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2046>을 보기 위한 마음의 자세로,
코아 아트홀에서 <화양연화>를 봤다.

<화양연화>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코아 아트홀에서는 지금 <2046>개봉을 기념하기 위한 event로
매일 저녁 8시 50분 <화양연화>를 상영하고 있다.

<화양연화>의 아스라한 미련을 아직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
<화영연화>를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
느림과 절제의 미학을 보고 싶은 사람들,
지금 사랑에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코아 아트홀에서 <화양연화>를 보는 97분을 권한다.

오늘 <화양연화>를 보며 느낀 점.

장만옥은 너무도 아름답다.
실루엣이 드러나는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의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고혹적이다.눈이 부시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장만옥 처럼 늙고 싶다고...

장만옥은 참 아름답게 늙어간다.
장만옥의 그토록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에서,
그 절제된 몸짓과 미세한 감정 하나 놓치지 않는 장만옥의 표정과 손짓에서, 어떻게 그 옛날 <폴리스 스토리>에 나왔던 장만옥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오늘....장만옥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장만옥 처럼 늙고 싶다. 그렇게 아름답게....

아름다운 색감의 다양한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을 보면서
왕가위는 늙은 장이모 처럼 겉멋을 부리지는 않지만,
색감에 있어서도 훨씬 세련되고 섬세하다는 생각을 했다.

코미디계의 혜성, 2004년 아시아 코미디계를 석권한 장이모의 <연인>을 보면서, 늙어가는 장이모가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렇게 웃기면서까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싶을까...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스타일에 집착해 영화를 망치고 마는 장이모,
<친구>의 후속작을 끝도 없이 만들어 내는,
<똥개>도 모잘라서 <우리형>까지 만든 곽경택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에 역행하며 자신의 스타일에 안주하는 재능있는 감독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하지만 장만옥 처럼 너무도 아름답게 늙어가는 배우는?
닮고 싶다. 진정으로.
그렇게 늙고 싶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면 늙는게 두렵지 않다.

오늘 <화양연화>를 보면서 또 하나 느낀 점!
사랑하는 사람이랑 호텔방에 틀여박혀,
아님 어촌 마을의 소박한 시골집이나,
아님 변두리의 작은 집에 틀여 박혀
같이 소설을 썼으면 좋겠다.
<화영연화>의 두 사람 처럼....

소설이 아니라도 좋으니 만화책이라도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둘이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둘만의 공간에...

요즘 베스트셀러 신간 도서의 하나.
<너, 외롭구나>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봐 준다면?

Say Yes.

어느 한 사람이랑 공간을 나누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잡담을 나누고, 뒹굴뒹굴하고 싶다.

밤에 쓴 글이라 너무 솔직한가?
아침이 되면 삭제할 수도...

<화양연화>를 다시 본 수선이의 센티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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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준 2004-11-14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한 사람이랑 공간을 나누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잡담을 나누고, 뒹굴뒹굴하고 싶다."



異床同夢

항상 내 머리속에 멤돌던 생각.....

반갑군요


kleinsusun 2004-11-14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준님도 좋은 사람과 공간을 나누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잡담을 나누고,뒹굴뒹굴하며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래요. 일요일 오후 pc방에 와 있는 수선.
 

오늘 산 책, 정확히 말하면 오늘 주문한 책은

<내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
(베네트 서프 지음, 정혜진 옮김, 씨앗을 뿌리는 사람)

이 책을 왜 샀냐면....

정은숙의 < 편집자 분투기> 를 읽고,
왜 마음산책 대표가 "바다 출판사"에서 책을 냈는지 넘넘 궁금했다.

항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수선.
마음산책 게시판에 질문을 했다.

점심시간에 마음산책 site를 방문해 보니,
정은숙 대표의 친절한 답변이 있었다.

"제가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내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에 보니 랜덤하우스의 사장 베네트 서프도 자신의 책을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했더군요.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책을 자신의 출판사에서 내는 뻔뻔함이란...어쩌구,,,아무튼 저는 '뻔뻔함'을 피해서가 아니라 '균형감각'의 차원에서 바다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편집자 분투기>에 관한 한 저자인 제가 직접 책까지 만든다면 균형감각을 상실할 것 같았습니다. 또 한 가지 숨길 수 없는 욕심은 바다출판사가 더 많이 팔아줄 것만 같았습니다. 하하.


참 자상한 설명이다.
"균형감각"이라.....

"균형감각"이란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감독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니었다면,
주인공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될 수 있었을까?
사실 그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자기가 자기를 주연으로 캐스팅했는지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연료를 아끼기 위해서?

음.... 사실 그 역할에 클린트는 잘 안어울렸다.
메릴 스트립이 있었기에 그 영화가 버틸 수 있었던거지....
메릴 스트립 같은 연기 잘하는 배우를 캐스팅 할 수 있는 능력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몫이니깐 뭐 칭찬도 해 줄 수 있다.

<내 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를 읽을까 말까 망설였었는데
(사실 책값도 좀 센편이다),
정은숙 대표가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기에 그냥 미친 척 하고 주문했다. 요즘 책 너무 많이 샀는데....

요즘 책을 너무 많이 사서 또 집으로 배달오면 엄마한테 혼날까봐 회사로 배달시켰다.ㅋㅋ

어떤 책일까?
행복한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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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7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금요일에 나는 건강 검진을 받았다.

회사 마다 다른데,
1년에 한번 하는데도 있고
2년에 한번 하는데도 있다.

직원들은 의무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
말 그대로 "일반 건강 검진"은 몇십만원 짜리 정밀 검진과
"대단히" 다른 형식적인 검진이다.

먼저 간단한 건강 상태 설문지를 작성하고,
1번에서 8번까지 순서대로 지시에 따라 이동하면서 검진을 한다.
아주 형식적으로 대충대충한다.

먼저 키와 몸무게를 재고 혈압을 잰다.
혈압을 재는 간호사는 표정 없이 말한다.
"정상입니다."

그 다음은 시력,청력을 측정한다.
이것도 아주 대충대충한다.
간호사는 또 무표정하게 말한다.
"정상입니다."

그 다음 엑스레이를 찍고,
소변 검사를 하고,
피를 뽑고,
치과 검진을 하고(입만 벌리면 30초 안에 끝난다.)
마지막으로 의사랑 상담을 한다.

이 의사들은 정말 환상의 직업이다.
"네, 앉으세요. 어디 특별히 아픈데 있으세요?"
"아니요."
"네, 그럼 가셔도 됩니다."

이런 의사들을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모른다.
이런 의사들을 볼 때 마다 생각한다.
지방대 의대라도 갈껄...

그런데...
이런 형식적인 일반 건강 검진에서도
벼락 같은 결과가 날아들 때가 있다.

혈액 검사 결과 상태가 안좋게 나왔을 때,
병원에서는 OO병이 의심된다며 재검을 받으러 오라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재검 결과가 나오기 까지 며칠 동안
밤잠을 못자며 불안에 떤다.
재검 결과가 나왔을 때,
"별 이상 없네요." 하면 기분 좋게 사무실에 들어와 한잔 쏜다.

그런데 아닐 경우에는?

몇년 전 이런 일이 있었다.
한 회사의 K부장이 암일지 모른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부장은 재검 결과가 나오기 까지,
자신의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고 눈물을 흘리며 반성을 했다.
아내한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다는 걸 떠올리며,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려는 욕심으로 무섭게만 대했다는 후회로,
회사일에 바빠 부모님한테 전화 한번 제대로 한적 없다는 후회로...

재검 결과 오진이었고,
그 부장은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부장은 그 며칠 동안의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글을 썼는데,
그 글이 이메일로 돌고 돌아서 유명해졌었다.
그 부장은 앞으로 매일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겠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해피엔딩이다.
오진으로 마음 고생은 며칠 했지만,
소중한 교훈을 얻은 경우다.

하지만...
오진이 아닐 경우에는?

내가 사원 2년차였을 때,
신입이었던 후배 하나가 있었다.

후배긴 하지만 나이는 나보다 한두살 많았다.
술,담배도 안하고,
교회도 누구 보다도 열심히 다니고,
경리팀에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을 하는 천사표였다.

송년회 할 때,
그 친구가 "풍선"을 불렀던게 생각난다.

내가 회사를 옮기고 나서 1년 후 쯤인가...
그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
난 믿을 수가 없었다.
술,담배도 안하고 심지어 커피 조차 안 마시던 친구였는데...
그렇게 건강한 20대가 어떻게 암에 걸릴 수 있지?

그 친구도, 회사 동료들도 처음엔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 검진 결과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씩 웃으면서,
" 오진이겠지. 귀찮겠지만 병원 한번 더 갔다와."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정말 암이었다.
그 착한 친구는 투병 생활을 시작했고, 수술을 했다.

얼마 후, 그 친구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쉬면 복직도 할 수 있을거라는 긍정적인 말을 들었다.
다른 회사에 있던 나는 가끔 그 친구의 소식을 들으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복직했다는 말도 어렴풋이 들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났다.

몇년이 지난 오늘,
입사동기 친구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금요일에 건강검진을 받은 얘기를 했다.
치과 검진 때, 의사가 나한테 사랑니가 나고 있다고 해서 그 말을 하려고...

건강검진 얘기가 나오자,
그 천사표 친구가 생각났다.

" K는 잘 있니?"
친구는 놀란 눈으로 쳐다 보며 말했다.
" 몰랐어? 작년에 그 친구 장례식에 다녀왔어."
" 뭐? 그 천사표가 죽었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복직했다고 그랬었쟎아."
" 복직했었는데....재발했어. 복직하고 얼마 안 있다가 죽었어."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술,담배도 안하던 범생이었다. 그 친구는...

그 친구가 송년회에서 "풍선"을 신나게 부르던 기억이 난다.
그 선한 눈망울이....
그 친구가 편안한 곳에 있길 바란다.

그 친구 얘길 듣고 마음이 편하지 않다.

고등학교 때, 한문시간에 이런 말을 배운 것 같다.
( 한문으로는 모르겠다. 뭐라고 쓰는지...)
가장 큰 효도는 부모님이 주신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 거라고...

부모 보다 먼저 죽는 것 보다,
아픈 모습을 보여서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보다
더 큰 불효가 있을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 엄마.
피곤한 모습 보이지 않고,
지친 모습, 짜증난 모습으로 염려 끼치지 않고,
한번이라도 더 웃고,
한번이라도 더 애교도 부리고,
엄마가 걱정 안하게 일찍 일어나서 아침도 꼭 먹고 나가고 그래야겠다.

10월의 마지막 주, 수선이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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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2004-10-25 0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회사에서 받는 건강검진 정말 정해진 틀에서 기차게 빨리 이루어지는 검진이죠. 저도 아주 건강하다고 진단하고 정확히 두달후 병원에서 수술 받았죠. 제발 그런 검사보다는 진정한 건강검진이 이루어지길 바라죠. 동료분 얘기 넘 슬프네요! 정말 풍선이 되어버린 그 분의 일들이 남은 분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여유를 준 것 같네요!

marine 2004-12-16 10: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검진하는 의사들을 좀 아는데요, 다 임시직으로 있는 사람들이니까 별로 부러워 할 게 못 됩니다 의대 공부 6년해서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병원 들어가서 의사 행세도 못하고 거기 앉아서 형식적인 상담 하는 거, 참 우울하죠 직장 못 구해서 방황하는 인생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표정훈 지음 / 궁리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표정훈 지음/궁리출판/1판 1쇄 펴냄 2003년 5월 26일)을 두달 전 읽었다.

두달 전 읽은 책인데,
책의 산더미에 끼어 잊고 있다가
어제 정은숙의 <편집자 분투기> 리뷰를 쓰면서 생각이 났다.

엄마는 항상 내방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고 걱정을 하신다.
책이 워낙 많아서, 그것도 질서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이 우후죽순 쌓여 있어서....
인터넷 서점에서 배달을 올 때 마다 엄마는 한숨을 쉬신다.
"또야?"

엄마는 물으신다.
도대체 이 많은 책을 시집갈 때 어떻게 다 들고 가냐고...
나는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요즘 포장이사가 얼마나 편한지 아냐고....

나는 꼭 제일 큰 방을 내 서재로 양보할 수 있는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 그 남자도 책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서재 결혼 시키기> 같은 고민도 한번 심각하게 해봤으면 좋겠다. 안방이 넓어서 뭐하냐? 잠만 자면 되지.

내가 표정훈을 처음 알게된건 2~3년 전이다.
야근을 하다가 여러 인터넷 서점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www.kungree.com을 발견했다.

책에 대한 아주 많은 정보를 넘칠새라 꾹꾹눌러 정리한
보물 창고같은 site였다.
그 후로 kungree.com을 자주 방문했는데,
site에 kungree.com을 만드는 사람들 소개와 각자의 e-mail address가 있었다.
(지금은 staff 소개가 없어진 것 같다.)

그 때 "표정훈"이라는 이름을 처음 봤다.
자기 소개에는 서강대 철학과 졸업,출판 평론/번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일단 학교 선배라는 점에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 때 나는 "출판"을 나의 업으로 변경하는 것을 아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으므로, "표정훈"이라는 이름이 더 반갑게 느껴졌다.

용기 있는 수선은 표정훈에게 별 내용 없는 이메일을 보냈다.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정말 별 내용 없었다.
책을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선배님 처럼 책과 관련된 일만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냐,
내 홈피 주소를 알려 주며 한번 들려 달라 뭐 이런 허접한 내용이었다. 답장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며칠 후 답장이 왔다.
깜짝 놀랐다.

" 선생님의 홈피 잘 들러 보았습니다.
(제일 편한 호칭이 "선생님"이라고 했다.)
김영하를 좋아하시네요? 술 마시며 끝없이 얘기하시는거 좋아하시구요? 저희 가끔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그 때 한번 초대하죠.김영하도 나오거든요."

오호.....
난 환성을 지르며 답장을 읽었다.
기대하지도 않은 답장에, 거기에 "초대"에 대한 암시까지...
단순 립서비스라고 해도 기분이 좋았다.

얼마 후, 정말 초대한다고 메일이 왔다.
근데... 너무도 촉박한 초대였다.
당일 아침에 메일을 보내 오늘 저녁에 홍대 앞에서 모임이 있다고 했다.
김영하도 온다고 했다.
난 정말 너무너무 가고 싶었지만,
회사일 관련된 선약이 있어 눈물을 머금고 가지 못했다.

그 후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표정훈은 독서 관련 TV 프로에 패널로 자주 나왔지만
TV를 거의 보지 못하는 나는 한번도 표정훈이 나오는 프로를 보지 못했다.(대장금도 한번 못봤는데 오죽하랴....)

8월 초였던 것 같다.
대기업 해외영업팀은 8월 초에 가장 한가하고, 9~10월 가장 바쁘다. 특히 8월에는 유럽 거래선들이 한달 넘게 휴가를 가서 통째로 놀아 버리기 때문에, 평소 그렇게 사람을 들볶던 거래선들에게 전화 한통 오지 않는다.

나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구경을 하다가,
책에 관련된 책을 정리한 리스트에서
표정훈의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를 보았다.

표정훈이 쓴 책이 있는지 몰랐었는데...
난 반가운 마음에 당장 주문했다.
"독자 리뷰"나 "목차" 이런거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냥 반가운 마음에 제목만 보고 주문했다.

이틀 후 책이 배달되었다.
나는 수선스럽게 소포를 뜯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기대한 책의 내용과 상당히 달랐다.

나는 이런 책을 상상했다.아니 기대했다.
표정훈의 아주 자전적인 내용,
어떻게 하여 나는 "출판평론가"가 되었으며,
"독서는 나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
뭐 이런 개인적인 고백.

이 책은 책에 대한 열정, 개인적 고백 이런거 보다는
책과 출판의 역사, 관련된 전반적인 지식들,
한국 출판 시장 바라보기, 정보화 사회에서 독서와 출판의 방향성 이런 "바라보기"가 주로 적혀 있다.

제 1부 책읽기, 그 고귀한 열정
제 2부 사람을 책을 만들고 (출판에 대하여)
제 3부 책은 사람을 만든다(유명인의 독서법 등 독서에 대하여)
제 4부 책과의 대화(서평,번역 등)
제 5부 서로와 망로 사이에서(정보화,인포메이션 리터러시 등)

350 페이지 밖에 안되는 책 한권이 이렇게 5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보니, 하룻밤에 다 읽는 한국사 이런 것 처럼 대략적인 지식의 전달에 머무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책읽기, 그 고귀한 열정" 에 대해서만 써도 500페이지는 쉬지 않고 쓸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아쉽다.

또 하나!
정은숙의 <편집자 분투기>를 보면, 누구를 겨냥해서 책을 썼는지
타겟 독자가 명확하다. 현직 출판계에 있는 후배 편집자들을 향한 자신의 시행착오와 충고,고언.

그런데,
표정훈의 <책은 나름대로의 운명을 지닌다>는 누구를 대상으로 한 책이지?
표정훈의 책은 너무 "general"하다.
차라리 아주 전문적인 책을 쓰던지(소수 독자들을 위해서),
아니면 아주 쉽게 써서 책에 대한 제일 쉬운 개괄서가 되게 하던지,
아니면 책에 대한 가슴 떨리는 자기 고백을 쓰던지....

아쉽게도 책이 좀 어중간 하다.
내가 평소 표정훈에게 너무 바라던게 많아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듣고 싶었던게 많아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머릿말"이다.
표정훈의 약간의 고백.

"칼럼 연재 이후 나는 직업적인 독서꾼이자 조각글 날품팔이,그리고 일용잡급 방송인이 됐다.책을 읽고 그 내용을 텔레비전,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일,출판/독서와 관련한 글을 신문,잡지,사보,학보 기타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는 일을 중요한 밥벌이 길로 삼게 된 것이다.개인적으로 이 책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혼 지난 2년간의 삶을 정리하는 의미를 지닌다."(page10)

내가 기대한건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온 그 2년간의 고백인데...
다음 기회엔 표정훈의 그런 담담한 에세이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표정훈이 부럽다.
책만 읽고 쓰고, 얘기하고, 번역하면서 살 수 있다니....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나도 직업적인 독서꾼이자 조각글 날품팔이,일용잡급 방송인이 되고 싶다.

수선이의 도서관

www.kleinsu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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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10-2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새로 나온 책 읽어보셨어요? 이번 책은 수선님이 꽤 마음에 들어하실 것 같은데요.
탐서주의자의 책 - 책을 탐하는 한 교양인의 문.사.철 기록
표정훈 (지은이)
저는 서점에서 조금만 읽어야지... 조금만 더.. 하다가 다 읽고 왔는데, 꽤 재미있었어요. ^^

panda78 2004-10-24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수선님 리뷰에 끌려 결국 이 책 주문했습니다. ^^;; 별 셋 주셨지만, 그래도 궁금하네요.
 
편집자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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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신간 소개에서 <편집자 분투기> 기사를 읽었을 때,
꼭 한번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내 모습.
나의 정체성을 한 줄로 쓰라고 하면 어떻게 써야 할까?

" 책을 사랑하는,글쓰기의 미련을 못 떨치는 회사원."

뭐 대략 이 정도 되지 않을까?

난 사람들이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그대로 밟아왔다.
아니....지금은 삐걱거리고 있다.
조건 좋은 남자랑 27~28세에 결혼하는걸 빠뜨려 버렸으니까...
어느새 30대가 되었고,
부모님의 걱정은 나날이 커지지만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도 없는 상태다.

대학 4학년때, 인턴사원으로 대기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줄곧 해외영업 부서에서 일했다.
줄곧 해외영업 부서에서 "외화벌이"를 해왔지만, 한 회사에서 일한 건 아니다.

입사 후 2년,
처참하도록 빡센 조직생활에 한계를 느끼며
유학을 핑계로 회사를 나왔다.

몇달 놀다가 다른 대기업의 해외영업 부서에 들어가서 다시 빡센 조직 생활을 했다. 3년간.

3년 후, 이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자 하며 겁 없이 또 회사를 그만뒀다.
몇달을 신나게 놀다가,
글도 써본다고 설치다가,
또다시 다른 대기업의 해외영업팀에서 "외화벌이 일꾼"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불경기에 참 운이 좋은 경우고,
어떻게 보면 아직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서 떠도는
불쌍한 경우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일에 자신의 모든 시간과 사랑을 바치며
두리번 거리지 않고 그 하나의 길을 열정적으로 걸어온 사람들을 존경한다.

<편집자 분투기>의 정은숙도 내 존경의 대상이다.
책을 향한 사랑과 열정으로 20년간 편집자를 해 온,
한 베테랑 편집자의 자기 고백이다.

<편집자 분투기>의 타겟 독자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편집자,출판 기획자인 것 같다.
정은숙은 자신의 20년을 뒤돌아 보며,
자신의 시행착오를 고백하고
좋은 편집자가 되기 위한 충고와 고언을 후배들에게 하고 있다.

실제로 자신이 기획/편집한 책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에 더욱 재미있다.

성공한 경우로 <예술가로 산다는 것>,<벼랑에서 살다>를 말하고,
실패한 경우로 <우리 집은 어디인가>를 예로 들었다.

난 <편집자 분투기>를 읽고,
출판사 마음산책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벼랑에서 살다> 두권의 책을 샀다.
(<편집자 분투기>를 읽다 보면, 이 두권의 책을 빨리 읽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또한 아주 훌륭한 마케팅 기법이다.)

정은숙은 출판사 "마음산책"의 대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자 분투기>는 "바다출판사"에서 나왔다.

왜일까?
자기 원고를 자기 출판사에서 편집하고 펴내고 홍보하기가 쑥스러워서?
아님 바다 출판사의 유능한 편집자가
"출판계의 후배들은 좋은 편집자가 되기 위한 지침서, 메뉴얼이 꼭 필요합니다. 이 일은 선배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출판계의 발전을 위한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막 쫓아 다녔을까?
궁금하다.

<편집자 분투기>를 읽으며 이런 상상을 했다.
정은숙 같은 베테랑 편집자가 나를 막 쫓아 다니며
책을 써 달라고 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벼랑에서 살다>를 펴내기 위해 시인 조은을 쫓아 다녔듯이 말이다.

이런 행복한 상상을 하며 덧붙이는 고백.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하는 <출판기획> 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정은숙도 강사 중 한명이었던 것 같은데,
결석을 해서 그 강의는 듣지 못했다.(출장을 워낙 자주 다녀서 결석한 날이 더 많았다.)

왜 <출판기획> 강좌를 들었냐구?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나의 열망 때문이었다.
작가가 될 자신은 없었고,
출판사를 하면 맨날 책을 만지고 책을 보며 살 수 있을 꺼라는 소박한 생각 때문이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현직 출판사의 직원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번듯한 대기업을 다니는 내가 왜 출판을 하고 싶어하는지 무척 궁금해 했다.
알고 보니 그들의 연봉은 내 반도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출판 환경이 워낙 열악하며,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못주는 출판사,
기획이고 뭐고 고민할 틈도 없이 일단 어음을 막기위해
새로운 책을 덜커덕 내는 출판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동료들은 내게 영업사원이 왜 골프는 안 배우고, 맨날 엉뚱한 것만 배우고 다니냐고 한마디씩 하지만, 출판 강좌에서 난 참으로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

이런 우리나라의 출판계에서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그 책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열정 하나로 20년간 편집자로 살아왔다는 것.

그 자체로 <편집자 분투기>의 저자 정은숙에게 경의를 표한다.

수선이의 도서관

www.kleinsu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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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만간 읽을 책입니다.
조은 시인의 벼랑에서 살다는 정말 마음에 쏙 든 책이었어요.
사진이랑 글이랑 아주 잘 어울려 심금을 울렸죠.