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드라이브 마이 카 : 알라딘 단독 리패키지 한정판 (2disc) - 풀슬립아웃박스/엘리트 투명 더블 케이스+스페셜 북(36p)+포토카드 4종 세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니시지마 히데토시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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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의 차를 운전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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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동의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ㅡ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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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핵심은 " 나 " 였다( : 과거형임을 명심하라).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_라고 선언한 이후, 서구 철학은 < 나 > 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코기토(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자기 중심 철학의 타노스였다. 하지만 < 나 > 라는 주체에 대해 별것 아니라는 증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니체는 "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들어져 첨가된 것, 그 뒤에 숨겨진 것이며, 그 본질은 허구로 정신도, 이성도, 사고도, 의식도, 영혼도, 의지도, 진리도 없다. 이들은 모두 쓸모없는 허구다 "라고 말했다. 니체는 망치를 들고 서양 정통 철학에서 그토록 예찬했던 주체를 과격하게 때려부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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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 는 데카르트의 코키토에서 배제된 타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목 " 드라이브 마이 카 " 에서 생략된 것은 who 다. 누가 나의 차를 운전하는가 ? 이 영화에서 빨간 자동차는 가후쿠의 도플갱어다. " 빨간 차 = 가후쿠 " 다. 그렇다면 낯선 이( 미사키)에게 내 차의 운전대를 맡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 그것은 타자성의 윤리1)를 강조하는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타자 - 되기'다. ‘나’라는 중심을 비워내고 온전히 타자가 되어봄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을 갖는 것이다.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역지사지의 태도가 타자 되기'다. 가수 김건모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 "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네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시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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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쿠는 분신( 그 잡채)인 차의 운전대를 타인에게 맡김으로써 타자 - 되기를 경험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는 죽은 아내를 용서하기로 마음 먹는다. 남의 말을 경청(듣기)하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아니 첫 번째 관문이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 그 잡채다. 그래서 가후쿠는 차 안에서 반복적으로 죽은 아내가 녹음한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타자의 말을 듣고, 듣고, 또 듣는다. " 듣기 " 는 연극 워크숍에서도 지겹도록 반복된다. 연극에 참여한 배우들은 대본 읽기를 반복한다. 그들은 서로 언어(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심지어 수화까지)가 다르지만 타인의 목소리에 몰입하다 보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감정적 교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언어 없이도 소통은 가능하다. 대화에서 표정은 최초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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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밝혔듯이 언어의 장벽은 작고 사소한 차이일 뿐이다. 이 영화를 한층 신비롭고 다층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요소는 가후쿠의 아내 오토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오토는 시나리오 작가로 섹스를 통해서만 창작의 영감을 얻는다. 그녀가 만들어 내는 " 이야기 " 는 남자와의 섹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녀는 이야기를 임신하고 이야기를 출산한다( : 오래 전 아이를 잃은 이후, 부부 사이에 아이는 없다). 이 설정은 그녀가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생산(출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임신한 이야기의 절반은 남성 타자의 몫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오토의 이야기는 그녀가 생산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남성이 만들어 낸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레비나스의 타자성 개념이 여성성을 출발점으로 해서 추구되었다는 점에 매우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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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쿠의 타자 - 되기 체험은 두 여자인 오토와 미사키를 통해 경험되어진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오토가 두 남성( : 남편과 다른 남자)을 통해 만들어 낸 이야기는 무엇일까 ?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은 " 전생에 칠성장어였던 소녀 " 이야기다. 다음과 같다. 전생에 자신이 칠성장어였다고 믿는 소녀는 같은 반 남학생을 짝사랑 한다. 소녀는 몰래 소년이 사는 집에 침입하여 자신이 사용하던 탐폰이나 팬티를 벗어 옷장 속에 숨겨 놓기도 하고 소년의 침대 위에서 자위를 하기도 한다(하루키스럽지요잉?). 이때 소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년일까, 소년의 아버지일까, 아니면 소년의 어머니일까 ? ㅡ 여기까지는 오토가 남편과 섹스를 통해 임신한 이야기의 전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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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쿠는 이야기 속 소녀는 아내이고 소년은 자신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가후쿠는 자신의 집에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훔쳐보는 장면과 소년의 집에서 소녀의 자위를 훔쳐보는 소년의 이야기 구조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의 외도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보았지만 이 사실을 모른 척한다.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생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가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내의 외도를 외면한 것이다. 다음은 그녀가 다른 남성과 섹스를 통해 잉태한 이야기다( : 불륜남은 차 안에서 남편 가후쿠에게 자신이 그녀와의 잠자리를 통해서 듣게 된 이야기 후반부를 들려준다). 소녀의 자위 행위를 훔쳐본 자는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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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자위를 훔쳐보고 있던 사람은 소년이나 소년의 가족이 아니라 도둑이었다. 도둑이 그녀를 강간하려하자 소녀는 연필로 도둑의 오른쪽 눈을 찔러 죽인다. 시체를 방에 두고 황급히 소년의 집에서 빠져나온 소녀. 다음날, 소녀는 살인 고백을 하려 하지만 소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소녀를 대한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 만약에 소년이 정말로 모르고 있다면 살인은 소녀의 환상이었을까 ? 전반부가 가후쿠와 오토가 합작한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불륜남과 오토가 합작한 이야기'다. 남편인 가후쿠는 전반부 이야기에서 소녀가 사랑한 소년이 자신이라고 믿었지만 후반부 이야기에서 소녀가 사랑한 소년은 자신이 아니라 불륜남이라는 사실을 간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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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소녀를 강간하려고 했던 도둑이 가후쿠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가후쿠는 의사로부터 왼쪽 눈에 녹내장이 진행 중이어서 차후에 실명이 될 수 있다는 소리를 듣는데 오토가 만든 후반부 이야기에서 도둑은 가후쿠와 마찬가지로 왼쪽 눈을 찔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토의 이야기에서 전반부와 후반부가 상이하게 다른 이유는 그녀가 접촉하는 타자의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가후쿠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아내도 자신 못지 않게 남편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편의 외면은 아내의 외도와 같은 강도의 고통이라는 사실. 남편은 비로소 죽은 아내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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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라는 감정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명이라면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입장 바꿔 타자가 되어 보기. 타자성의 윤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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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체성의 반대 개념이 타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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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S.E (2disc)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나카타니 미키 외 출연 / 미디어포유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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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로 보이는 50대 여자가 공원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무차별적 폭행에 따른 피살로 보인다. 그녀 이름은 마츠코. 영화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의 주인공이다. 인생을 얼마나 험하게 살았길래 마츠코는 사람들에게 혐오스런 여자로 낙인이 찍혔을까 ? 마츠코 고모를 한번도 본 적 없는 조카 쇼는 그녀가 남기고 간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녀가 살았던 발자취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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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중학교 교사로 첫 번째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제자가 저지른 절도 사건을 감싸다가 오히려 누명을 쓰고 교직에서 물러난 후 홧김에 가출을 한다. 이 잘못된 선택이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후폭풍으로 돌아올 줄 그 누가 알았으랴. 다자이 오사무를 동경했던 첫 번째 남자는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긴 채 마츠코가 보는 앞에서 기차에 투신하여 자살을 하고, 두 번째 남자는 유부남으로 불륜 관계를 유지하다 남자에게 버림받는다. 세 번째 남자는 사창가의 핌프다. 마츠코는 그와 돈 문제로 다투다가 우발적으로 칼로 찔러 죽인다. 그들과의 관계가 나쁜 쪽으로 더 나쁘게 끝날 때마다 마츠코는 습관처럼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건다. "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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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자는 마츠코가 교사로 있었던 학교 제자(절도 사건의 주범)다. 첫 번째 단추를 잘못 채웠으니 마지막 단추를 제대로 채울 리 없다. 그것은 순리에 어긋나는 일. 나쁜 남자(불량 학생)는 더 나쁜 남자(야쿠자)가 되어 그녀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녀는 남자를 만날 때마다 온몸을 바쳐 헌신했지만 처절하게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영화 속 남자들은 철저하게 여자를 착취한다는 점에서 신파를 정조준한 여성 잔혹사-서사의 전형을 따른다. 이 영화는 루비 구두와 에메랄드 시티 그리고 노란 벽돌길과 마법사 오즈가 등장하지 않는 < 오즈의 마법사 > 다. 마츠코는 성인이 된 도로시다. 그녀가 집을 떠나 겪게 되는 " 사랑 찾아 삼만리 이야기 " 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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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 시작해서 불륜녀, 매춘부, 살인자로 폭주하는 마츠코의 약사는 얼핏 보면 혐오스러운 일생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츠코는 상냥하고, 명랑하며, 밝은 마음을 가진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녀의 잘못이라고는 선택의 연속된 실패뿐이다. 마츠코는 사랑에 실패할수록 더욱더 사랑에 집착하는데 그럴수록 더더욱 최악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인생이 와르르 무너지면 상처는 반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법. 마츠코의 실패는 타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라 나(마츠코)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츠코를 누구보다 혐오했던 것은 마츠코다. 마츠코는 자기혐오에 빠진 인물이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자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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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사랑을 쟁취하고자 치열하게 분투하는, 실패를 거듭하는 루저의 서사가 눈물 나기 때문이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관계가 비로소 끝이 보일 때 희망을 얻듯이, 터널은 끝에 가서야 환해지듯이, 마츠코는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고 절망할 때마다 실낱같이 환한 희망을 갖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12월에 내리는 폭설처럼 펑펑 울면서 소리쳤다. 두 주먹 불끈 쥐고, 괄약근에 힘을 주며 외쳤다. " 간바레 !!! 마츠코 짱!!!!!!!!!!! " 눈물이...... 앞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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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다
바바라 로든 감독, 마이클 히긴스 출연 / 키노필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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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 컵이 있다. 컵에는 우유가 담겨 있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가까이서 촬영하는냐, 멀리서 촬영하는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 장면을 멀리서 찍으면 흔해 빠진 풍경이다. 어떤 이는 탁자 위에 컵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극장 스크린이 꽉 차도록 탁자 위에 놓인 컵을 클로즈업하면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클로즈업은 관객을 집중시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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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술을 탁월하게 사용하는 감독이 바로 히치콕이다. 영화 << 의혹 >> 에서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몰래 죽이려고 한다는 의심에 사로잡힌다. 양파남, 까도 까도 의심스러운 남자. 남자는 몸이 아파 침실에 누운 아내를 위해 따듯한 우유 한 잔을 침대 옆에 놓고 사라진다. 걷는 것조차 어딘지 냄새가 난다. 감독은 우유가 담긴 유리컵을 극장 스크린 전체를 덮도록 클로즈업한다. 관객은 생각한다. " 이 새끼, 독을 탔구나." 이처럼 클로즈업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카메라가 사람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연기력이 형편없는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면 득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크린 속에서 확장된 얼굴은 오로지 경지에 다다른 배우에게만 허용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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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 종이달 >> 에서 미야자와 리에는 대학생과 바람이 나서 은행 돈 10억을 횡령한 유부녀를 연기한다. 팜므파탈, 조선의 저잣거리 입말로 말하자면 어마어마한 쌍년 ! 관객이 돈을 횡령하고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는 저팬니즈 팜므파탈에게 감정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권선징악이라고 하지 않던가. 악인은 반드시 응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관객은 나도 모르게 젊은 남자와 섹스에 미쳐서 은행 돈을 횡령한 유부녀의 도주를 응원하게 된다. 감독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관객과 쌍년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리카(미야자와 리에 분)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한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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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정도 정이라고 관객은 점점 리카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 연민의 팔 할은 미야자와 리에의 압도적 연기에 있다. 감독이 자신 있게 리에의 얼굴을 가까이서 찍을 수 있었던 데에는 배우의 연기가 탁월했기 때문이다. 미야자와 리에가 젊은 남자에 미쳐서 은행 돈을 횡령한 유부녀 은행원을 연기했다면, 배우이자 감독인 바바라 로덴은 영화 << 완다, 1971 >> 에서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여기저기 떠도는 가난한 여성을 연기한다. 더군다나 그녀는 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지능도 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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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완다의 얼굴을 정지 화면으로 잡은 마지막 장면은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슬픈 얼굴이었다. 지금도 완다의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하다. 영화 << 완다 >> 는 미국 독립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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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바바라 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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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극복의 대상이다. 장애인의 성공 서사는 곧바로 관람객의 자기 반성으로 이어진다. 장애를 가진 저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우리는...... 관찰의 대상이 되어버린 장애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과연 장애는 극복의 대상인가 ? 어쩌면 비장애인은 자기 계발을 위한 소재로 장애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 그때부터 나는 장애를 다룬 영화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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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형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 소영의 노력 >> 은 뇌병변(?) 장애를 가진 소영의 무용담(舞踊談)이다. 소영은 무용극의 무용수다. 카메라는 소영이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한다. 영화 전반부는 소영에 대한 인물 정보와 무용극에 대한 소개가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무대 장면도 거의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감독의 단단한 다짐처럼 보였다. 장애인의 극복 서사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다짐 말이다. 영화 전반부의 카메라가 장애를 가진 소영을 관찰하는 시점이라면, 무대가 끝나고 난 후의 일상을 다룬 영화 후반부에서 카메라는 소영의 손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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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자의 시선으로 관찰당하던 그녀는 이제 자기 자신을 자기 손으로 직접 보여준다. 그 어떤 시선의 간섭도 없다. 이때부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을 고백하는 말보다 감동적인 것은 얼굴이다. 영화에서 멋진 대사보다 오래 남는 것은 정직한 얼굴이다. 거리 조절에 실패해 촛점이 흐려진, 해상도 낮은 몇몇 얼굴에서는 칼 테어도르 드레이어의 잔다르크를 떠올렸다. 소영의 어머니는 방구석에서 아무거나 찍는다고 영화가 되냐며 타박을 늘어놓았지만 관객은 어머니의 핀잔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소영은 훌륭한 무용가이자 연출가이며 좋은 시민이다. 이 영화는 내가 올해 본 가장 아름다운 독립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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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배우 한 명이 영화 전체를 씹어먹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그녀는 전동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은 채 홀로 서서 걷는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도 한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다리의 힘을 길러야 하고, 다리의 힘을 얻으려서 흔들리며 걸어야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춤이야말로 흔들리면서 걷는 예술이 아닐까. 도종환의 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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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시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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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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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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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처럼 흔들리지 않고 걷는 사람 어디 있을까.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다 흔들리면서 걷고 있다. 당신도, 그리고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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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
왕가위 감독, 송혜교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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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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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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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단추 / 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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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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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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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손택수 시집 < 나무의 수사학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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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경험하셨으리라. 애인과의 첫날밤, 떨리는 손끝으로 애인의 실크 블라우스에 달린 단추를 풀 때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것. 들뜬 마음에 조금이라도 빨리 풀어헤치고 싶으나 그럴수록 쉽게 풀어지지 않던 그 하얀 단추. 아직도 생각난다. 명주실로 짠 실크의 감촉이 아이스크림보다 부드러웠다는 사실도. 손택수 시인의 < 꽃단추 > 를 읽을 때마다 몇몇 장면들이 생각나곤 한다. 생각해 보면 : 참을성이 부족해서 /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민망한 구석이 있다. 옷이 가지고 있는 질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지퍼는 열고 닫는 개패(開閉) 기능만 있을 뿐 채움과 비움(풀어헤치는)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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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목수는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의 결대로 가구를 만들듯이 좋은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쇠 지퍼가 있을 자리에 단추가 있는 옷을 만든다. 날마다 단추를 끄르고(풀고) 맺는(채우고) 행위는 마치 인생과 같아서 인연을 끊고 맺고를 반복한다. 그런 점에서 단추는 조금 불편하고 조금 더 느리지만, 그래서 인간적이다. < 生 > 이 채워 놓는 단추의 기능이라면, < 死 > 는 풀어놓는 단추의 기능이다. 시인은 무덤가에 핀 노란 민들레를 단추에 비유한다. 시인의 상상력이 빛을 내는 순간이다. 지상과 지하, 묘와 관, 생과 사의 틈 사이로 찬바람 분다. 찬바람 든다고 옷을 여미듯이 시인은 무덤가에 핀 민들레 노란 꽃단추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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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단추 하나가 영화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무협 영화 << 일대종사, 2013 >> 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 단추 " 장면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확신한 것은 왕가위 영화라는 문화 상품은 철저하게 유물론적 세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철저한 유물론자다 . 아내가 있는 엽문(양조위 분)과 가문의 무예를 전승하기 위하여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궁이(장쯔이 분)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 간직하고 있다. 다만, 그 마음을 말하지 않을 뿐이다. 세월이 흘러흘러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남자는 가족과 재산을 잃는다. 여자는 가족과 건강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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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남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맹세이고, 여자에게 남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다짐이다. 남자의 맹세와 여자의 다짐은 어쩔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후회에 닿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단추 하나를 내민다. 오래 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장만했던 새 외투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다. " 그곳에 가기 위하여(당신을 만나기 위해) 외투 하나를 장만했었소. 하지만 전쟁통에 가지 못했소. 살림이 궁하여 외투는 팔았소. 남은 것은 외투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 하나요. 당신에게 주고 싶소. " 여기서 우리는 단추라는 물질(물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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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마른 선비에게 내민 조롱박(에 담긴 물) 위에 뜬 버들잎이 우물가 처녀의 고운 마음이 반영된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 남자가 내민 단추는 자본주의적 시선으로 보자면 교환 가치 없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비가시적인 마음의 가시적 현현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표다. 이처럼 왕가위 영화를 관통하는 멜랑꼴리한 정서는 사랑한다는 고백(말)보다는 사물을 통해 전달된다. 관객은 단추를 통해서 모노노 아와레(物ものの哀あわれ : 보고 듣고 만지는 사물에 의해 촉발되는 정서와 애수, 일상과 유리된 사물 및 사상과 접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적막하고 쓸쓸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정을 말한다 )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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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때 만났더라면 눈에 익었을 그 남자의 외투에 달린 단추. 여자는 처음 보는 단추를 지긋이 바라본다. 여자와 남자가 연을 맺지 못했듯이 옷의 왼편과 오른편을 맺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단추를 보면서 여자는 깊은 슬픔에 잠긴다. 남자가 뒤늦게 연을 맺자고 준 단추를 여자는 돌려준다. 마음만 간직할 뿐이다. 왕가위의 고백은 늘 이렇다. 일본의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끼는 외국 문학 작품 중에서 i love you 라는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까를 두고 고민하는 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의역하라고 했다. " 달이 참 밝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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