 초현실적인 악몽을 재현하려는 목표를 이루었다기보다는 중간에 자포자기한 영화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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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실패한 영화입니다. 반면에 엘렘 클리모프 감독이 연출한 전쟁 영화 << 컴 앤 씨, 1985 >> 는 관객에게 생각할 틈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영화 << 지옥의 묵시록 >> 이 월러드 대위의 우아한 오디세이 여행이라면 << 컴 앤 씨 >> 에서 소년이 그저 정신없이 떠도는 영화입니다. 목적지도 없고, 서사도 없고, 플롯도 없습니다. 또한 영웅도 없고 희생도 없으며 교훈도 없습니다. 적과 싸우면서 민중을 고무하는 감동적인 연설도 없습니다. 위안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오직 압도적인 죽음만 병열로 나열될 뿐입니다. 끝으로 희망조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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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자칫 선동 영화(프로파간다)로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오히려 << 지옥의 묵시록 >> 이야말로 비열하고 졸렬한 선동 영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전쟁 영화들은 겉으로는 반전을 내세우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웅주의에 대한 찬양입니다. 전쟁이라는 지옥도에 과도한 의미와 서사를 부여하고 그 서사에 구원과 희생을 담는 행위야말로 선동적이입다. << 지옥의 묵시록 >> 를 보고 나면 남는 것은 반전 메시지가 아니라 황홀한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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