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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표정훈 지음 / 궁리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표정훈 지음/궁리출판/1판 1쇄 펴냄 2003년 5월 26일)을 두달 전 읽었다.
두달 전 읽은 책인데,
책의 산더미에 끼어 잊고 있다가
어제 정은숙의 <편집자 분투기> 리뷰를 쓰면서 생각이 났다.
엄마는 항상 내방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고 걱정을 하신다.
책이 워낙 많아서, 그것도 질서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이 우후죽순 쌓여 있어서....
인터넷 서점에서 배달을 올 때 마다 엄마는 한숨을 쉬신다.
"또야?"
엄마는 물으신다.
도대체 이 많은 책을 시집갈 때 어떻게 다 들고 가냐고...
나는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요즘 포장이사가 얼마나 편한지 아냐고....
나는 꼭 제일 큰 방을 내 서재로 양보할 수 있는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 그 남자도 책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서재 결혼 시키기> 같은 고민도 한번 심각하게 해봤으면 좋겠다. 안방이 넓어서 뭐하냐? 잠만 자면 되지.
내가 표정훈을 처음 알게된건 2~3년 전이다.
야근을 하다가 여러 인터넷 서점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www.kungree.com을 발견했다.
책에 대한 아주 많은 정보를 넘칠새라 꾹꾹눌러 정리한
보물 창고같은 site였다.
그 후로 kungree.com을 자주 방문했는데,
site에 kungree.com을 만드는 사람들 소개와 각자의 e-mail address가 있었다.
(지금은 staff 소개가 없어진 것 같다.)
그 때 "표정훈"이라는 이름을 처음 봤다.
자기 소개에는 서강대 철학과 졸업,출판 평론/번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일단 학교 선배라는 점에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 때 나는 "출판"을 나의 업으로 변경하는 것을 아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으므로, "표정훈"이라는 이름이 더 반갑게 느껴졌다.
용기 있는 수선은 표정훈에게 별 내용 없는 이메일을 보냈다.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정말 별 내용 없었다.
책을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선배님 처럼 책과 관련된 일만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냐,
내 홈피 주소를 알려 주며 한번 들려 달라 뭐 이런 허접한 내용이었다. 답장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며칠 후 답장이 왔다.
깜짝 놀랐다.
" 선생님의 홈피 잘 들러 보았습니다.
(제일 편한 호칭이 "선생님"이라고 했다.)
김영하를 좋아하시네요? 술 마시며 끝없이 얘기하시는거 좋아하시구요? 저희 가끔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그 때 한번 초대하죠.김영하도 나오거든요."
오호.....
난 환성을 지르며 답장을 읽었다.
기대하지도 않은 답장에, 거기에 "초대"에 대한 암시까지...
단순 립서비스라고 해도 기분이 좋았다.
얼마 후, 정말 초대한다고 메일이 왔다.
근데... 너무도 촉박한 초대였다.
당일 아침에 메일을 보내 오늘 저녁에 홍대 앞에서 모임이 있다고 했다.
김영하도 온다고 했다.
난 정말 너무너무 가고 싶었지만,
회사일 관련된 선약이 있어 눈물을 머금고 가지 못했다.
그 후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표정훈은 독서 관련 TV 프로에 패널로 자주 나왔지만
TV를 거의 보지 못하는 나는 한번도 표정훈이 나오는 프로를 보지 못했다.(대장금도 한번 못봤는데 오죽하랴....)
8월 초였던 것 같다.
대기업 해외영업팀은 8월 초에 가장 한가하고, 9~10월 가장 바쁘다. 특히 8월에는 유럽 거래선들이 한달 넘게 휴가를 가서 통째로 놀아 버리기 때문에, 평소 그렇게 사람을 들볶던 거래선들에게 전화 한통 오지 않는다.
나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구경을 하다가,
책에 관련된 책을 정리한 리스트에서
표정훈의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를 보았다.
표정훈이 쓴 책이 있는지 몰랐었는데...
난 반가운 마음에 당장 주문했다.
"독자 리뷰"나 "목차" 이런거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냥 반가운 마음에 제목만 보고 주문했다.
이틀 후 책이 배달되었다.
나는 수선스럽게 소포를 뜯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기대한 책의 내용과 상당히 달랐다.
나는 이런 책을 상상했다.아니 기대했다.
표정훈의 아주 자전적인 내용,
어떻게 하여 나는 "출판평론가"가 되었으며,
"독서는 나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
뭐 이런 개인적인 고백.
이 책은 책에 대한 열정, 개인적 고백 이런거 보다는
책과 출판의 역사, 관련된 전반적인 지식들,
한국 출판 시장 바라보기, 정보화 사회에서 독서와 출판의 방향성 이런 "바라보기"가 주로 적혀 있다.
제 1부 책읽기, 그 고귀한 열정
제 2부 사람을 책을 만들고 (출판에 대하여)
제 3부 책은 사람을 만든다(유명인의 독서법 등 독서에 대하여)
제 4부 책과의 대화(서평,번역 등)
제 5부 서로와 망로 사이에서(정보화,인포메이션 리터러시 등)
350 페이지 밖에 안되는 책 한권이 이렇게 5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보니, 하룻밤에 다 읽는 한국사 이런 것 처럼 대략적인 지식의 전달에 머무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책읽기, 그 고귀한 열정" 에 대해서만 써도 500페이지는 쉬지 않고 쓸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아쉽다.
또 하나!
정은숙의 <편집자 분투기>를 보면, 누구를 겨냥해서 책을 썼는지
타겟 독자가 명확하다. 현직 출판계에 있는 후배 편집자들을 향한 자신의 시행착오와 충고,고언.
그런데,
표정훈의 <책은 나름대로의 운명을 지닌다>는 누구를 대상으로 한 책이지?
표정훈의 책은 너무 "general"하다.
차라리 아주 전문적인 책을 쓰던지(소수 독자들을 위해서),
아니면 아주 쉽게 써서 책에 대한 제일 쉬운 개괄서가 되게 하던지,
아니면 책에 대한 가슴 떨리는 자기 고백을 쓰던지....
아쉽게도 책이 좀 어중간 하다.
내가 평소 표정훈에게 너무 바라던게 많아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듣고 싶었던게 많아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머릿말"이다.
표정훈의 약간의 고백.
"칼럼 연재 이후 나는 직업적인 독서꾼이자 조각글 날품팔이,그리고 일용잡급 방송인이 됐다.책을 읽고 그 내용을 텔레비전,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일,출판/독서와 관련한 글을 신문,잡지,사보,학보 기타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는 일을 중요한 밥벌이 길로 삼게 된 것이다.개인적으로 이 책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혼 지난 2년간의 삶을 정리하는 의미를 지닌다."(page10)
내가 기대한건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온 그 2년간의 고백인데...
다음 기회엔 표정훈의 그런 담담한 에세이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표정훈이 부럽다.
책만 읽고 쓰고, 얘기하고, 번역하면서 살 수 있다니....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나도 직업적인 독서꾼이자 조각글 날품팔이,일용잡급 방송인이 되고 싶다.
수선이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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